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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정말 오랜만에 김영하가 내민 칼에 단번에 깊숙이 찔렸고 그 쾌감은 찌릿찌릿하다. 최근 장편들에서 보였던 한끝의 아쉬움을 털고 마지막까지 잘 찔렀다. 김병수가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다음엔 더 잘 할 수 있을 거야.' 라는 희망을 되뇌곤 했다고 묘사했는데 김영하가 그런 마음으로 다음 장편을 쓰곤 했을듯 하다. 그리고 이번 소설은 그 희망이 존재하는 것임을 증명했다.
<옥수수와 나> 때부터 전작들과는 달리 묘하게 바뀐 유머코드와 1인칭 시점의 활용이(작가 김중혁의 말을 빌리자면 '1인칭 비관주의자 시점')이 빛을 발한다. 타인을 내려다보며 지은 냉소는 더 날카롭게 자기 자신을 향해 돌아오고 그 앞에서 주인공과 독자는 당황한다. '왜?' 라는 물음을 품고 갈팡질팡하던 주인공과 독자는 자신의 상황을 복기하다 미처 눈치채지 못한 더 큰 존재(삶 혹은 작가)가 씩 웃으며 돌아서는 것을 목도한다. 그 순간 이야기는 끝나고 혼자 남겨진다. 그리고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이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이 섬뜩하면서도 짜릿하고 만족스러운 느낌을 어디서 또 받았다 했더니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이다. 아무래도 김영하의 문체나 스토리텔링은 이 정도의 짧은 장편에 가장 적합한 듯 보인다. 전작인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김영하의 단점를 감추지 못한 장편이었으나, 이번엔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다. 먼 길을 돌아 내공을 쌓은 뒤 김영하는 자기가 가장 잘 다루는 칼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나는 제대로 찔렸다. 앞으로도 기꺼이 찔리고 싶다.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