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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계로 풀어내는 국제정치 ㅣ SERI 연구에세이 28
민병원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5년 9월
평점 :
내가 이 책을 손에 들게 된 이유는 최근 사회과학 분야에서 각광을 받으며 떠오르는 '복잡계(또는 네트워크) 이론'에 입문하기 위해서다 (즉, 나는 복잡계 이론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다). 그런 까닭에 이 리뷰의 목적은 "이 책이 복잡계 이론을 잘 설명했다, 아니다"에 있지 않다. 또한 이 책에서 복잡계 이론을 무엇이라고 정의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한다. 다만,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이 책의 기획이 본문에서 잘 드러났는지, 또는 복잡계를 설명하기 위해 풀이한 기타의 제반 이론들이 설득력이 있는 지에 촛점을 두려한다.
먼저, 이 책의 장점을 보자면 이렇다.
첫째, 책의 분량이 깜찍할 만큼 얇다. 알라딘 소개에는 160쪽으로 나와있으나, '책을 내며'와 '차례'를 제외하면 143쪽 정도 된다. 얇은 것 뿐만 아니라, 설명 방식도 매우 쉽다. 나는 복잡계 이론에 무지하지만, 불과 두 시간 사이에 다 읽어 버렸다(다만, 국제정치이론에 약간의 사전 지식이 있어서 빨리 읽는데 다소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없는 입문자들에게는 적당한 분량에 적절한 서술 방식이다(저자도 이 책의 주 독자가 복잡계 이론 입문자임을 서문에서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내용의 깊이도 그다지 깊지 않아 어려움 없이 술술 읽힌다.
둘째, 각 장 말미에 참고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다. 자세한 목록은 아니지만, 입문자에게는 이 정도의 조언도 큰 도움이 된다(물론, 복잡계 이론을 어느 정도 아는 이라면, 이 참고 문헌이 다소 유치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은 아쉽게도 여기까지다.
다소 비판적인 입장이 될 지도 모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생긴 의문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책 구성이 심각할 정도로 불균형하다. 전체 160쪽 중에 복잡계 이론에 앞서, 다른 예비 이론 설명과 비판 (저자가 주요 비판 타겟으로 삼는 합리적 선택 이론을 비롯해)에 70쪽을 할애했다. 그나마 복잡계 이론의 최근 접근 방식이랄 수 있는 '패턴 찾기' 부분은 마지막 3부의 20쪽 정도에 불과하다. 뒷 부분은 말하다 말고 서둘러 끝내버린 것 처럼 보인다. 앞 부분에서 기존 이론을 비판하는데 호흡을 길게 들이마신 독자는 막상 본문에서는 허무함을 느끼기 십상이다.
둘째, 가장 거슬렸던 부분은 용어의 선택이다. 특히 저자는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매우!' 남발하고 있다. 내가 알기로 패러다임은 '새로운 이론의 축적되어 그 사회에서 받아 들여져 기존의 이론을 대체하고 일반화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한다(유감스럽게도 쿤 스스로도 패러다임이 무엇인지 정확히 꼬집어 말하지 않았다). 예를들어 뉴턴 식 결정론적 사고가 아인쉬타인의 상대주의로 일대 전환이 있음을 사회가 받아들 일 때,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다고 말한다. 결국, 구체적인 어떤 대상-이론이든 모델이든-을 두고 '이것이 패러다임이다' 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저자는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를 이론, 가설, 접근법, ...주의, 모델, 세계관 등의 말과 마구 혼동하여 쓰고 있다. 실례로 저자는 '복잡계','복잡계 이론', '복잡계 패러다임'(2쪽) '복잡계 이론의 패러다임(18쪽) 등으로 고쳐 부르며 일관성 없이 쓰고 있다. 복잡계 뿐 아니라, 다른 용어들 이를테면, 냉전식 패러다임, 과학 패러다임, 결정주의적 패러다임, 진화론적 패러다임 등등 ... 패러다임이라는 말이 과연 붙을 만한 곳인지 의심스러운 곳에도 갖다 붙인다. 심지어 저자는 남의 이론도 멋대로 패러다임이라고 고쳐 부른다. 예를들면, 이 책에서 '페르 바크의 모래탑 패러다임'(22쪽)이라는 말을 운운하고 있는데, 페르 바크는 자신의 주장을 '패러다임'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다만, '모래탑 모델'로 표현했을 뿐이다(정확히는 Bak-Tang- Wiesenfeld sandpile model). 또한 이 책의 저자는 자기가 비판하는 '합리적 선택 이론'도 어떤 부분에서는 '합리적 선택 패러다임'이라고 자기 멋대로 바꿔 부른다. 이즈음에서는 실소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첫번째 별을 뺀 이유다).
사진 출처: Wikipedia
(덴마크계 과학자 Per Bak. 2002년, 55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죽었다)
세째, 저자는 복잡계 이론가의 입장에서 합리적 선택이론, 특히 브르스 부에노 드 메스퀴타의 '기대 효용 이론'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는데, 이것이 적절한 것인지 의문이다. 말하자면, 메스퀴타의 기대 효용 이론은 저자가 비판하고자 하는 메타 이론 수준 - 저자는 복잡계 이론을 메타 이론으로 보고 있다(35쪽 각주)- 이 아니다. 즉, 복잡계 이론은 현실주의나 구조적 현실주의, 신자유주의 등의 메타 이론을 같은 수준에서 놓고 논쟁하고 비판해야 한다. 그런데, 메스퀴타의 이론은 메타 이론이 아닌 중범위 이론(또는 방법론)에 불과하다. 구체적으로 정책 수행 단계에서 적용되는 '모델'일 뿐이지 거시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아니라는 말이다. 때문에 분석의 레벨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다른 입장을 비판하는 것은 오류다 (두번째 별을 뺀 이유다). 책 내용 중에는 메타이론 수준에서 현실주의 등을 공격하는 (37-70쪽) 부분도 있는데, 그 비판이 복잡계의 논리에 따른 공격이 아니라 '구성주의'입장에서 하는 공격에 그치고 있다.
