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정말 오랜만에 김영하가 내민 칼에 단번에 깊숙이 찔렸고 그 쾌감은 찌릿찌릿하다. 최근 장편들에서 보였던 한끝의 아쉬움을 털고 마지막까지 잘 찔렀다. 김병수가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다음엔 더 잘 할 수 있을 거야.' 라는 희망을 되뇌곤 했다고 묘사했는데 김영하가 그런 마음으로 다음 장편을 쓰곤 했을듯 하다. 그리고 이번 소설은 그 희망이 존재하는 것임을 증명했다. 


  <옥수수와 나> 때부터 전작들과는 달리 묘하게 바뀐 유머코드와 1인칭 시점의 활용이(작가 김중혁의 말을 빌리자면 '1인칭 비관주의자 시점')이 빛을 발한다. 타인을 내려다보며 지은 냉소는 더 날카롭게 자기 자신을 향해 돌아오고 그 앞에서 주인공과 독자는 당황한다. '왜?' 라는 물음을 품고 갈팡질팡하던 주인공과 독자는 자신의 상황을 복기하다 미처 눈치채지 못한 더 큰 존재(삶 혹은 작가)가 씩 웃으며 돌아서는 것을 목도한다. 그 순간 이야기는 끝나고 혼자 남겨진다. 그리고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이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 섬뜩하면서도 짜릿하고 만족스러운 느낌을 어디서 또 받았다 했더니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이다. 아무래도 김영하의 문체나 스토리텔링은 이 정도의 짧은 장편에 가장 적합한 듯 보인다. 전작인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김영하의 단점를 감추지 못한 장편이었으나, 이번엔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다. 먼 길을 돌아 내공을 쌓은 뒤 김영하는 자기가 가장 잘 다루는 칼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나는 제대로 찔렸다. 앞으로도 기꺼이 찔리고 싶다. 즐겁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 - 제22회 스바루 소설 신인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31
아사이 료 지음, 이수미 옮김 / 자음과모음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아마 계절은 아직 가을일 것이다. 석양은 금세 떨어지고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11월 말은 참 미묘한 시기다. 열일곱이라는 나이도 미묘하다. 마음 가는 대로 탁 터놓고 울지도 못하게 된 지 제법 많은 세월이 흘렀고, 지금은 이미 익숙해져버렸을 정도다. p.52

 

1. 울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시원하게 울지 못한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어른인척 하면서 살아간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가. 아마도 고등학교라는 전환점을 돌면서부터 우리의 어른시늉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시절은 까마득하다. 뭐가 그리도 즐거웠을까. 동시에 뭐가 그리도 심각했을까. 그러나 그때의 고민들이 지금보다 얕거나 진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철학적인 질문을 정면으로 바라보았고, 더 예민하게 음악을 들었고 책을 읽었다. 열일곱의 나와 지금의 나는 세상을 보는 시야만 조금 넓어졌을 뿐, 더 성숙해지지는 않았다. 어른인척 하려 애쓰는 나와 당신은, 여전히 열일곱이다.

 

2. 우리는 모두 기리시마.

  책 표지를 본다. ‘기리시마’라는 이름을 기억한다. 책을 펼치고 차례에 적힌 이름들을 주르륵 훑어본다. 어? 기리시마가 없다. 기리시마는 누구인가? 그리고 책을 읽으며 기리시마의 흔적을 찾으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리시마가 누구인지 실체는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각 장의 주인공들의 이야기 속에 스치듯 지나갈 뿐이다. 배구부의 그만둔 주장으로, 리사의 남자친구로, 류타의 친구로. 이렇듯 기리시마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동아리를 그만두자 책에 등장하는 여섯 명의 고등학생들은 모두 조금씩 그 영향을 받는다.

  이야기는 챕터별로 여섯명의 고등학생의 일상을 써내려가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섯명의 고등학생은 각자의 이야기 속에 기리시마가 그러하듯 스치듯 지나간다. 말하자면 옵니버스식 구성이다. 여섯명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이름은 모르지만 쉬는 시간마다 우리 반에 찾아왔던 옆반 남자아이, 어울리던 무리에서 나와 홀로 점심을 먹던 여자아이, 너무 급한 나머지 자기 친구의 짝인 나에게 교과서를 빌려가던 아이 등등. 개개인으로 구성되었지만 고등학교는 하나의 유기체 같은 공간이었다.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가 전학을 가는 바람에 내 교과서가 없어진다던가 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던, 우연과 필연이 엉켜 그것이 일상이던 공간. 그 안에서 우리는 모두 기리시마이다. 불안하게 흔들리며 고민을 하고, 모두와 함께이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결국 고독하고, 인생의 최고 고민인 것처럼 앞으로의 방향을 결정하는 기리시마는 곧 책에 등장하는 여섯명의 고등학생의 모습이고 그것은 곧 지난 우리의 열일곱이다.

