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주는 기쁨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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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편의 에세이中 알랭드보통의 기존 저서( ‘여행의 기술’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불안’ 등)에 소개된 조금은 익숙한 내용이다. (내용이 조금 바뀐것 같기도 하다.)


저자가 말한 왜 많은 저서 중에서 이 내용들을 이 순서로 엮은 이유는 찾지 못했지만, 새로 읽어보는, 또는 처음 접해보는 책의 내용에서 지식의 즐거움을 발견한다.


나는 두가지 이유로 알랭드 보통의 책을 좋아한다.

첫째, 평상시에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둘재, 알고는 있었지만 명확히 표현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설명해준다.

이 책은 두가지 지유를 모두 가진책이라고 생각한다. 인상적인 제목들은 그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에세이에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의 답을 찾아 사색하게 만드는 그런 책이다.




슬픔이 주는 기쁨

슬픔이 주는 기쁨. 나의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과의 공감을 통해 위안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슬픔을 표현하는 그림, 음악등의 예술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슬픔을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것은 슬픔에서 위안과 더 나아가 기쁨을 발견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실망의 메아리를 목격하고, 그럼으로써 혼자서 감당하던 괴로움과 중압감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벽에 걸어야 할 것은 쓸쓸한 도로변 휴게소 그림인지도 모른다.


자동 판매 식당은 슬픔을 그린 그림이지만 슬픈 그림은 아니다. 이 그림은 위대하고 우울한 음악 작품과 같은 위력이 있다. 실내 장식은 검박하지만, 장소 자체는 궁색해보이지 않는다.


위대한 화가와 만나서 얻을 수 있는 부수입은 그들의 그림 덕분에 이 세상에서 화가가 예민하게 반응을 보였을 만한 장소들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호퍼적이라고 부를 만한 장소에 민감해진다. (24시간 식당, 역의 대합실, 모텔)


오스카 와일드는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에는 런던에 안개가 없엇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안개야 많았겠지만, 우리의 시선을 인도해주는 휘슬러의 그림이 없었다면 그 독특한 특질을 보는 것이 약간 더 어려웠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따분한 장소의 매력

장소와 행동의 따분함을 중시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권태’를 극복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의 감정에 충실하며, 내면으로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내면을 사랑하는 사람은 장소, 사람, 시간을 불문하고 그 상황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자신의 내부가 흥미로워 굳이 도시까지 흥미롭게를 바라지 않는 사람을 원햇다. 정열의 샘에 늘 가까이 있어서 도시가 재미없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을 사람을 원햇다. 인간의 영혼의 어둡고 비극적인 면을 잘 알고 있어서 취리히 주말의 고요를 고맙게 생각할 사람을 원했다. 결국 샤샤와 나는 오래가지 못했다.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외교를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화려한 행위이다. 그러나 꾸짖고, 웃고, 사고, 팔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가족과 함께 - 또 너 자신과 함께 - 상냥하고 정의롭게 사는것, 늘어지거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은 더 주목할 만한 일이고, 더 드물고, 더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건 그런 한적한 삶에서 이행해 나가는 의무들은 다른 삶의 의무만큼이나 어렵고 또 긴박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점은 계속 잊혀간다. 우리는 아이를 위해서 빵에 버터를 바르고 이부자리를 펴는 것이 경이로운 일임을 잊어버린다.



희극

농담이 비판에 특별히 효과적인 것은, 겉으로는 즐거움만 주는 것처럼 보이면서 은근히 교훈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만화는 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설교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만화를 보면서 낄낄거리다가 어느새 만화의 권위 비판이 적절하다고 인정하게 된다. 


웃음은 최고의 익살꾼의 손에 쥐어지면 도덕적 의미를 획득하며, 농담은 다른 사람들에게 성격과 습관을 바꾸도록 촉구하는 수단이 된다. 농담은 정치적 이상을 표현하는 방법, 더 공정하고 더 멀쩡한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새뮤얼 존슨이 말했듯이 풍자는 ‘[악이나 어리석음을 비난하는’ 여러 방법들 중 하나일 뿐이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존 드라이든의 말을 빌리면 “풍자의 진정한 목적은 악의 교정”이다.


유머는 높은 지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데에 유용한 도구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지위에 대한 불안을 이해하고 조절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글쓰기(와 송어)

아주 좋은 의도와 단정한 글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도저히 읽어줄 수가 없는 이유는 저자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송어와 날씨 이야기가 나오는 등 사실들이 나열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그림에서 삶은 빠져나가고 보이지 않는다. 마치 사람의 발과 구름만 나오는 홈 비디오를 보는 것 같다. 관객은 어리벙벙하여 도대체 눈노피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해한다. 많은 글쓰기가 이런식이다.


