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퍼시벌 에버렛 지음, 송혜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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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에 출간된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짐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책이다.
브런치에서 이 책을 소개받았을 때 기대감이 생겼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는 10대 소년 헉의 시각이기에 성장 소설로 분류된다면, 이 작품은 성인인 짐의 시각으로 그려졌기에, 당시 미국 남부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일에 다가갈 수 있는 작품이다.

흑인 노예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백인들이 자신의 우월성을 계속 느끼며 흡족함을 느끼게 할 수 있는가?이다. 최대한 어눌한 말투와 생각이라고는 없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대답과 질문을 연마한다.
눈을 맞추면 안 되고, 절대 먼저 말하면 안 되고, 백인들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도록 힌트를 주긴 하지만 절대 먼저 아는 척을 하거나, 행동을 지적하면 안 되고, 우리가 멍청함을 느낄 수 있게 웅얼거리거나 더듬거리는 말투를 사용하기도 할 것.
백인들이 기분이 좋아져야만 안전하기 때문에 이런 교육이 필요하단다. 😭

책의 중반부까지 이런 부분의 첨가만 뺀다면 전작과 비슷하다. 술주정뱅이 폭력적인 아버지를 피해 도망친 헉과 가족과 헤어져 팔려갈 운명인 짐이 우연하게 만나 함께 도망가는 여정. 헉은 아버지에게 도망치기 위해 자신이 죽은 것처럼 꾸몄기에 짐은 자연스럽게 백인을 죽인 살인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이유는 없다. 백인이 살해된 현장과 도망친 노예가 있다면 그 살인의 범인은 당연히 노예가 되는 법. 이게 당시 남부의 법칙이었다. 모든 잘못은 노예에게 주어지는 법. 그게 당시 남부의 법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백인 성인, 노예의 조합이라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어린 백인에 흑인 노예의 조합은 남들의 눈에 이상해 보일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할 게 많았다. 자신을 친구라 여기는 헉에게 순간순간 긴장을 놓쳐 평소의 말투와 읽고 쓰기가 가능함을 들킬 위험도 종종 발생했다. 수준 있는 단어 사용. 문법에 맞는 문장 구사와 명료한 말투를 사용하는 것조차 노예에겐 위험한 일이었다.

글을 읽는 건 완전히 은밀한 일이었고, 완전히 자유로운 일이었으며, 따라서 완전히 체제 전복적인 일이었다. 101p

짐에게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이 험난한 여정에서 위험을 넘길 수 있었다.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책을 만나기도 하고, 잠시 연이 닿은 친구의 목숨을 건 선물로 연필을 소유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 어떤 것보다 짐에게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누군가가 사용하던 연필이었다. 그 작은 물건조차 소유가 불가능한 존재인 노예. 그게 짐의 신분이었기에…

짐은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돈을 벌어야 했다. 자신의 아내와 딸을 자유인으로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북부로 향하는 여정 그것만으로도 험난하기만 했다.
지옥 같은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헉은 아빠가 죽었으니 이곳에서 죽다 살아난 아이로 자라면 그만이었지만, 짐은 가족을 찾아야 했다. 이미 고향에서 사라진 아내와 딸. 가장 최악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팔려갔다는 둘을 찾아 나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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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예제에 반대하는 북부 백인들의 입장을 생각해봤다. 노예제를 끝내고자 하는 욕구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백인의 죄책감과 고통을 진정시키고 억누르려는 필요에서 비롯됐을까? 그저 지켜보기에는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한 걸까? 그런 관행을 허용하는 사회에서 살아가자니 기독교인의 감정이 상했던 걸까? 그들이 벌이는 전쟁의 원인이 무엇이든 노예 해방은 부수적인 약속이며 부수적인 결과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373p

엄청난 부당함에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음에 대한 대답은 ❛노예니까요. ❜였다.
당시 그들이 백인들이 말하는 착한 백인과 그렇지 않은 백인의 차이도 ❛흑인은 노예❜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사람에게 글을 읽는다는 것이 주는 효용이란 얼마나 큰 것인가?
앞부분의 백인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흑인들의 교육 이야기만으로 이 책이 흥미로울 것이다!라는 생각만 했던 나의 생각을 했다니.. 주인공이 무려 ❛노예❜인데!

