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사 - 거미는 움직이지 않는다
최윤석 지음 / 팩토리나인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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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사 - 거미는 움직이지 않는다> 최윤석, 팩토리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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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팬은 자신이 동경하는 스타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대신 기억해 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승리에 내 일처럼 환호하고 패배에는 선수보다 더 긴 밤을 설쳐가며, 초라한 내 현실을 스타의 빛나는 성공 뒤에 슬쩍 포개어 위안을 얻기도 한다. 그렇기에 내가 온 마음을 바쳐 동경했던 우상이 사실은 상상도 못할 추악한 괴물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배신감은, 영혼을 뒤흔드는 재난과 같을지도 모른다. 최윤석의 소설 『파우사』는 바로 그 잔인한 배신감의 잿더미 위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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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명관은 심장이 약한 아들의 수술비를 대기 위해 타인의 사고를 수습하고 책임의 크기를 계산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보험조사관이다. 과거 축구선수를 꿈꿨던 그에게 국가대표 최강민은 이루지 못한 꿈의 대리만족이자 아들의 미래였다. 그런 우상의 세계에 우연히 발을 들이며 ‘성덕(성공한 덕후)’이 되었다고 기뻐한 것도 잠시, 명관이 마주한 스타의 민낯은 처참했다. 그에게 맡겨진 일은 스타의 화려한 커튼 뒤에 숨겨진 추악한 비밀을 치우는 배설구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강민의 실체를 보고도 쉽게 발을 빼지 못하는 명관의 모습은 읽는 동안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를 마냥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할 수만은 없었다. 절박한 처지에 몰린 인간에게 기회와 덫은 항상 놀랍게도 같은 얼굴을 하고 찾아오는 것 같다. 아들의 목숨값과 다시는 오지 않을 인생 역전의 타이밍이 얽혀 있는 한, 그것이 썩은 동아줄인 줄 알면서도 쥘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나약함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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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인 ‘파우사’는 공을 잡았을 때 곧장 패스하지 않고, 잠시 템포를 죽이며 상대 수비가 먼저 움직이도록 균열을 유도하는 축구 전술이라고 한다. 겉보기엔 정지 화면 같지만, 실은 가장 폭발적인 공격을 위한 치밀한 대기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명관의 복수 역시 이 파우사를 닮아 있었다. 분노에 휩쓸려 무작정 돌진하는 대신, 촘촘한 거미줄을 쳐놓고 타깃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작가가 제목을 참 잘 지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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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PD가 쓴 소설답게 비주얼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빠른 장면 전환이 돋보였다. 각 장을 전반전, 후반전, 동점골, 역전골로 명명한 구성은 마치 미니시리즈를 정주행하듯 책장을 넘기게 만들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꼬리를 무는 배신과 반전의 밀도가 높아지는데, 특히 모든 서사가 종료된 뒤 찾아오는 결말은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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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를 전혀 모르는 독자라도 인간의 동경이 어떻게 열등감과 탐욕, 끝내는 증오라는 괴물로 변해가는지 그 심리적 붕괴 과정을 추적하는 재미가 상당하다. 이 작품은 인생의 밑바닥으로 떨어진 남자가 거대한 권력을 가진 스타를 무너뜨리는 전형적인 카타르시스 복수극처럼 출발하지만, 정작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건 강민의 몰락이 아니라 명관의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괴물을 잡기 위해 쳐놓은 거미줄 한가운데, 어느새 자신 또한 흉측한 거미가 되어 갇혀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남기는 그런 작품이다.


