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빵빵, 파리
양진숙 지음 / 달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빵, 커피, 초콜릿'등의 소재 때문에 요리에세이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고, 한편으론 저자가 파리에서 생활하는 동안을 중심으로 쓰여진 것이기에 '여행기'같기도 하다. 실제로 소개된 빵집들 주소와 위치 설명, 파리 지도들이 상세히 담겨 있으니 여행에세이라 해도 손색 없으리.
여행수필의 경우 사진은 참 선명하고 예쁜데, 내용은 맘에 그닥 와 닿지 않아 본전 생각나게 하던 책을 몇 권 사고 난 후 내겐 약간의 편견이 생겼다. '앞으로 종이질 좋고 다소 비싼 여행에세이는 사지 말자'는 일종의 속좁은 결심이 삐죽히 맘속에 자리 잡았던 게지. 그 때문인지 읽어보기도 전에 이 책도 그런 류일 것이라 미리 앞당겨 생각했던 것.
한데 막상 다 읽고 나선 그런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워질만큼, 깊은 사색을 하며 세느강이라도 건넌 기분이랄까.
이 책으로 인해 나는 빵을 굽는 것이 단지 '사람의 손'만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빵안엔 그것을 만든 파티쉐의 '숨'결과 '혼'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수제로 만든 세상의 모든 빵을 ‘영혼이 굽는 빵'이라 부르리라.
책을 읽기 전엔 책 속에 웬지 불어만 가득하고 ‘서울에서 하던 일들을 다 관두고 파리로 건너가 이런 저런 고생을 하고, 그리하여 파티쉐로 성공한 눈물겨운 이야기’ 라고 혼자 소설쓰듯 책 전체 줄거리를 머릿속에 미리 다 그려버렸다. 그런데 그렇게 빤하고 말랑거리기만 한 내용이 절대 아니었다.
책에는 눈물, 슬픔, 사랑이 마치 설탕과 소금처럼 깊은 강속에 녹아내려 있었다. 「빵 레서피에 '밀가루, 버터, 설탕, 계란 등 외에도 '희, 노, 애, 락'이란 재료들을 꼭 첨가해 주세요!」 라는 주문을 외치기라도 하듯.
 빵은 밥과 밥 사이의 외로움, 허기, 불안을 달래준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내가 좋아 하는 빵을 먹으며 그 사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부스러기들은 소모적인 내 감정의 찌꺼기들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다. 빵을 먹으며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기도 하고 뜨겁고 향좋은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요전날 혼자 울면서 딱딱한 바게트를 뜯어먹은 기억이 아직 생생하기만 하다. 책에서 ‘가끔 베게로 이용되기도 했고, 때론 무기가 되기도 했으며 군수 식량으로도 쓰여졌다’고 소개된 그 바게트 말이다.
‘섬세하고 예민한 빵을 먹고 있으면 틈이 메워지는 기분이 든다’거나 ‘밀가루 반죽이 발효될 때, 빵이 구워질 때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빵이 살아 숨쉰다’ 는 책 속 표현들은 빵 구워지는 시간을 더 촘촘하고 고소하게 만들며, 독자들에게 더 맛난 빵을 기대하게 만든다.
가업을 물려 받아 몇 대째 파티쉐로 일하거나, 매출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그저 좋아서 빵 굽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야기에선 장인정신의 고귀한 기품이 엿보인다.
간간히 몇 쳅터 사이마다 <빵빵빵 이야기 노트> 라고 하여 세계사에 얽힌 빵, 과자 이야기나 초콜릿에 관한 오해와 진실같은 과학적 얘기들도 소개해 놓아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하며 또 책 전체 이야기 톤과는 조금 다른 어조의 신선함을 선물하기도 한다.
친구는 <빵을 나눠먹는 사이>
저자는 프랑스 속담을 소개한다. “빵만 있다면 대개의 슬픔은 견딜 수 있다”고. 또 ‘친구’를 뜻하는 프랑스 ‘꼬뺑copain'은 ’빵을 나눠먹는 사이‘라고.
내게 이 책을 읽어보라 강력 추천해준 사람은 친구 'L' .
그녀와 나는 한 육칠년 전쯤에 같이 서로의 집을 오가며 빵을 구웠었다.  그 땐 딱히 사는 데 큰 고민도 없었던 듯하다. 시간이 흐른 지금 친구‘L'과 나는 각자 살다보니 발생하는, 예기치 못한 아픔과 슬픔의 길고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그녀 대로 난 나만의 짐 같은 것을 짊어지고. 우린 더 이상 같이 빵을 굽지 않는다.
가끔 혼자 '커피 한잔' 생각이 절실한 오후에 머핀이나 카스테라를 만들기 위해 거품기를 씽씽 돌리거나 또 빵틀을 오븐에 넣고 나서 그네들이 먹음직한 갈색이 되는 걸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 그 사이 사이 난 친구 ‘L'이 행복해 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그녀에게 혼잣말을 건넨다. '슬픔을 견디고 이 순간을 지나가자고'
그런 오후면 내 아이는 눈빛을 반짝거리며 언제 빵을 먹을 수 있나 궁금해서 자꾸 오븐 안을 들여다 보느라 제대로 놀지도 못한다.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랑’
달콤하고 씁쓸하며 또 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바로 사랑.
책에선 몇 쳅터에 걸쳐, 파리에서 일어난 사랑이야기를 ‘사랑은 00이다‘라는 식의 제목으로 그려내고 있다. 강렬하고 때론 느닷없으며 또 한 없이 슬프기도 한 사랑.
영화 코코 샤넬에서 ’주인공 ‘코코’가 자신의 측근인 여배우에게 “사랑이 뭘까요?”라고 묻자 그 배우는 대답하지 않던가.
‘사랑은 마음이 아픈 것’ 이라고.
책에 나온 ‘사랑’의 정의처럼 사랑은 정반대를 끌어안는 일이기도 하고 축제이며 자석이기도 하다. 책속에 나온 사랑에 관한 정의는'사랑은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책을 읽다 문득, 훗날 파리에 갔을 때 빵빵빵 파리’에서 나온 사랑이야기 주인공들을 우연히 스치듯 만나는 상상을 해본다. 
  여기, 마음 아프지만 고개 끄덕여지는 한 구절
오븐에 빵틀을 넣을 때 틀과 틀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하듯 친구사이에도 사랑하는 연인사이에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얘기. ‘적당한 거리가 빵과 사람을 만든다’


