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 <파우스트>에서 <당신들의 천국>까지, 철학, 세기의 문학을 읽다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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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중 마지막 쳅터 <나를 찾는 시간여행, 회상> 만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 쳅터에 대한 감상인 동시에 <나를 찾는 시간여행, 회상>이 내 삶에 끼친 영향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책 전체에 대한 독후감이 아니니 서평이라고 하기도 뭣하고 그냥 독서일기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어찌됐건 덕분에 오래전 나를 좌절시켰던 『마르셀 프루스트』와 화해의 포옹을 나눌 수 있었으니 이 책이 마냥 반가울 따름이다.

나는 푸르스트와 이렇게 화해했다.
대학교 3학년 때, 교양과목과제 중 하나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서평쓰기였다.
전체 7권 중 1권만 먼저 도서관에서 빌려가지고 볕살 좋은 창가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장도 채 읽을 수 없었다. 뭐랄까. 원치 않는 스타킹같은 걸 뒤집어 쓴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암튼 도저히 책갈피를 넘기지 못하고 그냥 책을 덮어 버렸다. 
세로줄에 너무 자잘한 글씨여서 도저히 그 긴문장을 집중해서 읽을 수 없었다는 구차한 변명을 남길 수 밖에는.   
그럼에도 어떻든 과제는 제출해야 했으니. 다행히(?)  워낙 방대한 분량이라서 책 내용이 간추려진 요약본도 구하기 쉬웠다. 숙제는 그 요약본을 대충 버무려 제출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프루스트현상(특정냄새때문에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을 설명하기 위해 종종 인용되곤 하는, '주인공이 마들렌 한 조각을 홍차에 적셔 마시다가 잊어버린 기억들을 떠올리게 된다'는 문제의 그 장면. 
어디선가 '마들렌, 홍차 장면' 이 인용된 것을 우연히 읽게 될 때 마다 복숭아씨라도 삼킨 것처럼 가슴이 뻐근해졌다. 친구집에 놀러가서 말없이 집어온 장난감을 여태 돌려주지 못한 기분이랄까.
이것이 '기억'에 관한 첫번째 질문이다.
왜 나는 프루스트 세계 속에 발조차 못들인 것인가.
이 좌절에 대한 '기억'은 항상 먹구름처럼 마음 속어딘가에 드리워져 있다. 사는데 크게 지장은 없지만 왠지 닦아지지 않는 얼룩처럼. 프루스트에 대한 이 기억은 누군가 말한 것처럼 갑자기 꼬리를 흔들며 달려드는 개나 마찬가지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불쑥거리니 말이다.

여름밤 내내 나는 유년시절을 떠올렸다. 통으로 명확히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회상'은 커다란 직소퍼즐 맞추기이다. 테두리 없이 맞춰 나가야 했다. 여간 능숙한 손놀림이 아니고는 헝클어지기 쉽상인 것이다.
밤마다 숫매미가 상대를 찾아 귀찢어지게 울어대는 소리조차 아득해졌다.
나는 예전 이미지들로 기억의 틀을 짜는데 골몰했다.
여기서 두번째 질문, 왜 나는 과거의 '기억'에 집착하는가.
왜 어린시절을 다시금 떠올리려 하는가. 추억의 공간(집)을 다시 속속들이 들어가보고 싶어하는가.
다락방, 부모님의 낡은 물건에서 나던 눅진한 냄새, 지하실에서 나던 그 쾌쾌하고 음습한 냄새를 다시 맡아보고 싶어하는가.
현실도피인까. 아님 기억나는 대로 끄집어 내본 후 다 털어버리고 새로이 마음을 포멧하기 위해서인가.
'기억'을 집요하게 쫓는 '동기'와 '원인' 질문은 계속됐다. 고기 한마리 없는 호수에 드리운 낚시줄처럼 도통 수확은 없었지만.

그러던 중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요즘 부쩍 '철학'을 '심리치료사'나 '구원자'와 동의어처럼 받들어 모시고 싶던 찰나였다.
『문학살롱에 앉아 다양한 커피를 마셔라. '철학적 해석'이라는 특별메뉴에 눈길도 주면서』 라는 친절한 'Tip'을 던져주는, 느슨하고 여유있는 책머리로 책은 시작되고 있었다.
유명한 문학작품에 녹아있는 철학이야기를 어렵잖고 재미나게 풀어나간 덕에 금새 책 한권을 얼추 다 읽게 되었다.
이렇듯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회복하는 와중에 책 마지막 쳅터 '나를 찾는 시간여행, 회상' 편에 도달했다. 묵은 체증처럼 쌓여 있던 오랜 질문에 해답을 찾게 될줄 짐작도 못했지만.
 책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저자는 '기억'의 단초로 SF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예로 든다.
영화 초반에 인간들 가운데 숨은 인조인간을 색출해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에서 인조인간은 외모나 행동으로는 인간과 전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심문관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묻는다. 그러자 기억이 이식된 인조인간은 대답을 포기하고 스스로에게 방아쇠를 당긴다. 여기서 슬슬 '기억'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지가 제시되기 시작.  
  

