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신당의 살인
김영민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확하지는 않은데, <휴가 좀 대신 가줘>라는 단편으로 처음 만난 김영민 작가는, 이후 <계간 미스터리>에 실린 단편들과 여러 앤솔러지를 통해 만나왔었습니다.


한 작품, 두 작품 따라 읽다 보니 어느새 나름의 ‘내적 친밀감’ 같은 것도 생겼고, 이야기를 확장하고 추리를 주도하는 캐릭터도 갖게 되더니, <수상탑의 살인>으로 제41회 한국추리문학상 대상까지 거머쥔 명실상부 추미스계의 든든한 자리매김하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라는 어마어마한 영화를 내놓고 그 인기와 지지 덕분에, 스타워즈의 나머지  뒷이야기, 앞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의 세계관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확장에 확장을 거듭해 마침내 스타워즈 유니버스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그렇게 김영민 작가도 자기만의 유니버스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존재했던 혹은 대과거롤 향한 작가의 시선이 만들어낸 작품들을 거슬러 찾아 읽는 기분으로 읽는 건 묘한 재미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작가를 만든 흔적들을 시간을 거슬러 하나씩 발견하는 듯한.

“섬은 죽기 딱 좋은 날씨였다.”
- p.9 <해신당의 살인> 中

세 편의 이야기는 모두 시작부터 공간을 닫아버립니다.
죽으려고 찾아간 외딴섬, 머리가 잘린 용왕신과 그 앞의 시체. 통신마저 끊기고 배도 뜨지 못합니다.

<회색 장막 속의 용의>에서는 천식 환자들이 모인 산속 별장을 화학공장 폭발로 발생한 유독성 스모그가 에워쌉니다.

“아는 사람과도 어울리지 못하는데 모르는 사람과 깊은 산속 별장에서 2박 3일을 보내라니 썩 내키지 않았다.”
- p.130 <회색 장막 속의 용의> 中

섬과 스모그. 하나는 바다가, 다른 하나는 공기가 사람들을 가둡니다.

여기에 <불온한 손>은 미술관이라는 일상의 공간을 또 하나의 밀실로 바꿉니다.

“활약상을 보고 싶은데 아쉽네. 우리 갤러리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날 거 같진 않으니까.”
- p.251 <불온한 손> 中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바로 비명이 들립니다.

세 편의 이야기를 더듬어가며 읽노라니, 스멀스멀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그저 초자연의 영역으로 도망쳐버리지는 않겠단 작가의 고집.

용왕신의 저주처럼 보이는 사건도, 누구도 나갈 수 없는 밀실도, 잘린 손목만 남기고 사라진 예술가도 결국 단서와 논리의 세계로 끌려옵니다.
범인을 ‘맞히는’ 재미도 있지만, 도무지 설명되지 않던 일이 하나의 논리 안에서 가능해지는 순간의 쾌감이 더 큽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공간이었습니다.
외딴섬과 스모그 속 별장, 미술관은 단순한 무대가 아니라 범행을 가능하게 하고 동시에 범인을 옭아매는 장치가 됩니다.
섬에서는 기괴하고 음습했다가, 스모그 속에서는 답답하고 불안해지고, 미술관에 이르면 조금 더 경쾌하게 퍼즐을 가지고 노는 듯 합니다.

그래서 인지, 같은 캐릭터가 이끄는 이야기를 따라다녔는데, 물론 모두 각각의 이야기들이지반, 세 번의 다른 추리소설을 읽은 기분입니다.
그럼에도 그 이야기들의 중심에 서있는 규현이라는 탐정을 향하는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의 구심력이 끝까지 힘있게 뻣어나갑니다.

작가의 데뷔작인 <회색 장막 속의 용의>에서 시작해 이후의 작품을 거쳐 <수상탑의 살인>까지 이어지는 시간을 생각하면, 사건을 해결하는 재미와는 별개로 한 명의 탐정과 한 명의 미스터리 작가가 조금씩 자기 모습을 갖춰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맛도 있다 싶었습니다.

그 성장의 정직한 발걸음이 만들어낸, 화려하게 속이는 것보다 차근차근 단서를 놓고, 마지막에 그것들을 하나씩 회수하며, 도무지 불가능했던 사건들을 가능한 이야기들로 마침내 바꾸어 내는 것이야 말로, 추리소설을 읽는 독자가 동물적 후각으로 재미를 발견해내게 하는 힘이다 싶습니다. 

