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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정원 - NT Novel
가노 아라타 지음, 유경주 옮김, 신카이 마코토 원작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아, 행복하다.
세상에 단 한 명만 남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런 시간이 굉장히 좋다. 나는 모르는 사이에 그 정도로 지쳐 있었던 것같다. 이시간이 계속 이어지면 좋을 텐데, 생각했다. 흐린 하늘과 빗방울 소리와 아무도 없는 넓은 정원을 언제까지고 독점하고 싶다. (17p)
비오는 날에는 조용한 도서관에서 따스한 믹스 커피 한 잔과 함께 책을 읽는 것만큼 행복할 때가 없다 여겼던 나에게 <언어의 정원> 속 타카오가 만끽하는 행복의 모습은 또 다른 힐링으로 다가왔다.
비오는 날은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이라고 스스로 정한 타카오. 고등학생이지만 자기만의 룰을 만들어서 비오는 날이면 학교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는 그이다.
부모의 이혼으로 형과 엄마와 생활하지만 엄마는 자주 집을 나가서 다른 남자와 생활하기에 언제 집으로 돌아올지 모르는 상태로 형과 둘이서 지내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타카오는 구두에 관심이 많으며, 구두를 닦는 것도 수준급에 자신의 신발도 만들어 신을 정도로 재주가 좋은 친구들도 인정하는 구두장이이다.
'장마라....곤란한 걸. 당분간 학교에 갈 수가 없잖아.'
우천을 무릅쓰고는 학교에 갈 생각이 없면서 비오는 날이면 집을 나서서 향하는 공원에서 이상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이상하다는 건 타카오의 기준에서의 이상함으로 볼 때마다 맥주를 마시고 있는 그녀에게 관심이 있다면 매번 다르게 신고 있는 구두였다.
비싸보이면서 기성품이 아닌 제작된 구두를 신고 있는 그녀. 여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우렛소리 희미하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면 그대 붙잡으련만
여자는 알 수 없는 위와 같은 소리를 읊은 뒤 자리를 떠나고 운율이 있는 것을 보니 단카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기며 여자가 읊은 단카(일본 전통 시구의 한 형식)같은 것을 타카오는 자신의 노트에 메모했다.
그렇게 그녀와의 첫 대면 후 비오는 날 공원을 갈 때면 그녀를 보게 된다.
평일 낮부터 입장료를 내는 공원에서 맥주를 마시고, 초콜릿을 먹는 상식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정상이라 할 수 없는 그녀는 늘 이쁘고 단정한 헤어스타일과 화장을 하고 주문 제작한 듯한 정장에 깔끔한 구두를 신은 갈 수록 정체가 궁금한 인물이다.
'만약 비가 온다면' 다시 만나자는 어쩌다가 아는 사이가 된 이름도 모르는 여자.
그런 그녀는 비오는 날이면 그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공원의 의자에서 맥주를 들고 앉아 있으며, 그녀와 대화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타카오도 그녀가 신기하고 묘한 감정을 갖게 되는데....
사람을 기다리는 건 마음이 술렁이는 일이다.
모든 시간을 상대에게 바치는 느낌이다.
둘이 있을 때에는 시간을 반으로 나눠 서로에게 바치고 있다. 그러니까 공정하다. 하지만 남을 기다리는 시간이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168p)
우연하게 만나서는 이제 아는 사이가 되었지만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정작 없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처음과는 다른 감정으로 어느 덧 그녀의 존재가 타카오의 마음에 자리잡게 된다.
싱그러움이 느껴지는 표지의 <언어의 정원>은 비오는 날의 공원이라는 시간과 장소를 매개로 구두를 좋아하는 타카오와 신비로움을 간직한 정체불명의 여성 사이의 이야기라는 점이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극했다.
이후 밝혀지는 그녀의 정체와 가슴 아픈 사연을 통해 그동안 그녀가 보여주었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작가가 묘사하는 비오고 난 뒤의 싱그러운 풀내음이 가득한 숲 속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언어를 통해 표현된 것을 머릿 속으로 그려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었던 이 소설은 나에게 또 다른 힐링감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