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콜은 사양할게요
김유담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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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연극에 종종 비유하곤 하지만 인생은 연극이 되기에 너무 무겁다. 삶이라는 무대에 올라 각자의 역할을 맡아 최선을 다해 연기하지 않으면 실패할 것이고, 커튼콜을 받을 수 있는 배우는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무대에서 제대로 된 연기를 펼치지 못했을 때 받는 충격은 비할 바가 아니다. 연극 배우는 무대 밖에서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다른 삶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다르다.

연희는 대학 시절 연극 동아리에 모든 것을 바쳤다. 프랑스에 가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불문과에 진학했지만 학과 공부보다는 연극 동아리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무대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것에 매혹되었던 것이다. 소연 언니와 장미도 그곳에서 만나 친해졌다.

소연 언니는 불문과에서 최고 학점으로 장학금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면서도 연극 동아리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지금 열심히 살지 않고 놀면 인생이 망할까봐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다. 졸업 후에는 은행에 들어가서 그곳의 분위기와 수준에 맞는 소비를 하고 스펙을 갖추며 살아간다.

연극 무대가 삶 자체였던 장미는 졸업을 한 다음에도 극단에 들어가서 연극을 계속 했지만 적당한 배역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늘 겨우 생계를 이어갈 정도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무대에 오를 기회가 생기기를 바랐다.

학교에 다닐 때는 연극에 빠져서 현실을 잊고 있던 연희는 졸업과 동시에 삶이 망할까봐 불안해서 연극을 하고 싶어하면서도 출판사에 취업을 해서 고달픈 신입사원의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삶이 힘들 때마다 셋에게는 두번째 정기공연이었던 <하녀들>을 함께 이야기했다. 장 주네의 부조리극인 <하녀들>은 등장인물이 세 명 밖에 되지 않았다. 클레르와 솔랑주르는 이름을 가진 두 명의 하녀, 그녀들의 주인인 마담. 두 하녀는 마담의 삶을 동경하고 마담을 따라하고 싶으면서도 질투했다. 마담이 없을 때는 마담의 옷을 몰래 입고 마담의 말투를 흉내내며서 다른 삶을 연기했다. 결국 그들은 동경과 증오의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마담을 독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자신들이 파국을 맞게 된다. 연극에서 연희는 솔랑주, 장미는 클레르, 마담은 소연 언니가 맡아서 연기했다. 부조리극 특유의 난해함 때문에 해석이 어려웠지만, 그만큼 추억이 남았다.

연희의 말대로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다. 각자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고비를 맞을 때마다 연희는 그때 연극을 더 이야기했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시간에 영원히 남아있을 불멸의 무대를.

소설을 읽으며서 감탄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상황이 잘 드러나는 대사와 행동에서 만들어지는 생생한 캐릭터와 현실의 상황과 과거 연극을 교차시키는 연출력이 짧지 않은 소설임에도 지루하지 않게 해주었다.

아주 성공적인 무대가 아니면 커튼콜을 받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오늘을 연기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무대에 올라 맡은 역할을 잘 해내기 위해 노력한다. 잘 하지 못하면 다음 무대에 오르기 어렵고 그러면 영영 잊힌 사람이 될 테니까.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유쾌한 상황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뚝, 하고 전환되는 순간이 있다. 삶의 부조리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연극을 삶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바친 사람에게 돌아오는 것이 결국 비참한 생활과 쓸쓸한 죽음이라면, 꿈꾸는 것을 향해 나아가라는 말을 믿고 따라가도 될까.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 삶이 끝날 때까지 연극은 끝나지 않을 것이고 각자 맡은 배역에 맞처 최선을 다해 연기해야 할 것이다. 부조리극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 연극일지라도.

