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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도시
임우진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6월
평점 :
화려한 네온사인과 커다란 간판들은 아름다운 건물의 외벽까지도 점령해버렸다.
이따금 일명 시내라고 불리는 번잡한 거리를 나가면, 커다란 입간판들에 가려 그동네의 운치도 골목의 분위기도 다가려진채 흉악한 자기과시의 결과물들을 보는 듯 했다.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파리에서 유학 생활 중에 잠시 들어 올 때면 유독 그 커다란 간판들이 도시의 전경을 해치는 듯 했다. 마음이 불편했다. 밤거리는 은은한 불빛이 아닌 휘황찬란한 불빛들과 화려한 번쩍임의 강요들에 오히려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게 했다. 귀국 후 9년이 흐른 지금, 아직도 번쩍이는 불빛은 불편하지만 이 커다란 간판들을 보며 이질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것이 마치 한구그이 정서인양 받아들인 탓이다.
그러나 임우진 건축가님의 보이지 않는 도시에 나오는 설명에 설득당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발견했다. 그동안 나의 찌뿌린 눈은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뚜벅이로 그 거리를 누비었던 내가 결단코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 었다. 여행가면 굳이 커다란 간판없이도 찾아가게 하는 여러 상점들과 달리 왜 굳이 저렇게 커다란 이름표들을 달고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거닐었던 외국의 거리는 차가 지날 수 없던 좁은 거리로 걸어서 찬찬히 살펴 볼 여유로운 길이었다. 나의 편협한 시선들을 깨어주고, 역사책에서도 알 수 없던 건축사의 눈으로 바라본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외국에서 동양인으로 살아가면서 은연중 당하는 차별에 나도 모르게 자격지심을 갖고 있던 부분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도시법의 접근 차이에 관한 부분은 나의 오만한 생각을 깨부쉈다. 단순한 건물이야기가 아닌,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구석구석 배어있었다. 서양은 기본적으로 인간은 신뢰할 수 없음을 기본 전제로 해서 도시 시스템이 정교하게 발달했다고 한다. 반면 한국의 도시 시스템은 인간의 양심에 대한 신뢰가 깔려있다. 그러나 요즘은 신뢰할 수 없는 양심들이 많아 곳곳에 CCTV가 넘쳐나게 되었다. 주정차 단속, 인도로 차가 진입하는 일등은 한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이차선 도로임에도 가게 앞에 차를 주차해놓은 사람들로 운전하다 중앙선을 넘어야 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일은 운전자에게 대수롭게 여겨지지 않는 듯 했다.
그러다 한국의 도로와 파리의 도로를 비교해 놓은 사진을 보고 깜짝놀랬다. 시스템의 차이라는 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기본적인 길에 대한 개념과 광장의 개념이 다른 탓도 있지만, 파리의 길에는 주정차를 감시할 카메라가 필요하지 않았다. 좁은 도로에 인도 끝에는 커다란 쇠 말뚝들이 박혀 있어서 애초에 시도조차 할 수 없게 해두었다. 곧게 뻗은 도로에서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속도를 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했다. 그런데, 애초에 그런 충동이 들만한 시야가 트이고 쭉 뻗은 도로의 경우 모든 차선을 지워버렸다. 중앙선도 일반 차선도. 나는 그 거리를 지날 때마다 프랑스인들의 게으름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심리적 불안을 조성해서 과속을 막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라고 했다.
지나온 역사와 기본적인 가치와 세계관이 다른 동양과 서양의 도시의 공간의 비교를 통해 그동안 의문을 갖고 있던 것들이 풀리기도 했다.

한국에서 30년, 파리에서 20년을 생활한 저자의 10가지 질문을 통해서 나도 삶에서 익숙해진 방, 길, 장례식, 공간, 거리 등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여행이 주는 선물이 낯설게 하는 것에 있다면,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매일 걷던 거리의 간판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게 여행의 기쁨처럼 다가온 신선한 책이었다.
*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사실 자동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면서 길가에 있는 건물이 어떤 곳인지 인지하는 것은 겨우 몇 초 정도이고, 그것도 비슷비슷한 조건이 반복되는 상황이다. 건물주 입장에서는 자신의 가게를 알지 못하는 이방인 뜨내기가 자기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상점에 들어오게 하려면, 무엇을 파는 곳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필요한지 몇 초만에 설득해야 하는 그야말로 극한 상황인 셈이다. - P181
오늘 밤에도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지만, 저 수많은 업소를 10년 후에도 기억할 시민은 없다. 10년 전 이곳을 채웠던 간판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도시는 오늘만 살도록 설정되었다. 이렇게 시민은 도시의 기억을 잃어버리게 됐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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