 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다가도 마구 뛰어가 안기고 싶을 때,

문제는 어느 정도의 거리에 있다가 뛰어갈 것인지

어떤 이유를 앞세워 다시 적당한 거리로 돌아와야 할지 빵 틀을 놓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p.114


그리하여 마침내 ‘페이지를 넘겨요’
요사이 내가 계절을 타는 건지 항상 ‘울 준비는 되어 있다’식의 마음인지라 마지막 쳅터 ‘페이지를 넘겨요’를 읽다가 눈이 벌개지게 울고 말았다.
지은이는 과거 힘들고 어려 울 때마다 툭 털고 일어났었는데 한 번은 너무 힘들어 이겨내지 못했던 때를 얘기하고 있다. 날들이 흘러가고 계절이 바뀌어도, 의욕 없이 무기력하게 울면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을 때 책임 교수인 쉐프가 저자에게 했던 말
“페이지를 넘겨요!” 
 이미 지나간 일을 돌아보지 말고, 현재에 머물지도 말고, 페이지를 넘기라고.

지금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스스로 페이지를 넘기는 것뿐이라고.

페이지를 넘기는 일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지 않느냐고.

그리고 그 페이지를 새롭게 써나가라고.  p.308


난 마지막 장을 넘기고나서도, 아쉬워져선 다시 책을 펼쳐 들고 빈티지 엽서같은 빵과 파리 사진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카번에 뜨거운 커피로 심장을 놀래키면서 생각했다. 이젠 정말 '내 생의 페이지를 넘겨야겠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걷기예찬 -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예찬 시리즈
다비드 르브르통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심에서의 삶이 먼지와 부정으로 가득차 어느 순간엔 정말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아무도 없는 평일 오전, 숲으로가 '왜? 왜? 왜?' 소리를 질러본다. 외침은 이내 사라지고 궁금증만 어지럽게 남을 뿐이지만.
묵은 체증을 씻어내고자 그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라는듯 갑자기 난 걷는다. 양쪽 발을 번갈으며 땅에 내딛었다 떼는 단순한 과정의 반복.
몸은 이내 안다. 한쪽 방향으로 흐르는 바람의 '결'이 있음을.
행글라이더처럼 양 쪽 방향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바람결에 몸을 실으면 걷기는 리드미컬한 명상이 된다.
운동해본지 오래인 부실한 몸은 금새 가쁜 숨을 뱉어낸다. 그리고나서도 보행을 계속하면 단단히 붙었던 살들이 쫙 찢어지듯 피냄새가 울컥 올라온다.
신고 있는 신발이 신통찮으면 살갗이 까지거나 샌달의 경우엔 줄에 까진 속살이 닿을 때마다 '으' 쓰라린 비명! 육체의 고통과 달리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청정하다.
이제 막 물청소를 끝낸 촉촉한 길처럼. 

 

내 몸은 브르통 <걷기 예찬>의 소제목처럼 '물, 불, 공기, 땅, 그 원소들의 세계'인 자연에 다 녹아들어있다. 무엇이 되어도 좋겠거니. 아무 것도 아니어도 상관없으리. 서걱거리는 나뭇잎이 되거나 색종이 같은 가을하늘에 깃들거나. 그저 내 맘은 발레리나처럼 사뿐거린다.
혼자걷기의 고독이 주는 '진정한 나됨' 은 나를 충만케 한다.