『탬버린』, 『이완의 자세』에 이어 ‘청춘 삼부작’의 완결편으로 불리는 이 소설은 부모 세대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살지 못하는 세대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청년 세대의 고민과 갈등, 방황과 실패를 무겁지 않게 유머가 섞인 리듬감으로 강약을 조절하여 보여주고 있다. 청년 세대를 향한 따뜻한 위로와 응원이 담겨 있어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연극과 현실을 교차시키며 보여주는 방식도 슬프면서도 독특하게 재미있다. 김유담 작가의 다음을 기대하게 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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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술사
박은주.양지열.김만권 지음 / 미디어샘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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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우리가 언론을 소비하는 형태는 더욱 다양해졌다. 동시에 편협해졌다. 다양과 편협이 나란히 공존할 수 있는 단어인가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럴 수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이후 타인과 실제로 접촉하는 기회가 적어졌다. 비대면으로 사람을 만나고 개인적으로 미디어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결과적으로 언론은 다양해질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각 개인은 자신이 선택한 미디어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내가 선택한 채널과 유사한 많은 양의 채널 속에서 유영하며 정보를 접한다. 아무리 채널이 많더라도, 내가 원하는 유사한 채널 속에서의 정보는 편협할 수밖에 없다. 자신은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한쪽으로 치우칠 때가 많다. 편견을 가지고 프레임에 갇히기 쉬운 구조가 되는 것이다.

 

 제4의 권력이라고 하는 언론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때이다. 하지만 언론이 제 역할을 하고 있냐고 물어보면 나는 당연히 고개를 세차게 저을 수밖에 없다. 예전에는 언론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정당하다는 것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하지만 매체가 발달하면서 우리는 기존 언론에서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내용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물량공세로 하나의 이슈를 끌어가고 다른 뉴스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들끓게 만들다가 어느 순간 태세 전환을 하는 언론. 무게가 비슷한 두 개의 사건이 있는데, 한쪽의 사건에는 돋보기를 들이대고 다른 한쪽의 사건은 안경마저 빼고 보는 언론. 사실의 일부를 숨기고 일부를 과장시키면서 진실을 왜곡하는 언론. 권력을 행사했던 만큼 책임을 져야한다는 논의에는 독재라는 푯말로 책임의 꼬리를 슬그머니 내리려 하는 언론.

 

 언론의 여러 문제점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제목으로 장사를 하고 포털로 도배를 하고 따옴표를 끌어오면서 책임을 미루기만 하고 의도적인 오보를 하는 언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언론인은 여느 직장인과 같은 것인가. 언론의 사명은 증발할 것인가

 물음표를 던지고 싶은데 대답해줄 만한 곳은 없었다.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시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중요했다. 우리가 도둑맞은 진실을 찾아야 했고 프레임에 갇혀 눈뜬장님으로 보냈던 시간을 되돌려야만 했다.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다.

 

*

 

언론술사는 우리 언론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방송국 PD, 그림 읽는 변호사, 책 읽는 정치철학자가 각자의 시선으로 언론과 관련된 이슈를 해석하고 있다. 각자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의 관점은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흥미롭다. 이슈에 대한 설명과 역사적으로 유명한 그림과 책에서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려는 여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비난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저자들은 말한다. ‘진실에 이르는 길을 함께 찾아보자라고.

 


우리의 길이 옳다는 말이 아닙니다탈진실의 시대, ‘언론술사들;의 시대에 진실에 이르는 길을 함께 찾아보자는 겁니다이 세계가 여전히 사시르이 공유 속에 작동할 수 있또록언론이 그 역할을 굳건히 다해주길 간절히 바라며 이 책을 펼쳐 든 여러분을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합니다.

[언론술사]

 

 그 마음이 진심이라고 여기며 책을 펼쳤다

각 장을 읽으면 내가 무관심으로 지나쳤거나 무비판적으로 흡수했던 사건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언론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현재진행중이며, 가장 뜨겁고 치열하게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그렇기에 더욱 바라는 주제이다.

 

*

 

책에 나오는 이슈들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읽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슴 아프게 짚었던 이슈는 아동학대 사건을 다루는 언론이었다.

 

우리 언론이 더는 지체하지 말아야 합니다현장 취재와 심층보도로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의 삶을 직접 마주하고 기사를 써야 합니다그래야 우리 아이들 생명의 골든타임을 놓치는 과오를 더 이상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요.

