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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ㅣ 나폴리 4부작 3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7년 5월
평점 :
너무나도 여성의 삶을 생생하게 잘 묘사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읽다보니 내가 착각을 했었나보다. 내가 책 속의 범생이 레누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녀가 니노와 떠나기로 했을 때는 책을 덮고 "미친년"이라고 중얼거려 버렸다.
결혼 생활이 지난하여 힘들었다고? 도저히 책을 쓸 수 없는 환경이었다고? 그럼 우리 나라의 대다수 워킹맘들은 본인에게 영감을 주는 남자와 떠나는 것이 합리화될 수 있단 말이야? 아니다.
아쉽게도 결혼이 여성에게 너무나 불리한 체계인 것은 맞다. 더구나 그녀가 살던 1970년대는 더 그랬을 것이다. 페미니즘이 그때서야 태동하였으니 그 전까지 모든 결혼으로 인한 자질구레한 문제들은 여성들이 껴안았을 것이다. 설거지를 남자에게 시키는 것도 안 될 일이었을 거고 모든 세금과 양육은 여자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었으며 남자들은 아내를 섹스의 도구로 보며 집안일을 담당하는 파출부로 보았겠지. 그러나 레누는 깨어있는 시어머니가 있지 않았던가. 그녀에게 유일한 멘토 역할을 할 수 있는 시어머니의 말을 따라서 진작부터 보모를 들이고 아이에게 엄마는 일 하는 사람으로서 안 되는 것은 체념하도록 교육을 시켰더라면 좋았을 것을. 맹목적으로 공부했던 그녀는 모든 면에서 리나보다 우월하게 되었지만 결국은 허상을 붙들고 가정을 파탄내기로 결심한다.
반면 리나는 어떤가. 그녀는 생계를 책임지다 보니 일을 쉴 수가 없었고, 돈이 더 필요해지다 보니 본의 아니게 영리한 머리를 써서 승진을 한다. 물론 기저에 꼬여있는 마음은 계속 꼬여있지만. 내적인 면을 고민하며 갈고 닦아 나가기엔 그녀의 어깨는 너무 무거웠다.
둘이 다른 행보를 보인 이유가 무엇인가. 절박함이다. 생에 대한 절박함. 리나는 하루하루의 삶 자체가 절박했다. 그러나, 레누는 그냥 성공이 하고 싶었다. 말 그대로 '본인은 무언가가 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게 소설 속 레누만 그럴까. 아니다. 난 너무나 평범하다고 생각한 내 친구가 '본인은 특별한 줄 알았다'고 착각했었다는 고백을 하여 매우 놀란 적이 있었다. 나는 그렇지 않은가. 나 역시 '잘난 줄' 알았으나 지금은 평범함에 감사하고 이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인생은 사실은 가혹하다. 그러나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허상을 쫓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본인을 놓지 못한다. 그러나 정작 인생이란 놈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나의 위치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그 시작점에서부터 다시 시작을 하게 된다. 나 역시 인생의 민낯을 보지 못했더라면 오늘도 '심심하다. 자아를 실현하지 못한다. 이 욕구를 어디에 발산할까' 허송세월하고 있었을 것이다.
레누와 리나는 떨어져 살고 있다. 때로는 연락도 잘 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렇다. 한 때는 얘가 없으면 죽을 것 같았지만 이제는 드물게 연락한다. 때로는 그녀가 했던 한심한 말들이 떠올라 고개를 흔들고, 때로는 그녀가 보내준 책을 읽으며 인생의 유일한 벗인듯 감사하고 감격해 한다.
그게 인생이다. 결국은 혼자인 것이다. 레누는 이 사실을 이제서야 받아들이고 있다. 절실한 사춘기를 겪지 못했던 그녀가 결혼을 하고 인생의 민낯을 조금씩 보면서 본인의 인생은 본인의 발자국만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결혼으로 인해 레누의 인생이 꼬인 것일까. 아니다. 원래 결혼은 그러하였다. 그러나 레누가 결혼을 판타지로 생각하고 가족으로부터, 그녀의 촌동네로부터 탈출구로 여겼기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것이다. 그 문제는 그 때 해결하지 않으면 결국 곪다가 터진다. 가족의 문제도, 촌동네의 문제도 본인이 직접 해결했었어야 했다. 그녀는 이제서야 이를 시도하고 있다. 본인이 정리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4권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맹목적으로 공부만 하고 앞만 보고 달리던 친구가 결혼 후에야 사춘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알을 깨고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감동적이었던 장면도 있었다. 리나가 그녀에게 '소설이 거지같다'며 고백하고 울어버린 부분이다. 그녀가 레누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게 아니다. 본인과 동일시하며 진심으로 멋있는 인생을 살길 바랐기 때문에 눈물이 난 것이다. 본인은 무식쟁이이지만 레누는 본인의 공부까지 대신해준 제 2의 리나라고 스스로를 투영하였던 것이다. 너무나 똑똑하고 이기적인 리나도 여지껏 본인과 친구를 완벽히 구분하지 못할 만큼 그녀를 사랑하였고, 미숙한 면모가 보여지는 대목이었다. 이 대목은 친구들의 진심어린 우정이 느껴져서 눈물이 맺혔다.
이제 두 주인공은 인생의 중반을 다시 시작한다. 한 여성은 초졸의 한계를 극복하고 부서장이 되었으며 또 다른 여성은 사랑을 찾아 떠났다. 둘은 오늘도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치열함 속에 공허함을 달래고 있을까. 결국은 '그놈이 그놈'임을 깨닫고 후회로 본인의 허벅지를 찌르고 있을까. 4권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