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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법칙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6월
평점 :
김명국의 말대로 사람이란 본래 그럴 리 없는 존재였다.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고 선의를 가졌으며 다른 사람을 위해 양보할 줄 알았다. 대부분의 일들이 불확실한 가운데 벌어지며 그 내막과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임에도, 인간이 선의를 가진 존재라는 것은 세상의 몇 안 된느 진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것이 결심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것을 결행하려면 진실에 침묵해야 했다. 무엇보다 사람이란 본래 그럴 리 없는 일도 하는 존재였다.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거짓말을 일삼고 농락하고 사기치고 협박해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다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_77~78p
사람은 언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가. 홀로 있어도 외롭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도 외롭다. 그렇지만 홀로 있어도 연결될 때가 분명 있다. 그 순간은 너무 옅어서 알아차리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점과 점이 계속 만나면 선이 되는 것이 분명하듯 사람도 사람과 만나면 연결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선의 법칙>을 읽고 나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윤세오, 신기정, 조미연, 부이, 신하정, 세오의 아버지, 이수호, 이수호의 늙은 어머니, 김우술, 신재형. 각각의 인물들은 각기 혼자 있었지만 스치고 만나고 그러면서 '인연'을 만들었다. 처음부터 혼자였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세상은 조금 차갑다. 춥고 외롭다.
윤세오와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조미연. 이 두 사람은 확고한 선으로 이어졌는데 고등학생이 되면서 조금씩 멀어진다. 그들 사이에 부이가 끼어들면서 선은 점점 옅어진다. 친구라 불리던 이름이 빛을 잃고 연락을 주고받지 않게 한다. 조미연이 3년 후 세오에게 연락했을 때 그녀는 다단계에 빠져들고 있었다. 조미연은 세오를 다단계에 끌어들이고 도망친다. 세오는 그곳에서 1년 넘게 있었다.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었는데 도망가지 않고 아득바득 친구, 친구 아닌 사람,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거나 만나거나 사정해서 다단계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가 끌어들인 사람이 부이다. 부이는 흔쾌히 세오와 함께 해준다. 그리고 그 역시 조미연처럼 홀연히 사라진다.
하필이면 연결된 선이 가장 밑바닥에 있을 때라니. 그것은 슬픈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조금은 웃음이 나오는 일일까. 각각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하나씩 점점이 이어질 때, <선의 법칙>이라는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학교 선생이었던 신기정은 동생이 죽어서 동생을 추적해간다. 동생이 궁금해서 하나씩 과거를 되짚다 윤세오를 알게 되고 부이를 알게 되고 동생이 다단계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렇게 신기정과 윤세오 사이에 전혀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선이 연결된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는 스쳐지나가는 풍경일지도 모른다. 그 풍경을 누가 알아차리고 누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에 따라 인연이 되고 인연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세계에 한 발짝 발을 담그는 것으로 인연은 확실해진다.
삶은 홀로 살아가는 거라고 하지만 <선의 법칙>에 나온 인물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다단계를 하면서 정말 외롭고 고되고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선 일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 순간 연결되었다. 혼자 있고 싶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는 게 아닐까 생각되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세오가 부이를 감시하고 세오를 팀장이 감시한 것처럼.
신기정과 원도준의 관계도 그렇다. 원도준이 신기정에게 훔친 물건을 조금씩 준 것은 그녀를 곯리기 위해서였다기보다, 그저 하나 정도는 자신이 연결되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과. 그것이 악의든 호의든 개의치 않고.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을 끔찍히 싫어한다. 그렇지만 아주 가끔 혼자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신하정이 그렇게 죽어버린 것은 혼자 있었으면 했기 때문이 아닐까. 너무너무 다른 사람과 함께 한 것에 지쳐버려서 이제 혼자 남았으면 하고 바란 게 아닐까. 예전 트위터에서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홀로 있었기 때문에 그 외로움을 차지하기 위해 죽어버린 것이라고. 신하정은 아버지가 바람이 나서 데리고 온 동생이다. 그녀는 신기정의 어머니와도 신기정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독립적인 존재. 마치 홀로 있기 위해 살아온 것처럼. 외로움이 그녀 그 자체라면 그녀는 부이야말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동아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 동아줄이 홀로 떠났을 때 그녀의 심정은, 다시 외로움이 되었다는 사실. 그래서 죽은 게 아닐까. 자살이든 자살이 아니든.
어째서 우리는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까. '그럴 리가 없는 것'이 인간이라니. 선의도 악의도 모두 품고,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할 수 있는 존재라니. 세오가 이수호를 쫓아다니면서 품은 감정을 봐도 그렇다. 그녀는 절대 그럴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자살을 할 리 없다는 것처럼. 그녀는 그저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조미연에게 전화를 받고서 만나지 않는 길을 택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수호에게 증오를 품지 않고 그저 슈퍼에서 일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을 테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두 살아가기 위해 그럴 리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결국 신하정은, 살아가기 위해 물에 빠져든 것이리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을 테니.
처음부터 끝까지 우울한 글이었다. 점점 물속 깊은 곳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세오가 아버지를 잃고 다단계를 했을 때의 과거를 떠올릴 때 이수호를 쫓아다니면서 본 풍경을 볼 때, 사람이란 수렁에서 빠지면 빠졌지 거기서 결코 헤어나올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그럴 리 없는 행동을 하는 게 아닐까.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이수호가 빚을 받아내기 위해 인간성을 점점 잃어가는 것처럼. 윤세오가 아버지를 위해 증오를 품는 것처럼.
오직 부이만 헤어나간 것 같다. 신하정은 죽고 이수호는 증오를 품는데 부이는 의과대학에 합격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그도 전과 같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선의 법칙>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절망에 빠지다가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니다. 그저 그런 사람이 있다고 말해준 글이다. 선으로 연결된 사람들 사이에는 선의도 있고 악의도 있고 인간으로서 그럴 리 없는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것. 오직 그뿐인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