네째, 복잡계 이론이 과학(물리학, 화학) 등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왜 사회과학, 특히 국제정치학에 적용 가능한지 논리적 연결 고리가 없다. 자연과학을 사회과학, 특히 인간의 행태에 적용하는 데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가딱 잘못하면 자연과학자들로부터 비웃음을 살수가 있다).
소칼과 브리크몽의 '지적사기'
경제학에서 수학 모델을 쓰는 이유는 그것이 자연어로 표현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면서도 또한 엄밀하기 때문이다. 물론, 한계도 있어 수학 기법 중 일부만을 사용한다. 그 만큼 적용이 까다롭다(메스퀴타의 이론이 다른 학자들로부터 비판받는 것도 그런 부분에서만 정당하다). 그런데 저자는 뉴턴 식 결정주의(과학주의)는 크게 비판하면서, 정작 자연과학에 바탕을 둔 복잡계 이론이 왜 사회과학에 접목될 수 있는 지 설명이 없다. 다시말해 데이터(통계나 확률을 통한)를 이용한 '자연과학의 성과를 사회현상에 적용시키자!'는 계몽적인 주장에 그치고 있다. 결국 방법론은 과학적이나, 적용방식은 직관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다섯째, 새 이론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론의 정당성을 과거의 어느 이름난 학자에게서 찾는데, 이 책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복잡계 이론의 원류로 허버트 사이몬, 토마스 셸링, 케네스 애로우, 로버트 액셀로드 그리고 제임스 로즈노 등을 언급하는데 이것이 과연 적절한지 의문이다.
애로우

사이먼

셸링
액셀로드
사이먼은 신제도주의자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인물이고, 셸링, 애로우, 액셀로드 등은 게임이론 및 합리적 선택이론 등에서 자주 언급되는 학자들이다. 오히려, 굳이 이들을 하나로 묶는 범주를 들라면(로즈노를 제외하고), '공공 선택 이론'에 가깝다. 그런데 마치 이들이 복잡계 이론의 원류이고 이를 직접 지지한 것처럼 소개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아예 원류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찾는 것은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뒷부분에 색인이 없다는 것이다. 소설 책이 아닌 다음에야, 사회과학 서적이라면 최소한의 참고 문헌과 색인은 있어야 한다(요즘에는 소설에도 참고 문헌이 자주 등장한다). 이 책의 경우, 참고 문헌이 각 장 말미에 조금이나마 소개되어(사실 참고문헌이라기 보다는 '더 읽을 거리' 정도 된다)있어 그다지 문제가 아니지만, 색인은 출판사 측의 성의 문제다. 아쉬운 부분이다(세번째 별을 뺀 이유이다).
정리하자면, 이 책은 복잡계(국제정치학에 적용된)에 대한 어떤 답을 제시해 주지는 않는다 (알라딘 책소개에서는 "복잡계이론의 개념과 틀을 이용하여 현재 국제 정치를 설명한다"고 하는데,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 정도로 구체적이지 않다.) 기존 이론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작 복잡계 이론은 맛보기 정도만 언급한다. 따라서, 이 책은 독자에게 도대체 "복잡계가 뭐냐?"하는 더 강력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강력한 장점일 것이다. 그것이 좋은 의미든 아니든 간에.
* 사족 하나: 저자의 이력이나 언급된 레퍼런스를 통해 알수 있는 것은 이 책이 구성주의 시각(특히 오하이오 대학)을 모태로 했다는 것이다.특히 환원주의와 구조주의는 비난하면서, 구성주의에 호의를 보이는 시선에서(64쪽)에서 바로 알 수가 있다.
출처: 오하이오대 홈페이지
(Alexander Wendt . Robert Keohane과 더불어 미국 내 국제정치학계 영향력 1ㅡ2위를 다투는 인물이다)
더 나아가 저자가 연구했다는 Mershon Center(오하이오 대학에 있다)는 구성주의자 알렉산더 웬트가 교수로 있는 곳이고, 저자가 과학주의를 비난하며 언급한 존 루이스 개디스는 한때 오하이오 대학(캠퍼스 위치는 다르지만)에 몸담았던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 책에서 구성주의와 복잡계의 관련성을 구체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는 것은 아쉽다(구성주의에 관심있는 독자들에게는 특히 아쉬운 부분일 것이다).
* 사족 둘: 요즘 사회과학 제분야에서 분석 기법의 추세를 꼽으라면, 통계, 확률, 진화(evoution) 그리고 학습일 것이다. 복잡계 뿐 아니라, 다른 이론에서 파생된 접근법들도 그렇다. 이제는 확실성의 추구보다는 확률로 어림 짐작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예측이 빗나갔을 때 학자들이 피해나갈 구멍이 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