* 이 책은 샘앤파커스(@samnparkers)에서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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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구락부
이화경 지음 / 한길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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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구락부> 이화경,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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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근현대사 교과서를 펼치면 일제강점기, 해방, 좌우 대립, 미군정, 한국전쟁 같은 건조한 명사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시험 문제를 맞히기 위해 사건과 연도를 달달 외우면서도 정작 그 시절을 온몸으로 통과하던 개인이 아침마다 어떤 마음으로 눈을 떴을지는 딱히 상상해 본 적은 없다. 이화경 작가의 『비밀구락부』는 바로 그 촘촘한 역사의 틈새에서 살아간 '애란'이라는 여자의 펄떡이는 생을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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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아지’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열 살에 민며느리로 팔려 갔던 소녀. 시집이라기보다 일손을 부려 먹는 노예에 가까운 곳에서 학대를 견디던 아이는 기어이 도망쳐 경성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선교사의 도움으로 ‘애란’이라는 새 이름을 얻는다. 이름을 바꾸면 운명의 궤적도 달라질 거라 믿었을 테지만, 시대는 일개 개인이 겨우 마련한 일상을 사정없이 짓밟고 고쳐 쓴다. 여학생이었던 애란은 누군가의 연인이 되었다가, 미군정의 통역사가 되고, 마침내 ‘스파이’라는 위험천만한 이름표까지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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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독서회에서 만난 현욱과의 사랑은 애란의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자 가장 깊은 흉터였다. 평등과 혁명을 부르짖는 현욱은 만인을 위한 해방에는 기꺼이 목숨을 걸면서도, 정작 곁의 여인이 머물 빈자리 하나도 만들지 못한다. 읽는 내내 이 위선적인 혁명가가 참으로 야속하고 답답했다. 왜 대의를 품은 인간들은 눈앞의 구체적인 인간을 외롭게 만드는 걸까? 그럼에도 애란이 그를 끝내 놓지 못하는 마음을 흔한 미련이라 잘라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거듭 버려져 온 이에게 사랑이란 단순한 연애 감정보다 앞선 존재 증명 방식과도 같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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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시대의 말맛을 억지스럽지 않게 살려낸 문장이다. 평양 사투리와 지금은 낯설어진 옛 어휘들이 단순한 장식을 넘어 그 시절의 공기와 인물들의 계급을 생생하게 복원해 내는 것만 같았다. 곱씹고 싶은 문장이 많아 읽는 속도는 더뎠지만, 첩보와 배신이 휘몰아치는 후반부에는 가파른 가속도가 붙어 페이지를 빠르게 넘길 수 있었다. 역사소설의 묵직함과 멜로의 애절함, 장르물의 긴장감이 절묘하게 섞여 있는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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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난 뒤 가장 오래 남는 생각은 타인의 생을 단 몇 글자의 낙인으로 심판하는 일이 얼마나 게으르고 폭력적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는 과거의 인물들을 친일파, 공산주의자, 변절자, 간첩이라는 명사로 쉽게 요약하지만, 그 단어의 두께 밑에는 굶주림과 두려움, 사랑받고 싶었던 필사적인 몸부림이 겹겹이 쌓여 있지는 않나 싶다. 이 책은 그들을 무조건 면죄부로 대변하는 소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낙인을 찍기 전에,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오래 들어보는 건 어떻겠냐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애란이라는 여인의 서사를 천천히 통과하고 나면 이전처럼 모든 것을 한 단어로 쉽게 정의하는 일은 단연 어려워지지 않을까 한다.