[언론술사]

 

 

 ‘아동학대 사건의 골든타임에 대한 글의 일부이다

박은주 pd는 우리 주변에서 학대를 받는 아이들 인생의 골든타임을 지켜줄 책임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는 말과 함께 아이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언론의 역할은 그 어떤 때보다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처음에 정인이 사건으로 명명되었다가 피해자 중심으로 보도되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이어지자 양천 아동학대 사건으로 불렸던 사건이 뉴스에서 떠들썩하게 다룰 때마다 아이가 겪었을 고통과 가해자들의 잔혹성에 대해 분노를 느끼면서도, 뭔가 어긋나고 있음을 감지했다


 분노하고 안타까워하고 후회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인데,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심각한 사회 문제에 대해 언론이 공론장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일 터인데, 무엇인 문제일까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처음과 달리, 언론은 사건을 대량소비만 하고 있던 것이었다. 끔찍한 학대의 장면을 담은 자극적 보도와 가해자들에 대한 형량 강화를 피상적 접근과 입장 전달식 보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제야 과거 언론이 아동학대 사건에 보였던 태도가 떠올랐다입에 올리고 싶은 않은 수많은 아동학대 사건들이 떠들썩하게 소비되었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던. 당시의 사건들 이후 우리 사회에서 달라진 점은 무엇이고 사건 가해자들은 어떤 처벌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경쟁적으로 보도를 쏟아낸 뒤에 무대는 끝난 것인가. 한차례 몰아친 폭풍처럼 그렇게 끝내버리면 남는 것인 무엇일지. 언론이 떠나고 텅빈 무대를 바라보는 심정이 될 때가 많았던 것 같다. 자극적인 보도에 집중하지 않고, 정말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고 아이들을 구할 수 있는 보도를 집중적으로 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해졌다.


아이들이 잘 성장하려면아이들만 잘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과 사회도 잘 성장해야만 해요아동과 관련된 보다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보도들이 언론에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여기에 또박또박 궁서체로 적어둡니다.

[언론술사]

 

 

 골든타임은 모든 상황에서 존재한다

아이들의 생명을 지키는 골든타임을 지키는 것처럼 언론의 골든타임을 지켜야 한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전에 신뢰를 찾기 위해 부끄러운 부분을 감추지 말고 고치려는 노력부터 해야할 것이다.


 우리나라 언론 신뢰도가 낮은 이유를 언론 스스로 깊이 깨닫는 계기를 만들 수는 없겠지만 많은 시민들이 언론의 문제를 공론화시켜서 언론 스스로 쇄신하는 분기점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단 한 줄이 남아 있을지라도 울ㄹ림을 만들어낼 수 있따면 포기할 수 없습니다. 주어진 자유로 엉뚱한 곳으 ㄹ헤매다 지쳐 쓰러질지라도 우리는 언론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 없습니다.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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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강 - 이미지의 시대를 연 사진가 머이브리지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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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시간의 강물을 정지시키는 방법이 사진이었다면, 영화는 흐르는 시간의 강물을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으며 심지어 거슬러 오르는 회귀와 다가오지 않은 미래까지 헤엄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 장치이다. 그리고 시간과 함께 공간이 따라오고,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어간다. 세계가 고정되어있지 않으며 자연은 예측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의 변화도 사진에서 영화로 넘어가는 변화의 시대에 생겨난다.

사진, 철도, 전신. 이전 세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키는 데 핵심에는 그것들이 자리잡고 있다.

빛과 어둠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의 강’을 처음 포착했을 때에는 머이브리지도 시공간을 낚아서 계획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미처 못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머이브리지는 흘러가는 것, 변하는 것, 고정되지 않은 것에 지속적으로 관심으로 보였다. 마차사고로 인한 뇌 손상이 가져온 천재적인 재능은 머이브리지에게 ‘동작’에 대한 꾸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을 연속적인 동작으로 촬영하여 인식하지 못했던 순간에 대한 눈을 밝히며 영화의 시대를 열 수 있는 가능성을 이끌어주었던 머이브리지. 그에게 그런 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던 스탠퍼드.

리베카 솔닛은 <그림자의 강>에서 머이브리지의 생애, 특히 그가 찍던 사진이 영화로 발돋음할 수 있었던 시기를 이야기로 풀어냈다.

