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정지돈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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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희한하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한 인물에 집중하여 쓴 글이 많다. <건축이냐 혁명이냐>에서는 이구라는 인물에 대해, <우리 모두의 정귀보>는 정귀보 씨라는 한 인물에 대해, <조중균의 세계>에서는 조중균이란 사람에 대해, <임시교사>는, 좀 모호한 구석도 있지만 P부인에 대해. 어찌 보면 문학이란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기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이번 수상작품집에선 그 한 사람을 대놓고 집중시켰다. 그것은 흥미로웠으며 동시에 재미있었고 또 동시에 씁쓸했다.


먼저, <건축이냐 혁명이냐>에서 다룬 이구란 인물. 이구란 인물이 황실의 마지막 왕자라는 것보다도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분명하지 않아 여권을 발급받지 못했다는 것에 놀랐다. 모국에게도 한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짙은 에스프레소는 향기라도 있지, 이 씁쓸함에는 아무런 향기도 없었다. 그저 씁쓸함만 고요하게 머물러 이구를 바라보게 했다. '시'를 쓰고 싶었다고 했지만 아무도 그런 이구를 바라봐주지 않았을 때에도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 '씁쓸함'이 이구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가 '시' 대신 '건축'을 택한 것은 어찌 보면 '시'를 쓰는 삶을 간접적으로 선택한 길이 아니었나 싶다. 그의 말따마다 "건축은 땅위에 시를 짓는 일입니다(11p)"였는지도 모른다. 땅위에 시를 짓는 일. 그는 그렇게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애정을 쏟아부었던 것이다. 희한하게도, 이 작품은 '이구'란 인물에 초점을 두면서 '이구'가 아닌 것을 점진적으로 펼쳐나가고 있다. 가령, "김중업"이란 건축가와 같이, 서울 건축물의 "역사"와 같이. 무엇이 역사이고 무엇이 허구인지에 대한 흥미보다도 이 여러가지 요소가 어떻게 "이구"와 연결되는지 그것에 관심을 두었다. 어쩌면 이 글은 "이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글은 건축가였던 "김중업"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프랑스로 망명한 한 건축가. 그리고 "밤섬"이 있다. 폭파된 섬. 무국적으로 떠돌던 이구, 프랑스로 망명한 김중업, 폭파당한 밤섬. 그리고 떠돌게 된 밤섬 사람들. 나는 이 글을 온전하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은 글이었다. 다만 이 글에서 한 가지만이라도 이해한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덤덤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 이구와 밀접하게 연결된 인물들을 하나하나씩 열거해가면서 이구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과 어떤 상관이 있을지 찾아내는 것은 오로지 읽는 독자의 몫이다. 그렇기에 이 글은 철학적이면서도 "혁명"적이라고 생각했다. 혁명적인 것은, 어느 한 부분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 어느 한 부분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허구인지 진실인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우리 모두의 장귀보>는 읽고 난 순간 전율이 일었던 작품이다. 문장, 내용, 서사적인 구조, 정교하게 만들어진 어떤 기계장치를 본 기분이었다. 촘촘하게 맞물리는 톱니바퀴들이 돌아가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정귀보 씨의 삶이 명쾌하게 보인 글이라고 해야 하나. 허구적인 인물이지만 어디에서 살아갈지도 모르는 "진실"의 인물. 정귀보 씨가 그러했다. 이 소설에서, 정귀보 씨를 특별하게 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난하게 적지도 않았다. 남들 하는 것처럼 살아갔을 인생이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그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보여준다. 이 글의 첫부분을 떠올려도 화가 정귀보 씨에 대해 적어야 할 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내용"이 없다고 하지만 덤덤하게 정귀보 씨를 말하는 그 삶은 결코 "이렇다 할 내용"이 없지는 않았다. 평범하게 살아온 한 무명화가가 어떻게 유명해졌는지에 대해 덤덤하고도 간결하게 "설명"하고 이 글은 어딘지 모르게 이기적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네 이해를, 공감도 바라지 않으나 여기 이곳에 이런 사람이 있다고, 청중도 독자도 전혀 의식하지 않은 글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왠지 정귀보 씨답다고도 생각했다. 마지막에 해변에서 스르르 올라와 한 걸음 다가올지도 모른다고 했을 작가의 문장처럼.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렇다 할 감상"을 남길 수 없는 것도 지극히 정귀보 씨다운 느낌이었다. 그것은 싫은 게 아니라 너무 당연하다 싶을 정도다. 나는 정귀보 씨의 삶을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다. 다만 여기, 이런 글이 있노라 몇 줄 적을 뿐이다.