브르통은 말했다. 우리는 끝없이 걷기만 할 뿐 어디에도 이르지 못할 수도 있고, 시간이 흐르고 죽음을 향해서 느릿느릿 다가가고 있음을 잊어버리기 위해 걸을지도 모른다고.
혼자 걸어본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보행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더 걷다보면 한계를 딛고 넘어서서 전적으로 자유로이 풍경의 일부가 될수도 있다는 것을.
그 때 체험한 완전한 인식의 '자유'는 공기청정기 역할을 하는 사진으로 남는다. 뒷날 된통 고된 시간을 치뤄야 할 때 그 사진을 꺼내보며 숨고르기를 위한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소진될 때까지 걷고난 뒤 딱딱한 나무 의자에 등붙이고 누워서 펼쳐든 '걷기예찬'은 박하사탕처럼 개운하기만 하다. 귀찮기만한 고민거리들은 둘둘말아 잠시 던져버리자.  
 걷기;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
우리는 지나가는 시간을 음미하고 존재를 에돌아가서 길의 종착점을 더 확실하게 이르기 위하여 걷는다.
또는 여가활동, 자기확인, 고요함, 침묵, 자연과의 접촉 등을 시도하기 위해 걷는다.
아니 보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목적 없이 그냥 걸을 때도 위의 것들은 말없이 걷는 보행자들에게 선물로 주어진다.
'걷기'는 '집'의 반대말 : 걷기는 어떤 거처를 향유하는 것의 반대다.
걷기가 어서 다음 기착지에 다다르기를 바라거나 그만 집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조바심으로 권태로움을 불러오기도 한다.
보행자는 자연 속에 몸을 푹 담그고 거칠거나 혹은 편안한 길, 해질녘이나 비가 내리는 질척한 길을 걷는다.
오들오들 떨거나 반대로 너무 더워 땀을 줄줄 흘리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보행자의 몸의 감각은 자연을 향해 활짝 열린다.
그 끝에 오는 검소한 식사와 한잔의 물, 그리고 누추한 곳에서의 휴식.
저들에 비하면 아주 피라미처럼 걸었을 뿐인 나는 얼음물 한 잔을 벌컥 거리고 난 뒤 하얀 면으로 된 침대시트에 몸을 내동댕이치고픈 어느 고달푼 보행자의 열망을 생생히 느낀다.
걷는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
자연의 다양한 소리는 내 안에 가득한 침묵 한가운데로 흐르지만 침묵의 배열과 질서를 어지럽히진 않는다.
오히려 그 소리들은 침묵의 존재를 드러내주고 어떤 장소의 청각적 질감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들어 준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은 내게 맑은 산바람으로 가득찬 거대한 '숲'같은 책이다.
책 속에서 나는 익명의 누군가가 되어 길을 떠났다. 책속으로 두 발과 몸전체를 쑥 들이민 것이다.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 구조도 아니건만 나는 끊임없이 길에서 호흡하며 책 속 길들을 따라 보행의 과정을 겪었다.
숲과 산을 지나고 나무 아래 혹은 헛간 건초더미에서 아쉬운대로 잠드는 불안한 잠.
몸의 편안함을 포기하고 나면 시간에 있어서 만큼은 부자가 될 수 있다. 여름 날 청량한 물놀이처럼 나는 시간 속에서 마음껏 유영하고 탐험한다.
앞 선 무수한 보행자들이 들었을 굴곡진 흙의 노래를 듣는다. 도마뱀이나 고슴도치를 보기도 하고 자동차에 깔려 죽은 납작해진 짐승들의 시체를 본다.
산책이 자잘하고 세부적인 것들의 변화로 날마다 새로울 수 있듯이 <걷기 예찬>은 계절이나 공간, 혹은 독자이자 생활인으로서의 '내'가 처한 심리상태에 따라 읽을 때마다 낯설고 새로운 '걷기'책이 될 수 있다.
난 각각 다른 장소, 다른 시간과 상황에서 이 책을 다시 읽어 볼 것을 메모해 둔다.
책장을 덮고 야트막한 언덕을 둘러싼 숲길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생수병 하나를 챙겨든채.
 오감을 활짝 열어 공기를 들이키고, 아주 느리게 걷는다. 가끔은 오던 길을 일부러 다시 가보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슬 맞은 새벽 풀잎처럼 가을에 흠뻑 몸을 담구게 된다.  '걷기 예찬' 의 수많은 보행자들처럼.
들숨과 날숨이 점점 거세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신께 감사한다. 올해도 이 계절을 향유할 수 있음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흔에 잘린 뚱보아빠>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마흔에 잘린 뚱보 아빠
나이절 마쉬 지음, 안시열 옮김 / 반디출판사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남편을 처음 만났던 때 그의 나이가 스물 일곱이었다.시간이 흘러 어느 덧 올해 남편 나이가 서른 아홉.
몇 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하여 9년째 살아오는 동안 나는 그에게도 마흔이란 나이가 찾아올 거란 사실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왜 난 시간이 우리만 비껴갈 것이란 착각속에 빠져 살았던 것일까. 허허 참..
이 책 제목을 첨 봤을 때 솔직히 암울했다. 
 '311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은 마흔에 실직한 한 뚱뚱한 가장이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 내용이겠지? 뭐, 뻔하잖은가. 그렇다고 첨부터 끝까지 우울하다, 슬프다로 일관할 것 같진 않고.  일러스트를 보니 재밌을 것 같기도 한데?' 
마흔을 코 앞에 둔 남편을 둔탓인지 제목이 나랑 전혀 상관 없는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처음에 책을 펴 들면서도 머릿 속은 쇠수세미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마흔에 잘린 뚱보 아빠>는 자신이 맡고 있던 회사가 합병으로 문닫게 된 것을 계기로 일년을 백수로 지냈던 나이절 마쉬의 이야기다. 제목은 '잘린'이란 표현이 들어가지만 지은이의 얘기를 읽다보면 스스로가 방향전환을 하기 위해 휴식을 선택한 셈. 그러니 자발적 실직이라 하는 편이 더 맞겠다. 
저자는 자신이 CEO 로 있는 동안 일에 쫓겨 아이들에게는 엄청 소리를 지르고 어떤 때는 너무 녹초가 되어 집에 도착해서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차안에서 혼자 라디오를 듣기도 했었음을 고백한다.
합병에 즈음하여 그는 자신을 돌아보고 가족과의 관계도 회복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굳이 그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합병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일자리가 주어졌을테니 일년을 백수로 지내지 않아도 됐을텐데 말이지. 
그는 부인 케이트에게 집을 팔아 작은 집으로 옮기고 실직수당으로 1년을 버티며 놀겠다는 자신의 뜻을 전한다. 부인 케이트는 선뜻 동의해 준다.
아이가 넷이나 있고, 실직수당 외엔 당장 수입이 없어지는데 갑자기 쉬겠다는 남편의 말을 아무 말 없이 따라 준 부인 케이트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라.
낚시나 다니면서 살고 싶다고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는 남편의 말에 항상 긍정도 부정도 아니고 '침묵'만 하는 내 입장에선 말이다. 
 