머이브리지의 평전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책은 딱딱하고 교훈적인 분위기는 전혀 없으며 소설적이면서 시적 문장과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생동감과 입체감이 있다. 머이브리지와 스탠퍼드가 활동하던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의 태동과 발전하는 모습을 당시 역사적 상황들-철도를 놓고 관광객을 유치하여 자연의 풍광을 보여주기 위해 아메리카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을 보호라는 명목상 이름표를 붙인 채 쫓아내고 좁은 곳으로 몰아내고, 평원을 질주하던 버펄로를 사냥하여 공장으로 보내어 컨베이어 벨트로 만들고, 물에서 헤엄치며 집짓기를 하던 비버를 신사용 팰트모자로 만들며 생태계를 파괴-과 복잡한 뜨개질을 하는 것처럼 올이 풀리지 않도록 잘 이어나간다.

다양하면서도 정교한 무늬가 배열된 올이 촘촘한 스웨터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보는 것처럼 리베가 솔닛의 <그림자의 강>은 사진이 영화로 나아가고 철도 밖으로 펼쳐지는 속도가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시대,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캘리포니아를 머이브리지, 스탠퍼드 뿐 아니라 역사적 변화에 동참한 주요인물들을 등장시켰다가 퇴장시키며 교묘하게 엮어간다.
풍성하면서도 깊이있는 통찰력을 보여주는 이 책에서 나는 영화의 세상을 열어준 머이브리지 뿐 아니라 시공간이 소멸한 자리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인간과 세계의 탄생까지 볼 수 있었다.

보들레르는 “사진은 암시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 말은 여러 사진들을 거치며 금세 낡은 것이 되어갔다. 더구나 그 중심에 머이브리지가 있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쉘 프루스트의 소망은 기계 장치에 올라타는 것으로도 복원할 수 있었다. 물론 개인의 기억을 기계에 고스란히 복사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한 일이지만.

미국이 새로운 세계 속에서 정체성을 찾는다는 명분 아래에서 삭제된 과거를 읽어나갈 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강대국의 횡포가 떠올랐다. 권력은 소수에게 집중되었고, 수많은 다수는 권력의 희생자가 되어 늘 시간에 쫓기고 가난과 억압에 시달려야했다.

“새로움은 미국의 정체성에서 아주 두드러지는 특징이었다. 스스로를 에덴동산 같은 갓 태어난 풍경 속에서, 무한한 자원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채 이제 막 새로 시작하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의 새로움이었다. 19세기 미궁니들은 그 신선함을, 그들의 묘사에 따르면 타락한 채 쇠퇴하고 있던 유럽의 분위기와 비교하기를 좋아했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문화적 궁핍함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를 나타내는 지표가 되었다. 거기서 캘리포니아나 서양사의 다양한 삭제가 이루어졌다. 원주민들을 삭제하고, 자원이나 다양한 생물, 기록을 삭제했다. 서부로 온다는 건, 어느 정도는 과거를 버린다는 의미였다.”
-<그림자의 강> 중-

“상심의 기술, 심령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 사이의 고통스러운 간극을 건너는 다리를 세우는 기술이며, 시간이라는 외상을 물리치기 위한 기술이었다. 모도크족의 상심은 자연 세계는 물론 특정한 장소, 그리고 자신들의 문화와 공동체 전체와 관련한 것이었던 반면, 원주민들의 상실을 만들어내고 거기서 이익을 취했던 사람들의 상심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그림자의 강> 중-

수많은 이야기 중 세라 윈체스터가 기억에 남는다. ‘서부를 쟁취한 총’을 만들어 아메리카원주민들을 많이 죽게 만든 인물의 부인. 남편의 총 때문에 무참하게 죽어간 원주민들의 영혼을 막아내기 위해 미로처럼 복잡한 저택을 만든다. 160개의 방은 계획대로 만들어지지 않아서 창문 밖이 다른 방이 나오거나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하는 계단도 있다. 아무도 방을 제대로 찾아갈 수 없는 그 집에서 세라는 파란색 방에 홀로 앉아 교령회를 연다. 거대하게 부풀어오르는 자본 속에서 고독하게 영혼과 대화를 시도하며 늙어가는 세라.