탐정 규현의 활약을 펼치는 그 다음 이야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연명치료는 사양하겠습니다 - 오래 사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떠날 것인가
양성관 지음 / 히포크라테스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적으로 종교적인 이유(?)에서라도 안락사는 동의하지 않지만, 연명치료 거부의 권리는 옹호하는 편입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도 이미 한참 전에 작성한 상태이고.

누군가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도, 그 고통을 누군가에게 짐지우는 것도 저로서는 죄스러운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모습 이대로’ 살아낼 존엄에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의료 현장의 목소리, 환자와 보호자에게 의료지식을 쉽고 편하게 전달해온 책들을 여럿 써온 작가의 신작은, 이 문제적 주제인 연명치료 거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들었습니다. 작가의 선체험적 소재로부터 시작해서 의료계 전반에 숨어있는 모순과 환자와 보호자의 권리에 대해 제한된 지면이지만 입체적이고 종합적으로 담아냈다 싶습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결과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었다.”

-p.6


‘밤새안녕’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는 바로는 밤에 잠자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가끔 이런 죽음을 상상하곤 합니다. 어쩌면 이상적인 죽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고통을 이겨낼, 두려움을 견뎌낼, 가족들에게 부담을 줄 용기가 없어서 였던 것 같습니다.

너무나도 이기적이게도…


이 책에서 저자는, 제목과 달리 독자에게 연명치료 거부를 제안하거나 웅변하지는 않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 법체계와 의료현장의 간극, 그리고 실제 죽음을 앞두거나 맞이한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사례들을 들어가며 우리가 반드시 맞이할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지에 대한 길라잡이의 마중물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질문들과 답들을 예의 친절한 말투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환자와 가족, 심지어 일부 의사마저도 끝까지 싸우는 것이 용기라고 믿는다. 그러면 기적이 찾아올 거라 생각한다. 심장이 멈춰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p.47


희망과 현실, 현실과 진실, 그 외줄타기에 의도치 않게 초대된 이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마음이 쓰이고 남의 일 같지 않게 다가옵니다. 정해진 죽음과 정해지지 않은 시간은 언제나 누구라도 만족할 수 없는 불균형이다 싶습니다.

그러기에 미리 그 상황을 쉽지 않지만 상상하며 그때의 결정과 선택의 방향, 태도를 미리 그려보고 정리해두는 삶이, 덮어 놓고 쳐다보지도 않으려는 삶보다 더 살아있음의 소중함을 알아차린 인생 아닐까 하는 생각에 까지도 이르게 해줍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많은 사회적 문제로 뉴스에 등장하는 가족살인은,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긴 간병의 시간에 몰려서 저지르는 슬픈 우리네 인생의 단면입니다.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제 개인의 경험에서도 그 지독한 외로움과 괴로움은, 가족 간병인의 인생과 마음과 육체를 철저하게 갉아먹고야 맙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있어서는 안될 그 일이 어느 측면에서는 이해와 공감에 닿기도 합니다. 


“기억을 잃고, 가족을 잃고, 끝내 자신을 잊은 사람들이었다. 심장은 뛰고 숨은 쉬지만 눈은 닫히고 말을 사라졌으며, 손은 침대 난간에 묶여 있었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때로는 삶의 연장이 아니라 죽음의 연기처럼 느껴졌다.”

-p.181


한 지인이 부모님 두 분을 모두 작년 초에 요양원에 모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들을 가끔 찾아뵙게 되면, 그 얼굴과 목소리는 여전한데, 전혀 다른 사람들이 그 속에 들어있는 것 같아서, 웃고 떠들고 나와서는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게 된다는...  


그 이야기가 겹쳐지며 이 책은 저에게도 커다란 물음표를 남겼습니다. 


정말 그분들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것일까? 

이게 최선일까?

이 정답 없는 혹은 알아도 모르고 몰라도 알 것 같은 이 질문들을 계속해서 되뇌이게만 됩니다.


#연명치료는사양하겠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양성관 

#사전연명치료의향서 #안락사 

#도서제공 #서평단리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살았으니, 말해야 해요 - 베트남전쟁 아카이브 시집
한베평화재단 엮음 / 사회평론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이 시집은 말한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꼭 기억하라!
- 황석영 추천사 中


… 사과하면 덮일 일인가. 함께 슬퍼하면 될 일인가. 그저 미래를 향해 가자고 말할 수 있는가….