삶을 붙잡아두는 데는 감각 경험을 충실하게 기록하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 우리가 보는 것을 나열한 자료는 예술이 되지 못한다. 오직 선별을 할 때에만, 선택과 생각이 적용될 때에만 사물들이 자연스러워보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읽다보면 역설적으로 나 혼자 파악하려고 할 때보다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달느 사람의 책에 있는 말을 읽다 보면 전보다 더 생생한 느낌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세계는 어떤지 돌아보게 된다.


위대한 책의 가치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나 사람들의 묘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독자가 읽다가 이것이 바로 내가 느꼈지만 말로 표현을 못하던것이라고 무릎을 쳐야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새로 조율된 레이더처럼 의식을 떠다니는 어떤 대상들을 포착한다. 마치 조용한 방에 라디오를 가져다놓는 것과 같다.



독신남

사람은 아주 하찮은 것으로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뭐 사랑이라는 말이 좀 그렇다면, 기질에 따라서는 반한 상태, 병, 착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뜨겁게 고조된 그런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찮은 것으로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이어가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와 마음의 상호작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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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단순한 균형의 문제
장 자크 상뻬 글 그림 / 미메시스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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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그 즐거운 추억  

장 자크 상뻬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가 그린 많은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나의 어리시절 동심으로 자전거를 바라보던 시기가 생각난다. 처음 자전거를 처음 접했을 때 얼마나 즐거웠던가! “손 놓치 마세요! 놓치 마세요!” 라고 아빠에게 소리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기도 하고, 아르바이트 시간이 늦을까봐 쌩쌩 달리던 나의 학창시절이 생각나기도 한다. 이렇듯 그의 그림은 누군가에게 정말 즐거운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나는 자전거의 즐거움으로 그림 하나 하나를 만났다.




자전거, 단순한 균형의 문제

균형은 자전거 타기의 가장 필수적인 항목이자, 즐거움은 자전거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이다. 어찌보면 자전거타기는 인생의 단순한 균형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닐까?  책에 그려진 손을 놓고 자전거를 타는 어린이의 모습, 연인을 무릎에 놓고 자전거를 타는 남자들, 복잡한 도심에서 홀로 천천히 이동하는 남자 등의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균형의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순간의 삶에 균형잡힌 자세로 최선을 다하는 자세일 것이다.



조화와 균형, 그리고 순간을 사는 삶

‘논문 100편보다 한편의 그림이 더욱 세상을 가치있게 만들 수 있다.’


전문적인 문체와 학술적 이론을 바탕으로 작성된 논문과는 달리 그림은 남녀노소 쉽게 접하며, 이해하기 쉽다. 책을 읽으며 지금은 속도, 디자인, 산악용도 등의 다양한 이유로 변해버린 자전거 그 자체의 의미와 평화로운 가치를 다시 생각해봤다. 그림을 통해 즐거움, 균형, 평화 등의 조화로운 가치가 자연스레 떠올랐고 편안함을 느꼈다. 개인적으로 다양한 자전거의 광고보다는 이런 몇장의 그림이 자전거 이용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일상 생활에서 예술이 대중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더 많은 사람이 이 그림을, 더 나아가 예술을 좀 더 가치있게 마주하는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은 조화와 균형, 그리고 순간을 사는 즐거움이다. 마치 자전거 타기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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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비행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18
생 텍쥐페리 지음, 배영란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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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조종사, 작가 생택쥐페리

여기에서 생택쥐페리가 언급하는 것은 모두 직접적인 경험에 나온 것들이다. 그가 직접 겪은 빈번한 위험의 순간들이 담겨 있어 이 책은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진솔한 맛을 느끼게 해준다. _서문 中_


소설가이자 비행사였던 생택쥐페리의 이야기는 실제로 자신이 경험한 다수의 야간비행을 토대로 이 소설을 썼다. 야간 비행이 완벽하게 setting 되지 않은 시점에서 생텍쥐페리

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며 소설을 썼을까. 

소설의 화자들의 대화와 독백은 마치 작가가 직접 이야기 하는 것과 같은 담담함과 숭고함이 있다. 이 책은 단지 가볍게 읽고 잊혀지고 마는 동화책이 아닌, 독자로 하여금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여기 세명의 각기다른 역할과 책임, 가치관의 남자가 있다.