이 일화는 어쩌면 새롭고 자유로운 기반 위에서 펼쳐지는 캘리포니아의 신세계는, 인간의 속도가 물질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벌어지는 틈, 간극에서 벌어지는 모순과 그로 인한 비극의 축소판이 아니었을까.

“예술적인 장점을 평가할 때 작품과 예술가 본인의 사적인 삶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지는 우리 시대의 질문이다. 중요한 것은 개인사의 파편이 아니라 작품 안에 담긴 윤리-물론 이 둘은 절대 무관한 것이 아니지만-이다. 예술에는 항상 예술가의 흔적이 남게 마련이다. 머이브리지의 사적인 삶을 대변하는 소외는 그의 사진에서도 분명하게 보인다. 사진에서 보이는 독립성은 이단아였던 그의 삶의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머이브리지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거장다운 명징함은, 재판정에서 드러난 감정에 휩싸인 인물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역사의 ‘위인’ 이야기들이 근래에 많은 공격을 받고 있다. 하지만 머이브리지를 살펴봐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그가 없었다면 영화 매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있었기 때문에 영화의 근원에 관한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재능은 다른 데에서도 생겨날 수 있었겠지만, 그러한 재능을 가진 특정 인물의 흔적은 그렇지 않다. 머이브리지에 대한 반응은 복합적이지만, 덕분에 그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흘러 다니는 이미지’의 시대를 낳은 완벽한 선조가 될 수 잇는 것이다. 놀라움의 시대, 진부함의 시대, 타락의 시대, 화려한 볼거리와 사악함의 시대, 되돌릴 수 없는 상실과 극적인 성취의 시대 말이다.”
-<그림자의 강> 중

리베카 솔닛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한때 새로운 세계로 급변했던 캘리포니아를 찾는다. 특히 작가의 관심은 철도 확장으로 인해 쫓겨난 모도트족로 향한다. 툴레 호수는 모도트족에게 세상의 중심이었지만 작가가 현재 다시 찾은 그곳은 세상의 씁쓸한 모퉁이에 불과했다.

실재와 재현이 혼재되어 혼란스러운 요즘이다. 머이브리지 이후로 시공간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우리는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속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시간이 돈이고 금이다, 는 말이 명언이 되었고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은 무능력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가늠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선택은 불가피하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어느 곳에든 올라타야 한다. 다만 이제 말도 마차도 기차도 아닌, 인터넷 속도에 맞춰 올라타야하기 때문에 숨이 가쁘고 속도에 대한 멀미가 공황장애처럼 나타날 수 있다는 부작용이 있지만.

“머이브리지는 몸과 장소를 재현으로 변환하려고 했다. 그 시도는 어떤 면에서는 풍경이나 지리, 아름다움, 실체, 그리고 감각적인 삶에 대한 충족되지 않는 갈망을 채워주었다. 하지만 황금 못에 망치질을 했던 스탠퍼드는 시간과 공간을 무자비하게, 그 과정에서 잃어버릴 것들에 대한 고려 없이 철저하게 소멸시키려 했다. 아마도 그것이 할리우드와 실리콘벨리의 차이일 것이다. 할리우드는 영화 세계의 중심이 되었고, 실리콘밸리는 정보기술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이 두 장소가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에 캘리포니아가 현대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 소멸한 세계, 뭔가 분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해체되고 탈장소화되고 비물질화된 세계, 중심이라는 개념 자체가 혼란스러워진 세계이기도 하다.”
-<그림자의 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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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오구니 시로 지음, 김윤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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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환자이기 전에, 사람이잖아요."