- 김영란 추천사 中


…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입술들이 사라진 몸에 기어코 다시 살을 입혔다…

- 손희정 추천사 中



제게 베트남전쟁은 여러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여러 영화와 문학작품 속에서 폭력의 연장선으로, 때로는 슬픔의 기폭제로, 그리고 가끔은 우스꽝스런 코미디의 배경으로.

그럼에도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욕심이 가져온 무수한 죽음을 생산한 살인과 광기의 시간이자 공간이었다는 것일겁니다. 어쩌면 여전히 진행 중인.


그런 베트남전쟁을 시집의 형태로 기록하는 방식이 우선 독특하게 다가온 이 책은, 그럼에도 책의 첫 추천사에 올린 글들이 끼쳐오는 가슴 먹먹한 슬픔은 어쩔 수 없는 그 시간들의 정체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베평화재단 창립 10주년 기념 시집으로 출간된 이 책은, 그렇게 재단이사인 김남일 소설가의 여는 글에서 실린 시들의 시인들의 전쟁과 얽힌 이야기를 예고편처럼 들려주고, 또 시로 대화하며 도종환과 탄타오의 주고 받은 여는 시는,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도 좋다는 서로의 친구되기의 시작을 감지케 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각자의 위치와 시간에서 바라보았던 그 고통과 분노, 상처의 시공간을

때론 스치고, 때로는 관통하며 노래하고 또 노래하고, 울고 또 울어에는 그 말들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이 아카이브로서의 시집은, 독자로 하여금 동참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작용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저는 읽어내며 계속 또 저만의 노래를 지어 부르고만 있었습니다.

되뇌이며 또 되뇌이는 론도의 시로 지어진 노래를 말입니다.


“서로의 슬픔을 보듬고 서로의 상처를 싸메어주고

그 출구 조차 보이지 않는 길 없는 길을 헤매어

기어코 만나 얼싸 안고 울고 웃는 우리, 우리들”


그래서, 맹호부대 병장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김명인 시인의 1971 발표작 <포복>의 시어들이 자꾸만 제 눈에 어른거려, 젊은 그시절의 제 모습과 겹쳐지고 아리고 쓰라려, 하염없이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책을 덮기도 하였습니다.


‘... 오래도록 소총수 

늘 어둠과 덤불을 헤치며

가까운 곳에로의 평화

스물 다섯 나의 전 생애로

포복하고 있다.’

- p.46, 김명인 <포복> 中


묘하게 짚어낸 제주4.3과 베트남전쟁 중의 양민학살의 피해자로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며 용서하는 포옹이, 그렇게 포복과 단어의 조합이나 모양에 겹치며 더 아릿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오래 전, 조선과 안남의 사행단인 연경에서 서로 시를 주고받은 창화가 여전히 21세기의 우리에게도 사명처럼 전수된 듯 말입니다.


전쟁의 기억으로, 그릇된 시선으로 꺼려졌었던 베트남. 그곳을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간절해졌습니다. 

어쩌면 그곳에서 친구를 만날 것만 같습니다.


#살았으니말해야해요 #베트남전쟁아카이브 #시집 #사회평론

#한베평화재단 #베트남전쟁 #제주4.3

#도서제공 #서평단리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슈퍼리치가 세상을 구한다는 헛소리, 그런데 우리는 왜 그들을 숭배하는가
달리아 나미앙 지음, 조민영 옮김 / 원더박스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받아들자마자 제목을 한참동안 들여다 봤습니다. 꽤 도발적입니다.

슈퍼리치가 세상을 구한다는 말이 ‘헛소리’라니.
그 헛소리 하는 슈퍼리치들을 숭배하는 우리들 이라니. 꽤 불편합니다.

록펠러의 녹색혁명에서 베이조스의 우주여행, 머스크의 화성 식민지까지.
그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후위기와 식량, 심지어 인류의 미래까지 해결하겠다고 나섭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부가 만들어지는 과정입니다.
저임금 노동과 자원 착취, 환경 파괴와 불평등을 통해 축적된 그들의 부가 어느 순간 ‘자선’과 ‘혁신’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시 세상의 구원자를 자처하는 아이러니입니다.

