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문명을 지배하다 경문수학산책 29
모리스 클라인 지음, 박영훈 옮김 / 경문사(경문북스)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은 "수학이 서구 문명에서 문화적으로 중요한 힘이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저술되었고 한다. 동시에 저자는 이 책이 "역사적 접근을 따르기는 하지만  수학의 역사 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전체 서술 구조는 분명 연대기적 접근을 따르고 있고, 또한 '서구 문명을 수학이라는 렌즈로 투영'하고 있다. 

이 책이 다루는 '문명'은 전적으로 '서양'의 것이다. 첫 도입부에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수학이 잠시 등장하나 저자는 '종교적 신비주의' 또는 '경험'에 불과하다는 말로 치부해 버린다(그런 면에서 그가 서양 문명만을 다룬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결국, 저자가 다루고 있는 수학+문명은 오직 그리스와 유럽의 것이다. 때문에 아랍이나 인도, 중국에서의 수학+문명은 전혀 소개 되지 않았다. (저자도 이런 점을 감안한 듯  원저의 제목을 Mathematics in Western Culture라고 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출판사는 Western Culture를 "문명"으로 바꿔 버렸다. 우리 스스로가 "문명" = "서양 문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지 되돌아 볼 일이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따분하고 지루함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첫째,  서문에서 집필 목적을 뚜렷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스스로 이것을 종종 잊고 있는 듯 하다. 역사 책으로 보기에는 사료가 너무 부실하고, 수학 교양서로 보기에는 등장하는 수학(물리) 공식에 대한 소개가 불친절하고 어렵다(강약 조절이 잘 안되어 있다). 또한 자기 마음의 감상을 담은 수필로 보기에는 독자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는다(심지어 책의 마지막에 있는 '옮긴이의 글' 마저 그렇다. 어찌나 멋을 부려 썼는지, 마치 신춘 문예 당선 소감을 보는 듯하다. 궁금한 이는 직접 확인해 보길 바란다). 또한 만연체 문장, 중언부언하는 설명도 감당하기 어렵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저자의 설명이 다소 간결해지고 구체화 되어간다는 점이다.    

둘째, 인과적 논증, 구체적 실례 보다는 저자의 수학사에 대한 감상, 단정과 주장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예를들면,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여류 수학자 히파시아(Hypatia)의 죽음에 대한 설명이 그렇다. 저자는 그녀의 죽음을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종말을 보여준다며 불과 세 문장으로 압축해 버렸다. 하지만, 히파시아에 대한 이야기 거리는 그보다 훨씬 많다.(그 구체적 예를 보기 원하는 사람은 사이먼 싱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도움이 될 것이다). 극적인 부분은 생략해 버렸고, 논증하고 설명해야 할 부분은 자기 감상문으로 채워 넣었다.  (첫째와 둘째 이유를 합해 별을 하나 뺏다)     

셋째, 수학의 대상 범위(그의 표현으로 보자면 '문명')을 지나치게 넓혀 놓았다. 고대 이집트 건축물부터, 물리, 회화, 음악, 경제, 정치 등 거의 모든 사회 영역으로 서술의 범위를 확장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수학 그 자체보다는 각종 물리 법칙이나 회화에 대한 소개가 훨씬 많이 등장한다. 문제는 그런 소개를 잔뜩 늘어 놓고는 그것을 뒷 수습하지 않았는다는 점이다. 아마도 저자는 '문명은 곧 수학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의 주장은 수학이 '문명'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바탕이 된 '기술'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문명과 기술을 혼동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논리로 보자면 뉴턴의 '만유 인력'은 '문명'이고, 이것의 발견에 수학이 공헌했다는 것인데, 만유 인력을 문명이라고 보는 것은 다소 엉뚱하다. 차라리 만유 인력이라는 법칙을 발견하는 '기술'에 수학이 공헌을 했다고 봐야 한다.  

더나아가, 독자들이 정말 알고 싶은 것은 바로 '그러한 '문명'이 도출되기까지의 수학의 공헌'이다. 그런데, 그것을 설명해 주려는 저자의 노력은 부족하기 짝이 없다. 예를들어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늘어 놓는 것으로 수학이 공헌 것에 대한 설명을 대신한다(면밀한 역사적 자료가 밑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어이없는 것은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수학은 곧 예술이다'라며, 엉뚱한 극적 반전을 노린다는 점이다. 결국 독자는 어리둥절할 따름이다(그래서 별을 또 하나 뺏다). 

Morris Kline (뉴욕 타임스 1992년 6월 10일 모리스 클라인의 부고를 알리는 사진)

때문에 저자가 밝힌, '수학이 문명의 힘'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려던 계획이 과연 성공했는지 의문이 든다. '수학과 문명의 연관성'을 직관으로만 느꼈을 뿐, 그것을 구체화시키고 싶어하는  많은 독자들은, 적어도 이 책에서는 그런 정교한 접착력을 맛보기 어려울 것이다. 마치 기름과 물을 억지로 섞어 놓은 듯한 찝찝함만이 남는다. 게다가, 다소 허무하고 비극적인 결론(수학=예술 이라는 주장)은 이 책의 가치가 과연 무엇인지 의구심을 품게 한다. 

다만, 이 책을 통해 담아둘 만한 지은이의 주장이 있다면,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 체계가 무너진 후, 수학에서 조차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확률과 통계'가 그 대체 도구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근의 과학, 사회, 문화 분석에서 확률과 통계가 지배적인 도구가 되었음을 감안하면 이 지적은 상당히 큰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독서 후에 갖기 마련인 뿌듯함은 거의 맛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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