방송국 PD로 일하던 오구니 시로 씨는 우연한 기회에 나고야에 있는 치매 간병 시설을 취재하게 된다.
원래 기획되어 있던 취재분의 촬영에 문제가 생겨서 급하게 취재대상을 찾던 중 누군가의 소개로 가게 된 곳이다.
오구니 시로씨는 나고야의 간병시설인 그룹 홈을 취재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치매'와 실제 보는 '치매'의 다른 점을 느끼게 된다. 취재 전까지, 시로 씨의 머릿속에 있던 '치매'는 기억을 잃고 자꾸 집을 나가거나 폭언을 하고 환각증세가 나타나는 무섭고 슬픈 병이라는 생각과 함께 '위험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그룹 홈에서 취재를 하는 동안 치매의 다른 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각자 맡은 일을 하고 함께 시장을 보러 나가는 일상적인 일들을 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은 평범했다. 그곳의 책임자인 와다 씨의 보이지 않은 노력이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겠지만 주변에서도 흔쾌히 받아주었기 때문에 어르신들은 치매를 앓기 전과 변함없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그룹 홈의 책임자인 와다 씨.
그는 30년이 넘도록 간병 시설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인데, 취재가 진행되는 동안 시로 씨에게 병 시설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장 큰 문제는 비용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해를 얻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그때마다 정중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그런 시로 씨는 치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게 치매란 벌레가 달라있는 것일 뿐.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은 변함이 없다. 거기에서 시작하라."

오구니 시로 씨는 그곳에서 어르신들이 직접 만든 요리를 강렬한 위화감과 함께 대접받았다고 한다. 분명 그날의 점심메뉴는 햄버그스테이크였는데, 식탁 위에는 물만두가 놓여졌다. 순간 놀랐지만, 자신이 '이거, 실수한 거죠?'라는 말을 꺼내면 그 말 한마디로 와다 씨와 어르신들이 그동안 싸하온 삶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말을 삼켰다다. 그리고 그 순간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이라는 키워드가 생각났고, 그것은 5년 후인 2017년에 실질적으로 문을 열게 된다.

2012년 나고야의 그룹 홈에서 얻은 아이디어는, 2016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실행하게 되어, 2017년 6월 3일과 4일, 도쿄 시내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을 빌려 시험적으로 오픈한다.
시로 씨는 많은 회의를 거쳐, 실수를 일부러 내세우는 방식은 치매를 희화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가장 중요한 원칙 두 가지를 내세운다.
첫째, 식당답게 음식의 질을 고집하기(멋있을 것, 맛있을 것)
둘째, 실수가 목적이 아니다. 일부러 실수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에서 주문을 받는 직원은 모두 치매를 앓고 있는 어르신들이다. 그래서 주문한 음식과 다른 음식이 나올 때도 있고 주문을 반복해서 받거나 샐러드가 두 번 나가는데 스프는 안 나오기도 하고, 주문을 받으러 왔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심지어 주문을 틀리게 받는 할머니께서 그 사실을 잊어버린 채 레스토랑 이름을 보고는, '주문을 틀리다니 말도 안 되는 식당이네' 라며 껄껄 웃기도 한다.
모든게 뒤죽박죽인 엉터리 식당.
하지만 그곳의 손님들은 모두 즐거워하며 그런 실수를 너그럽게 바라본다.

책을 읽으면서 갑작스레 눈물이 뚝 떨어졌다.
특히 평생 피아노를 배웠고 피아노 교실까지 운영했다는 미카와 씨의 아내가 56세에 청년성 치매를 앓게 된 사연.
아내는 평생 치던 피아노의 건반에서 음계를 찾을 수 없게 되었고 건반을 눌러 소리를 들으면 음을 짐작하고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미카와 씨 부부가 '주문이 틀리는 요리점'에서 잦은 실수를 하며 우여곡절 끝에 연주를 마친다. 레스토랑에 있는 손님과 직원들은 큰 박수를 보고 어떤 이들의 눈은 붉게 젖어 있었다.

비효율적으로 일하지만 기다리고, 실수하지만 받아들이는 사이, 그곳에 있던 사람들과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을 알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 관용이 생겨났다.

요리점을 이용한 손님들이 제출한 설문지에는,
"주문을 틀렸는데도 왠지 사랑스러워서 저절로 용서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어르신들이 실수를 했을 때 혀를 내미는 모습이 너무 다양해서 우습고 재미있었습니다."
"요리가 잘못 나와서 너무 기뻤습니다."
"좀 더 실수가 나왔어도 괜찮앗다고 생각합니다."
등의 응답이 있었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시로 씨는 '비용기 가치로 바뀌는 순간'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이런 요리점 하나가 생겼다고 해서, 초고령화 사회에 불어닥친 치매에 대한 획기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곳에서 퍼져나가는 따뜻한 시선이 사회 전체를 따뜻하게 물들일 수 있다면. 그런 사람들의 시선과 사회적 관용이 널리 자리잡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매 뿐 아니라 다른 병을 앓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말이다.

