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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 - 할인행사
데이비드 안스퍼 감독, 숀 오스틴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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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는 전형적인 스포츠 스크린을 따른다. 안 된다는 걸 거듭 강조하는 부권의 명령과 물론 그런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 그런 영화들 말이다. 그런데 그 진부함을 이 영화는 자신만의 특별한 시퀀스로 풀어나간다. 영화에서의 주인공 루디는 어려서부터 노틀담 대학에서의 미식축구를 응시한다. 그는 그것을 운명으로 생각하며 자신에게 고지한다. 그렇지만 영화는 당연하듯 아버지나 주위의 만류가 오히려 적실성을 가진 이야기들로 구성된다. 열정과 실력의 상관성에서 우위는 언제나 실력이라는 것을. 그리고 보란듯이 결별하고 전복되리란 것을.


 여기에 영화가 자리한 재미난 장면이 있다. 루디는 특별한 계기(계시에 가까운)로 노틀담을 향한다. 거기서 만난 신부는 모자란 루디의 자격 요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대신으로 쥬니어 칼리지에서 좋은 성적을 보이면 입학할 수 있을 거란 불투명한 희망을 말한다. 우직한 루디는 자신의 신념을 따른다.


 하지만 루디는 계속해서 고배를 마신다. 그는 자신의 선택과 지나간 시간들을 원망한다. 돌아간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자신이 포기함으로써 그려진 동일한 시간의 또 다른 나의 모습, 가정적이고 성공한.. 되풀이되는 실패와는 완연히 대조되지만, 원래의 내 것이었던 것들의 현재형을 지금 바로의 동일한 시간으로 보고야 마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온 흔들리는 자신을 루디는 고백한다. 여기서 신부는 말한다. 자신이 신부 생활을 통해 얻은 진리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신은 있다는 것과 하나는 자신은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에서 적절한 응답성을 갖춘 답변을 한다. 채울 수 없는 그 '견딜 수 없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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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SE (2disc) - [할인행사]
밀로스 포먼 감독, 루이즈 플레쳐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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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런 선차적인 질문은 두드러기와 같은 반응을 잡아내기도 한다. 영화는 순전히 느끼는 것으로, 이해는 그것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물론 동감하지 않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이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왜냐하면 우리가 이것을 이야기하려면 경유할 수밖에 없는 단단함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질문은 우리를 견딜 수 없게 한다. "왜 하필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란 말인가? 아니, 생각해 보면 '뻐꾸기 둥지'란 어디인가가? 하는 본원적인 질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된다. 

 물론 영화에서 둥지란 영화가 끝없이 공전하는 궤도, 그곳은 병동이다. 여기서 얻어지는 뻐꾸기의 자리란 바로 병동인 셈인데, 탁란, 그러니까 뻐꾸기는 자신의 둥지를 짓지 않고 다른 종의 둥지에 자신의 알을 낳기 때문에 둥지란 뻐꾸기 둥지이며 동시에 아닌 곳이 된다. 최근의 연구는 그 둥지 주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자식 뻐꾸기로 하여금 어미 뻐꾸기를 인식하게, 그러니까 새끼 뻐꾸기를 위탁받은 식모는 어디까지나 식모살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어머니가 아닌 어머니인 것이다. 이 영화의 탁월함은 그것이다.

 병동으로 이감된 맥머피와 그 시작부터 사사건건 신경전이 벌어지는 랫체드와의 관계는 상당히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녀는 잠재울 수 없을 만큼의 폭력을 충동질하게끔 부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로하여금 (몇몇 누군가 이 표현을 좋아할지 모르지만) 정복욕을 일깨운다. 음악을 줄이러 들어선 맥머피에게 그녀는 계속해서 (차분하게) 환자와 간호사는 별개, 그러니까 다른 존재이며, '넘어선 안 되는' 투명한 유리창과 같은 것임을 끝임없이 강조한다. 그녀는 창에 손자국조차 남기지 말 것을 지시한다. 물론 그럴수록 충만해지는 질감은 그녀의 자리다. 우리는 숱한 맥머피의 '정욕'에 대한 제스쳐 덕분에 우리의 그런 환상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 일깨워준다. 랫체드는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섹쉬(sex-y)하다. 그녀는 우리를 부른다. fuck.. me... 그렇지만 영화는 (결정적으로!) 그것을 안배하지 않는다. 