암튼 저자는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들 네 명의 육아에 깊숙이 참여하여 아이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결속해 나간다. 수영으로 바다를 헤엄쳐 건너갈 계획을 세우고 꾸준히 연습을 계속한다. 달리기를 하는 등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축쳐진 뱃살 및 몸의 군살들을 뺀다. 』 는 애초의 계획을 꾸준히 실천에 옮긴다. 그리고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했던 알코올 중독도 극복한다. 
친구와 처제의 결혼식을 이유로 아이들 네 명을 놔두고 부인과 단둘이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아버지'가 위중하단 소식을 듣고 장남을 데리고 비행기를 타고 부모님께 날아간다. 
한번도 칭찬 비슷한 걸 해준 적이 없던 아버지는 왠지 이것이 마지막 인사가 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나이절에게이렇게 말한다.  



 "나이젤, 네가 온 게 내게는 큰 의미란다... 그리고 너의 멋진 아들 녀석을 데리고 온 것도 ...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늘 자랑스러웠다... 네 어머니와 나는 네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한다... 호주에서 네가 더 잘 살고 있다는 소식에 우린 정말 기쁘다." P.294 


나이절은 그 말을 듣고 아버지 앞에서, 차로 걸어가면서, 그리고 주차장에서 울었다. 집으로 차를 몰고 가다가 울음을 멈출 수 없어 차를 세우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 앞에서도 울고 이 책을 쓰는 순간에도 울고 있음을 고백한다. 
 

호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일할 것을 제의 받아 직장에 복귀하게 된다. 다시 일을 하게 되면서 그는 애초에 목표했던 '본다이-브론테 수영' 계획도 실행에 못옮기게 되고 다시 과거의 패턴으로 슬슬 회귀하는 듯 보인다. 
만약 저자가 책 속에서 일 년동안의 백수생활로 크게 달라져서 다시 일을 하면서부터는 절대 전처럼 생활하지 않았다고 얘기했더라면 이 책의 매력은 크게 반감됐을지도 모른다. 그런 식의 이야기는 자기개발서들에서 너무나도 흔하니까.
한데 저자는 집과 업무사이의 균형을 이루라고 충고하지 않는다. 완벽을 추구하기를 그만뒀다는 말로 대신한다. 무조건 인생을 긍정적으로 보라는 멘트대신 인생은 여전히 고되지만 초점을 바꾸여 완벽한 삶을 살지 못한다는 큰 실패를 바라보며 자학하지 않고, 작은 승리들에 대해 자신을 칭찬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가족 간의 행사에서 뭔갈 놓치면 그 순간을 아쉬워하기 보다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순간을 누릴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게 됐다는 것이다.저자는 1년에 걸친 휴식으로 인해 자신의 개인적 여정이 가능케 됐고 그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을 확신한다.
 
