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시장
김성중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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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어느 문 앞에 서 있다. 당신은 그 문을 열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 그 문을 열면 분명 지금껏 보지 못했을 세상이 펼쳐질 테지만 당신에게 혹독한 시련을 안겨줄 수 있다. 만약 그 문을 열지 않는다면 당신은 지금처럼 편안한 생활에 안주하며 살아갈 수 있다.


때론 환상이란 지독한 독처럼 번져 삶에 치명적이 될 수가 있다. 하지만 환상이 없다면 삶은 퍽퍽할 것이다. 잘 굴러가던 톱니바퀴가 어느 날 멈춰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환상은 윤활유처럼 퍽퍽한 삶을 부드럽게 이어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당신은 망설일 수밖에 없다. 한 방울의 독이란 때론 모든 것을 앗아갈 만큼 잔혹하기도 하니까.


자, 이제 당신은 선택을 할 때가 왔다. 그 문을 열 것인가, 아니면 그만둘 것인가. 이런,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보지 마라. 나는 그대에게 정보를 줄 수 있지만 그대 대신 들어갈 수는 없다. 좋아, 이렇게 하자. 지금부터 내가 그 문 너머에 보았던 것을 당신에게 말해주겠다.


그 문 너머에 존재하는 세상은 대략 이렇다.

기억을 팔아 물고기의 비늘을 구입하여 물건을 살 수 있는 <국경시장>, 짧은 생이지만 천재가 될 수 있게 해주는 <쿠문>, 커다란 곰이 되어버릴 수 있는 공간 <관념 잼>, 서로 반대를 향해 달려가던 두 소녀 <에바와 아그네스>. 인간의 언어를 알게 된 킹코브라 여왕, <동족>, 불멸이 되기 위해 필멸로 들어선 <필멸>, 흐려지는 꿈처럼 사라져버린 <나무 힘줄 피아노>, 거짓말에 관한 <한 방울의 죄>.


당신의 얼굴이 환해진다. 두려움이 사그러진 듯 떨림도 멎었다. 하지만 당신은 선뜻 문을 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첫페이지를 넘기면 드넓은 세상이 펼쳐지는데 당신은 그것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두려움은 언제나 산재한다. 그렇다고 그 두려움에 먹히지 마라. 환상이란 당신에게 슬픔과 분노, 좌절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찰나의 달콤함을 누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문지기인 내가 당신의 두려움을 없애줄 수는 없다.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듯 문을 여는 것도 오로지 당신의 몫이다. 하지만 걱정 마라. 그 문을 연다고, 그 페이지를 펼친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일은 없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단단하게 받치는 땅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어째서 아냐고? 환상이란 모르는 것보단 누릴 때 더 좋다는 것을 알거든. 치명적이기도 하지만 그 치명적임을 알기에 현실에 더 안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당신은 맨 처음 문을 열고서 어느 시장에 들어설지도 모른다. 그곳은 열다섯 살 미만이 아닌 사람은 잡을 수 없는 물고기가 헤엄치고 그 물고기의 비늘로만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 물고기의 비늘은 당신 자신의 기억으로 사야만 한다. 그것이 그곳의 룰이다. 어떤 물건이든 그곳에서는 다 팔지만 자신의 기억을 팔아야 한다. 당신은 머뭇거릴 수도 있다. 물고기의 비늘을 위해 물건을 구입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당신이 가진 소중한 기억을 모두 팔아버릴 지도 모르지. 그런 여인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 남자를 나는 알고 있다. 기억을 모두 팔아서 그곳에 안주해버린 한 여인을. 떠돌아다니는 것이 싫어서 기억을 모두 팔아버렸다지. 처음엔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기억을 팔면서 물고기의 비늘을 구입했는데 어느 순간 기억에서 소중했던 기억마저 모두 팔더니 기억 모두가 사라진 빈 껍데기인 여인이 되고 말았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기억을 모두 팔아버린 사람들만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기억을 모두 팔지 못한 한 남자는, 즉, 당신과 같은 사람은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기억을 모두 팔아서까지 한 곳에 정착하고 싶은가.


