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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사진과 삶에 관한 단상
필립 퍼키스 지음, 박태희 옮김 / 눈빛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 빛 지켜보기
<해질무렵, 여전히 볕이 드는 방 안에서 빛이 들어오는 쪽을 향해 편안한 의자를 놓고 앉는다.
완전히 해가 질 때까지 그곳에 머문다. 그저 빛을 지켜본다. P.75>
글쓰기 수업 첫 날,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를 읽고 특정장소에 있는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적는 세부묘사과제가 주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방안의 온갖 사물 중 키스 자렛의 'my song' CD를 골랐다. 그리고 나름 섬세하게 CD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CD 앞장에 끼워 진 사진 속 인물들의 표정, 옷차림, 주변 배경 그리고 CD앞 미세하게 금간 자국까지.
안타깝게도 왜 이야기란 꼭 퍼지기 마련인걸까. 이미지 묘사를 하는 사이 갑자기 머리 속에선 처음 CD를 샀을 때의 기억이 주섬주섬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과제의 컨셉을 잠시 망각, CD를 구입했던 시기인 '1997년'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은 욕심에 갑자기 사로잡혔다. 그래서 시간적 배경과 관련해 떠오르는 장면들을 이미지묘사 뒷부분에 사족처럼 조금붙여놓았다.
과제 발표 때 내 '사물묘사' 를 들은 사부께선 내용은 재밌으나 주제로부터 도망간 글이라고 지적하셨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에 문화적, 사회적,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힘을 빼고 말랑말랑해진 심장으로 '그저 바라보기' 과정을 시도해 본다면 그것은 상상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시간이 될텐데 말이다.
<보여지는 것, 그 자체. 너무 성급하게 메타포나 상징으로 건너뛰지 마라. '문화적 의미'를 담으려 하지 마라. 아직 이르다. 이런 것들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먼저 대상의 표면에 떨어진 빛의 실체를 느껴야 한다.
사진이 찍혀지는 순간까지 그것과 함께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삶 전체를 통틀어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은 이 머무름과 반대 선상에 있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 빛, 공간, 거리 사이의 관계, 공기, 울림, 리듬, 질감, 운동의 형태, 명암, ...사물 그 자체 ... 이들이 나중에 무엇을 의미하든 아직은 사회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성적이지도 않다.
그저 바라만 보아라 p. 19>
그 후로 난 '그저 바라보기' 의미를 다시 한번 충실히 되새긴 뒤, 처음부터 끝까지 눈에 보이는 '시각적 이미지'로만 구성된 하루일지를 작성해보았다. 온통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온갖 '소리'만을 적은 하루일지를 기록해 본적도 있다. 마찬가지 과정을 거친 다른 사람의 하루일지를 그냥 들어보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의 시도를 하고 나니 눈과 귀가 자연스레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의도'나 '목적' 없이 가슴에 뭔가가 가득 차오르는 기분도 아울러. 소리에만 집중할 때는 자신이 소머즈가 된 것 같은 발랄한 망상에 사로 잡히기도 했다.
필립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는 아날로그적인, 느린, 기교적이지 않은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반드시 사진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오히려 삶에 대한 성찰의 의미가 더 크다.
그래서 이 책은 더 맛나다. 아껴 먹고 싶은 별미처럼.
시간이나 일과, 약속 따위는 다 던져버린 아주 한가한 시간에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책 읽는 동안은 그저 몇 시간이지만 그 이후 내면은 한층 더 깊어진다.
나의 경우 이 책을 읽고나서 '사는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게 됐고 '적극적으로 느리게 살기'를 실천하고 싶어졌다. 이 책을 읽은 또다른 누군가는 필립 퍼키스가 제시한 방법대로 사진이 찍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디지털 적인 기교를 가급적 배제한, 트리밍이나 보정 과정을 거치지 않은, 거칠고 조악하지만 세상에 하나 뿐인 멋진 사진을 찍게 될 것이 분명하다.
사진을 찍을 때 구체적인 계획보다 대략적 계획하의 '유연한 대처'가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옴을 필립 퍼키스는 말하고 있다.
<나는 사진을 찍기 위해 어떤 재료(카메라, 렌즈, 필름)를 가지고 어떤 시간에 어떤 장소로 간다. 그곳은 우리 집 뒷마당일 수도 있고 거실일수도 있다. 꼭 저 광활한 몽고사막일 필요는 없다. 이제 나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내 몸과 마음은 예민한 레이더가 되어 모든 상황에 적극 반영할 것이다. 대신 내용이나 의도는 고려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할 것이다.