<루카>. 난 이 글이 왜 이렇게 먹먹한지 모르겠다. 먹먹해서 읽고 나서 꿈으로 꾸기까지 했다. 찰나의 오수였으나 꿈에서 그 두 사람을 만난 것은 내 바람이 아니었나 싶다. 소설 속 인물이 이렇게 꿈으로 스며드는 일이 종종 있다. 내가 바라서 만나는 게 아닌, 무언가 그들이 원해서 나를 찾아온 것만 같은 느낌. 루카, 나는 네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퀴어문학이라는 표현도 처음 알았다. 성소수자를 다룬 글을 "퀴어"라고 부르는 것 역시 나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왠지 성소수자들을 어느 한쪽으로 몰아넣어서 말하는 말 같다. 성소수자는 퀴어다, 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이 두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루카와 같은 사람이 나타나면 어쩌나. 내 이런 독단적인 마음에 루카처럼 속으로 앓다 그렇게 사라지면 어쩌나. 그것이 쓰리게 아팠다. 나는 그저 이 글을 "루카와 딸기의 가슴 아픈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윤이형 작가는 "평범한 사랑"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지만 이 글을 읽고 나니 이 세상에 평범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세상에 평범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왠지 사랑을 하고 있는 자들에게 조롱처럼 들린다. 평범한 사랑이 있을 리가 없다. 루카와 딸기의 이야기가 이렇게도 가슴이 아픈데, 다른 사랑이라고 가슴이 안 아플까. 루카, 루카, 가만히 부르는 이름. 꿈에서도 나는 루카를 불렀다. 서로 떨어진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보면서 나는 루카"만"을 불렀다. 루카는 태생적으로 안타까웠다. 신을 모시는 아버지, 성소수자들을 위해 일을 하려는 딸기.... 그들 사이에 "중립"이란 게 있었다면 루카는 그렇게 불행했을까. 어느 누군가를 위한다는 이기적인 행동이 어느 한 사람을 파멸시킬 수도 있었다. 참회해야 한다. 루카를 위해. 그러니, "루카"라고 부르는 것조차 나는 숨이 막혀서 꾸었던 꿈을 온전히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근린>은 지극히 일상적인 글이었다. 겉으로 보면 그랬다. 어느 공원이 나오고 수다를 떠는 노부인들이 나타나고 한가롭게 벤치에 앉아 가을 날씨를 누리는 한 여인이 있고, 강아지와 산책을 하는 중년의 여자가 있고 엄마와 함께 공원에서 뛰어노는 여자아이. 산들바람이 불어온다고 느낄 만큼 기분 좋은 분위기가 있는 배경에는 어떤 두려움이 있다. 그 두려움이 무엇인가. 나는 모른다. 한 여인이 불의의 사고로 죽은 것? 그건 아닐 것이다. 다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떤 어색한 것을 느낀 것은 분명하다. 노부인들을 보면, 똥꿈을 꾼 한 노인이 다른 노인에게 삼만원으로 팔았지만 그 꿈의 효험은 꿈을 산 사람이 아닌 꿈을 판 사람에게 돌아왔을 때, 그 기저에 깔린 시기를 보았다. 정말 원하는 것을 다른 이가 혼자 누릴 때 느낄 그런 불쾌함과 배신감.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요양원에 있는 한 노인 둘이 탈출한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정분이 나서. 이 기가 막힌 상황조차 일상처럼 다뤄진다. 마치 자연스레 스며드는 수다처럼. 그러면 아이는? 아이는 행복한 듯 엄마와 함께 공원에 나오지만 엄마에게는 우울증이 있다. 지극히 나른한 일상 아래 깔린 것은 어둡다. 글 제목이 "근린"인 것은 그것을 말하기 위함인가. "가까이 사는 사람"이라 뜻하는 이 단어에서 주는 것이 모든 스토리를 관통한다. 노부인들, 아이와 엄마, 사랑에 빠진 요양원의 노인. 공원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가까이 이어져 있다. 그것을 한가로운 일상이라는 무대를 통해 서서히, 조심스레 침투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글은 섬뜩했다. 확 드러난 섬뜩함이 아닌 살살 긁어내는 섬뜩함이었다. 그래서 읽고 나서도 무겁고 찜찜했다.


