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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배의 노래
김채원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월
평점 :
어릴 때부터 나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길어봤자 2~3년이 고작이었다. 까마득하게 어린 나이에는 몰랐다. 사람이 드나들고 떠나는 것은 어린 나에게 알아야 할 게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친구가 있다. 내 소꿉친구라고 할 수 있는, 어릴 때 만났던 친구. 그 친구와는 초등학교 1학년이 지나서 헤어졌다. 어렴풋이 나는 그 마지막이 기억난다. 단촐한 짐을 트럭에 탄 우리 가족이 친구네를 지나칠 때 친구가 손을 흔들었다. 잘 가라고 했는지, 아니면 편지할게, 라고 했는지 그것은 난 모른다. 다만 그 이후 나는 그 친구와 오래도록 편지를 주고받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한 곳에 정착을 하면서 그 편지는 끊겼다. 나에게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생겼다는 것은 그 정착 이후에나 가능했다.
아버지가 하는 일이 어째서 그렇게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던 것인지 어린 나는 몰랐다. 그저 아버지의 말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곳에 정착하고서는 오히려 그것이 더 어색했다. 언제나 어려웠던 것은 낯선 곳에서 있어야 하는 내가 아니라 한 곳에 머물러야 했던 나였다. 친구를 사귀는 것도 그렇게 힘겨웠다. 언제나 내가 먼저 말을 걸기보다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어온 것도 떠나야 함과 머물러야 함을 혼동했던 탓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친구를 사귄다면, 내가 떠날 때 그 친구는 다시 손을 흔들면서 나를 떠나보내겠지. 그런 두려움이 나를 타인과의 관계를 쌓게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한곳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하나둘씩 변했다. 말 한 마디 못 붙이던 내가, 먼저 말을 꺼내게 되고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이게 되었으며 친구와 사소한 일로 다투기도 했다. 누군가의 애정을 받아들이고 주는 것은 오로지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공간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자라 나는 대학 일로 집을 떠나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한 곳에 지내던 내가 다시 낯선 곳으로 가야 했을 때 다시 두려움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지 나는 몰랐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서 4년간 대학생활을 해야 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었는지, 다시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상황에서 오는 두려움이었는지. 그러나 어릴 때와 다르게 친구들과 말을 트는 것이 수월했고 단짝이랄 부를 수 있던 동기도 생겼다. 나는 어릴 때와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그 어린 시절의 나약한 모습이 튀어나왔다.
어느 것이 나였는지, 나는 모른다. 그것은 마치, <쪽배의 노래>에서 있던 단편, "등뒤의 세상"과도 같다. 아이를 잃은, 혹은 떠나 보낸 한 여인. 그녀는 가끔 등뒤에서 무언가 자신을 낚아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와 상황이 달랐지만 가끔 그런 것을 느낀다. 나는 이 현실에 그대로 있는데 무언가가 나를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그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는 모른다. 다만 그것은 나와 현실을 분리시켰다. 내가 아닌 것처럼. 그녀도 그런 것을 느꼈던 것일까. 그래서 가끔 그렇게 자기 자신이 사라진다고 느꼈던 것일까.
이 책은 유난히 느리게 읽혔다. 한 줄 한 줄 읽는 것이 버거웠다. 어떤 문장이든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서산 너머에는"이란 단편에서는 두려움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두려움은 잘 녹여야 한다는 그 말이 어딘지 모르게 어떤 힘을 지닌 것 같았다. 그 문장만이 오로지 나를 구원해줄 것처럼 느껴져 그것을 바짝 잡았다. 나도 언제나 두려웠다. 누군가가 떠나가는 것이, 내가 누군가를 떠나가는 것이, 이 삶이, 이 모든 삶이 나에게는 무거워서 두려웠다.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야만 보이는 세상에서, 나는 내려가기를 주저했다. "서산 너머에는"에서, 미국에 있던 사촌은 테러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세계를 급변하게 하는 테러는 비단 사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을까. 많은 사람이 많은 것을 잃었다. 폭발을 일으키며 무너지는 그 철옹성 같은 두 개의 빌딩이 무너지고 사람이 죽고, 불길이 치솟았던 테러 현장에서, 그들은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인간의 증오가 얼마나 큰 일을 일으키는지를 목도했다. 수많은 죽음이 그렇게 바스러질 때 느껴지는 두려움, 상실, 어쩌면 그보다 더 깊은 감정. 그리움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들. 잃기 전에 찾아야 한다. 두려움을 물리쳐서 그것을 찾아야 한다.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더 가까이"는 한 여인을 두고 싸운 두 남자를 다룬 이야기다. 젊은 시절, 대학을 다닐 때 그토록 반짝이던 청춘들. 그것을 그리워하는 한 여인.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록 화해하지 못하는 두 남자. 어딘지 희화적이면서도 슬픔을 드러낸 글이었다. 자유, 그것은 무엇일까. 자유로울 것만 같았던 그 젊은 날에도 종례가 느낀 불안이 있다. 불안은 어디에나 있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에도, 좀 더 자란 시절에도 어른이 된 후에도, 늙어서도. 그 불안만이 우리 삶을 맴돌면서 숨결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 나도 지독히 큰 불안을 느낀다. 어떻게 해야 불안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자기 '방'이 튀어나온다. 방, 그 방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한 사람이 소유하는 공간이면서도 소유하지 못하는 공간. 그 사람의 생활이 모두 녹아있는 어느 방. 한 개인이라고 명명해도 될 지극히 사적인 곳.
