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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운 것들
앨러스데어 그레이 지음, 이운경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4월
평점 :
앨러스데어 그레이의 <가여운 것들>은 메리 셰리의 <프랑켄슈타인>에 바치는 가장 발칙하고 현대적인 오마주이자, 이를 비틀어버린 해체적 답서이다. 두 작품은 조각난 시체에 생명을 불어넣어 피조물을 탄생시켰다는 설정과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천재 과학자의 존재라는 핵심 뼈대를 공유하지만, 탄생 이후 주인공이 나아가는 방향은 정반대를 가리킨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창조주와 사회로부터 외면받아 파멸로 치닫는 비극의 존재라면, <가여운 것들>의 주인공 '벨라'는 사회적 편견이나 가부장적 질서를 전혀 학습하지 않은 투명한 시선을 무기로 세상의 낡은 규범을 통쾌하게 무시하고 파괴하는 해방의 아이콘으로 우뚝 선다. 소설은 한 여성의 자살과 태아의 뇌 이식이라는 음산하고도 충격적인 부활로 문을 열지만, 어둠은 이내 걷히고 주인공 ‘벨라’가 세상 밖으로 질주하며 서사는 완전히 다른 생기를 뿜어낸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세상의 각본을 전혀 배우지 못한 벨라의 시선은 무해할 정도로 투명하다. 이 무결점의 파괴적인 존재가 19세기 영국 사회의 낡은 규범을 제멋대로 흩뜨려 놓을 때, 읽는 이는 묘한 해방감과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된다. 작가의 유머는 벨라를 둘러싼 남성들을 다룰 때 더욱 빛이 난다. 그녀를 완벽한 피조물로 숭배하는 창조주, 성적 주도권을 쥐려다 도리어 압도당하는 바람둥이, 소유욕에 눈이 먼 전남편까지. 벨라를 제멋대로 규정하려던 남성들의 독점욕과 질투는 작가의 펜 끝에서 한없이 찌질하고 우스꽝스러운 희극으로 전락한다. 가부장제라는 견고한 벽에 유쾌한 어퍼컷을 날리는 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짜 묘미는 후반부, 회고록과 반박 편지, 주석이 얽히는 다층적인 문서 배치에서 폭발한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독자는 "지금껏 숨 가쁘게 따라온 기이한 모험담이 진짜 사실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절묘한 망상일까?"라는 거대한 서사적 수수께끼 앞에 홀로 남겨진다. 동명의 영화 <가여운 것들>의 강렬한 미장센이 시각적 쾌감을 준다면, 남성들이 독점한 역사 뒤에 숨겨진 여성의 진짜 목소리를 추적하는 원작 소설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짜릿한 문학적 밀당을 선사한다. 처음에는 남성들이 벨라를 향해 혀를 차며 "가여운 것"이라 불렀지만, 책장을 덮을 때쯤 우리는 벨라의 주체적이고 당당한 뒷모습을 보며 그녀를 가두려 안달이 났던 남성 사회를 향해 똑같이 한숨을 쉬며 읊조리게 된다. "참 가여운 인간들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