우리나라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서, 혹은 일년을 실직하면서도 지극히 궁핍하게만 생활한 모습은 아니기에 오는 약간의 이질감을 옆으로 비껴둔다면 이 책은 아주 재밌다.
일년을 쉬면서 하고 싶었던 수영과 달리기를 원없이 하고, 군살들을 쫙 빼고 윈드 서핑을 하는 저자의 모습은 밑바탕에 그 자신의 굳은 결심과 노력이 있었기에 온전히 가능하다. 특히 알콜 중독의 경우 굳이 술자리를 피하지 않고도 술의 유혹을 이겨 내는 모습을 보면 그가 비록 입원이나 재활이 필요한 중증의 환자까지는 아니었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 아니기에 박수를 보낸다.
치루로 거의 애낳는 여인 수준의 비명을 지르고, 수술 후엔 거즈를 채워 넣고 종이팬티를 입었다는 내용의 책시작부터 심상찮더니 솔직하고 유쾌한 사십 대 주인공의 목소리는 읽는 내내 책 넘기는 속도를 스피디하게 만든다. 재미도 있으면서 은근한 깊이도 있더란 말씀.
"거의 모든 남자들에게 삶이란 없다. 단지 삶이 있는 척할 뿐이다" 란 책표지의 문구를 보며 내 남편이 격한 동조의 뜻으로 자신의 로망인 '일년 휴식'을 선포할지도 모르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꿈꾸는섬 2009-10-18 0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년 휴식, 제 남편에도 주고 싶은데 일상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요.ㅠ.ㅠ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사진과 삶에 관한 단상
필립 퍼키스 지음, 박태희 옮김 / 눈빛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 빛 지켜보기

<해질무렵, 여전히 볕이 드는 방 안에서 빛이 들어오는 쪽을 향해 편안한 의자를 놓고 앉는다.
완전히 해가 질 때까지 그곳에 머문다. 그저 빛을 지켜본다. P.75>

 글쓰기 수업 첫 날,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를 읽고 특정장소에 있는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적는 세부묘사과제가 주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방안의 온갖 사물 중 키스 자렛의 'my song' CD를 골랐다. 
그리고 나름 섬세하게 CD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CD 앞장에 끼워 진 사진 속 인물들의 표정, 옷차림, 주변 배경 그리고 CD앞 미세하게 금간 자국까지.
안타깝게도 왜 이야기란 꼭 퍼지기 마련인걸까. 이미지 묘사를 하는 사이 갑자기 머리 속에선 처음 CD를 샀을 때의 기억이 주섬주섬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과제의 컨셉을 잠시 망각, CD를 구입했던 시기인 '1997년'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은 욕심에 갑자기 사로잡혔다. 그래서 시간적 배경과 관련해 떠오르는 장면들을 이미지묘사 뒷부분에 사족처럼 조금붙여놓았다.
과제 발표 때 내 '사물묘사' 를 들은 사부께선 내용은 재밌으나 주제로부터 도망간 글이라고 지적하셨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에 문화적, 사회적,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힘을 빼고 말랑말랑해진 심장으로 '그저 바라보기' 과정을 시도해 본다면 그것은 상상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시간이 될텐데 말이다.
<보여지는 것, 그 자체. 너무 성급하게 메타포나 상징으로 건너뛰지 마라. '문화적 의미'를 담으려 하지 마라. 아직 이르다. 이런 것들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먼저 대상의 표면에 떨어진 빛의 실체를 느껴야 한다. 
사진이 찍혀지는 순간까지 그것과 함께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삶 전체를 통틀어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은 이 머무름과 반대 선상에 있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 빛, 공간, 거리 사이의 관계, 공기, 울림, 리듬, 질감, 운동의 형태, 명암, ...사물 그 자체 ... 이들이 나중에 무엇을 의미하든 아직은 사회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성적이지도 않다.
그저 바라만 보아라 p. 19>
그 후로 난 '그저 바라보기' 의미를 다시 한번 충실히 되새긴 뒤, 처음부터 끝까지 눈에 보이는 '시각적 이미지'로만 구성된 하루일지를 작성해보았다. 온통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온갖 '소리'만을 적은 하루일지를 기록해 본적도 있다. 마찬가지 과정을 거친 다른 사람의 하루일지를 그냥 들어보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의 시도를 하고 나니 눈과 귀가 자연스레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의도'나 '목적' 없이 가슴에 뭔가가 가득 차오르는 기분도 아울러. 소리에만 집중할 때는 자신이 소머즈가 된 것 같은 발랄한 망상에 사로 잡히기도 했다.