짐이 제임스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함께한 일에 후회는 없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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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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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3개의 단편.
❝묻고 싶다.천선란 자네는 대체 어떤 살아을 해온 것이냐고 ❞ by 박정민
묻고 싶다. 박정민 당신은 대체 어떻게 한 줄 요약을 이렇게나 잘하는 것이냐고! by 제로

딱 한 줄로 요약하면 나도 저 심정이다.
1편을 읽을 땐 그저 잔잔하게 따스했다. 그리고 나름 신났다. 이번 작품은 난이도가 낮군. sf 세계관이 힘든 사람들도 따라가기 쉽겠어. <천 개의 파랑>처럼 사람이 아닌 개체와 이름 정도만 흡수하면 되는 정도라 좋았다.

그런데 슬슬 그가 말하는 사랑의 찐함이 1편 중후반부터 몰려오다 2권에 폭발했다. 폭발 수준이 엄청나서 나는 3권에서 오히려 cool down 되는 느낌이었다.

1부 제 목소리가 들르십니까
우주선에서 꽤 긴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좀비 영화가 현실화됐다?
아직 감염되지 않은 나는 이곳에서 탈출을 해야 하는데!
학대받던 내가 살아갈 수 있던 힘이 되어주던 묵호를 두고 갈 수가 없다.
감염된 묵호. 함께할 수 있을까?

2부 제 숨소리를 기억하십니까
좀비를 피해 다들 떠나간 도시.
자폐 아들을 홀로 키우는 은미는 집엔 삶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엄마를 지키는 한 소녀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의사인 은미는 아픈 아이를 낳았다는 모든 비난을 홀로 감수해야 했고, 그런 아이를 키우는 일에 버거운 마음에 도망치고 싶었다. 왜 그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만 하는 걸까? 아이를 버리고 싶다는 그 나쁜 마음에 죄책감에 시달리는 일은?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이 있다. 아픈 존재가 자식이어도 도망치고 싶은데, 직계 존속이라면? 안타깝게도 인간은 내리사랑의 법칙이 있다. ㅠ 아픈 부모 분명 내 엄마이고 아빠이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나의 목숨까지 위험에 빠지는 상황에 이 존재들을 끝까지 감내할 수 있을까? 버리지 못하면서 버리고 싶은 마음 그 자체로 느끼는 죄책감 이 양가감정 속에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

3부 우리를 아십니까?
좀비가 된 아내와 함께 거북이를 바다에 보내주는 여정을 떠난다.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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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꼭 해주고 싶은 말은, 행동하지 않았다면 마음을 먹은 것만으로는 죄가 될 수 없다는 거다. 마음마저 순결한 사람을 적어도 아빠는 살아오면서 본 적이 없다. 단지 순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과 노력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열매 같은 거란다. 씨앗은 같지만 어떤 과육은 싱그럽고 어떤 과육은 썩어 있지. 또 어떤 건 달기도 하고 어떤 것은 쓰기도 하지. 떫기도 하고, 혀를 아리게 만들기도 해. 같은 씨앗이 모두 같은 맛을 내지 않는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러니 중요한 건 씨앗보다 과육이야. 마음보다 보이는 모습이 어떤지가 더 중요한 법이야. 아빠가 늘 말했잖니. 사람의 친절은, 그냥 친절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그 속에서 어떤 안타까움이나, 어떤 우월함이나, 어떤 기만이 들어 있다고 한들 우리가 그것까지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고. (중략)
그러니 엄마가 심심해할 거리고, 외로워할 거라고, 슬퍼할 거라고 생각해서 너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들지 말기로 아빠랑 약속했잖니. 150p

말이라는 것이, 소문이라는 것이, 조롱과 험담이라는 것이, 걱정을 뒤집어쓴 위로라는 것이 출처와 시기가 뚜렷한 채로 퍼졌던 적이 있던가. 어디에나 눈이 있다. 어디에나 입이 있다. 그 눈과 입은 주인이 없다. 마음껏 구경하고 떠들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177p

내 삶이지만 내가 쥘 수 없어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놓은 환자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보호자의 삶까지 죄다 쥐고 있어서. 포기하는 것 외에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삭제된 상태로 멈출 수도, 내릴 수도, 끝낼 수도 없이 너무 오랫동안 멀리를 느낀다. 183p

이렇게 찐한 사랑을 쓰시다니.. 잘 쓰고 싶은 리뷰는 더 쓰기가 어렵다.
오래 묵혔는데 더는 미룰 수가 없어서 쓰긴 썼으나…
가을엔 사랑이죠.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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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이모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21
박민정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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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고 일을하다 다시 대학원으로 돌아온 우정은 논문을 쓰며 괴로운 시간을 보낸다. 과 교수가 아닌 독문학 교수의 지도를 받게 되었고, 독일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독일 문학을 연계하여 논문을 쓰는 일은 생각보다 감당하기 어려운 파장을 불러온다.

