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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ㅣ 갈릴레오 총서 3
사이먼 싱 지음, 박병철 옮김 / 영림카디널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교양서- 그것도 "수학!"에 관한-이면서도 가독성이 높다는 것이다. 수학 전공자가 아닌 나도 이 책을 손에 쥐자마자 하루 동안 꼬박 앉아 모두 다 읽어 치울 정도로 재미가 있었다. 교양서로서 이 정도의 재미를 가진 책은 발견하기 쉽지 않다.
책의 줄기는 크게 두 갈래다. 영국 출신의 수학자 앤드류 와일즈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라는 수학계의 난제를 풀어가는 것을 그의 인생 역정에 맞추어 서술하는 것이 하나고, 그의 연구 대상이 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와 관련된 수학계의 일화들이 또 하나다. 사실, 와일즈의 연구 과정은 이 책에서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한 그의 증명법은 이 책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그것은 교양의 수준을 넘는다). 오히려 그가 "정리"를 입증하기 위해 도입한 여러 선배 수학자들의 노력과 도전이 보다 중심이라고 하겠다.
저자는 우선, 수학에 문외한인 독자들을 위해 수학의 기초부터 시작한다. 그 기초란 덧셈 뺄셈 따위가 아니라, 수학적 논리 즉, "연역, 귀납, 귀류"를 말한다. 이들을 기반으로 그리스 부터, 이슬람, 힌두, 그리고 근대와 현대의 수학까지 수학 철학/기술의 발전을 인물과 사건 중심으로 전개해 나간다. 물론, 이런 사전 포석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왜 탄생하고, 또 왜 중요한가에 대한 이야기를 위한 것이지만, 그것 자체가 이 책의 가장 큰 재미거리다.
가독성이 높은 이유는 수학이라는 고급 교양을 다루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강약 조절을 잘 맞춘데 있다. 저자는 종종 독자들에게 수학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곤 하는데, 그 질문이 난처하게 할 정도는 아니다. 즉, 읽기 어려울만하다고 느낄 때 쯤이면 재빨리 재미있는 story-telling으로 넘어간다. 반대로 이야기 거리가 지루해질 때 쯤이면 어느새 다른 주제로 넘어가거나, 흥미로운 수학 문제로 넘어간다. 특히 저자가 제시하는 수학 문제들은 수학의 핵심이라기 보다는 마치 "마술" 같은 수학 기법에 관한 것들이다. 때문에 독자들은 어렵다기 보다는 일상에 숨겨진 마법의 비밀을 엿보는 것처럼 -예를들면 샘 로이드의 14, 15 퍼즐 이야기(자세한 것은 책을 보시라)-오히려 흥미를 느낀다. 소설 같은 기법도 출중하다. 마지막 부분에서 와일즈가 자신의 증명 속에 드러난 오류 때문에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독자들에게 손에 땀을 쥐게 하여 소설의 절정 부분을 연상케 한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수학계에 일본인들이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만 중요하게 언급된 일본인 수학자만도 -타니야마, 시무라, 미유오카 등 -여럿이 등장한다. 수학이 단지 서양의 학문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일본인들의 활약상이 너무 눈부시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저자는 책 초반부에 수학의 엄밀성을 다루면서 수학과 논리학을 잠시 혼동하고 있다. 분명 논리는 수학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논리학이 곧 수학은 아니다(이점은 수리철학계에서 논란이 있는 것으로 안다).
또 하나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폴 에르디쉬"(책 "화성에서 온 수학자"로 알려져 있다)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에르디쉬는 20세기 정수론 분야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석학인데, 그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 아무런 공헌이 없었는지 궁금하다(개인적인 궁금증이다).
마지막으로는 원서의 제목이다. 국역본에서는 이 책의 원제목을 "Fermat's Last Theorem"이라고 했는데, 내가 알아본 바로는 "Fermat's Enigma: The Epic Quest to Solve the World's Greatest Mathematical Problem-페르마의 수수께끼: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기 위한 탐구 여정-" 이다.

원서를 대조해 보지는 않았지만, 영문판 페이퍼 백 출간 년도가 1998년으로, 국역본에 소개된 원저 소개 년도 1997년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고, 국역본 서문에 나와 있는 존 린치의 서문이 이 책에도 같이 있는 것으로 보아 똑 같은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국역본 제목이야 다소 왜곡이 있다손 치더라도, 왜 원서의 제목까지 이렇게 바꿔썼을까? (참고로 원서 제목이 Fermat's Last Theorem인 것은 아미르 악젤의 책으로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나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재미있다. 또 교양서로서도 수준급의 지식을 전해 준다(아마존에 251개의 리뷰가 달려 있고, 평균 별점이 4개 반인 것은 괜한 것이 아니다) . 이 책은 대중 소설이나 자기 계발서에는 흥미를 잃은 대신, 적당한 수준의 교양이 담긴 책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딱 맞춤인 책이다.
물론, 수학과는 아예 담을 쌓고 살아왔거나, 소설 수준의 스토리 텔링을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여전히 지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