 필립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는 아날로그적인, 느린, 기교적이지 않은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반드시 사진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오히려 삶에 대한 성찰의 의미가 더 크다.
그래서 이 책은 더 맛나다. 아껴 먹고 싶은 별미처럼.
시간이나 일과, 약속 따위는 다 던져버린 아주 한가한 시간에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책 읽는 동안은 그저 몇 시간이지만 그 이후 내면은 한층 더 깊어진다.
나의 경우 이 책을 읽고나서 '사는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게 됐고  '적극적으로 느리게 살기'를 실천하고 싶어졌다. 이 책을 읽은 또다른 누군가는 필립 퍼키스가 제시한 방법대로 사진이 찍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디지털 적인 기교를 가급적 배제한, 트리밍이나 보정 과정을 거치지 않은, 거칠고 조악하지만 세상에 하나 뿐인 멋진 사진을 찍게 될 것이 분명하다. 

 사진을 찍을 때 구체적인 계획보다 대략적 계획하의 '유연한 대처'가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옴을 필립 퍼키스는 말하고 있다.
<나는 사진을 찍기 위해 어떤 재료(카메라, 렌즈, 필름)를 가지고 어떤 시간에 어떤 장소로 간다. 그곳은 우리 집 뒷마당일 수도 있고 거실일수도 있다. 꼭 저 광활한 몽고사막일 필요는 없다. 이제 나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내 몸과 마음은 예민한 레이더가 되어 모든 상황에 적극 반영할 것이다. 대신 내용이나 의도는 고려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할 것이다.
이 상황에 완전히 몰입한 상태에서, 나는 약간의 행운(은총)과 더불어 내 의도가 사진 찍는 행위와 일치될 수 있는 '열린'상태를 맞게 된다.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면, 내 안에 잠재된 것들까지 끌어내 더욱 역동적으로 상황에 대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리 계획을 철저하게 세우고 일을 진행시키는 것보다 대략적인 계획 아래 구체적인 부분들을 자신의 본능, 직관, 감각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한다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P.52>

 흑백사진과 컬러 사진의 명암에 대해 언급한 부분에서 필립 퍼키스는 사진 초보자들이 필터 쓰는 것을 권하지 않고있다. 이유는 필터를 쓰면 원래의 미세한 사진 톤을 관찰할 기회를 잃기 때문이고 이는 치명적인 손실이다.
 그리고 인화.
<뛰어난 사진 작품들 중에는 어떤 부분을 완전히 하얗게 비워 두거나 혹은 완전히 검게 인화한 경우도 많다. 내가 사진을 검게 혹은 하얗게 인화한다면, 그것은 실수가 아닌 의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P80>
만약 추후에 필립 퍼키스의 사진을 우연히 보게 됐는데 어느 부분이 하얗다거나 완전히 검다면 그것이 실수가 아니라 뭔가를 뜻하고 있다는 의미로 봐야 할 듯.
풍경 사진을 찍을  땐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사물들간의 위계질서가 점점 희미해져 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고, '내용'은 그 모습과 기능 안에 녹아 있다.

마지막으로 '니오타니'
실은 '니오타니' 바로 이 단어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됐음을 여기서 밝혀 두련다.
이 책을 읽기 직전, 난 어린시절 무궁화 열차같이 느릿하던 시간이 점점 '고속열차'처럼 빨라지는 것이 두렵고 서글프다는 감정에 한창 사로잡혀 있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등떠밀려 여기까지 왔고 뭐 현실에 순응하다 보니 뭔가 새로운 것을 하기엔 어정쩡한 나이랄까. 영화 '해운대'에서 나오는 '오후3시' 딱 그 짝인거다. 
 
전문 사진작가도 아니고 오히려 사진에는 문외한인 내가 글쓰기 수업에서 이 책을 접하게 됐고, 남은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칠 행복한 단어 '니오타니'를 만나게 된 것을 그야말로 나는 신께 감사한다.
'사진강의 노트' 마지막에 나오는 이 '니오타니'라는 단어는 너무 빨리 인생의 새로운 시도나 호기심을 놓아버린 사람들에게 도전을 불어 넣는 말이다.   
여기에 '니오타니'에 대해 저자 목소리 그대로 옮겨본다  

정년퇴임 하게 된 나는 존 리바인이란 사람과 전화통화를 한다. 나는 존에게 줄곧 내면에 있는 이상한 기분을 토로한다. 65세의 일선에서 은퇴한 노인의 내면에 여전히 '나중에 성장했을 때 무엇이 되고 싶은지'에 관한 궁금증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건 니오타니예요" 존은 말했다.
니오타니란 분명히 생물학적 성장이 끝났는데도 의식 안에선 호기심, 상상력, 장난치기, 새로운 것에 대한 배움의 욕구들 같은 초기 성장 단계를 여전히 밟아 나가며, 어린 시절의 감성과 환상들을 그대로 간직한 어른을 은유적으로 지칭하는 생물학적 용어이다.