논문 쓰는 일이 이렇게도 버거운 일이군요.
지도 교수에 따라 논문을 쓰는 과정의 험난함은 천차만별이구나.

우정에겐 서독이모가 있다. 그 옛날 독일에 유학가서 정착한 엘리트 이모.
그녀는 왜 자신을 독일 이모가 아닌 서독 이모라 칭했을까?
서독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 그곳에서 교수 생활을 하는 이모는 동독의 물리학자와 결혼을 한다. 결혼 생활은 2년쯤? 둘 사이의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데 갑자기 사라진 이모부.

이모부의 행방은?
이모부가 사라지고도 6개월 남짓 이모부의 여동생과 이모는 함께 살았다.
그 시절 우정의 가족은 이모를 만나러 독일에 갔었는데, 당시엔 이모부가 출장중이라고 했다.
이모부가 없는 상황에서 이모와 이모부의 여동생은 어떻게 함께 산 것일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여학생에게 남자 교수의 호의가 불러오는 소문이란..

#제로책방 #책리뷰 #책기록 #책추천 #중편소설 #한국문학 #통일의양면성 #다각도로보는통일 #베를린 #북스타그램

독일 같은 경우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통일이 왔지만, 통일된 독일은 또 하나의 벽을 만나게 됩니다. 계층화 현상이 심화되었고 서독화된 독일에서 동독 출신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심해졌지요. 그런 점에서 통일은 민족의 열망이지만 조심스럽고도 신중하게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두 개의 주권이 공존하는 남북이라 할지라도 자유로운 교류 협력이 이뤄질 수 있도록. 사람과 물자가 자유롭게 오가는 통일, 평화통일이 중요하지요. 이런 점을 우리 국민들 마음속에 많이 심어두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개성공단, 금강산 사업, 투자 등이 남북 사이를 가깝게 만들어줄 수 있는 건 사실이고요. 제일 중요한 건 통일보다 평화가 먼저라는 것이지요. 96-7p

독일의 통일이 제 3자들이 보기엔 평화로워 보였지만, 당시 동독의 지식인들의 생각은 어떠했는가?를 처음 알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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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해로외전
박민정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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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하지 못한 사람이 악인이면 그 주변에만 파장이 있지만, 똑똑한 사람이 악인이면 큰 파장을 일으킨다는 맥락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책을 표현하는 말은 아니지만, 그 문장이 떠올랐다.

선하지 않은 사람에게 부가 따르는 경우. 하필 오직 큰아들만 바라보는 엄마가 많았던 시절이라면?
2남 2녀의 가족 구성원을 이룬 한 집안에서 큰아버지의 부로 다른 가족들이 도움(?)과 상처를 입는 이야기.

큰아버지 댁, 여름이면 능소화가 환하게 피어 있던 집. 마당이 딸린 번듯한 이층짜리 독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했던 집.

수현의 가족이 그 집에 살았던 것은 잠시였지만, 작은 고모는 그 집의 일하는 사람이 지내는 방에서 수진 언니와 꽤 오래 머물렀다. 부유했지만 종종 친정에 찾아와서 악마같이 행패를 부리는 어린 딸과 방문하던 큰 고모와 편가르기와 눈치가 빨랐던 예리가 있었던 곳. 칼보다 날카로운 할머니의 말이 쏟아지던 곳.

학교에서의 일로 약을 먹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남편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에게 연락하려고 하지 않는 정상에서 조금 궤도를 벗어난 생활을 하던 중 바닷마을 언니의 사춘기 딸인 수진이 잠시 집에 머물게 됐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돈을 주고 한 국제결혼이라는 시선을 받아야 하는 큰아버지의 아들 장훈 오빠의 딸인 수아는 고모와 만났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여기서 고모는 한국에 사는 고모가 아닌 큰아버지의 전처의 버려진 딸들 중 한 명이었다.