“슈퍼리치는 선구적인 천재이자 하늘이 내린 기업가, 나아가 인류의 구원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 p.8


그래서 첫 번째로 남는 것은 부의 크기가 권력의 크기를 넘어 옳고 그름을 말할 자격으로까지 바뀌는 과정입니다. 민주적 합의보다 한 억만장자의 판단이 더 빠르고 효율적이라는 믿음은 언제부터 이렇게 자연스러워졌을까? 싶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들 일반대중을 매혹하게 하는 ‘선한 부자’라는 이미지입니다. 기부하고 재단을 만들고 기술에 투자하면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그 부를 얻었는지를 쉽게 잊게 만듭니다.
문제를 만들어낸 구조는 그대로 둔 채 그 구조의 최대 수혜자에게 해결까지 맡기는 기묘한 순환입니다.


하지만 가장 날카로운 칼끝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도발 사회는 부자들의 추악한 행동이나 저급한 생활양식을 미화하면서, 거기서 생겨나는 빈곤과 대중의 분노는 철저히 외면하는 사회를 말한다.”
  - p.20

그렇게 가장 불편한 지점인 세번째에 다다릅니다.
요트와 전용기, 우주여행을 비판하면서도 클릭하고, 부러워하고, 언젠가 나도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있기를 꿈꿉니다. 불평등의 피해자가 불평등의 상징을 욕망하는 순간, 시스템은 굳이 우리를 설득할 필요조차 없어집니다.

물론 이 책은 부자를 미워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부를 능력과 동일시하고, 부유함을 성공과 선함의 증거처럼 받아들이며, 또 그 슈퍼리치들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기는 사고방식을 한번 더 의심해보자는 제안을 합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한 다음, 다시 책의 표지를 돌려 펴봅니다.
책 제목이 다르게 읽히는 듯 합니다. 주어가 슬쩍 바뀌어 보입니다.
슈퍼리치가 왜 저러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어쩌다 그들을 저렇게 만들었는가, 라고 말입니다.


#슈퍼리치가세상을구한다는헛소리.그런데우리는왜그들을숭배하는가
#달리아나미앙 #원더박스
#슈헛왜숭
#도서제공 #서평단리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어리석은 자의 독 (애장판)
우사미 마코토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에는 서로 다른 시간에 놓인 사람들의 불행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980년대 무사시노의 저택과 1960년대 지쿠호의 폐광촌, 그리고 다시 현재.

시간은 자꾸 앞뒤로 움직이고 이야기는 좀처럼 하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흩어놓은 조각들이 맞춰지고 전혀 다른 이야기라 여겼던 삶들이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가 됨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반전 자체보다 그 반전을 위해 지나온 사람들의 시간이 뒤늦게 한꺼번에 독자를 덮쳐오는 느낌입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범죄의 이유를 개개인의 악의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가난과 탄광촌의 몰락, 폭력과 차별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착취까지.
누군가는 처음부터 너무 나쁜 패를 받아 들고 삶을 시작합니다. 출발점 자체가 너무 판이하게 다릅니다. 여기서 다름은 틀림으로 읽히게도 합니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지만, 애초에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몇 개나 있었을까 생각하면 선과 악의 경계는 너무 금방 흐릿해져버리고 맙니다.

“가슴속에 독을 품으십시오. 어중간한 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야말로 그 독을 유용하게 쓸 수 있습니다.”
  - p.135

그래서 제목의 ‘독’이란 단어에 한참 멈춰 서게 됩니다.
분노, 상처, 죄책감은 사람을 망가뜨리는 독이지만 때때로 누군가를 지키고 끝까지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한다 싶습니다.

“나도 어리석은 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몸속에 독을 품은 채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 그게 그대로 독으로 남을지, 아니면 약이 될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렇게 살기로 했어.”
  - p.182

결국 이 소설에서 독과 약을 가르는 것은 그것의 성분이 아니라, 그것을 품은 사람이 어떻게, 또한  누구를 위해 사용하는가에 달려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스터리로 시작했다가, 사랑으로 마무리되는 기묘한 이야기,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죄를 공유함으로써 맺어지는 관계, 그리고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버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어쩌면 각자의 사랑.

작가는 그들을 쉽게 용서하지도 단죄하지도 않는 태도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다만 왜 그들이 독을 품게 되었는지를 아주 오랫동안 가만히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래서 진실을 모두 알게 된 뒤의 마음은 통쾌하기보다, 먹먹하고 또한 서늘해집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독은 있을테지요. 그래서, 그것을 품고 어떤 사람이 되어 살아갈 것인가, 그것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느새 가을이 되었습니다.

#어리석은자의독 #우사미마코토 #블루홀식스
#도서제공 #서평단리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