 이제 영화가 빠르게 전개되고 거의 마지막에 도달한다. 그녀 앞에 빌리가 선다. 그녀는 빌리의 행동에 대해 어머니 친구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어머니로 자처한다. 빌리에게 부끄러움을 요구한다. "부끄럽지도 않니?" 우리는 여기서 한참 전에 대답되지 않은 빌리의 대답(좋아하는 여자가 있었고... 청혼을 했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대체 그 다음은!)이 가졌던 -영영 대답되지 않을- 불안을 포착하게 된다. 물론 그 상한은 어머니 자신이다. 그것이 대답되는 순간, 빌리는 자멸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정확히 모든 것을 포괄하는 힘이 엉뚱한 곳으로부터 분출한다. 바로 "어머니가 아닌 어머니"인 맥머피다. 병동을 "둥지이며 동시에 아닌 곳"으로 물들이는 파괴적인 힘, 그러지 말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V) 속에서도 응답되지 않는 절대적인 지점, 바로 그곳이다. 여기에 영화는 징그러운 장면을 삽입한다. 랫체드의 목이 졸리던 그 텅 빈 공간이 어두워지고 드러난 지점, 그곳에 한 개비의 담배가, 한 개비의 담배가, 한 개비의 담배가 그리고 나누어지는 카드들... "어머니가 아닌 어머니"로서의 맥머피가 지닌 힘을 설정하는 장면이다. 여유가 흐르며 충분히 담배가 공급되고, 모두가 만족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는.. 병동으로 들어선 그에게 렛체드는 불러세운다(V). 시펠트는 대답한다. "yes, ma'am" 그녀는 온화한 미소로 그것에 응답하며 그다 다시 이곳에 자리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는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떠든다. 맥머피가 어쩌고.. 그의 실패에 대해... '그'란 엉터리라고. 사랑은 엉터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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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의학 윤리 - 책임 원칙의 실천
한스 요나스 지음, 이유택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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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없이 실증적이고 헤맬 필요 없이 우리의 직관으로 보이는 대상성을 갖춘 의학 시대는 우리의 낙관을 자신의 '진보'라는 운동성으로 해명해 주고 있다. 우리는 그 어디에서나 의학의 발전이라는 희망의 조치(그것조차도 의료 행위인데)가 어디서나 꺾이지 않고 낙관적으로 주입되는 병상의 모습을 수고 없이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의학은 그 자체로 (인간의) 완결성이며, 다만 현대가 처한 곤란이란 인간이 그 완결을 헤아릴 수 없는 '턱없이 부족한' 진보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시대에도 여전히 (빈곤한) 소박함이 완벽히 망각하는 것은 아니다. 불로와 영생에 대해 아주 미세하게 약간 더 기대할 수 있다고 여겨질 뿐이다. 그러나 결국 이 시대에 최종적인 것은 그런 기대감들의 총체성이 빚어내는 낙관이다. 왜냐하면 "'진보'가 가치 개념의 표현은 아니라 하더라도, '변화'라는 말로 간단히 바꿀 수 있는 중립적인 표현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태의 본질상 기술적 진보의 다음 단계는 앞 단계에 비해 언제나 우월하기에 그렇다."(22) 우주는 해명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를 심판한다. 그렇기에 요나스는 묻는다. "도채에 무엇이 현대 기술에게 끊임 없는 운동을 강요하는가?"(23)