파비앵, 로비노, 리비에르.  


파비앵

각기다른 소중한 사연이 있는 우편물을 배송하며, 아직 개척되지 않은 야간 비행 경로를 개척하는 숭고한 사명 완수를 위해 노력하는 조종사.


그는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인지하고 있으며, 내면의 작은 두려움까지도 극복하려 노력하는 투철한 조종사이다. 과연 우리시대에 이렇게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의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그의 투지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손에서 핸들이 빠져나가려고 해. 손이 펴질 것 같아. 그는 자신이 그런 말을 떠올렸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자신의 양손이 이미지의 막연한 힘에 복종하여 서서히 펴져서는 어둠 속으로 그를 놓아버릴 것 같이 느껴졌기 떄문이다. 그는 아직 더 싸울 힘이 있었고,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볼 수 있었다. 비운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 스스로의 나약함을 깨다는 그 순간 사람은 눈깜짝할 사이에 실수를 저지르고 마는 법이니까. 바로 그 순간, 푹풍의 갈라진 틈새로 마치 덫으로 유인하는 죽음의 미끼처럼 별 몇 개만 반짝이는 게 보인다. 물론 그도 그것이 함정이라는 걸 알았다. 어떤 구멍 사이로 세 개의 별이 보이고, 그 별들을 향해 일단 올라가기만 하면, 그곳에서 영원히 갇혀서 별들을 입질하며 지내야 하는 그런 함정.. 하지만 빛에 대한 목마름이 너무나 컸던 그는 결국 올라가고 말았다.


정말 아름답군. 파비앵은 생각했다. 그는 자신과 동료 외에 살아있는 생물체라고는 하나 없는 세계에서, 빽빽하게 보석이 들어차 있는 별들 사이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옛날이야기에서나 나오는, 보석으로 가득 찬 방안에 갇혀버려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전설 속의 도둑들과 같은 처지였다. 얼음처럼 차디찬 보석들 속에서 엄청난 부자가 되었지만,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신세였다.


로비노

야간비행을 완수하는 임무를 책임지는 중간관리자. 권위와 인간적인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중간상사.


자신의 부족함과 외로움에 솔직하며, 부하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싶은 중간 상사 로비노.

하지만, 그의 상관 리비에르로 인하여 자신의 임무와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고, 그것에 대해 고민한다. 파비앵이 사라졌을 때에는 진심으로 가슴아파한다.

조직의 입장에서는 좋은 관리자는 아닐지언정 인간미가 필요한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로비노는 지금 조종사 하나를 자기 친구로 만들려는 참이었다. 호텔에서 그는 조종사 앞에서 자기의 여행용 가방을 열고 그 안의 소지품들을 꺼내놓았다. 볼품없는 셔츠 몇장, 세명두고, 벽에 핀으로 꽂아두었던 깡마른 여자 사진 등 가방에서 그렇게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쏟아놓음으로써 그는 감독관들도 다른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게 업는 인간임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감옥을 보여준 셈이었다.



리비에르

야간 비행이라는 충직한 사명을 바탕으로 그것이 무조건적으로 완성되기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바치는 총 책임자.


그는 자신의 사명을 위해서 인간적인 부분을 누르며 업무를 지시한다. 개인적으로는 가슴아픈 일이 있어도 모든 것들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일이며, 그것이 자신의 부하들을 진실로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총 책임자의 모습이다. 심지어는 파비앵의 죽음 또한 야간 비행의 경로를 개척하는 숭고한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리더의 모습이다.


책은 그를 미화한다. 엮은이의 말 또한 그의 인간적인 내면에 초점을 맞추며, 사명과 책임에 충실했던 그의 상황을 변호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의견에 반대한다. 굳은 사명은 조직과 개인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부분은 공감한다. 하지만, 그것은 뚜렷한 목적과 방향을 제시한다는 것이지 획일화된 방법으로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근시안적으로 목표만을 위해 달려가는 양옆의 시아를 가린 경주마들처럼 부하에게 명령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리더이며, 리더십일까?

몇가지 경우에서는 공감하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는 절대로 같이 함께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특히, 죽음에 대해 숭고한 희생이라 생각하는 관점은,, 자신의 가족이라고 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내 말대로 하게. 로비노, 부하 직원들을 아껴주게. 하지만 내색을 하진 말게.


