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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구락부
이화경 지음 / 한길사 / 2026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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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구락부> 이화경,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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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근현대사 교과서를 펼치면 일제강점기, 해방, 좌우 대립, 미군정, 한국전쟁 같은 건조한 명사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시험 문제를 맞히기 위해 사건과 연도를 달달 외우면서도 정작 그 시절을 온몸으로 통과하던 개인이 아침마다 어떤 마음으로 눈을 떴을지는 딱히 상상해 본 적은 없다. 이화경 작가의 『비밀구락부』는 바로 그 촘촘한 역사의 틈새에서 살아간 '애란'이라는 여자의 펄떡이는 생을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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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아지’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열 살에 민며느리로 팔려 갔던 소녀. 시집이라기보다 일손을 부려 먹는 노예에 가까운 곳에서 학대를 견디던 아이는 기어이 도망쳐 경성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선교사의 도움으로 ‘애란’이라는 새 이름을 얻는다. 이름을 바꾸면 운명의 궤적도 달라질 거라 믿었을 테지만, 시대는 일개 개인이 겨우 마련한 일상을 사정없이 짓밟고 고쳐 쓴다. 여학생이었던 애란은 누군가의 연인이 되었다가, 미군정의 통역사가 되고, 마침내 ‘스파이’라는 위험천만한 이름표까지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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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독서회에서 만난 현욱과의 사랑은 애란의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자 가장 깊은 흉터였다. 평등과 혁명을 부르짖는 현욱은 만인을 위한 해방에는 기꺼이 목숨을 걸면서도, 정작 곁의 여인이 머물 빈자리 하나도 만들지 못한다. 읽는 내내 이 위선적인 혁명가가 참으로 야속하고 답답했다. 왜 대의를 품은 인간들은 눈앞의 구체적인 인간을 외롭게 만드는 걸까? 그럼에도 애란이 그를 끝내 놓지 못하는 마음을 흔한 미련이라 잘라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거듭 버려져 온 이에게 사랑이란 단순한 연애 감정보다 앞선 존재 증명 방식과도 같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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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시대의 말맛을 억지스럽지 않게 살려낸 문장이다. 평양 사투리와 지금은 낯설어진 옛 어휘들이 단순한 장식을 넘어 그 시절의 공기와 인물들의 계급을 생생하게 복원해 내는 것만 같았다. 곱씹고 싶은 문장이 많아 읽는 속도는 더뎠지만, 첩보와 배신이 휘몰아치는 후반부에는 가파른 가속도가 붙어 페이지를 빠르게 넘길 수 있었다. 역사소설의 묵직함과 멜로의 애절함, 장르물의 긴장감이 절묘하게 섞여 있는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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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난 뒤 가장 오래 남는 생각은 타인의 생을 단 몇 글자의 낙인으로 심판하는 일이 얼마나 게으르고 폭력적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는 과거의 인물들을 친일파, 공산주의자, 변절자, 간첩이라는 명사로 쉽게 요약하지만, 그 단어의 두께 밑에는 굶주림과 두려움, 사랑받고 싶었던 필사적인 몸부림이 겹겹이 쌓여 있지는 않나 싶다. 이 책은 그들을 무조건 면죄부로 대변하는 소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낙인을 찍기 전에,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오래 들어보는 건 어떻겠냐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애란이라는 여인의 서사를 천천히 통과하고 나면 이전처럼 모든 것을 한 단어로 쉽게 정의하는 일은 단연 어려워지지 않을까 한다.
* 이 책은 한길사(@hangilsa)에서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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