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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강 - 이미지의 시대를 연 사진가 머이브리지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평점 :
흐르는 시간의 강물을 정지시키는 방법이 사진이었다면, 영화는 흐르는 시간의 강물을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으며 심지어 거슬러 오르는 회귀와 다가오지 않은 미래까지 헤엄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 장치이다. 그리고 시간과 함께 공간이 따라오고,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어간다. 세계가 고정되어있지 않으며 자연은 예측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의 변화도 사진에서 영화로 넘어가는 변화의 시대에 생겨난다.
사진, 철도, 전신. 이전 세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키는 데 핵심에는 그것들이 자리잡고 있다.
빛과 어둠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의 강’을 처음 포착했을 때에는 머이브리지도 시공간을 낚아서 계획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미처 못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머이브리지는 흘러가는 것, 변하는 것, 고정되지 않은 것에 지속적으로 관심으로 보였다. 마차사고로 인한 뇌 손상이 가져온 천재적인 재능은 머이브리지에게 ‘동작’에 대한 꾸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을 연속적인 동작으로 촬영하여 인식하지 못했던 순간에 대한 눈을 밝히며 영화의 시대를 열 수 있는 가능성을 이끌어주었던 머이브리지. 그에게 그런 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던 스탠퍼드.
리베카 솔닛은 <그림자의 강>에서 머이브리지의 생애, 특히 그가 찍던 사진이 영화로 발돋음할 수 있었던 시기를 이야기로 풀어냈다.
머이브리지의 평전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책은 딱딱하고 교훈적인 분위기는 전혀 없으며 소설적이면서 시적 문장과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생동감과 입체감이 있다. 머이브리지와 스탠퍼드가 활동하던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의 태동과 발전하는 모습을 당시 역사적 상황들-철도를 놓고 관광객을 유치하여 자연의 풍광을 보여주기 위해 아메리카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을 보호라는 명목상 이름표를 붙인 채 쫓아내고 좁은 곳으로 몰아내고, 평원을 질주하던 버펄로를 사냥하여 공장으로 보내어 컨베이어 벨트로 만들고, 물에서 헤엄치며 집짓기를 하던 비버를 신사용 팰트모자로 만들며 생태계를 파괴-과 복잡한 뜨개질을 하는 것처럼 올이 풀리지 않도록 잘 이어나간다.
다양하면서도 정교한 무늬가 배열된 올이 촘촘한 스웨터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보는 것처럼 리베가 솔닛의 <그림자의 강>은 사진이 영화로 나아가고 철도 밖으로 펼쳐지는 속도가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시대,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캘리포니아를 머이브리지, 스탠퍼드 뿐 아니라 역사적 변화에 동참한 주요인물들을 등장시켰다가 퇴장시키며 교묘하게 엮어간다.
풍성하면서도 깊이있는 통찰력을 보여주는 이 책에서 나는 영화의 세상을 열어준 머이브리지 뿐 아니라 시공간이 소멸한 자리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인간과 세계의 탄생까지 볼 수 있었다.
보들레르는 “사진은 암시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 말은 여러 사진들을 거치며 금세 낡은 것이 되어갔다. 더구나 그 중심에 머이브리지가 있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쉘 프루스트의 소망은 기계 장치에 올라타는 것으로도 복원할 수 있었다. 물론 개인의 기억을 기계에 고스란히 복사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한 일이지만.
미국이 새로운 세계 속에서 정체성을 찾는다는 명분 아래에서 삭제된 과거를 읽어나갈 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강대국의 횡포가 떠올랐다. 권력은 소수에게 집중되었고, 수많은 다수는 권력의 희생자가 되어 늘 시간에 쫓기고 가난과 억압에 시달려야했다.
“새로움은 미국의 정체성에서 아주 두드러지는 특징이었다. 스스로를 에덴동산 같은 갓 태어난 풍경 속에서, 무한한 자원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채 이제 막 새로 시작하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들의 새로움이었다. 19세기 미궁니들은 그 신선함을, 그들의 묘사에 따르면 타락한 채 쇠퇴하고 있던 유럽의 분위기와 비교하기를 좋아했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문화적 궁핍함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를 나타내는 지표가 되었다. 거기서 캘리포니아나 서양사의 다양한 삭제가 이루어졌다. 원주민들을 삭제하고, 자원이나 다양한 생물, 기록을 삭제했다. 서부로 온다는 건, 어느 정도는 과거를 버린다는 의미였다.”