* 이 책은 한길사(@hangilsa)에서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비밀구락부 #이화경 #한길사 #서평단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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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과학자 - 우리 곁의 자연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기록한 과학의 순간들
이동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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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과학자 - 우리 곁의 자연을 정확하고 아름답게 기록한 과학의 순간들> 이동주,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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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으로서 일하다 보면 과학자에게 진짜 강력한 무기는 어려운 개념이나 복잡한 구조를 도식화한 그림이라는 생각을 가끔 할 때가 있다. 복잡한 수식과 깔끔하게 정리된 그래프도 중요하지만 직관적으로 와닿게 잘 그려진 그림은 정말 중요하다. 미지의 현상을 처음 마주했을 때, 머릿속에 엉킨 가설을 붙잡아두는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도구는 언제나 선과 화살표였다. 과학자에게 그림이란 아직 언어가 되지 못한 사유를 시각화하는 연구 활동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동주 작가의 『그림 그리는 과학자』는 자연의 비밀을 풀기 위해 기꺼이 펜과 붓을 들었던 관찰자들의 발자취를 추적한다. 카메라가 없던 시대, 그들이 남긴 드로잉은 단순히 대상을 그럴싸하게 베껴 그린 세밀화가 아니었다. 애벌레가 어떤 잎을 갉아먹는지, 해골의 뼈마디가 어느 방향으로 맞물리는지, 새가 바람을 탈 때 날개의 균형이 어떻게 무너지는지까지 포착해 낸 연구 데이터의 집약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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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깊은 잔상을 남긴 인물은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이다. 당시의 전형적인 꽃 그림에서 곤충은 도리어 아름다움을 해치는 불청객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메리안은 생물과 환경을 분리하지 않았다.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번데기를 거쳐, 기어이 나비로 날아오르는 연속적인 시간을 끈질기게 목격했고 화폭 안에 나비의 화려한 박제 대신 살아 숨 쉬는 생태의 서사를 통째로 담아냈다. 그림 한 장이 어떻게 훌륭한 논문이 될 수 있는지를 정말 잘 보여준 사례가 아닌가 한다. 메리 애닝이 땅속에서 건져 올린 어룡의 화석을 복원하고, 훔볼트가 산의 고도에 따른 식생 변화를 한눈에 들어오는 인포그래픽으로 구현해 낸 장면도 놀라웠다. 존 제임스 오듀본은 새를 관찰하며 먹이를 노리며 뒤엉키는 찰나의 역동성을 캔버스에 그려 넣었다. 이들이 그리고 싶었던 것은 생물의 박제된 외형이 아니라 어떻게 움직이고, 무엇을 탐하며, 어떤 환경과 투쟁하는가와 같은 역동적인 순간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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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의 『자산어보』에 담긴 물고기 기록과 신사임당의 초충도, 남계우의 나비 그림을 서양 자연과학의 계보와 나란히 대치시킨 작가의 시선도 반가웠다. 우리는 흔히 사임당의 그림을 가부장제 안에서 소비된 얌전한 교양 예술로 기억하지만, 풀잎 아래 기어 다니는 벌레의 다리 마디를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실제 자연을 집요하게 관찰한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엄청난 사실주의의 산물이었다. 예술과 과학을 오늘날의 잣대로 칼같이 나누기 전부터, 인간은 보고 이해한 것을 그림으로 기록하며 자연을 해독해 왔다. 카메라는 이제 사람이 인지하지 못하는 초고속의 순간까지 담아내고 인공지능은 명령어 몇 줄로 몇 초 만에 그럴듯한 회화를 연성해 낸다. 그럼에도 왜 인간 과학자가 연필을 쥐고 직접 선을 긋는 행위가 사라지지 않는지,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납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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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프레임 안의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수집하지만 그림은 무엇이 본질인가를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그림을 그리는 물리적인 시간은 곧 대상을 본질적으로 이해해 가는 사유의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연구 데이터를 접하며 살아가지만, 나 역시 정작 눈앞의 사물을 이토록 깊은 밀도로 바라본 적이 있었는지 이 책을 읽으며 자문하게 되었다.


🌿

패러다임을 바꾼 위대한 발견의 출발선에는 대단한 고성능 장비가 아니라, 한 생명을 치열하게 관찰했던 인간의 눈동자가 있었다. 책장을 덮고 나니 아파트 화단의 풀 한 포기, 길가의 흔한 벌레 한 마리에게 관심을 가져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함부로 생략하거나 배제하지 않겠다는 다정한 결심일지 모른다.