 

3. 건투를 빈다.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가 국내에서는 청소년 문학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일본 현지에서는 일반문학으로 분류되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슴이 뛸 대상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인일 것이다. 청소년이 본다면 그저 자신의 일상과 똑같은 일본 고등학생의 이야기에 심심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떠난 시선에서 책을 읽으면 여섯 명의 주인공들의 일상은 무척 귀여운 동시에 애틋하다. 가벼울 수도, 무거울 수도 없는 열일곱의 나이에 조금은 버거운 일상을 떠안고 진지하게 서성이는 여섯 명의 모습은 내 지난날을 떠올리게 만든다. 떠들썩한 고등학교 교실 안에서 나름의 고민 때문에 고독했던 그날의 내 모습. 미래 때문에, 동아리 때문에, 나의 능력 때문에, 마음에 드는 이성 친구 때문에, 사이가 멀어진 친구 때문에 각자의 성장통을 앓는 모습들을 보며 지난날의 데자뷰가 떠올라 아련해진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성장통을 잘 견뎌내고 다시 씩씩하게 내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면서 어른인척 하는 법 또한 익힐 것이고, 서로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괜찮아, 넌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라고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기리시마에게, 여섯명의 고등학생에게, 어른인척 하지만 마음 속에 기리시마를 숨겨둔 나와 당신들에게 건투를 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좀비 제너레이션 - 좀비로부터 당신이 살아남는 법
정명섭 지음 / 네오픽션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과 표지만 보고 흔한 지구종말소재의 소설.txt 라고 생각했지만 이 책은 내 미약한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었다. 이것은 실용서이다. 그것도 지구종말을 대비한 실용서.

  지구가 종말을 맞이한다면 그것은 외계인에 의해서일까 핵폭탄에 의해서일까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의해서일까. 그 무엇이건 인류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생겨날 필연적 생명체는 좀비일 것이다. 아름다운척 착한척 하던 겉모습이 녹아내리고 인간 본연의 추악한 실체만이 남은 이 존재를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한편으로는 또 열광한다. 지금까지 좀비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는 수없이 많았다. 심지어 올해에는 좀비와 사랑에 빠지는 영화까지 나왔다. (물론 그 좀비가 영국산 꽃미남이라 가능했던 결과라고 보인다.)  많은 영상매체들이 좀비의 기괴한 모습이나, 좀비를 피하다가 사랑에 빠진 남녀나, 좀비에게서 주인을 지키는 충직한 개의 모습은 디테일하게 그렸으면서 정작 어떻게 하면 좀비를 잘 이겨낼 수 있는지는 그러내지 않았다. 영화에서 잠깐잠깐 나온 장면들을 조합한 나의 상식에 의하면 좀비를 피하는 방법은 1. 대형마트로 달려가야하고 2. 가는 길에 듬직하고 이왕이면 잘생긴 남자 한명을 꼬셔야 하고 3. 총은 무조건 챙겨야한다. 정도였다.

  <좀비 제너레이션>은 이런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본격 좀비 대처법을 알려준다.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좀비 제너레이션>에서는 좀비사태가 나타났을때 대형마트로 가면 안된다고 말한다. 평상시에도 사람이 많은 곳이기에 좀비사태가 벌어졌을때 이미 아수라장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한다. 또한 좀비와 싸우기에 적합한 무기들을 총기류, 둔기류 등으로 분류해 별점까지 매기며 알려주고 좀비 사태가 일어났을때 챙겨야 하는 물건들 목록을 아주 디테일하게 알려준다. 이것은 자칭타칭 좀비덕후인 남동생도 모르던 소중한 정보이다. 참고로 좀비덕후인 남동생은 <좀비 제너레이션>을 읽으며 몇번이나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정색하고 쓴 실용서는 아니다. 일반적인 실용서적들의 단점은 재미가 없고 이론만 늘지 정작 실천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비 제너레이션>은 추리소설을 여러권 쓰기도 한 작가의 흥미로운 필력으로 좀비사태 발생부터 종료때까지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 중간중간에 좀비대처법이 실용서적의 형식을 빌려 들어가 있다. 그러기에 <좀비 제너레이션>은 재미도 있을 뿐더러 좀비 대처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머리 속으로 그리며 읽어나갈 수 있다.