<조중균의 세계>는 독특하다. 튀지도 그렇다고 묻히지도 않는 한 교정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나"는 조중균 씨를 동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배려하지 않는 것도 아닌, 사무적인 관계다. "나"를 결코 타인에게 드러내지 않는다. 회사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분명하다. 하지만 해란인 다르다. 해란이는 조중균 씨를 동정하고 친해지려고 하고, 자신을 드러낸다. 정규직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길에서 결국 "나"는 정규직으로 남았지만 해란인 그렇지 않게 되었다. 조중균 씨는 독특한 사람이다. 어찌보면 조중균 씨야 말로, 자기 자신을 놓지 않은 채 회사에서 "잘" 살아왔던 사람일 수도 있다. 점심식사비를 받은 부분에서 그게 정말 잘 드러났다. 본부장에게 꼬박꼬박 사인을 받으면서까지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면을 증명했단 것은 어찌 보면 희극적일 수도 있겠으나 그 희극적인 것이야말로 처절하다. 누가 보면 "그렇게까지 해서 그 돈을 돌려받아야 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 나 또한 이리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처절"함이야말로, 그런 아득바득 아끼는 모습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아닌가. 그렇기에 조중균 씨는 희극적이 되면서 처절하게 자신을 위해 살아가라고 "설명"해주고 있는 듯하다. 비록 나중에 교정하는 일로 해고되기도 하지만 그는 자신을 잃지 않았다. 자신이 뜻한 바를 고수하는 것이 조중균씨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멋지지 않나. 해고될지라도 자신을 잃지 않겠다는 각오. 처절하게 살아가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겠다는 각오. 그 모습에 나는 아찔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아서. 나는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어서. 나는 도저히 나 자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그러니까 조중균씨가 가진 처절함은, "자기 자신을 잃지 않겠다"는 것에 있다. 점심식비를 받기 위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본부장에게 꼬박꼬박 사인을 받은 것, "나는 나태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한 것에 사인을 받기 위해 고집을 부린 것, 교정기한을 어기면서까지 교정지를 붙들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은 조중균 씨가 자기 자신을 놓지 않겠다는 단 하나 가진 고집이고 자존심이고, 존엄이다. 그 모습에 어찌 전율을 하지 않나.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지금 얼마나 될까. 어느 책에서건 자기 자신을 잃지 말라고 하지만 그렇게 산다는 게 어렵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그렇기에 조중균 씨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작가노트"에서 후일담을 적은 것도, 어찌 보면, "나답게" 사는 것을 조금이나마 조중균이란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작가"로서의 모습이 그 모습의 본연일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렇단 기분이 든다. 작가란 자기 자신의 모습이 되었기에 조중균 씨를 적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임시교사>는 교사로 한평생 살아온 P부인이 가정교사가 되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아이 엄마나 아이 아빠에게 어떠한 화도 나지 않았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속물적이지만 그들을 탓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P부인이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벽한" 타인이란 얼마나 감정을 절제하게 만드는가. 어느 누구에게 손해를 끼쳤다고도 단정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 글에서 오히려 "따스함"을 느꼈다. 가정교사로 일한 P부인은 교사로 일했을 때와 다를 바 없이 자기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전적으로 희생했다. 그것은 "희생"이었다. 그렇기에 그것이 무척 숭고하게 느껴졌다. 정교사가 될 수 없어 임시교사로 전전하며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서, 가정교사는 완벽하게 그녀를 위한 "임시교사"가 아니었나 싶다. 