"물의 희롱-무와의 입맞춤"은 한 여인의 사랑을 이야기 한다. 편지식으로 시작하다가 갑자기 그 여인이 남긴 노트가 공개되면서 사적인 영역이 드러난다. 한 남자를 사랑하는 한 여인. 이 글에는 유난히 늙어가는 여인의 모습이 많이 비추어졌다. 그 여인들이 바라보는 세상, 테러, 사람들. 어려운 영역도 분명 존재했지만 대체로는 물 흐르듯 흘러갔다. 어느 글이든 읽히는 것은 수월했다. 다만 흘러갈 때마다 무언갈 붙잡고 싶어서 나는 오래 멈춰야만 했다. 한 번 숨을 쉴 때 신중하게 숨을 쉬듯이. 아마 그런 것으로 인해 더 많은 것을 고민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아무것도 고민하지 못했다. 그저 녹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책의 내용을, 바스락거리면서.
"소묘 두 점"은 한 남자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과거로 돌아간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누구의 과거였을까. 이렇듯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이야기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내가 있지도 않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살아있다고 느끼는 착각을 주는 글이었다.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는가"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 담긴 두려움을 담아낸 것 같았다. 어느 글에서나 불안과 두려움이 깔려 있다. 그리고 그 불안과 두려움을 모두 떠안듯, "쪽배의 노래"가 있었다. 집이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흐름에도 흘러가지 않기 위해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쪽배가 된 것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집이,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있기를 소망했다. 여인이 회상하는 어린 시절의 집, 어머니, 그리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오빠. 그 모든 것을 떠안으며 존재했던 집의 모습. 누군가에게 집이 그런 식으로 회상할 수 있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다. 나에게는 그런 집이 없었다. 아버지의 일은 어딘가를 떠돌았지만 어느 곳에 정착하지도 못했다. 잠깐 머무는 집이 아버지 명의가 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다시 떠나야 한다는 불안은 설렘을 잠재웠다. 난 언제나 새로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상황이 지독히도 무서웠다. 무섭고도 끔찍했다. "안녕"이라는 말 한 마디를 꺼내는 것이 왜 그렇게 무서웠나 싶을 정도다. "잘 부탁해"란 말도 나에겐 버거웠다. 언제나 그런 낯선 공간에서 "집"이란 것을 온전히 느끼질 못했다.
대학을 지나고, 아버지가 일을 은퇴하여 온전히 "우리 집"이란 것이 생겼을 때엔 그마저도 두려웠던 것 같다. "쪽배의 노래"에서처럼, 집이란 모든 것을 포근히 품어주는 존재여야 할 텐데 나에겐 그러질 않았다. 나만의 공간이어야 하는 '방'도 나 혼자 쓰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사적으로도 어느 누군가에게 보호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딘가 자꾸 내 안에 결핍이 생겨나 모든 것을 앗아가는 느낌.
그래서 이 책은 나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착각에 빠진 것일까. 이 책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내 자화상처럼 느껴졌다. 내 안에 그리도 많은 내가 있었나 싶으면서도 문장 하나하나에 숨겨진 위안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이 여인들은 내 자화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자화상이기도 할 테니까. 어쩌면 이 글을 쓰신 김채원 작가님의 자화상일 수도. 아니면, "등뒤의 세상"에서 휘둘리고 있는 뭇 여인들의 자화상일지도.
수많은 얼굴들이 지나간다.
흘러간다.
그중 내 얼굴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이 불안을, 이 두려움을 녹일 수 있을까.
다시 불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