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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위로 - 글 쓰는 사람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곽아람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평점 :
남들이 말하는 끼 없이 오롯이 공부로 예술을 꾸역꾸역 해내고 있는 내게 위로가 되어 주는 책을 발견했다. 성장이라는 단어에는 열광하면서도 유독 공부라는 단어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이제 막 24개월이 된 아들을 향해 시부모님이 대견하다 등을 토닥이며 "우리 아가 공부하니?"라는 말에는 기겁을 했다. 마치 그 말 한마디에 아들이 즐겁게 보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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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의 쓸모 이외에도 굳이 교양을 배워서 어디다 써먹냐 묻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한대로 결정하고 살아간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100% 자신의 의견이라는 것이 있을까. 결국은 내 안에 쌓인 여러 지식들을 바탕으로 판단의 지표를 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양이란 조금 넉넉하게 내 안에 채워 놓아도 좋지 않을까.
아!! 서문에서 부터 반해 버렸다. 초반부터 열심히 플러그를 붙이고는 내게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어린 날의 범생이에게. 구석구석에 담긴 그림들과 넘치는 지식들에 다시 대학시절로 들어가서 곽아람 기자의 수업을 훔쳐 보는 기분이 들었다. 직접 들어보고 싶은 욕구가 드는 수업들. 만나고 싶은 은사님들. 그녀의 기억의 층위를 들여다 보는 일은 즐거웠다. 어느 구절에서는 포스트 잍에 꾹꾹 눌러 적으며 눈물을 참았다. 그 구절의 위로가 나의 오늘을 다독였다. 그녀가 고른 그림이 그녀가 언급한 고전 속의 글귀가 내 마음을 휘저었다. 단단하게 잘 살아간다고 믿던 나의 하루가 사실은 위로가 필요했음을 느꼈다. 고단했구나. 한자락의 위로가 필요한 건 바로 나였어. 아둥바둥 바득바득, 열심과 열정이라는 이름 아래 노력하는 모습을 전혀 인정 받지 못하고, 지지 받지 못할 때 오는 지반 없는 모래성 같은 마음들이 '내 안의 깊은 계단'과 층위라는 말에 멈추었다. 내 마음의 층위는 어디 쯤일까?
때때로 나의 방황은 어긋남, 궤도 이탈의 시그널이 아니라 잘 항해 중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잊고있던 것들을 상기 시켰다. 문학에 애정 깊은 사람들이 같은 취향으로 동류임을 발견하듯, 나는 그녀가 선택한 문장들에 밑줄을 그었다. 물론 내가 읽은 책들보다 교양서의 경우 모르는 것들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가끔 내가 읽은 문학과 문장이 언급될 때면 동류라도 만난듯 기뻐했다. 책을 탐독하며(아직도 읽은 책보다 안 읽은 책이 더 많지만...) 필사하는 모습에 왜 그렇게까지 필사적이냐고 물었다. 네 전공과 관계없는 서적들을 들추는 일이 육아와 너의 작업하는 시간을 쪼개서 해야 할 "남들이 말하는 끼 없이 오롯이 공부로 예술을 꾸역꾸역 해내고 있는 내게 위로가 되어 주는 책을 발견했다. 성장이라는 단어에는 열광하면서도 유독 공부라는 단어에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이제 막 24개월이 된 아들을 향해 시부모님이 대견하다 등을 토닥이며 "우리 아가 공부하니?"라는 말에는 기겁을 했다. 마치 그 말 한마디에 아들이 즐겁게 보면 그림책을 짚어 던지기라도 할 것 처럼.
내게 공부의 이미지는 부정적이었다. 억압, 강요, 부담, 거부감, 범생이. 대학교 1학년 1학기 때 실컷 놀다가 유급 받는 것 쯤은 흉도 아니라는데, 매번 지각 없이 수업을 들어갔다. 꼬박꼬박 들은 그 교양 수업이 나는 재미있었다. (예고 출신이라 실기 수업이 많았고, 늘 교양에 목마름을 느꼈다) 그리고 첫 장학금을 시작으로 마지막 학기를 빼고는 줄 곧 장학생이었다. 범생이라는 사실이 예술학부에 속한 나에게는 조금은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티내지 않고 다녔으나 범생=끼 없음의 대변 같아 조금은 불편해 감추었다. 지금의 내 모습은 공부+연습으로 이루어 졌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들이 내 자산이요. 자양분이었음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아는 만큼 힘이 되었다고 감히 고백한다. 공부의 쓸모 이외에도 굳이 교양을 배워서 어디다 써먹냐 묻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한대로 결정하고 살아간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100% 자신의 의견이라는 것이 있을까. 결국은 내 안에 쌓인 여러 지식들을 바탕으로 판단의 지표를 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양이란 조금 넉넉하게 내 안에 채워 놓아도 좋지 않을까.
아!! 서문에서 부터 반해 버렸다. 초반부터 열심히 플러그를 붙이고는 내게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어린 날의 범생이에게. 구석구석에 담긴 그림들과 넘치는 지식들에 다시 대학시절로 들어가서 곽아람 기자의 수업을 훔쳐 보는 기분이 들었다. 직접 들어보고 싶은 욕구가 드는 수업들. 만나고 싶은 은사님들. 그녀의 기억의 층위를 들여다 보는 일은 즐거웠다. 어느 구절에서는 포스트 잍에 꾹꾹 눌러 적으며 눈물을 참았다. 그 구절의 위로가 나의 오늘을 다독였다. 그녀가 고른 그림이 그녀가 언급한 고전 속의 글귀가 내 마음을 휘저었다. 단단하게 잘 살아간다고 믿던 나의 하루가 사실은 위로가 필요했음을 느꼈다. 고단했구나. 한자락의 위로가 필요한 건 바로 나였어. 아둥바둥 바득바득, 열심과 열정이라는 이름 아래 노력하는 모습을 전혀 인정 받지 못하고, 지지 받지 못할 때 오는 지반 없는 모래성 같은 마음들이 '내 안의 깊은 계단'과 층위라는 말에 멈추었다. 내 마음의 층위는 어디 쯤일까?