그 다음에 볼 세상은, 예술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겐 희소식일지도 모르겠다. 쿠문. 천재가 될 수 있는 힘. 쿠문이 되면 예술에 눈을 뜨고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천재적인 감각으로 온갖 예술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쿠문의 치명적인 단점은 삶이 짧다는 것이다. 천재란 자고로 오래 살지 못하는 법이니까. 무엇보다도 천재의 삶이기에 그런 아름답고 멋지고 환상적인 예술이 탄생되는 건지도 모른다. 당신이 만약 예술을 꿈꾼다면 당신은 짧은 인생이라도 그것을 택할 것인가. 쿠문은 그것을 늘 묻는다. 끊임없이 묻는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당신의 예술일까? 당신의 노력으로 일군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저 다른 힘에 취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만든 게 아닐까. 그것에 오리지널티가 있을까. 당신이 머뭇거리면 머뭇거릴수록 삶은 빠져나갈 수 없는 진창이 되어가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선택하라, 빨리 선택하라.


조금은 여유롭게 가도록 하자. 에바와 아그네스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두 소녀는 같은 고아원에서 자랐는데 어느 순간 서로의 삶이 정반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델이었던 에바는 교통사고 이후로 다리를 못 쓰게 되면서 몸만 큰 장애인이 되었고 사진가였던 아그네스는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 뛰어갔다가 한 소녀를 만난 후 전쟁 사진을 찍게 되었다. 사람의 관심을 받았던 에바와 사람의 관심에서 멀어지려고 했던 아그네스. 그 두 사람이 함께 만났을 때 서로 갈라졌던 삶은 합쳐졌던가. 거울은 당신의 얼굴을 비추지만 거울 너머에 있는 건 당신이 아닐 수도 있다. 에바와 아그네스는 그걸 말해준 게 아닐까.


아참, 당신은 문 너머 세상을 가다가 곰돌이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참 이상한 곳이다. 물건들이 사람처럼 막 움직이기도 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도 하면서 어느 순간 당신이 커다란 곰 인형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영혼이 어느 한 곳에 갇혀진다면 그것은 괴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영혼이 어느 한 곳에 붙박힌다는 게 일종의 평안이 될지도 모른다. 더 이상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괴로워하지도 않아도 되니까. 삶은 끝없는 불안과 근심을 헤치고 나아가는 행로다. 그 불안을 넘고 근심을 타고 흘러갈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모든 사람이 그것을 뛰어넘는 건 아니니까. 당신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잘 되길 바라지만 잘 될 수 있다고 믿지만 어느 순간 유리로 된 곰에 갇히게 되는 가엾으면서도 행복한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이제 조금 슬픈 이야길 해야겠다. 어느 한 킹코브라의 이야기다. 그녀는 여왕이라 불리면서 킹코브라로서의 삶을 영위했다. 하지만 어느 날 인간에게 잡히더니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오, 얼마나 불행한 삶의 시작인지. 인간의 말을 이해하고 인간의 언어를 읽게 되고 마치 자신이 인간이 된 것처럼 착각하게 된 삶. 하지만 그녀는 현명하다. 그녀 자신이 킹코브라라는 것을 안다. 킹코브라로서의 삶과 인간의 삶. 서로 다른 삶이 자기와 함께 있으니 괴로운 것이다.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삶과 자신이 꿈꾸는 삶이 다르기에 인간은 괴롭게 사는 것이다. 삶에 안주하고 삶 그 자체에 만족한다면 얼마나 행복한 삶인가. 그렇지만 왜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나.


불멸도 마찬가지도. 오직 자신 혼자 남기 위해 동족을 죽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오만함이야 인간이 버려야 할 덕목이 아닌가. 제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히는 삶이 불멸이라 할 수 있는가. 어쩌면 그래서 "필멸"이 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반드시 멸망함.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정의되어 있는 단어지. 반드시 멸망한다. 불멸을 꿈꾸면 반드시 멸망한다. 모두 불멸을 꿈꾸었기에 서로를 물어뜯으며 함께 멸망하는 것이다.


이런 게 싫다면 꿈꾸는 것은 어떤가. 그 남자처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르는 한 남자가 한 여인을 만나면서 도망치듯 훌쩍 여행을 떠난다. 그 여인이 자살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여행을 떠나지 않았을까. 어쨌든 여행을 전전하면서 머문 곳에서 그는 다시 한 여인을 만난다. 서로의 삶에 상처를 주면서도 헤어지지 못했다. 그 여인이 전에 만난 여인처럼 스스로를 해하려고 하자 그는 그녀를 해치지 못하도록 원인을 제거한다. 나무의 힘줄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는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은 그것을 알겠는가?



나는 당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하나 더 있지만 그것은 당신의 온전한 몫으로 남겨두겠다. 한 방울의 환상이 한 방울의 독이 될지는 당신에게 달렸다. 자, 당신은 이제 선택할 때다. 만약 당신에게 위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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