* 이 책은 위즈덤하우스(@wisdomhouse_official)에서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그림그리는과학자 #이동주 #위즈덤하우스 #서평단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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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 아래서
가산 카나파니 지음, 윤희환 옮김 / 열림원(도서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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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 아래서> 가산 카나파니,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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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는 새콤달콤하고 맛있는 과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샘플북을 읽고 나니, 당분간 오렌지를 이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지는 못할 것 같다. 이 소설에서 오렌지는 풍요로운 고향의 냄새인 동시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땅을 손안에 겨우 쥐고 있는 피난민의 서글픈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것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의 샘플북으로, 수록작 중 「슬픈 오렌지의 땅」과 「네가 한 마리의 말이라면」 두 편이 실려 있다. 짧은 이야기 두 편 이었지만 가산 카나파니라는 거장이 비극을 다루는 세련된 솜씨를 느끼기엔 충분했다. 영문도 모르는 아이의 둥근 눈망울, 어른들의 무거운 침묵, 그리고 바스스 말라가는 오렌지 껍질 같은 사소한 풍경으로 묘한 긴장감과 감정선을 만들어내는 탁월한 작가의 작품이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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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오렌지의 땅」의 어린 화자는 자신이 왜 정든 집을 놔두고 떠나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잠시 소풍이라도 다녀오듯 어른들의 손을 잡고 국경을 넘을 뿐이다. 아이들이 자신들이 '난민'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늘 당당했던 아버지가 굽힌 등과, 차마 아이들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무거운 침묵을 통해서 였다. 실향이란 단순히 주소지가 지워지는 사건이 아닌 것 같다. 매일 아침을 깨우던 익숙한 풍경, 대대손손 이어지던 생업의 자부심, 그리고 내일을 계획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한꺼번에 가루가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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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분홍색 발레복이 그려진 색칠책을 갖고 싶어 눈물 흘리던 소년 마르코의 에피소드가 마음 한구석에 남았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 남자라는 이유로 우는 모습조차 숨겨야 하는, 그 '남자다움'은 대체 누구를 위한 규칙일까?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 것이 단단함인 줄 알고 자란 우리에게, 자기 안의 여린 마음을 솔직하게 마주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강한 인간이라는 아빠의 대답은 잔잔한 울림을 준다. 먼지 쌓인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인 검은 권총과, 그 옆에서 쩍쩍 갈라지며 말라가는 오렌지. 이토록 기묘하고도 잔인한 정물화 같은 묘사 앞에서 숨이 턱 막혔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난민을 숫자와 이동 경로라는 통계로 소비하곤 한다. 하지만 소설은 그 숫자 뒤에 저마다의 정원과, 흙냄새와, 오렌지 나무를 기억하는 지극히 구체적인 개인이 살고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


☀️

또 다른 수록작인 「네가 한 마리의 말이라면」은 앞 작품과는 결이 전혀 달랐다. 미신과 불길한 징조에서 시작하는 탓에 처음에는 기묘한 민담을 읽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저주가 아니라 두려움에 영혼이 잠식당한 아버지의 나약함이라는 걸 알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지만, 아들의 몸에 돋아난 붉은 반점을 볼 때마다 과거의 불길한 예언을 떠올리며 몸서리친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서 중요한 건 예언의 진위가 아니라, 그 예언이 가져다 주는 공포를 내면화해 버린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가에 있다. 한 번 마음에 둥지를 튼 불안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아버지를 괴롭힌 건 아들의 붉은 반점이 아니라, 본인이 과거에 저지른 비겁한 선택과 그에 따른 죄책감이었던 셈이다. 결국 "네가 한 마리의 말이라면"이라는 독백은, 자식조차 편하게 사랑하지 못할 만큼 겁에 질린 한 인간의 비명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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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설은 겉보기엔 전혀 딴판이지만 묘하게 닮은 감정의 흔적을 남긴다는 게 신기했다. 한쪽은 전쟁이라는 외부의 폭력 때문에 삶의 터전을 유린당했고, 다른 한쪽은 공포 때문에 스스로 마음에 지옥을 만들어 버린다. 외부의 핍박이든 내부의 망상이든, 일상이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 인간관계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쓸쓸해지는지 두 소설은 묵묵히 보여준다. 샘플북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온전한 단행본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서... 결국 펀딩을 질러버렸다. 다른 작품들은 어떤 내용일지 정식 출간까지 기다려보려 한다.