 육체적으로 나이 들어가는 징후들과 전혀 별개로 아이와 같은 호기심, 상상력, 배움의 욕구들이 우리 안에 끊임없이 용솟음친다는 것,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고 매력적인 일 아닌가.  두근두근~!
- 한정된 공간에 책이 쌓이다 보니, 구입한 책을 일단 읽고 나면 한 번만 읽고서 정리할 책과 소장하고픈 책으로 구분하는 습관이 생겼다.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는 당연히 후자다. 빈티지 포도주처럼 말이다.
공간, 빛, 성찰, 조화 등 우리가 삶에서 간과하기 쉬운, 그러나 놓쳐서는 안될 것들에 대해 다루고 있기에 내겐 이 책이 더 의미가 있고 소중하다.
기회가 된다면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를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사진관련일을 하거나 사진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이면서도 뼈대가 되는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반대로 사진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읽더라도 이 책은 여전히 기분좋은 책이리라. 
수묵담채화처럼 곳곳에 드러난 여백을 통해 천천히 숨고르기 하면서 삶을 관조할 수 있는 기분좋은 선물이 주어질테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 <파우스트>에서 <당신들의 천국>까지, 철학, 세기의 문학을 읽다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은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중 마지막 쳅터 <나를 찾는 시간여행, 회상> 만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 쳅터에 대한 감상인 동시에 <나를 찾는 시간여행, 회상>이 내 삶에 끼친 영향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책 전체에 대한 독후감이 아니니 서평이라고 하기도 뭣하고 그냥 독서일기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어찌됐건 덕분에 오래전 나를 좌절시켰던 『마르셀 프루스트』와 화해의 포옹을 나눌 수 있었으니 이 책이 마냥 반가울 따름이다.

나는 푸르스트와 이렇게 화해했다.
대학교 3학년 때, 교양과목과제 중 하나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서평쓰기였다.
전체 7권 중 1권만 먼저 도서관에서 빌려가지고 볕살 좋은 창가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장도 채 읽을 수 없었다. 뭐랄까. 원치 않는 스타킹같은 걸 뒤집어 쓴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암튼 도저히 책갈피를 넘기지 못하고 그냥 책을 덮어 버렸다. 
세로줄에 너무 자잘한 글씨여서 도저히 그 긴문장을 집중해서 읽을 수 없었다는 구차한 변명을 남길 수 밖에는.   
그럼에도 어떻든 과제는 제출해야 했으니. 다행히(?)  워낙 방대한 분량이라서 책 내용이 간추려진 요약본도 구하기 쉬웠다. 숙제는 그 요약본을 대충 버무려 제출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프루스트현상(특정냄새때문에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을 설명하기 위해 종종 인용되곤 하는, '주인공이 마들렌 한 조각을 홍차에 적셔 마시다가 잊어버린 기억들을 떠올리게 된다'는 문제의 그 장면. 
어디선가 '마들렌, 홍차 장면' 이 인용된 것을 우연히 읽게 될 때 마다 복숭아씨라도 삼킨 것처럼 가슴이 뻐근해졌다. 친구집에 놀러가서 말없이 집어온 장난감을 여태 돌려주지 못한 기분이랄까.
이것이 '기억'에 관한 첫번째 질문이다.
왜 나는 프루스트 세계 속에 발조차 못들인 것인가.
이 좌절에 대한 '기억'은 항상 먹구름처럼 마음 속어딘가에 드리워져 있다. 사는데 크게 지장은 없지만 왠지 닦아지지 않는 얼룩처럼. 프루스트에 대한 이 기억은 누군가 말한 것처럼 갑자기 꼬리를 흔들며 달려드는 개나 마찬가지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불쑥거리니 말이다.

여름밤 내내 나는 유년시절을 떠올렸다. 통으로 명확히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회상'은 커다란 직소퍼즐 맞추기이다. 테두리 없이 맞춰 나가야 했다. 여간 능숙한 손놀림이 아니고는 헝클어지기 쉽상인 것이다.
밤마다 숫매미가 상대를 찾아 귀찢어지게 울어대는 소리조차 아득해졌다.
나는 예전 이미지들로 기억의 틀을 짜는데 골몰했다.
여기서 두번째 질문, 왜 나는 과거의 '기억'에 집착하는가.
왜 어린시절을 다시금 떠올리려 하는가. 추억의 공간(집)을 다시 속속들이 들어가보고 싶어하는가.
다락방, 부모님의 낡은 물건에서 나던 눅진한 냄새, 지하실에서 나던 그 쾌쾌하고 음습한 냄새를 다시 맡아보고 싶어하는가.
현실도피인까. 아님 기억나는 대로 끄집어 내본 후 다 털어버리고 새로이 마음을 포멧하기 위해서인가.
'기억'을 집요하게 쫓는 '동기'와 '원인' 질문은 계속됐다. 고기 한마리 없는 호수에 드리운 낚시줄처럼 도통 수확은 없었지만.