기억과 회상에 대해 프루스트식으로 풀어본 저자의 글을 보자.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1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썼다. 13년 중 이미 소설 첫 시작인 1권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그가 전 작품을 통해 천착한 문제, 곧 인간에게 기억이란 무엇이며, 어떤 일을 하는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게다가 이것은 13년동안이나 쓴, 7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기억이란 무엇일까? 가령 사고나 마취로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사람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은 깨어났지만, 처음에는 시간에 대해, 장소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무지 상태에 놓이게 된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는 우선 주위 사람들에게 시간과 장소를 묻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려고 사고 이전의 기억을 더듬거리며 찾을 것이다. 다행히 기억을 되찾게 된다면 그는 곧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누구든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은 곧 자기가 누구였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사람은 자기가 누구였는지를 알게 됨으로써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이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흔히 정체성이라고 말하는 인간의 자기동일성을 확보하게 해주는 것이 곧 기억이다.   
 프루스트에 관한 <인간적 시간에 대한 연구> 를 쓴 비평가 조르주 풀레는 
'프루스트 사상에서의 '기억'은 기독교 사상에서 '은총'과 같다. 회상이란 인간이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허무로부터 인간을 구출하기 위해서 찾아온 천상의 구원인 것이다.' 이라고 했다. 
 회상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시간'으로 만드는 일을 한다.
프루스트가 말한 우연에 의한 '무의지적 기억'이 강렬한 쾌감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잊었던 기억들을 떠올려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자기 자신, 잃어버린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무의지적 기억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시간'으로 만드는 위대한 역할을 한다.
회상은 상이한 두 시간, 곧 과거와 현재를 겹치게 하여 새로운 시간을 만들고, 이 시간 안에서 '시간적 입체상'을 '재발견하고 또 느끼게'한다.
회상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은 자연적 공간이 아니며, 그렇다고 여기저기 분산된 공간을 무의미하게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지의 정체성에 합당한 각각의 서로 다른 공간들이 모여 마치 모자이크처럼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를 완성하기 때문에, 이러한 공간 안에서 인간은 비로소 불변하는 자기 자신을 되찾게 된다. 이 같은 의미에서 프루스트는 "장소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의 주인공이 되찾은 삶의 진실은 소설을 쓰는 것이다. 이 글쓰기는 말을 다듬는 장인의 산물이 아니고 '우리에 앞서 이미 존재하는 것'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프루스트가 말하는 '시간의 질서에서 해방된 인간'은 회상에 의해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공간, 그리고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되찾는 인간이다. 이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열등한 존재, 우발적이고, 죽게 마련인 존재라고 느끼지 않는다. 또한 결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느끼는 존재도 아니다. 
 

 올해가 유독 나에겐 힘든 해였다. 나도모르게 무의식중에 과거의 기억을 자꾸 떠올리려 했던 것은 힘든 시간을 지나는 동안 잃어가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었던 것.
나는 조각난 기억들을 통해 옛집을 회상했다. 그 과정에서 과거의 기억과 현재를 나란히 두는 공간의 병치작업이 이루어졌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고 잃어버린 공간을 찾으며 궁극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했던 본능적 몸부림이었달까.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이 책 덕분에  오래전에 싸우고 미처 화해 못한  친구같은 느낌이었던 프루스트에 대한 나 혼자만의 해묵은 감정을 털어낼 수 있었다. 게다가 자꾸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일을 현실도피가 아닐까 여겼던 괜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됐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도 자신도 모르게 심히 과거의 '기억'에 '천착'하게 된다면 너무 괴념치 마시길. 그대는 열심히 과거를 떠올려 현실에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자신의 아이덴티를 찾고 있을 뿐이니. 
 이제 나에겐 세가지 숙제가 주어졌다.  좀 느긋한 맘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다시 읽어보기.  두번째는 프루스트와 똑같은 의미로 공간의 병치를 사용했다고 소개된 러시아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 빌려보기.
마지막은 '우리에 앞서 이미 존재하는 것'을 찾아내기 위한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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