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전에서 한자의 창시자로 등장하는 눈이 네 개인 창힐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내가 알고 있는 '입춘대길'의 뜻에 하나가 더 붙는다는 걸 처음 알았다. 흠~ 그런 뜻이 있다니... 의외다.
- 우리말로 된 아름다운 지명을 호명해본다. 골짜기를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인 '고라데이', 마을이 호리병을 닮아 붙여진 '호려울', 둔전으로 부치던 밭이 있다는 '둔지미', 가락처럼 좁은 골짜기에 있다고 해서 '가락골', 마을이 누운 밤과 닮아 '범지기', 황소의 뚜레처럼 생겼다고 '도램말' 같은 순 우리말 이름들이 안타깝게도 두 자 한자로 잊히고 말았다. p 33
- 마을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굳이 맡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선비를 존경하는 뜻에서 콩도 갖다주고 고추도 따다 주면서 '우리 아이에게 글 좀 가르쳐 주세요' 해서 생겨난 게 서당이다. 그게 선비의 나라이고 한국인 이야기다. p 33
그림을 통해 본 일본의 서당인 데라코야는 우리네 서당과는 확연히 그 분위기가 다름에 놀라웠다.
질문대장이던 저자의 일화는 낯선듯 하면서도 어느 부분은 익숙한 풍경이다.
- 늘 그런 식이었다. 중요한 것을 어른들은 묻고 따지지 않았다. 무슨 불문율이라도 있는 듯, 어쩌면 몰라서, 아니면 귀찮아서, 또는 겁나서 그냥 피해다니기만 했다. 그것들과 눈만 마주치지 않으면 밥만 먹고도 잘 산다는 식이다. 감동 없이도, 사랑 없이도, 나라 없이도 말이다. p 53
- 어릴 때 다니던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는 '학교'란 말이 옛날 《맹자》에 나오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 만약 이 글의 의미를 알았더라면 '학교'란 말에 더 두터운 정을 느꼈을지 모른다. 학교란 선생님의 일방적인 가르침으로 이뤄지는 공간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가 서로 주고받으며 배우는 공간임을 알았을 테지..... p 55
- 우리 학생들에게 공부는 국· 영· 수 공부, 어려운 암기를 뜻한다. 생활의 지혜, 인생의 생각과는 상관없는, 그저 진학을 위한 도구다. 원래 공부의 의미가 '놀고 생각한다'는 의미라는 사실을 아는 학생들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놀면서 생각하는 공부가 얼마나 즐거운지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진학을 위한 암기식 빈칸 채우기의 째째한 공부가 아니라 진정한 공부를 해야 제대로 세상살이를 할 수 있다. p 56
저자는 멘토와 멘티의 관계를 선생과 제자의 수직적 관계가 아닌 잠재력을 일깨우는 수평적 관계로 본다. 멘토는 멘티의 잠재능력을 일깨우고 능력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고, 멘티는 멘토의 도움으로 자신의 창조력을 키워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교육의 필요성을 피력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공교육의 미래는 밝아 보이진 않는다.
- 수백 년 내려온 서당과 향교가 학교란 말로 바뀌었을 때에도, 그리고 심상소학교가 국민학교로 다시 바뀌던 때에도 우리는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역사의 강물을 흘려보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된 뒤에도 '국민학교'라는 말을 그대로 썼다. 일본이 패전 후 민주화를 추진하며 맨 처음 한 일이 '국민학교'란 말을 버린 것이었는데도, 우리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 1996년이 되어서야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그런데 왜 바뀌어야 했는지 아는 학부모들은 많지 않았다. p 65
우리에게 익숙한 '민족'이란 말이 생긴 건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도 일본 사람들이 제국주의를 할 때, 천황주의의 국민이란 말을 통칭하기 위해 민족이란 말을 썼다니 충격적이다. 아마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평생을 모르고 '민족'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했을 것이다.
식민지를 몸소 겪은 저자의 생생한 일화와 여기에 그의 지식이 덧보태어져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타인이 아닌 우리 조상의 이야기는 울림을 전해준다. 그저 읽기를 추천한다.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