그러던 중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요즘 부쩍 '철학'을 '심리치료사'나 '구원자'와 동의어처럼 받들어 모시고 싶던 찰나였다.
『문학살롱에 앉아 다양한 커피를 마셔라. '철학적 해석'이라는 특별메뉴에 눈길도 주면서』 라는 친절한 'Tip'을 던져주는, 느슨하고 여유있는 책머리로 책은 시작되고 있었다.
유명한 문학작품에 녹아있는 철학이야기를 어렵잖고 재미나게 풀어나간 덕에 금새 책 한권을 얼추 다 읽게 되었다.
이렇듯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회복하는 와중에 책 마지막 쳅터 '나를 찾는 시간여행, 회상' 편에 도달했다. 묵은 체증처럼 쌓여 있던 오랜 질문에 해답을 찾게 될줄 짐작도 못했지만.
 책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저자는 '기억'의 단초로 SF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예로 든다.
영화 초반에 인간들 가운데 숨은 인조인간을 색출해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에서 인조인간은 외모나 행동으로는 인간과 전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심문관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묻는다. 그러자 기억이 이식된 인조인간은 대답을 포기하고 스스로에게 방아쇠를 당긴다. 여기서 슬슬 '기억'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지가 제시되기 시작.  
  

기억과 회상에 대해 프루스트식으로 풀어본 저자의 글을 보자.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1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썼다. 13년 중 이미 소설 첫 시작인 1권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그가 전 작품을 통해 천착한 문제, 곧 인간에게 기억이란 무엇이며, 어떤 일을 하는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게다가 이것은 13년동안이나 쓴, 7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기억이란 무엇일까? 가령 사고나 마취로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사람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은 깨어났지만, 처음에는 시간에 대해, 장소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무지 상태에 놓이게 된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는 우선 주위 사람들에게 시간과 장소를 묻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려고 사고 이전의 기억을 더듬거리며 찾을 것이다. 다행히 기억을 되찾게 된다면 그는 곧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누구든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은 곧 자기가 누구였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사람은 자기가 누구였는지를 알게 됨으로써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이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흔히 정체성이라고 말하는 인간의 자기동일성을 확보하게 해주는 것이 곧 기억이다.   
 프루스트에 관한 <인간적 시간에 대한 연구> 를 쓴 비평가 조르주 풀레는 
'프루스트 사상에서의 '기억'은 기독교 사상에서 '은총'과 같다. 회상이란 인간이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인간을 구출하기 위해서 찾아온 천상의 구원인 것이다.' 이라고 했다. 
 회상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시간'으로 만드는 일을 한다.
프루스트가 말한 우연에 의한 '무의지적 기억'이 강렬한 쾌감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잊었던 기억들을 떠올려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자기 자신, 잃어버린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무의지적 기억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시간'으로 만드는 위대한 역할을 한다.
회상은 상이한 두 시간, 곧 과거와 현재를 겹치게 하여 새로운 시간을 만들고, 이 시간 안에서 '시간적 입체상'을 '재발견하고 또 느끼게'한다.
회상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은 자연적 공간이 아니며, 그렇다고 여기저기 분산된 공간을 무의미하게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지의 정체성에 합당한 각각의 서로 다른 공간들이 모여 마치 모자이크처럼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를 완성하기 때문에, 이러한 공간 안에서 인간은 비로소 불변하는 자기 자신을 되찾게 된다. 이 같은 의미에서 프루스트는 "장소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의 주인공이 되찾은 삶의 진실은 소설을 쓰는 것이다. 이 글쓰기는 말을 다듬는 장인의 산물이 아니고 '우리에 앞서 이미 존재하는 것'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프루스트가 말하는 '시간의 질서에서 해방된 인간'은 회상에 의해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공간, 그리고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되찾는 인간이다. 이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열등한 존재, 우발적이고, 죽게 마련인 존재라고 느끼지 않는다. 또한 결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느끼는 존재도 아니다. 
 

 올해가 유독 나에겐 힘든 해였다. 나도모르게 무의식중에 과거의 기억을 자꾸 떠올리려 했던 것은 힘든 시간을 지나는 동안 잃어가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던 것.
나는 조각난 기억들을 통해 옛집을 회상했다. 그 과정에서 과거의 기억과 현재를 나란히 두는 공간의 병치작업이 이루어졌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고 잃어버린 공간을 찾으며 궁극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했던 본능적 몸부림이었달까.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이 책 덕분에  오래전에 싸우고 미처 화해 못한  친구같은 느낌이었던 프루스트에 대한 나 혼자만의 해묵은 감정을 털어낼 수 있었다. 게다가 자꾸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일을 현실도피가 아닐까 여겼던 괜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됐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도 자신도 모르게 심히 과거의 '기억'에 '천착'하게 된다면 너무 괴념치 마시길. 그대는 열심히 과거를 떠올려 현실에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자신의 아이덴티를 찾고 있을 뿐이니. 
 이제 나에겐 세가지 숙제가 주어졌다.  좀 느긋한 맘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다시 읽어보기.  두번째는 프루스트와 똑같은 의미로 공간의 병치를 사용했다고 소개된 러시아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 빌려보기.
마지막은 '우리에 앞서 이미 존재하는 것'을 찾아내기 위한 글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