* 이 책은 열림원(@chungaram_media)으로부터 샘플북을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뜨거운태양아래서 #가산카나파니 #열림원 #서평단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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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시티피케이션 - 똥이 되어버린 플랫폼의 해부학
코리 닥터로 지음, 박희원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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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시티피케이션 - 똥이 되어버린 플랫폼의 해부학> 코리 닥터로, 흐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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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SNS나 쇼핑 앱을 열 때마다 묘한 피로감을 느낀다. 친구의 안부가 궁금해 켰는데 화면을 가득 채우는 건 생판 처음 보는 이들이 정체 모를 춤을 추고 있는 숏폼과 온갖 걸 팔아대는 광고뿐이다. 기사 하나를 검색하려고 해도 광고 배너와 스폰서 상품을 한참 지나쳐야 겨우 진짜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쓰다 보니 너무 불편해서 앱을 그만 쓰려고 해도 그동안 쌓인 내 인간관계와 사진첩, 결제 정보가 묶여 있어 쉽게 삭제하기도 어렵다. 코리 닥터로의 『엔시티피케이션』은 우리가 매일 겪는 이 끈적하고 막연한 불쾌감에 아주 직관적이고 노골적인 학명을 선사한다. 바로 플랫폼이 기어이 ‘똥(Shit)’이 되어가는 과정, 엔시티피케이션(Enshittification)이다. 원어 발음대로라면 엔'쉿'티피케이션이어야 하려나? 아무튼 처음엔 단어가 과격하다 싶지만, 책을 읽다 보니 이보다 정확하고 세련된 표현은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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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사악하게 태어나는 플랫폼은 아마도 없지 않을까 싶다. 초기에는 친절한 플랫폼들이 많다. 쇼핑 플랫폼이라면 배송비를 대신 내주기도 하고, 수수료를 깎아주며, 창작자에게 수익을 넉넉히 나눠준다. 진짜 비극은 모두가 그 플랫폼 생태계 아네 완전히 갇혀 도망칠 수 없게 된 다음부터 시작된다. 플랫폼은 어느 순간 연결의 허브에서 길목을 막고 통행료를 뜯어내는 검문소로 슬그머니 지위를 바꾼다. 책에 등장하는 아마존의 검색 조작, 애플의 자가 수리 제한, 어도비의 강제 구독 정책 등은 먼 나라 거대 테크 기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장 우리가 매일 쓰는 국내 배달 앱, 포털, 택시 호출 서비스의 변천사만 봐도 같은 전략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엔 없던 광고 팝업이 야금야금 화면을 가리고, 잘 쓰던 기본 기능들이 유료 멤버십 안으로 숨어버리는 과정을 우리는 이미 수없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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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빠르고 똑똑한가에만 감탄하며 열광하기 바쁘다. 하지만 기술의 독창성과 그 기술이 운영되는 방식의 정당성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지금은 눈부시게 편리하고 심지어 무료인 최첨단 AI 서비스들도, 독점 체제를 완성하고 대안을 지워버린 뒤에는 언제든 '엔시티피케이션'의 지옥으로 돌변할 수 있을 것이다. 혁신이라는 달콤한 단어가 늘 소비자의 편은 아니라는 점을 이 책은 집요하게 상기시킨다. 특이한 건 저자는 이 문제를 몇몇 사악한 CEO의 도덕적 결함으로 치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이 마음 놓고 사악해질 수 있는 판이 깔렸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설명한다. 경쟁사가 나타나면 인수합병으로 싹을 자르고 규제 당국은 무기력하게 방관했으며, 서로 다른 서비스를 연결하던 상호운용성은 기술적 빗장 뒤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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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제시하는 해법은 반독점 규제, 데이터 이동권, 상호운용성 같은 제도적인 칼날들이다. 솔직히 거대 플랫폼이 국가보다 강력해진 시대에 과연 이것이 얼마나 빠르게 실현될 수 있을지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개개인이 앱 하나 지운다고 해결될 사이즈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결국 핵심은 적어도 우리에게 도망칠 자유는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비스를 떠나는 순간 내 인맥과 데이터, 구매한 콘텐츠를 전부 포기해야만 한다면 그건 비즈니스가 아니라 인질극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

우리가 플랫폼을 필요로 하는 만큼, 그들 역시 우리가 만들어내는 데이터와 지갑 속 돈을 절박하게 원하고 있다는 팩트를 너무 오래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책은 왜 짜증이 나는지조차 설명하기 어려웠던 우리의 일상적 불쾌감에 정확한 언어를 쥐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상을 호명할 이름이 이제 규정되었으니, 앞으로는 적어도 이 구질구질한 불편들을 기술 발전의 어쩔 수 없는 대가라며 순순히 수긍하진 않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 이 책은 흐름출판(@nextwave_pub)으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엔시티피케이션 #코리닥터로 #흐름출판 #서평단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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