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태양 아래서
가산 카나파니 지음, 윤희환 옮김 / 열림원(도서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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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 아래서> 가산 카나파니,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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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는 새콤달콤하고 맛있는 과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샘플북을 읽고 나니, 당분간 오렌지를 이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지는 못할 것 같다. 이 소설에서 오렌지는 풍요로운 고향의 냄새인 동시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땅을 손안에 겨우 쥐고 있는 피난민의 서글픈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것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의 샘플북으로, 수록작 중 「슬픈 오렌지의 땅」과 「네가 한 마리의 말이라면」 두 편이 실려 있다. 짧은 이야기 두 편 이었지만 가산 카나파니라는 거장이 비극을 다루는 세련된 솜씨를 느끼기엔 충분했다. 영문도 모르는 아이의 둥근 눈망울, 어른들의 무거운 침묵, 그리고 바스스 말라가는 오렌지 껍질 같은 사소한 풍경으로 묘한 긴장감과 감정선을 만들어내는 탁월한 작가의 작품이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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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오렌지의 땅」의 어린 화자는 자신이 왜 정든 집을 놔두고 떠나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잠시 소풍이라도 다녀오듯 어른들의 손을 잡고 국경을 넘을 뿐이다. 아이들이 자신들이 '난민'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늘 당당했던 아버지가 굽힌 등과, 차마 아이들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무거운 침묵을 통해서 였다. 실향이란 단순히 주소지가 지워지는 사건이 아닌 것 같다. 매일 아침을 깨우던 익숙한 풍경, 대대손손 이어지던 생업의 자부심, 그리고 내일을 계획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한꺼번에 가루가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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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분홍색 발레복이 그려진 색칠책을 갖고 싶어 눈물 흘리던 소년 마르코의 에피소드가 마음 한구석에 남았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 남자라는 이유로 우는 모습조차 숨겨야 하는, 그 '남자다움'은 대체 누구를 위한 규칙일까?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 것이 단단함인 줄 알고 자란 우리에게, 자기 안의 여린 마음을 솔직하게 마주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강한 인간이라는 아빠의 대답은 잔잔한 울림을 준다. 먼지 쌓인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인 검은 권총과, 그 옆에서 쩍쩍 갈라지며 말라가는 오렌지. 이토록 기묘하고도 잔인한 정물화 같은 묘사 앞에서 숨이 턱 막혔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난민을 숫자와 이동 경로라는 통계로 소비하곤 한다. 하지만 소설은 그 숫자 뒤에 저마다의 정원과, 흙냄새와, 오렌지 나무를 기억하는 지극히 구체적인 개인이 살고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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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수록작인 「네가 한 마리의 말이라면」은 앞 작품과는 결이 전혀 달랐다. 미신과 불길한 징조에서 시작하는 탓에 처음에는 기묘한 민담을 읽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저주가 아니라 두려움에 영혼이 잠식당한 아버지의 나약함이라는 걸 알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지만, 아들의 몸에 돋아난 붉은 반점을 볼 때마다 과거의 불길한 예언을 떠올리며 몸서리친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서 중요한 건 예언의 진위가 아니라, 그 예언이 가져다 주는 공포를 내면화해 버린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가에 있다. 한 번 마음에 둥지를 튼 불안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아버지를 괴롭힌 건 아들의 붉은 반점이 아니라, 본인이 과거에 저지른 비겁한 선택과 그에 따른 죄책감이었던 셈이다. 결국 "네가 한 마리의 말이라면"이라는 독백은, 자식조차 편하게 사랑하지 못할 만큼 겁에 질린 한 인간의 비명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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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설은 겉보기엔 전혀 딴판이지만 묘하게 닮은 감정의 흔적을 남긴다는 게 신기했다. 한쪽은 전쟁이라는 외부의 폭력 때문에 삶의 터전을 유린당했고, 다른 한쪽은 공포 때문에 스스로 마음에 지옥을 만들어 버린다. 외부의 핍박이든 내부의 망상이든, 일상이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 인간관계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쓸쓸해지는지 두 소설은 묵묵히 보여준다. 샘플북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온전한 단행본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서... 결국 펀딩을 질러버렸다. 다른 작품들은 어떤 내용일지 정식 출간까지 기다려보려 한다.



* 이 책은 열림원(@chungaram_media)으로부터 샘플북을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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