 옛날 같으면 어느 누가 성대한 오페라 공연이나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심장 수술, 비행기 참사로 죽어간 사람들의 사체 인양을 (비누, 냉장고, 생리대 광고는 차치하고라도) 그의 거실에서 보고 싶어하겠는가? 어느 누가 커피를 일회용 종이컵에 따라 마시고 싶어 했겠는가? 어느 누가 인공수정, 시험관 아기, 대리모 등을 원했겠는가? 또 어느 누가 자기 혹은 타인의 복제물이 거리를 활보하기를 바라겠는가? (21-22)



 "미지의 세계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깊고 새로운 차원이 속속 출현하면서 과학은 오늘날 스스로 놀라고 있다."(28) 앞으로 무엇이 출현할지 모르는 미지의 영역. 그러나 그 세계는 여전히 '과학의 미지'라는 점에서 우리는 과학을 담보로 '더 나은' 세계를 기대한다. 모르는 것은 오히려 "지속적인 혁신을 위한 잠재력 또는 무한한 것"으로 대체된다.(28) "과학의 가치중립에 대한 믿음 … 연구의 절대적 자유의 권리에 대한 믿음"(77-78)은 사실상 "신앙고백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78) 신의 의지를 누가 알겠는가? 요나스의 논의는 거기까지 미치지 않지만, "철도와 증기선은 우편마차와 돛단배와는 질적으로" 다르듯(33), 신앙생활과 과학생활은 "(목적을 제외한다면,) 자신의 경험에서도 다르다."(33) 



 한때는 공리주의를 떠나 이루어지는 최고의 지적 추구였던 이론이 이제는 외부 세계의 온갖 요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하는 시녀-'프로메테우스적' 외양(31)-(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30)


 

 기계의 증식은 "직선적이라기보다는 상반된 관계들이 얽혀 만들어내는 그물과도" 같아서(32), 현대 이전의 생활은 하나의 (진절머리나는) '수수께끼'가 되었고, 그것은 (앎을 전제로 하는) 호기심을 마구 불러일으킨다. 현대는 언제나 과거를 종합하지만, 그렇다고 과거를 내용으로 하지는 않는다. (가령 미디어라는 동시성으로 전달되는 원시성[부족]이라고 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제임스 와트의 소박한 증기기관"이 possible이었다면, "탄광에서 물을 빼내는 기계에 이르는 긴 사슬"은 im-possible을 의미한다.(32) (다시 말하듯) "왜냐하면 사태의 본질상 기술적 진보의 다음 단계는 앞 단계에 비해 언제나 우월하기 때문이다."(22) 현대 시대의 가능성은 역설적으로 더 많은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없는'을 더 많이 ('~이 있는' 가운데에서)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고 현대는



행운과 실험을 통해 발견된 경험적 처리 방법(예컨대 청동기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금속 합금이나 요업, 재빵, 포도주 발효 등)과는 전혀 다르다. 추상적인 설계도(계획)에 따른 인위성 또는 창조적 구성은 물질의 핵심을 향해 육박해 들어간다. 분자생물학에 있어서 이것은 여러 가지 끔찍한 가능성들이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34) … 물리학적인 의미에서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녹음기, 계산기 등은 어떤 '노동'도 수행하지 않으며 (최소한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우리의 감각과 정신에 봉사할 뿐이다. 이들 기계는 비물질적인 의식을 겨냥하여 만들어졌고, … 거시적이고 입체적으로 움직이는 고전적 유형의(36) 



세계와는 다름을 뜻한다.


 요나스는 여기서 문제를 보다 심화한다.