  지구종말이 온다면 마야인의 예언도, 양치기소년  할아버지인 노스트라다무스의 거짓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지구가 망하고, 핵이 내일모레 터져도 우리는 학교를 가고 출근을 해야 하니까. 언제 망할지 모르는 지구를 위해 방공호를 마련해두고 라면을 사재기하기보다는 유용한 책 한권을 집에 구비해 두는게 훨씬 경제적이고 간편하게 종말을 대비하는 자세일 것이다. 설사 좀비사태가 일어나지 않으면 어떠랴, 시도만으로도 신선한 책을 봤다는 것에 즐겁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처음엔 사건의 흐름과 인물간의 관계를 어떻게든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다가 책의 중반부에 가서는 포기하고 마음 편하게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인과관계를 파악하며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책이 있는 반면, 그 노력을 포기해야 비로소 이해되는 책이 있다.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는 후자에 속하는 책이다.

 

  정규교육과정에서 그렇게 하도록 강요당해왔기 때문에 우리는 책을 읽을 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다. 나 또한 그것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아야미가 누구인지 장님소녀가 누구인지 의미부여를 하며 책을 읽던 도중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낮잠에 들었다. 그러다가 바깥의 소음에 문득 잠에서 깨 혼곤한 정신으로 다시 책을 펼쳤는데, 그제서야 나는 아야미가 사는 도시 속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아야미를 따라 오디오 공연장에 머물다가 부하를 따라 마리아의 편지를 읽다보면 시인 여자를 마주치고 그들을 따라가다 보면 다시 아야미와 장님 소녀를 마주하게 된다. 결국 무더운 도시의 길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고 잃어버린 줄 알았던 길은 내 발 밑에 있었다. 의미를 부여해 이해하는 것만이 독자의 올바른 태도는 아니다. 때로는 작가가 짜놓은 미로를 터벅터벅 따라 길을 잃는 것도 독자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태도 중 하나이다. 그 미로가 몽롱하고 계속 같은 길만 나오는 것 같을지라도,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는 배수아라는 믿음직스럽고 실력 있는 설계사가 짜 놓은 미로이니 마음을 놓고 주위 풍경을 보며 걸어보자. 그러면 당신이 놓치고 있던 것이 보일 것이다.

 

  책을 두 번 읽고 나니 이것은 애초에 입구도 출구도 없는 미로라는 것이 보인다. 작가가 원하는 것은, 또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이 미로의 단면도를 그리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속에서 인물들과 함께 변주하며 반복되는 하루를 보내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 그러면 당신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닌 상태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페마실 - 커피향을 따라 세상 모든 카페골목을 거닐다
심재범 지음 / 이지북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책의 저자인 심재범씨는 인텔리젠시아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고 마신 아메리카노에서 놀라움을 느끼고 바리스타에게 자신의 편견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를 표한다. 나 또한 심재범씨에게 미안함과 감사를 표해야겠다. 솔직히, 책의 제목과 표지를 보고는 ‘그저 그런 감성팔이 카페 홍보책’ 이라고 지레 짐작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처음에 받았던 인상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소위 ‘감성팔이’도 홍보도 들어있지 않다. 대략 350쪽이 되는 이 책의 모든 페이지마다 커피향이 빼곡하다.

 

  일단 이 책은 매우 전문적이다. 앞쪽에 나와 있는 용어 설명을 읽고, 책을 읽으며 인터넷을 검색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를 정도로 전문적이다. 그러나 전문적이라는 것이 곧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커피여행을 다니며 쓴 에세이기 때문에 여행지에서의 에피소드나 설렘이 담겨 있어 커피 용어만 익힌다면 술술 읽을 수 있다. 더군다나 카페의 사진이 자세히 찍혀 있어 커피에 대해 제대로 모를지라도 사진을 보고 글을 읽으며 심재범씨의 정서와 설렘에 동참할 수 있다.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여행 서적은 여행 자체보다 자신의 감성이 우선시되는 바람에 여행지의 정보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카페 마실>은 책의 취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오로지 커피를 위해 여행을 떠났고, 커피와 카페의 정보만 수록되어 있으며 커피의 맛과 카페의 분위기에 대한 평으로 글이 끝난다. 단 한순간도 커피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이 책을 끝마치면 커피도 커피지만 심재범씨의 열정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진다. 모든 것을 내던져 커피를 사랑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도 무언가에 이렇게 미칠 수 있을까 싶어 부럽기도 하다. 자기 일을 사랑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의 모습을 봤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것이 충분히 만족스럽다

 

  이 책은 커피‘여행’이 아니라 ‘커피’여행 책이다.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여행서적을 생각하고 읽었다가는 실망하겠지만, 커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분명 만족할 것이다. 커피도, 책도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나에게 충분한 가르침을 주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