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주는 기쁨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여러편의 에세이中 알랭드보통의 기존 저서( ‘여행의 기술’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불안’ 등)에 소개된 조금은 익숙한 내용이다. (내용이 조금 바뀐것 같기도 하다.)


저자가 말한 왜 많은 저서 중에서 이 내용들을 이 순서로 엮은 이유는 찾지 못했지만, 새로 읽어보는, 또는 처음 접해보는 책의 내용에서 지식의 즐거움을 발견한다.


나는 두가지 이유로 알랭드 보통의 책을 좋아한다.

첫째, 평상시에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둘재, 알고는 있었지만 명확히 표현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설명해준다.

이 책은 두가지 지유를 모두 가진책이라고 생각한다. 인상적인 제목들은 그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에세이에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의 답을 찾아 사색하게 만드는 그런 책이다.




슬픔이 주는 기쁨

슬픔이 주는 기쁨. 나의 슬픔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과의 공감을 통해 위안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슬픔을 표현하는 그림, 음악등의 예술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슬픔을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것은 슬픔에서 위안과 더 나아가 기쁨을 발견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실망의 메아리를 목격하고, 그럼으로써 혼자서 감당하던 괴로움과 중압감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벽에 걸어야 할 것은 쓸쓸한 도로변 휴게소 그림인지도 모른다.


자동 판매 식당은 슬픔을 그린 그림이지만 슬픈 그림은 아니다. 이 그림은 위대하고 우울한 음악 작품과 같은 위력이 있다. 실내 장식은 검박하지만, 장소 자체는 궁색해보이지 않는다.


위대한 화가와 만나서 얻을 수 있는 부수입은 그들의 그림 덕분에 이 세상에서 화가가 예민하게 반응을 보였을 만한 장소들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호퍼적이라고 부를 만한 장소에 민감해진다. (24시간 식당, 역의 대합실, 모텔)


오스카 와일드는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에는 런던에 안개가 없엇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안개야 많았겠지만, 우리의 시선을 인도해주는 휘슬러의 그림이 없었다면 그 독특한 특질을 보는 것이 약간 더 어려웠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따분한 장소의 매력

장소와 행동의 따분함을 중시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권태’를 극복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의 감정에 충실하며, 내면으로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내면을 사랑하는 사람은 장소, 사람, 시간을 불문하고 그 상황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자신의 내부가 흥미로워 굳이 도시까지 흥미롭게를 바라지 않는 사람을 원햇다. 정열의 샘에 늘 가까이 있어서 도시가 재미없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을 사람을 원햇다. 인간의 영혼의 어둡고 비극적인 면을 잘 알고 있어서 취리히 주말의 고요를 고맙게 생각할 사람을 원했다. 결국 샤샤와 나는 오래가지 못했다.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외교를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화려한 행위이다. 그러나 꾸짖고, 웃고, 사고, 팔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가족과 함께 - 또 너 자신과 함께 - 상냥하고 정의롭게 사는것, 늘어지거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은 더 주목할 만한 일이고, 더 드물고, 더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건 그런 한적한 삶에서 이행해 나가는 의무들은 다른 삶의 의무만큼이나 어렵고 또 긴박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점은 계속 잊혀간다. 우리는 아이를 위해서 빵에 버터를 바르고 이부자리를 펴는 것이 경이로운 일임을 잊어버린다.



희극

농담이 비판에 특별히 효과적인 것은, 겉으로는 즐거움만 주는 것처럼 보이면서 은근히 교훈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만화는 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설교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만화를 보면서 낄낄거리다가 어느새 만화의 권위 비판이 적절하다고 인정하게 된다. 


웃음은 최고의 익살꾼의 손에 쥐어지면 도덕적 의미를 획득하며, 농담은 다른 사람들에게 성격과 습관을 바꾸도록 촉구하는 수단이 된다. 농담은 정치적 이상을 표현하는 방법, 더 공정하고 더 멀쩡한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새뮤얼 존슨이 말했듯이 풍자는 ‘[악이나 어리석음을 비난하는’ 여러 방법들 중 하나일 뿐이지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존 드라이든의 말을 빌리면 “풍자의 진정한 목적은 악의 교정”이다.


유머는 높은 지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데에 유용한 도구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지위에 대한 불안을 이해하고 조절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글쓰기(와 송어)

아주 좋은 의도와 단정한 글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도저히 읽어줄 수가 없는 이유는 저자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송어와 날씨 이야기가 나오는 등 사실들이 나열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그림에서 삶은 빠져나가고 보이지 않는다. 마치 사람의 발과 구름만 나오는 홈 비디오를 보는 것 같다. 관객은 어리벙벙하여 도대체 눈노피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해한다. 많은 글쓰기가 이런식이다.


삶을 붙잡아두는 데는 감각 경험을 충실하게 기록하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 우리가 보는 것을 나열한 자료는 예술이 되지 못한다. 오직 선별을 할 때에만, 선택과 생각이 적용될 때에만 사물들이 자연스러워보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읽다보면 역설적으로 나 혼자 파악하려고 할 때보다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달느 사람의 책에 있는 말을 읽다 보면 전보다 더 생생한 느낌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세계는 어떤지 돌아보게 된다.


위대한 책의 가치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나 사람들의 묘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독자가 읽다가 이것이 바로 내가 느꼈지만 말로 표현을 못하던것이라고 무릎을 쳐야하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새로 조율된 레이더처럼 의식을 떠다니는 어떤 대상들을 포착한다. 마치 조용한 방에 라디오를 가져다놓는 것과 같다.



독신남

사람은 아주 하찮은 것으로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뭐 사랑이라는 말이 좀 그렇다면, 기질에 따라서는 반한 상태, 병, 착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뜨겁게 고조된 그런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찮은 것으로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이어가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와 마음의 상호작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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