이 상황에 완전히 몰입한 상태에서, 나는 약간의 행운(은총)과 더불어 내 의도가 사진 찍는 행위와 일치될 수 있는 '열린'상태를 맞게 된다.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면, 내 안에 잠재된 것들까지 끌어내 더욱 역동적으로 상황에 대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리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고 일을 진행시키는 것보다 대략적인 계획 아래 구체적인 부분들을 자신의 본능, 직관, 감각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한다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P.52>
흑백사진과 컬러 사진의 명암에 대해 언급한 부분에서 필립 퍼키스는 사진 초보자들이 필터 쓰는 것을 권하지 않고있다. 이유는 필터를 쓰면 원래의 미세한 사진 톤을 관찰할 기회를 잃기 때문이고 이는 치명적인 손실이다.
그리고 인화.
<뛰어난 사진 작품들 중에는 어떤 부분을 완전히 하얗게 비워 두거나 혹은 완전히 검게 인화한 경우도 많다. 내가 사진을 검게 혹은 하얗게 인화한다면, 그것은 실수가 아닌 의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P80>
만약 추후에 필립 퍼키스의 사진을 우연히 보게 됐는데 어느 부분이 하얗다거나 완전히 검다면 그것이 실수가 아니라 뭔가를 뜻하고 있다는 의미로 봐야 할 듯.
풍경 사진을 찍을 땐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사물들간의 위계질서가 점점 희미해져 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고, '내용'은 그 모습과 기능 안에 녹아 있다.
마지막으로 '니오타니'
실은 '니오타니' 바로 이 단어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됐음을 여기서 밝혀 두련다.
이 책을 읽기 직전, 난 어린시절 무궁화 열차같이 느릿하던 시간이 점점 '고속열차'처럼 빨라지는 것이 두렵고 서글프다는 감정에 한창 사로잡혀 있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등떠밀려 여기까지 왔고 뭐 현실에 순응하다 보니 뭔가 새로운 것을 하기엔 어정쩡한 나이랄까. 영화 '해운대'에서 나오는 '오후3시' 딱 그 짝인거다.
전문 사진작가도 아니고 오히려 사진에는 문외한인 내가 글쓰기 수업에서 이 책을 접하게 됐고, 남은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칠 행복한 단어 '니오타니'를 만나게 된 것을 그야말로 나는 신께 감사한다.
'사진강의 노트' 마지막에 나오는 이 '니오타니'라는 단어는 너무 빨리 인생의 새로운 시도나 호기심을 놓아버린 사람들에게 도전을 불어 넣는 말이다.
여기에 '니오타니'에 대해 저자 목소리 그대로 옮겨본다
정년퇴임 하게 된 나는 존 리바인이란 사람과 전화통화를 한다. 나는 존에게 줄곧 내면에 있는 이상한 기분을 토로한다. 65세의 일선에서 은퇴한 노인의 내면에 여전히 '나중에 성장했을 때 무엇이 되고 싶은지'에 관한 궁금증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건 니오타니예요" 존은 말했다.
니오타니란 분명히 생물학적 성장이 끝났는데도 의식 안에선 호기심, 상상력, 장난치기, 새로운 것에 대한 배움의 욕구들 같은 초기 성장 단계를 여전히 밟아 나가며, 어린 시절의 감성과 환상들을 그대로 간직한 어른을 은유적으로 지칭하는 생물학적 용어이다.
육체적으로 나이 들어가는 징후들과 전혀 별개로 아이와 같은 호기심, 상상력, 배움의 욕구들이 우리 안에 끊임없이 용솟음친다는 것,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고 매력적인 일 아닌가. 두근두근~!
- 한정된 공간에 책이 쌓이다 보니, 구입한 책을 일단 읽고 나면 한 번만 읽고서 정리할 책과 소장하고픈 책으로 구분하는 습관이 생겼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는 당연히 후자다. 빈티지 포도주처럼 말이다.
공간, 빛, 성찰, 조화 등 우리가 삶에서 간과하기 쉬운, 그러나 놓쳐서는 안될 것들에 대해 다루고 있기에 내겐 이 책이 더 의미가 있고 소중하다.
기회가 된다면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를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사진관련일을 하거나 사진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이면서도 뼈대가 되는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반대로 사진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읽더라도 이 책은 여전히 기분좋은 책이리라.
수묵담채화처럼 곳곳에 드러난 여백을 통해 천천히 숨고르기 하면서 삶을 관조할 수 있는 기분좋은 선물이 주어질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