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형이상학 민음사 철학 에세이
알랭 바디우 지음, 박성훈 옮김 / 민음사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너무나 매혹적인, 너무나 위험한 행복론

 

 

<행복의 형이상학>은 프랑스의 한 노(老) 철학자가 투척한 회심의 ‘폭탄’이다. 하여,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권하건대, 핑크색 (반)양장본 껍데기나 속지에 속아 뭔가 말랑말랑한 책이라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 알랭 바디우가 조제한 이 폭탄의 어마어마한 폭발력은 자칫 방심하면 당신 자신마저 삼켜버릴지 모를 만큼 강력하니까.

 

  

 

먼저, 이 폭탄은 행복에 대한 기존 통념을 산산조각 낸다. 바디우에 따르면,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 요컨대 일상적 욕구를 채워주는 자잘한 보상들(“훌륭한 직업, 적당한 보수, 무쇠 같은 건강, 명랑한 부부 관계 …… 예쁜 아이들”)로 이뤄진 평온한 삶이란 행복이 아니라 ‘만족’이다. 이런 ‘만족’은 “행복의 유사물”일 뿐으로서 가상의 행복, 혹은 ‘상상적 행복’이다.

 

 

이 폭탄은 속칭 멘토들이 설파해온 ‘행복해지는 방법’도 여지없이 박살낸다. 그들은 행복해지기란 쉽다고, 욕심·집착을 버리고 주어진 것에 감사해 하면 행복해진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바디우에게 행복해지기란 일종의 “도박, 선택, 절대적 결단 …… 시련”인바, “상당한 각오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오직 과/감히 행복해지기를 바랄 수 있을 뿐이다.

 

뭘 이 정도로 호들갑이냐 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다. 그렇다. 웬만한 독자들이라면 이 정도의 폭발까지는 충분히 버텨내며 바디우의 논의를 따라왔을 게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바디우가, 대가를 치러야만,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 행복은 ‘만족’=‘상상적 행복’이 아닌 ‘실재적 행복’(bonheur réel)이다. 실로 이 책은 실재적 행복을 설명하는 책이며, 결론으로 수록된 21개의 정의도 이 점을 증명한다. 그런데 ‘실재적’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실재적’이란 ‘실질적’이란 뜻일까? 그러니까 ‘진정한 행복’이 따로 있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그 행복이 진정한 것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판별할 수 있을까? 혹시 ‘실재적’이란 ‘실재에 속한’이란 뜻일까? 흔히 실재란 상징화될 수 없는 것, 혹은 상징계 너머에 있는 것이라 정의된다. 그렇다면 그런 실재의 차원에 속한 행복에 우리는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아니면 ‘실재적’이란 ‘실재로 향하는’ 혹은 ‘실재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이란 뜻일까? 요컨대 어떤 특정한 행복의 상태에 도달하면 우리가 평소에 가닿을 수 없는 실재와 (잠시나마?!) 접촉할 수 있다는 뜻일까? 그런데 왜 꼭 그래야 하나?

 

 

놀랍게도, 아니 당연한 것일 텐데, 바디우는 나름대로 이 모든 질문에 답변을 내놓는다. 이해가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지만, 동의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바디우가 한 가지 답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바디우는 실재를 ‘불가능한 것’이라고도 말한다. 기존의 세계나 관점 안에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그래서 바디우는 “행복은 언제나 불가능한 것의 향유”라고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재는 ‘새로운 것’이기도 하다. 일단 그 모습을 드러내는 한, 적어도 기존의 이 세계나 관점 안에서는. 그런데 새로운 것이 꼭 좋은 것(bon)이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나? 상당한 각오와 위험을 감수하며 겨우 얻어냈는데 그것이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어쩔 텐가?

 

실제로, 다른 곳에서, 이런 ‘실재에 대한 열정’이 지배한 지난 세기가 파괴의 세기이기도 했다고 말한 건 바디우 본인이다. 물론 그때 바디우는 실재에 대한 열정이 파괴의 방향이 아닌 또 다른 방향, 이른바 ‘벗어나는’ 방향으로 향할 가능성(기존의 것과 다른 최소의 차이, 그렇지만 절대적인 차이, 그래서 새로운 것으로 이어질 차이의 창출 가능성)도 동시에 언급했다. 하지만 그때에도, 그렇게 힘들게 도달한 실재=새로운 것에 대한 가치평가는 없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실재라는 것은 그 정의상 그런 가치평가 너머에 있는 무엇일지도 모르겠다…….

 

‘사건,’ ‘진리,’ ‘주체,’ ‘충실성’ 같은 개념을 통해 바디우가 (본인으로서는 최대한) 간결하게 펼쳐 보이는 논의를 이쯤까지 쭉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문득 이런 느낌을 갖게 된다. 뭐랄까, 바디우가 투척한 이 폭탄이 알고 보니 집속탄이고, 처음의 폭발로 떨어져 나와 곳곳에 흩어진 소폭탄들에는 시한장치마저 장착되어 있어서 예상하지 못한 때에, 정신없이 펑펑 터진다는 그런 느낌?

 

 

그렇다. “오로지 불행을 거부하는 데 순응할 것이냐, 아니면 행복을 구하는 모험을 강행할 것이냐?”라고 재촉하는 이 책 <행복의 형이상학>은 바로 이런 책이다. 행복에 관한 우리의 통념을 속 시원하게 박살내주기 때문에 너무나 매력적인 책. 그러나 더 읽으면 읽을수록 곳곳에서 끊임없이 질문의 질문의 질문을 낳게 하기에 우리의 평정심을 뒤흔드는 너무나 위험한 책.


더더욱 이 책이 너무나 위험하게 느껴지는 건, 이미 만사가 더할 나위없는 막장인 세상인지라, 실재적 행복을 향한 저 어려워 보이는 길조차도 너무나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결국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될지언정, 아니 중도에 포기할지언정, 그 길을 향해 가봤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만큼 바디우가 말하는 실재적 행복은 매력적이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