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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뒤락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9
애니타 브루크너 지음, 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묵묵히 스며드는 고독과 우아한 각성의 드라마 애니타 브루크너의 <호텔 뒤락>은 극적인 사건이나 화려한 액션 대신, 주인공의 세밀한 내면 심리와 정적인 분위기로 독자를 압도하는 클래식하고 우아한 심리 소설이다. 미술사학자 출신이라는 작가의 이력답게, 소설 속 스위스 호숫가 호텔의 풍경과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마치 한 폭의 정물화를 보는 듯 세밀하고 아름답다.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차분하고 건조하게 서술하는 문체는 오히려 주인공이 느끼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더 깊게 전달하는 듯 하다. 소설은 통념적인 '해피엔딩'의 결혼 제도가 과연 여성에게 구원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주인공은 호텔에 묵고 있는 다른 여자들을 보며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한계와 기만을 느끼고 현타에 빠진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 돈 지랄로 공허함을 채우는 모녀, 자식에게 재산 뺏긴 노부인까지, 하나같이 남자에 저당 잡힌 기구한 인생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타협을 통한 안락함과, 고독을 동반한 주체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시대를 초월해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이야기는 잔잔한 호수처럼 흘러가지만, 그 아래에서는 주인공의 격렬한 내적 갈등이 휘몰아치고 있다.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기준에 휘둘리던 한 여성이 온전히 자기 자신을 마주하고 스스로의 길을 선택해 나가는 과정은, 책을 덮은 후에도 긴 여운과 묵직한 위로를 남긴다.
PS.

결혼 안 한 여자....솔직히 지금 시선에서 1980년대라고 하면 컴퓨터도 쓰고 대중문화도 폭발하던 시절인데, 무슨 고조선 같은 소릴 하냐 싶었다. 하지만 "1980년대 영국 보수 사교계(상류층)"라는 배경을 떼어놓고 보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1980년대는 컴퓨터와 대중문화가 폭발하던 현대적인 시기처럼 보이지만 소설 호텔 뒤락의 배경인 영국 보수 상류층은 힙한 대중문화와 완전히 담을 쌓은 채 도가 지나치게 꼰대 같은 19세기적 사고방식에 갇혀 있던 폐쇄적인 동네였다. 단적으로 이 소설이 나오기 3년 전인 1981년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의 결혼 당시 왕실이 원한 조건이 순결하고 말 잘 듣는 내조형 현모양처였다는 점만 봐도 당시 상류층이 여성을 가문의 장식품으로만 소비하던 인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런던 거리에 펑크족이 넘쳐날 때도 이 레이디들의 리그에서는 서른 후반까지 결혼 안 한 여성을 결함품 취급하며 티타임의 뒷담화 소재로 삼았기에 소설은 이 숨 막히는 꼰대 사회의 민낯을 하이퍼리얼리즘으로 까발린 셈이다. 지금 시선에서 겨우 결혼 안 한 게 무슨 대수냐고 고루하게 느낄 수 있지만 당시의 결혼을 현대의 취업이나 부동산으로 치환하면 주인공의 선택이 얼마나 파격적인지 단번에 이해된다. 상류층 남자와의 결혼은 대기업 프리패스 합격증이나 강남 아파트 입주권을 쥐여준 것과 같았는데 주인공은 상사가 꼰대고 내 영혼이 안 잠긴다는 이유로 이를 쿨하게 찢어버리고 자발적 백수이자 월세방으로 돌아간 상황이기 때문이다. 즉 당시 주인공에게 남자의 청혼을 거절한 행위는 인생의 모든 치트키와 안전장치를 제 손으로 날려버린 미친 짓이자 파격적인 반항이었다. 결국 이야기 겉포장만 클래식하고 고루해 보일 뿐 본질은 남들이 다 맞다고 강요하는 거대한 사회적 가스라이팅과 치트키 같은 대세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굶어 죽더라도 내 꼴리는 대로 독고다이 마이웨이를 갈 것인가에 대한 시대를 관통하는 묵직한 질문이다. 그렇게 보면 이 작품은 단순한 연애 거부 스토리가 아니라 자신을 통제하려는 시스템의 안전망을 걷어차고 고독한 자유를 선택한 한 여자의 짜릿하고도 시크한 반항극이자 자아 찾기 드라마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