‘저들을 강하게 밀어붙여야 돼. 그래야 고통과 기쁨이 함꼐 하는 강인한 삶을 살 수 있지, 그것만이 오로지 중요한 것이니까. ‘


나는 이 사람들을 모두 사랑한다. 내가 싸우는 대상은 이들이 아니다. 나는 다만 이들 배후에 있는 악과 싸우는 것이다.


나의 처사는 공정한가, 부당한가?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호되게 밀어붙이면 고장은 분명 줄어든다. 모든 사람을 다스리지 못하면 결코 우리 손이 닿을 수 없는 미지의 힘 같은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만일 내가 너무 공정하게 대했다면, 야간 비행은 번번이 목숨을 건 여행이 되었을 것이다.


승리,패배 ,, 이런 단어들은 죄다 부질없는 것이다. 삶은 이런 이미지들을 초월하여 이미 다른 새로운 이미지들을 준비하고 있다. 승리는 한 나라를 나약하게 만들지만 패배는 나라를 새로 태어나게 만든다. 리비에르가 맛본 패배는 진정한 승리를 위해 한 번쯤 겪어야 하는 예정된 절차였는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리비에르는 완강한 시선으로 직원들을 굽어보며 그 사이를 지나 천천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리비에르는 위대했다, 그는 승리라라는 무거운 짐을 이고 가는 승리자였다.




짜이 밀레가


1. 화룡점정

표현력이 풍부한 그림, 한눈에 보아도 이해될 수 있을 법한 추상적이면서도 detail한 설명을 보주는 풍부한 미적감각. 그림은 정말 아름답다.


2. 같은 결과, 다른 입장

사명을 위해 야간비행을 떠나는 조종사 파비앵의 의지는 뜨겁다. 하지만, 하지만, 파비앵의 아내 생각은 그와 같았을까? 고작 6개월이 지난 신혼부부였다. 남편이 원하는 것은 사랑스러운 아내보다 밤하늘의 별이었고, 사명은 자신의 죽음보다 더욱 값진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남편을 잃어버린 그녀는 사명을 생각하던 남편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런 상황에서도 파비앵의 사명과 의지는 현 사회에 귀감이 된다’ 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3. 다른 관점

2번의 화자의 여러 측면은 내가 소설을 통해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부분이다. 주인공의 죽음이 안타깝다라고만 생각했는데, 교보문고의 다른 리뷰를 통해 나와 다른 관점을 깨닫고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http://booklog.kyobobook.co.kr/jangsh0305/468656/)

이렇듯 자신의 리뷰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관점을 한번쯤은 보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물론, 그 사람의 관점을 편협하게 쫓아가는 것은 문제가 되겠지만, 나의 생각과 비교도 분명 그 장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문득, 좋아하는 글귀가 생각난다.


사색 없는 독서는 소화되지 않는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_ 애드먼드 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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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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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데, 돈은 전부가 아니다. 돈은 특정 대상에 대한 가치를 매겨, 인간의 교환활동을 원활하게 도와주는 유통증권일 뿐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폐단과 인간의 탐욕, 물질만능주의으로 인해 ‘수단’이었던 돈이 ‘전부’가 되고 있다. 

혹자는 아무에게도 피해주지 않는 범위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우리는 효율성, 자율성, 시장논리 등을 논하기 전에 인간의 필수 가치인 평등과 대상의 본질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돈으로 인해 본질이 변화되서는 안된다.이제 우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본연의 가치들을 생각하며 다섯 가지 범주로 소개된 책을 함께 읽어보자. 


<<우리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맞서지 않고 뒷걸임질친다면, 시장이 가치를 잠식할 것이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회 관행과 재화의 의미에 관해 솔직하게 공개적으로 숙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1. 새치기

[렉서스 차로, 대리 줄서기, 진료 예약권 암거래, 암표]


모든 것에 경제적인 관념을 대입하는 순간, 그 본연의 가치는 퇴색된다. 최근에는  기존에 미덕으로 여겨졌던 줄서기, 순서, 공평성 등의 가치에 어느순간 자본주의적 잣대가 도입된다. 순서를 기다리던 미덕은 없어지고, 돈으로 새치기를 하는게 당연한 시대가 되었다. 프리미엄, 추가비용 등의 미사여구를 붙여 우선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결국은 세치기를 합법적으로 용인한 것이다. 돈이 개입되는 순간 누구에게나 동등했던 기다림이 가진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변했다. 평등이 사라졌다. 



2. 인센티브. 