이 책을 번역한 김윤희 번역가의 글도 마음에 와 닿아서 적어본다.

"나는 현재 시내 대학병원에서 배선원으로 일하고 있다.
입원 환자들에게 하루 세 끼 식사를 운반하는 일이다 보니, 필연적으로 늘 환자와 마주하는 셈이다.
처음에는 '이분들처럼 아프지 않으니 감사하다,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일을 하면 할수록 환자 특히 노인들을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겪게 될 일이고 건강하게 세상과 작별을 고하면 좋겠지만, 그런 기대는 꿈에 가깝다. 몸을 운신할 수 없는 것도 고통이지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정작 본인이 아닌 사랑하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진다는 비극이 기다린다.
....(중략)....
많은 이들이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에 와서 분위기를 즐기고 공감하는 동안 마음이 훈훈하고 여유로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저자가 기대하는 새로운 가치관이 실제로 나타나게 되지 않을까. 크게 심각하거나 문제될 것 없는 실수는 가벼운 마음으로 수용하고 함께 즐기는 분위기. 그 정도의 문제와 갈등은 소통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긍정적 마인드. 그것이 개인적 가치관에서 이어져 사회적 가치관으로 자리 잡는 나라라면, 그야말로 강력한 힘을 갖게 될 것이다.
늙는 것이 두렵지 않은 나라, 병드는 것이 더 이상 불행하고 외롭지 않은 사회. 이 책을 읽으면서 살짝이나마 그 맛을 본 것 같다.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의 그 현장감이 우리 삶 자체가 될 수 있기를, 관용과 이해와 소통의 공기가 곳곳에 흐를 수 있기를 바라고 고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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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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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오사카의 작은 민박집에서 이 책의 한 부분을 읽었다.
<d>
<d>가 이야기하는 dd. 그 이름은 친숙하고 밝게 다가왔다가 가슴에 선명한 점 하나를 찍고 사라졌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고 dd는 말했지만 '혁명'을 말한 dd의 목소리는 잊히지 않았다.

<d>를 읽으면서 당연히 예전에 읽었던 <디디의 우산> , <웃는 남자>가 겹쳐 보였다. <디디의 우산>에서 작고 여리고 따뜻한 디디는 <웃는 남자>에서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죽어버린다. 늘 돌아오던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백의 그림자]]가 함께 떠올랐다. d와 dd는 없지만 세운상가의 여소녀가 있다. 여소녀의 축음기와 진공기가 있다. 그리고 세운상가의 여소녀는 어느순간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의 아버지라는 이미지로 이어진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가 황정은의 다른 소설과 달라서 읽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읽다가 멈추고 읽다가 멈추고.

그렇게 며칠 동안 몇 페이지를 나가지 못하다가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는 새벽에 나머지를 읽었다.

"이제 모두를 깨울 시간이다.
그들을 흔들어 깨우는 동안 여기에도 혁명은 있을까. 나는 궁금할 것이다. "한번 일어났다. 그러면 그것은 다시 일어난다." (2017년 9월 22일 세월호아카데미. 박래군 416연대 공동대표의 쁘리모 레비 인용을 재인용함. "사건은 일어났고 따라서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돌베개 2014) 오래전 내가 읽은 책에 그런 구절이 있었는데 그것이 여기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가. 혁명, 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까. " -디디의 우산

혁명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혁명들이 있다.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입김이 사라져버린 그 말들을 움켜잡는다.
손에 잡히는 것 없이,
내 체온과 다른 온도가 느껴진다.

당시에 나는 그것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주의깊게 살펴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린 적이 여러번 있다.

혁명은 삶을 뒤흔든다.
억눌리고 차별당한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사람들은 혁명을 외친다. 그런데 그 혁명 가운데서도 여전히 혁명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을 향한 혁명이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 아무런 이유없이, 자신의 생각없이, 관습적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김소영이 했던 이야기를, 다음에는 서주경이 했으면 좋겠다. 아마 서주경이 하는 이야기를 '완주'라는 제목으로 담아내기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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