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 - 신경림 - 다니카와 슌타로 대시집(對詩集)
신경림.다니카와 슌타로 지음, 요시카와 나기 옮김 / 예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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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란 책을 알게 된 것은 신경림 시인의 이름도 다니카와 슌타로 시인의 이름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아쉽고 운명이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를 알기 전 다니카와 슌타로 시인의 <20억 광년의 고독>이란 시를 읽었다. 바로 직전이었다. 트위터를 훑어보던 중 먼저 <20억 광년의 고독>이 먼저 보였고 그 바로 위에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란 책을 보았다.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도 어느 누군가가 쓴 시라고 생각해서 검색창에 검색어를 입력했다. 그러다 보니 위즈덤 하우스에서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의 책 소개를 하는 페이지와 함께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글을 발견했다.


대시對詩,

"둘이서 짓는 시"를 일본에서는 "대시"라고 부른댔다. 그것이 무척 색다르고 호기심을 자아냈다. 마치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정자 안에 둘러 앉아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고 하는 풍경이 떠올랐다. 혹은 서로 시를 적은 걸 서편으로 보내 주고받은 장면도. 사극에서 자주 보았던 것만 같은 그런 풍경이. 스쳐지나가는 풍경과 함께 한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신경림 시인과 일본에서 빼놀을 수 없는 다니카와 슌타로 시인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시를 주고받았다니 꼭 읽고 싶단 생각을 했다.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를 지닌 두 시인이 품은 생각도 궁금했다. 책이 왔을 때 대시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탄과 함께 두 시인이 서로 쓴 시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가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한 대목에서 숨이 덜컥 멈추었다.


4월이다. 잊지 못할 시간이 오고 있다. 넘치는 바닷물을 볼 적이면 저절로 떠오르는 풍경. 우리는 그날 노란 리본을 매달았다. 결코 잊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시간이 흐르면 인간의 기억은 흘러가는 것인지 어느 순간 잊었던 것도 같다. 잊지 말자 스스로 다짐했는데. 이 시를 읽으면서 그날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았고 1년이 흘렀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 내가 느끼는 것을 두 시인도 절감하겠구나 싶었다.