-<그림자의 강> 중-
“상심의 기술, 심령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 사이의 고통스러운 간극을 건너는 다리를 세우는 기술이며, 시간이라는 외상을 물리치기 위한 기술이었다. 모도크족의 상심은 자연 세계는 물론 특정한 장소, 그리고 자신들의 문화와 공동체 전체와 관련한 것이었던 반면, 원주민들의 상실을 만들어내고 거기서 이익을 취했던 사람들의 상심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그림자의 강> 중-
수많은 이야기 중 세라 윈체스터가 기억에 남는다. ‘서부를 쟁취한 총’을 만들어 아메리카원주민들을 많이 죽게 만든 인물의 부인. 남편의 총 때문에 무참하게 죽어간 원주민들의 영혼을 막아내기 위해 미로처럼 복잡한 저택을 만든다. 160개의 방은 계획대로 만들어지지 않아서 창문 밖이 다른 방이 나오거나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하는 계단도 있다. 아무도 방을 제대로 찾아갈 수 없는 그 집에서 세라는 파란색 방에 홀로 앉아 교령회를 연다. 거대하게 부풀어오르는 자본 속에서 고독하게 영혼과 대화를 시도하며 늙어가는 세라.
이 일화는 어쩌면 새롭고 자유로운 기반 위에서 펼쳐지는 캘리포니아의 신세계는, 인간의 속도가 물질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벌어지는 틈, 간극에서 벌어지는 모순과 그로 인한 비극의 축소판이 아니었을까.
“예술적인 장점을 평가할 때 작품과 예술가 본인의 사적인 삶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지는 우리 시대의 질문이다. 중요한 것은 개인사의 파편이 아니라 작품 안에 담긴 윤리-물론 이 둘은 절대 무관한 것이 아니지만-이다. 예술에는 항상 예술가의 흔적이 남게 마련이다. 머이브리지의 사적인 삶을 대변하는 소외는 그의 사진에서도 분명하게 보인다. 사진에서 보이는 독립성은 이단아였던 그의 삶의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머이브리지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거장다운 명징함은, 재판정에서 드러난 감정에 휩싸인 인물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역사의 ‘위인’ 이야기들이 근래에 많은 공격을 받고 있다. 하지만 머이브리지를 살펴봐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그가 없었다면 영화 매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있었기 때문에 영화의 근원에 관한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재능은 다른 데에서도 생겨날 수 있었겠지만, 그러한 재능을 가진 특정 인물의 흔적은 그렇지 않다. 머이브리지에 대한 반응은 복합적이지만, 덕분에 그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흘러 다니는 이미지’의 시대를 낳은 완벽한 선조가 될 수 잇는 것이다. 놀라움의 시대, 진부함의 시대, 타락의 시대, 화려한 볼거리와 사악함의 시대, 되돌릴 수 없는 상실과 극적인 성취의 시대 말이다.”
-<그림자의 강> 중
리베카 솔닛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한때 새로운 세계로 급변했던 캘리포니아를 찾는다. 특히 작가의 관심은 철도 확장으로 인해 쫓겨난 모도트족로 향한다. 툴레 호수는 모도트족에게 세상의 중심이었지만 작가가 현재 다시 찾은 그곳은 세상의 씁쓸한 모퉁이에 불과했다.
실재와 재현이 혼재되어 혼란스러운 요즘이다. 머이브리지 이후로 시공간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우리는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속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시간이 돈이고 금이다, 는 말이 명언이 되었고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은 무능력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가늠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선택은 불가피하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어느 곳에든 올라타야 한다. 다만 이제 말도 마차도 기차도 아닌, 인터넷 속도에 맞춰 올라타야하기 때문에 숨이 가쁘고 속도에 대한 멀미가 공황장애처럼 나타날 수 있다는 부작용이 있지만.
“머이브리지는 몸과 장소를 재현으로 변환하려고 했다. 그 시도는 어떤 면에서는 풍경이나 지리, 아름다움, 실체, 그리고 감각적인 삶에 대한 충족되지 않는 갈망을 채워주었다. 하지만 황금 못에 망치질을 했던 스탠퍼드는 시간과 공간을 무자비하게, 그 과정에서 잃어버릴 것들에 대한 고려 없이 철저하게 소멸시키려 했다. 아마도 그것이 할리우드와 실리콘벨리의 차이일 것이다. 할리우드는 영화 세계의 중심이 되었고, 실리콘밸리는 정보기술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이 두 장소가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에 캘리포니아가 현대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 소멸한 세계, 뭔가 분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해체되고 탈장소화되고 비물질화된 세계, 중심이라는 개념 자체가 혼란스러워진 세계이기도 하다.”
-<그림자의 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