[탄소배출권, 독서 권장제, 건강제도, 학생 공부제도, 기업 수익성]


선행(善行)에 대한 본연의 기쁨과 악행에 대한 수치심이 사라졌다. 이제 선행은 금전적인 보상을 받고, 악행은 금전적 청구를 당한다. 잘한 사람과 잘못한 사람에게 경제적 차별을 도입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인다. 남을 돕는 행위는 기존에는 선행(善行)이었다. 하지만, 돈이 개입되면 그것의 도덕적 가치가 변질된다. 기존에 선행으로 여기는 것들을 획득하기 위해서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선행을 할 것이고, 그것에 대한 보상을 기대할 것인가. 이윤추구를 위한 사기업이 아닌 개인과 정부가 이 잣대를 대입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잘못된 사람에게는 벌금을 부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수치심을 느꼈던 행동에 대해 벌금을 내는 순간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한다. 예를 들어, 탄소배출권을 구매함으로 인해 환경 오염에 대한 권리를 구매했다고 생각하고, 어린이집에 자녀들을 늦게 데리러 온 것도 자신은 돈을 냈기에 당연한 권리라고 여긴다. 타인이 직면할 환경 오염이나, 어린이집 교사들이 늦게까지 남아있는 상황에 대한 죄책감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듯 우리는 시장논리가 특정 영역에서 적절한지 여부를 판단하기 전에, 어떤 규범이 생활에 도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3. 시장은 어떻게 도덕을 밀어내는가

[돈으로 구입한 금메달, 노벨평화상, 홈런볼, 사과문]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효용성은 ‘경제학’ 이라는 유일한 잣대를 모든 경우에 대입해서 발생한 문제다. 이제는 금메달도, 오스카상도, 심지어 노벨상도 돈을 주고 살 수 있다. 그리고 돈으로 구매함으로 인해 기존의 선(善, the good)의 가치는 변질된다. 

선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현금이 선물보다 20% 이상 효율적이라는 연구논문이 있지만, 그것은 효율성이라는 가치에 가려진 감사, 미덕 등 숭고한 인간미를 생각하지 못한 연구 결과일뿐이다. 이타주의, 관용, 결속, 시민정신은 사용할수록 고갈되는 상품이 아니라, 오히려 운동하면 발달하고 더욱 강해지는 근육에 가깝다. 우리는 더욱 부지런한 미덕을 행사해야한다. 효용성이 미덕을 없애도록 하지 말자. 


“우리는 정당하게 행동함으로써 정당해지고, 절제함으로써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하게 행동함으로써 용감해진다” -아리스토 텔레스



4.삶과 죽음의 시장

[타인의 생명권, 죽음을 이용하는 채권, 도덕적 측면에서 본 생명]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생겨날 수 있는 재정적 위험에 대해 가족과 사업체를 보호하기 위해 생긴 장치가 이제는 사망에 따른 피보험 이익을 놓고 도박을 벌이는 상황에 이르렀다. >


죽음을 통해 재정적 이익을 얻게 하면 본인과 우리의 윤리적 민감성은 무뎌진다. 사망채권은 죽을 놓고 벌이는 도박일 뿐이고, 생명보험은 사회적 선을 위해서라면 도덕성을 잠식하는 시장 관행을 감내하겠다고 결정한다. 도덕적 잠식을 더이상 지켜볼수만은 없다.


사망보험 관련 내용은 미국애 국한된 내용이 아니다. 더불어, 생명 이외에도 우리에게 소중하지만 그것의 중요성을 모른채 이익창출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많은 기준들이 있다. 그것은 투기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발 소중한 가치만큼은 돈과 결부시키지 말자. 



5. 명명권

[지하철 이름 명명, 무의식을 자극하는 광고, 광고로 아이이름을 짓는 행위, 이마에 기업 광고 문신,  책과 영화에 특정 광고를 삽입, 교과서에 광고를 하는 행위]


“우리는 숨을 쉴때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이산화탄소 배출은 문제를 일으킨다. “


광고의 일상 생활 침투는 도를 넘어섰다. 소설에 특정 광고를 하는 것. 교과서에 특정 제품을 광고하고, 스포츠 센터에 기업의 이미지를 투여한다. 소비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광고의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공공기관을 기업의 논리로 변화시키고 있다. 공립학교의 목적은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다. 그런 곳까지 광고로 이름을 짓고, 세뇌적인 가치를 교육한다는 것은 정말인지 끔찍한 세상이다. 주객이 전도된 세상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짜이 밀레가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싶은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절대 변하지 말아야할 숭고한 가치들이 분명 존재한다. 이 가치들의 의미를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 재화를 구매, 이용하기 전에 이것의 타당성 여부를 경제적 관점이 아닌 도덕적 관점을 대입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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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도그마 - 강자가 말하는 약자의 본심
마이클 프렐 지음, 박수민 옮김 / 지식갤러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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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강자에게 엄격하고, 약자에 관대한 경험이 있는가? 같은 행동에 대해서도 강자는 비난하고, 약자는 동정하지 않았는가? 만약 당신이 이런 경향이 심하다면 언더도그마에 대해 생각해보자. 