그녀의 절제된 행동,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배려, 끝까지 완수하는 책임감.... 어딘지 인간적이면서도 어딘지 차가운 인상을 남기는 그녀에게서 나는 그 모습이 그녀가 가장 원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녀가 일을 그만두면서 느낀 감정조차,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란 기분을 느꼈다. 그녀가 마지막에 한 말조차 그녀가 한 행동이 결코 화내거나 원망하거나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말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마치 끈 하나를 잡아당기면 엉킨 끈이 풀어지듯이 잘못된 일들이 고쳐질 거야(276p)". 그렇기에 나는 그녀의 인생을 존중한다. 그 담담한 희생을 "읽었다". 작가의 말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세상의 어느 누가 자기 자신에 대해 진심으로 "나쁜 사람"으로 지칭할 수 있는지, 혹은 반대로 이 세상의 어느 누가 자기 자신에 대해 진심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를테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빠진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끈임없이 '다른' '나쁜'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_278p


<여름의 정오>는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느낌이 묘했다. 분명 반짝반짝해야 할 첫사랑인데, 어째서 한 가지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애절함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타카히로가 죽으려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죽음이 반짝반짝할 첫사랑의 느낌을 사라지게 할 수도 있나? 아니다. 나는 잘못 이해하고 있다. 이 세상에 어떤 첫사랑도 반짝반짝만은 하지 않을 것이다. 때론 이런 이야기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한여름을 배경으로 잡아 찬란하지 않은 이야길 적었다. 결코 빛날 수 없는, 조금은 쓸쓸하고 흐릿한 풍경으로 담아냈다. 나는 뜨거운 여름을 상상하며 읽었는데 전혀 뜨겁지 않았다. 첫사랑을 겪어낸 스무 살의 "나"가 더 이상 스무 살이 아니게 되었을 때를 느낄 때, 아, 여름이 뜨겁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나는 납득하고야 만 것이다. 타카히로의 삶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것보다 더 외로운 일은 없어(301p)". 어느 곳에 살아도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삶이 아닌가 싶었다. 서른 살의 타카히로는 스무 살의 "나"에게 그걸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러나 스무 살의 "나"는 그런 타카히로가 너무 멀리 있던 것이다. 그렇기에 파리를 다시 방문했을 때 거리는 가까워졌으나 다시 만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타카히로가 죽으려 했던 것을 통해, 그녀는 알아버렸던 것이다. 외로운 삶, 을. 그러나 그것이 결코 외롭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그리 생각한다. 스무 살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이 변해버렸다. 이제는 외로움을 알아버렸다고. 그렇기에 여름의 정오는 눈이 따가울 만큼 뜨겁지만 그만큼 빨리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무엇을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이번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좋았다. 각 인물들에 대해 오래 고민했다. 결국 문학은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여러 사람이 밀집하게 연결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각각의 독립된 개체가 스치고 만나게 될 때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것. 마치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될지도 모르고 느슨하게 연결될지도 모르며 종국에 끊어질지도 모른다. 그런 관계 속에서 삶은 외로울 것이고 외롭지 않을 것이다. 문학이 말하는 "삶"은 명확하지 않지만,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읽어"가면서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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