때때로 나의 방황은 어긋남, 궤도 이탈의 시그널이 아니라 잘 항해 중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잊고있던 것들을 상기 시켰다. 문학에 애정 깊은 사람들이 같은 취향으로 동류임을 발견하듯, 나는 그녀가 선택한 문장들에 밑줄을 그었다. 물론 내가 읽은 책들보다 교양서의 경우 모르는 것들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가끔 내가 읽은 문학과 문장이 언급될 때면 동류라도 만난듯 기뻐했다. 책을 탐독하며(아직도 읽은 책보다 안 읽은 책이 더 많지만...) 필사하는 모습에 왜 그렇게까지 필사적이냐고 물었다. 네 전공과 관계없는 서적들을 들추는 일이 육아와 너의 작업하는 시간을 쪼개서 해야 할 만큼 중요해?
위의 질문에 위의 인용문으로 답을 하고싶다.
"인간은 자주 착각하고, 착각을 진실로 믿어 가끔씩 위대한 힘을 발휘하고, 착각에서 깨어나 슬퍼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착각한다. 착각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흔들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인간의 취약성을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인문학의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p229.<공부의 위로>
정확하게 공감한다. 나의 취약성을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당장 내 손안에 뭔가가 쥐어지는 것 같지 않아도 그래도 나는 이 시간이 좋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건네는 말들로 나는 잠시 '쓸모'의 강박에서 벗어나 독자의 기쁨, 공부하는 사람의 기쁨을 온전히 누렸다. 프란츠 아이블의 <책 읽는 소녀>를 다시 찾아보며, 나도 괜시리 가슴에 손을 얹어본다. 책을 읽으며 새 찬 가슴이 뛰고 있다.
정확하게 공감한다. 나의 취약성을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당장 내 손안에 뭔가가 쥐어지는 것 같지 않아도 그래도 나는 이 시간이 좋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건네는 말들로 나는 잠시 '쓸모'의 강박에서 벗어나 독자의 기쁨, 공부하는 사람의 기쁨을 온전히 누렸다. 프란츠 아이블의 <책 읽는 소녀>를 다시 찾아보며, 나도 괜시리 가슴에 손을 얹어본다. 책을 읽으며 새 찬 가슴이 뛰고 있다.
p229.<공부의 위로>
질문에 위의 인용문으로 답을 하고싶다. 정확하게 공감한다. 나의 취약성을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당장 내 손안에 뭔가 쥐어지는 것 같지 않아도 그래도 나는 이 시간이 좋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건네는 말들로 나는 잠시 '쓸모'의 강박에서 벗어나 독자의 기쁨, 공부하는 사람의 기쁨을 온전히 누렸다. 프란츠 아이블의 <책 읽는 소녀>를 다시 찾아보며, 나도 괜시리 가슴에 손을 얹어본다. 책을 읽으며 새 찬 가슴이 뛰고 있다.
공부가 남긴 흔적에 대한 이야기. 공부한 내용이 기억에 남지 않으면 헛되다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대학 시절의 공부는 잊히는 과정에서 정신에 깊은 자국을 남기고 거기에서 졸업 후 이어질 고단한 밥벌이의 나날에 자그마한 위로가 될 싹이 움튼다.
그것이 공부의 진정한 쓸모라고 생각한다.
<서문> 에서. 공부의 위로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하되 다른 세계가 진입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교양이란 겹의 언어이자 층위가 많은 말, 날것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 일, 세 치 혀 아래에 타인에 대한 배려를 넣어두는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서문>. 공부의 위로
기억과 마음에도 층위가 있다는 것을, 나는 종종 ‘내 안의 깊은 계단‘을 걸어 내려간다. 층위마다 켜켜이 쌓인 묵은 이야기들을 헤집어 꺼내 헹군다. 깨어진 토기 조각을 이어 붙이듯, 복원한다.
p37. <공부의 위로>
사람을 사귈 때면 항상 마음속 지층을 가늠해 본다. 이 사람은 어느 층위까지 내게 보여줄 것이며, 나는 내 안의 어떤 층위까지 그를 허용하고 인도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층위마다 차곡차곡 고인 슬픔과 눈물과 어두움과 절망과 상처와 고통, 기쁨과 웃음과 약간의 빛의 흔적....... 나는 손을 내밀며 상대에게 묻는다. 더 깊은 곳까지 함께 내려가 주겠냐고, 그 어떤 끔찍한 것을 보게 되더라도 도망치지 않을 수 있겠냐고.
p38. <공부의 위로>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괴테,<파우스트>에서 사회인이 된 이후에도, 어려움이 닥치고 미로에서 헤매고 있는 것만 같은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이 문장에 기대어
‘노력하고 있으니 방황하는 거겠지.‘
생각하곤 했다.
p223.<공부의 위로>
인간은 자주 착각하고, 착각을 진실로 믿어 가끔씩 위대한 힘을 발휘하고, 착각에서 깨어나 슬퍼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착각한다. 착각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흔들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인간의 취약성을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인문학의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p229.<공부의 위로>
책을 장악한다는 것은
날뛰는 야수의 목덜미를 낚아채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틀어쥐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p325. <공부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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