언더도그마란  '힘이 약한 사람이 힘이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선하고 고결하며, 힘이 강한 사람은 힘이 강하다는 이유로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믿는 무비판적인 생각이다. 우리는 불합리한 무비판적인 언더도그마를 경계해야 한다. 


언더도그마의 생성 원인에 대한 많은 의견이 있다. 우리는 태초부터 어미의 젖을 빨고,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약자였기에 약자의 편에 선다는 의견이 있고, 종교적 교리, 어린 시절의 교육의 영향으로 언더도그마가 형성되었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교육은 약자를 도와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도와줘야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교육하지 않은것 같다.)  또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이기적인 감정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강자의 삶을 동경하지만, 그들처럼 강해질 수 없기에 자신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그들을 비난하고, 자신의 관점을 바꾸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밖에도 언더도그마가 생성된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우리는 여기서 언더도그마로 인한 우리 관점의 영향과 올바른 태도에 대해 초점을 맞춰보자.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것과 무조건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전자는 성선설의 관점에서 인간의 도의적인 책임을 의미하는 반면, 후자는 약자는 언제나 옳다고 믿는 무비판적 사고를 의미한다. 이런 언더도그마는 대중에게 잘못된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하게 만든다. 팔레스타인 과격 단체의 이스라엘 소녀를 살해한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을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사상자 발생일 비판하고 그들의 반성을 촉구한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을 강자라고 생각하고 팔레스타인을 약자라고 생각하는 언더도그마가 형성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강자-약자로 프레임으로 이어지고, 강자인 이스라엘인은 악인이 되고 팔레스타인은 약자라는 이유로 선한 사람이 된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선,악의 언더도그마가 형성되면 사건 개개인의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살해 사건은 약자들의 불가피한 저항이라고 미화하고 정당화하고, 이스라엘인은 마땅히 당해야 할 악인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순간 살인은 잊혀지고, 피해자인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여론이 생기는 것이다. 명백한 살인사건이 언더도그마로 하여금 미화되고 정당화 된다는 것은 실로 끔찍하다. 


이처럼 언더도그마는 무비판적인, 비합리적 관점을 생성한다. 언더도그마는 자연적 본성이 아닌 후천적으로 생성된 감정이다.그것은 결코 선/악의 대립, 권선징악이 아니며, 우리는 객관적 사고로 사건의 본질을 바라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언더도그마가 국가간의 분쟁이나 강자-약자의 싸움에만 국한되지 않고, 영악한 사람들로부터 선전도구로 악용될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 정치, 기업, 언론 등 주체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언더도그마를 통한 선전이 가능하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우리, 대중은, 언더 도그마에 취약하다. 

 


짜이 밀레가 


나는 어릴때부터 약자를 지지했다. 운동 경기에도 약팀을 응원했고,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힌다는 생각에 대한 반발감이 심했다. 군대에서도 항상 후임들의 편에 섰다. 또한, 약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강자가 되는 순간 더이상 그들의 편에 서지 않았다. 지금도 강자를 가능한 멀리하고,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을 선호한다. 기업, 제품, 스포츠스타, 연예인도 독보적 1위는 좋아하지 않는다. 약자는 동정하고, 강자는 배척하는 태도는 약해졌지만 아직까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제는 나의 언더도그마를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돌이켜보면 나는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여 선/악의 프레임을 만들었다. 소수가 잘못되었다는 가정 자체를 배제하고, 약자라는 이유로 그들을 지지하며 이중잣대로 사건을 판단했다. 이제는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는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태도를 갖고자 한다. 어떤 사건이 진위 여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그것을 거시적인 관점과 미시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본인의 편향적인 관점이 있는지 돌아보고, 그것의 원인을 생각함으로 인해 언더도그마 ‘선전’으로부터 자유로운 주체적 사고를 해야한다. 


분명한게 있다. 이 책을 읽고 나의 언더도그마는 약해질 것이다. 하지만, 약자를 돕는 세상이 옳다는 나의 가치관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함께 멀리가야 한다는 기본 전제는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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