 쟁기는 좋은 것이고 (사람을 해하는) 칼은 나쁜 것이다. 평화로운 시대에 칼은 쟁기로 변하기 마련이다. 이를 현대 기술 시대의 언어로 바꿔 말하자면 원자폭탄은 나쁘지만 인류의 부양을 돕는 화학비료는 좋다. 그러나 (그렇기에) 여기서 우리는 현대 기술을 괴롭히는 딜레마를 발견하게 된다. 현대 기술의 '쟁기'는 장기간 지속하다 보면 '칼'만큼이나 해로울 수 있다! (그리고 점증하는 결과의 '장기적인 지속'은 -이미 언급했듯이- 현대 기술의 적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48)



 핵은 무기라는 소유적 양태를 통해 "그것의 사용을 막는"(48) 역설성을 실천하는 반면에 '자원'으로 이름을 달리하면서 그것은 도처에 핵을 증식시킨다. (그 위험성의 '봉쇄'라는 측면에서만 우리는 어떤 가이드가 있을 뿐이지, 그 범위를 넘어선 사태에 대한 매뉴얼은 전혀 없다. 그것은 오직 신만이 아는 일. 우리의 자세는 따라서 "과학자여, 과학일지어다!"[90]) 여기서 비워지는 것은 우리의 시야이다(49). "즉 지구라는 무대의 유한성"(49)을 벗어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무대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인류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직'의 볼모이고, 따라서 결과적으로 인류 운명은 오직 배역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현대 문명의 모두가 -놀랍게도- 외계인을 알고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멋진 패러디로 이것을 정식화 할 수 있다: "외계인 모르면 외계인이게요?""지난 시절 높은 가치가 부여되었던 호전적 용기가 앞으로 차지하게 될 자리는 없다. … 전쟁방지는 전쟁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인류의 생존문제가 되어 가고 있다. 극단적인 수단이 억제하고 있는, 무장을 통한 갈등 상황에서 개인의 용기는 그를 넘어선 기술의 힘에 보잘것없다."(60) 요나스는 말한다. 당면 시대가 요청하는 덕목이란,



 매우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두려움이다. 말하자면 두려움의 느낌 역시 새로운 가치를 획득한다. 겁쟁이의 약점 정도로 취급됨으로써 과거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둘움의 느낌은 이제 존중되어야 한다. 두려움의 느낌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윤리적 의무이다. (63)



 (그렇기에) 요나스는 더욱 각별히 말한다. 「절제와 정의」라는 문제를 다루면서 회페가 말한 시민성(또는 시민적 용기[Zivilcourage])을 발현하는 맥락과 같다. 용기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논의 대상은 -좋건 나쁘건- 그 안에서 '시대'가 펼쳐지고 진보가 이루어지는, -사람과 사람의 직접적인 교류가 이루어지는(57)- 초개인적 공공 영역이다. (58) (그러한 초개인적 공공 영역의) 추방 이유는 다음과 같다. 17세기에 목적인이라는 개념이 자연 관찰에서 사라짐으로써 생겨나게 되었다. 즉 뒤에 오는 것은 가치와 무관한 필연성에 의해 동일한 성격을 가진 앞선 조건들을 뒤따를 뿐이다. 따라서 '어디에서'로 표현되는 배후의 힘은 결정되어 있지만, '어디로'는 그렇지 않다.(79) 현대인의 과소비는 사실상 뻔뻔함 그 자체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관습의 … 아래로부터의 개혁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자발적 합의에 의한 길과는 다른 또 하나의 길은 공법과 그에 근거한 규제를 통해서 검소함을 위로부터 강요하는 것이다.(66) … 앞으로 우리는 어디에서건 최고 기록을 향한 질주를 계속해야 하는가? 과연 그래도 되는가? 수명 연장에 있어서의 최고 기록을 위해서? 유전자 변형에 있어서? 심리학적 행위 조절에 있어서? 산업과 농업 생산에 있어서? 지하자원의 활용에 있어서? 각종 기술의 효율성 일반의 제고에 있어서? (67) 나치와 관련된 현상을 아무런 가치판단 없이 분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86) (그렇다!) 지금 우리의 논의 대상은 -좋건 나쁘건- 그 안에서 '시대'가 펼쳐지고 진보가 이루어지는, -사람과 사람의 직접적인 교류가 이루어지는(57)- 초개인적 공공 영역이(기 때문이)다.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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