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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7p)
누군가 묻는다. 한 번 묻는 질문이 아니다. 글 중간중간에, 어디까지 왔는지, 어디에 왔는지 묻는다. 그것은 단순한 중얼거림이 아니다. 간절함, 혹은 애원.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으면 그렇다. 어딘가로 가야하는지 몰라서,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
이 글의 첫 모습은 어리둥절하게 볼 수밖에 없다.
내 이름은 앨리시어, 여장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 있다.(7p)
앨리시어는 왜 여장을 하고 사거리에 서 있나. 그리고 뒤에 따라오는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마치 누군가를 찾아헤매는 여장 부랑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걸을 때 괴상하게 움직이는 골격. 발을 끌고 악취를 풍기는 여장 남자.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악취를 풍기면서 묵묵히 제 길을 가는 부랑자. 왜 앨리시어는 그런 모습이 되었는지. 그렇게 앨리시어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앨리시어는 고모리에서 왔다. '무덤'이라고 하는 고모리에서,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 앨리시어는 그 집에서 기른 개를 기억한다. 개를 잡아먹은 그 집을 기억한다. 개의 시체를 떠올린다. 하지만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들은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잃어버리지 않도록 꽁꽁 숨겨버렸는지도 모른다. 앨리시어의 가장 머나먼 기억. 동생과 함께 맞았던 기억. 어머니가 씨발 년이 되던 순간.
학대는, 마치 답습하는 것만 같다. 어머니도 아버지에게 맞고 자랐다. 벌거벗은 채 추운 바닥에 서 있다고 했다. 그 기억이 있어서, 어머니는 앨리시어와 그 동생을 때린다. 때리고 싶으니까 때린다고, 앨리시어는 말한다. 하지만 폭력은 거기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아버지의 외면이 다시 폭력으로 이어지고 이웃집의 외면이 폭력으로 이어지고 배 다른 남매인 형과 누나의 외면조차 폭력으로 이어진다. 앨리시어와 앨리시어의 동생은 고립되었다. 폭력에 고립되었다.
하루는, 앨리시어의 친구인 고미가 신고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앨리시어는 고미와 함께 구청으로 가서 가정폭력을 신고하려고 한다. 구청에서는 담당부서가 다르다면서 다른 곳으로 안내를 하고 그곳에서도 다시 다른 곳으로 안내해준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씨발 년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듣는다. 앨리시어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그런 게 아니다. 씨발 년은 씨발 년이라고 말해주는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폭력이 얼마나 무시하고 악독한지 말해주길 바랐을 것이다. 그것은 앨리시어가 동생에게 해주는 이야기와 같다. 여우와 네꼬의 이야기. 그리고 소년 앨리스의 이야기. 어디로 가지 못한 채 그저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던 것들의 이야기. 앨리시어가 동생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모두 어디로 가지 못했다. 여우도, 네꼬도, 소년 앨리스도.
그렇게 아래로 가라앉았다. 내려가고, 내려간 곳에서 그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그것은 대체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을까. 나도 궁금하다. 앨리시어처럼. 대체 그 아래로 가면 어떤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앨리시어는 보았을까. 그 깊은 바닥까지 가서야 비로소 무엇이 있는지 보았을까. 앨리시어가 여장을 하고 거리를 떠도는 것은 그 밑바닥에 있다는 의미인 것일까.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 가장 야만적인 것은 누구였을까. 학대를 가한 어머니? 학대를 외면한 아버지와 이웃? 아무것도 조치해주지 않은 정부? 아니면, 어딘가로 도망가지 못하고 학대를 받은 앨리시어 형제? 그래서 그렇게 물었던 것인가.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어디까지 왔냐고 물을 수 있을까. 나는 '소년 앨리스'다. 소년 앨리스처럼 커다란 나무 그늘에 앉아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을 나뭇가지의 끝에서만 보는, 그런 영혼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가만히 앉아 있는 소년 앨리스다. 앨리시어와 마찬가지다. 한쪽 다리를 절면서 악취를 풍기면서 심연 속으로 끝없이 가라앉고 만 존재에 불과하다.
그 고통이, 우리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낯선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