남쪽 바다에서 들려오는 비통한 소식

몇 백 명 아이들이 깊은 물 속

배에 갇혀 나오지 못한다는

온 나라가 눈물과 분노로 범벅이 되어 있는데도 나는

고작 떨어져 깔린 꽃잎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_신경림


숨 쉴 식(息) 자는 스스로 자(自)와 마음 심(心) 자

일본어 '이키(息, 숨)'는 '이키루(生きる, 살다)'와 같은 음

소리 내지 못하는 ㄴ말하지 못하는 숨이 막히는 괴로움을

상상력으로조차 나누지 가질 수 없는 괴로움

시 쓸 여지도 없다

_다니카와 슌타로


밤새껏 물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눈을 뜨니 솜이불이 가시덤불처럼 따갑다

아랑곳없이 아침햇살이 눈부신 앞뜰에는

목련이 지고 작약이 피고

이렇게 봄은 가고 있는데

_신경림


신문에서 눈을 떼고 텔레비전 소리도 끄고

뜰에 있는 단풍나무의 어린잎을 바라봅니다

사람의 손이 닿지 못하는 것을 외경(畏敬)하는 것과

사람의 손이 닿은 것을 무서워하는 것

외경심을 잃어버릴 때 공포가 생긴다

_다니카와 슌타로



이렇게 이어지는 대시가 얼마나 두 시인이 고통스러워했는지 알게 해준다. 가끔 시인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최근에, 어느 시인의 시가 내 마음을 울렸는데 신경림 시인과 다니카와 슌타로 시인의 시를 읽으니 다시금 그 시를 읽을 때의 기분을 느꼈다. 사람이 시처럼 살 수만 있다면 그 차디찬 바다에 가라앉은 아이들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시처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 풍경을 보고 있는 시인이 적은 시를 읽는다지만 그것을 모두 내 안에 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결코 닿을 수 없는 풍경 같다. 다만 언뜻언뜻 그 풍경이 보일 때면 감히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모두 시처럼 살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세상이 오지 않을까 하는 헛된 바람을.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가장 아름다운 것 같은데, 그것을 시인들은 늘 말하는 것 같은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시는 언제나 고독한 것이라고. 마치 다니카와 슌타로 시인이 적은 <20억 광년의 고독>처럼 말이다.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 그래서 모두가 서로를 찾는다/우주는 조금씩 팽창하고 있다/그래서 모두가 불안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 그 까마득한 고독 속에서 인간은 서로를 보지 못해 상처를 주고 있다. 조금만 가까웠다면 우리가 조금 더 많이 팽창해서 서로에게 닿았다면 그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시 다음에는, 신경림 시인과 다니카와 슌타로가 서로 꼽은 대표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시도, 참 좋다. 시 다음에 두 시인이 도쿄와 파주에서 나눈 대담이 있는데 두 시인이 모두 서로 닮았다고 하는 부분이 있다. 서로 꼽은 시를 보니 많이 닮은 것 같았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것도 그렇고, 서로 전쟁을 겪은 것도 그렇고, 함께 늙어가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같은 풍경을 본 게 있던 탓에 둘은 닮은 것일까. 잘 모르겠다. 신경림 시인이 시는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생활 속"에서 시의 소재를 찾는다고 했다. 그런 생활을 면밀히 바라본 시인들이라면 같은 풍경을 바라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특히 포엠과 포에지에 대해 말한 부분은 인상이 깊었다. 포에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향유하는데 포엠 그 자체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해서 조금 마음이 아팠다. 내가 그래도 두 시인들의 얼굴을 볼 낯이 없는 게, 나도 지금보다 어릴 때엔 시가 어렵다는 이유로 멀리 했기 때문이다. 어렵단 이유로, 더 안 보게 되었던 것 같다. 학교 다닐 때엔 시가 까다롭고 시 안에 담긴 의미를 모두 암기해야 했던 탓에 멀어졌지만 나이가 들어선 어렵단 이유로 안 보았다. 봐서 뭐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고. 그렇지만 조금 더 나이가 들어 시를 하나씩 느리게 읽다 보니 시가 얼마나 삶에 밀접해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알리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시인이 알려준 것들, 가령 꽃 한 송이를 보아도 시를 읽었을 때와 시를 읽기 전이 달랐다. 내가 그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된 것도 시를 읽은 덕분이다. 나는 이렇게 시인에게 빚을 지고 있어서,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 서평단이 되었을 때 조금 많이 부끄러웠다.


대담을 지나면 두 시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신경림 시인의 어린 시절은 생소했다. 일제 시대를 직접 겪은 분의 일화를 그분의 글로 보니 낯설면서도 무언가 따끔따끔했다. 우리나라를 우리나라라 알지 못했구나, 왕은 순종이 아니라 천황으로 알고 있었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고 나니 일본이 패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나도, 한국의 역사가 아니라 일본의 역사를 우리나라 역사로 오해하고 있겠구나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광복을 하고서 바로 먼저 배웠다는 것이 한글이었다는 것도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니카와 슌타로 시인의 이야기는 꽤 귀엽단 생각을 했다. 특히 아버지가 아들을 보면서 적은 에세이는 뭉클했다. 마지막에 시인이 된 계기에 대해서는 숙연해졌다.


아, 두 시인을 아주 가까운 곳에서 본 듯한 인상을 준 책이다.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란 제목에서처럼, 두 시인이 별이 되어 내 안에 스며들었다. 아름답고 애틋하고 뭉클하고 가슴 떨리고, 도저히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두 시인의 풍경이 아주 잠깐 펼쳐졌다가 사라진 기분이다. 그것을 아쉽다고는 하지 않으련다. 나는 언제라도 두 시인이 쓴 시에서 다시 그 풍경을 볼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으니까. 아직 시인의 세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들어서지도 못했지만 읽다 보면 조금씩 나에게도 펼쳐지리라 믿는다. 밤하늘의 별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환해지듯, 시인의 세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더 환해지란 것을 믿는다.


좋은 시간이었다. 두 시인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위즈덤하우스로부터 제공을 받아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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