할머니가 큰고모에게 시집가지 말고 장훈의 두 누나, 장선과 장희를 맡아 키우라고 했다는 이야기였다. 일찍 출가한 둘째 딸은 어쩔 수 없고 네가 맏딸이니까 맏딸 노릇을 하라고 강요했다는 거였다. 큰고모는 두고두고 생각할수록 괘씸하다고 했다. (중략)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큰고모는 ❛감히❜라는 말을 내뱉었다. 124p

야엘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장희는 프랑스에서 의사를 하고 있었다. 자신이 포기했던 가족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야엘. 그녀는 부모에게 버림받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좋은 부모를 만나 지금에 이를 수 있었지만, 버려졌다는 상처보다 더 큰 부채감을 품고 있었다. 오로지 남자 아이만을 품었던 사회에서 어린 그녀가 품었던 질투가 불러온 일이었지만, 어른들은 그걸 이해해 주려 하지 않았다.

큰아버지의 두 번의 결혼으로 생긴 두 아이의 입양. 남은 한 아이. 그리고 새롭게 생겨난 가족에서 남은 아이의 심정은 어떠한지? 큰 집에서 잠깐의 생활이 아직도 상처로 남은 수현과 달리 그 집에 오래 살았던 수진 언니의 의연함은 어디서 온 것인지? 책은 보여주지 않는다. 진정한 외전을 기다리게 만드는 책이다.

책은 꽤 많은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어수선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촘촘하게 잘 쓰인 글이었구나. 책을 덮고 든 생각이다. 다만, 그걸 리뷰로 표현할 내 능력의 부족이 안타까울 뿐…

옛날에 서울에서 살 때,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었어. 우리 일가가 이만큼 살고 있는 건 전부 어머니, 그러니까 할머니 덕분이라고. 어머니가 아버지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행려 병자가 된 남편을 죽을 때까지 거둬 먹였기 때문에, 비록 아버지는 칠순도 맞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그래도 그 순간까지 함께했기에, ‘백년해로’했기에 우리가 이만큼 살고 있는 거라고. 301p
책의 제목이 이런 무서운 뜻을 품고 있었다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곧 다시 읽을 ‘시선으로부터’랑 얼마나 다른지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는 포인트가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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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에, 말 그대로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야말로 제대로 살아볼 기회가 생긴다고 누군가 그랬다. 나는 그 말을 가슴에 꾹꾹 눌러 담았다. 그저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기를 쓰고 모른 척했던 많은 이야기들. 오히려 다른 사람이 내 복수를 대신 해준다고 생각하며 남의 불행에 슬그머니 웃던 순간들. 그러나 슬픔에 빠져 구덩이 앞에 쭈그려앉은 사람의 등을 발로 차는 사람이 나 자신은 아니었는지. 돌아보면 너무나 이른 나이부터 나는 내가 글러먹었다고 생각했다. 어릴 적에도 착한 아이가 아니었고 딱히 좋은 사람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착한 아이, 좋은 사람이란 것도 전부 이데올로기일 뿐이야, 라는 말 뒤에 슬며시 숨었었다. 그러나 나는 그 학생이 내게 연락해서 간절하게 말할 때,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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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른베
신유진 지음 / 시간의흐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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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진 작가는 1984books 대표님의 누나이기도 하고, 번역가, 에세이스트, 소설가이다. 아니 에르노 작품을 다수 번역하였고, 그녀의 노벨상을 점치기도 했었다. 그녀의 에세이 글을 좋아한다. 이 책은 신유진 작가가 자신의 문학 뿌리가 엄마에게 나왔음을 살펴보는 <사랑을 연습한 시간>을 읽었기에, 책을 펼치면 보이는 ❛전혜린으로부터❜를 보자마자 대출했다.
<사랑을 연습한 시간>에서 / 리뷰 걸렀는데;;;;
그녀와 그녀의 엄마가 전혜린의 책에 대해 많은 대화를 했다는 것. 그녀 엄마가 있는 공간에 아니 에르노의 책이 놓여 있었다는 것(아마도 원서였을 듯/ 어머니 읽지 못하지만 디피용으로 들고 계셨을 것으로 추측되지만)이 너무도 신기하게 여겨졌고, 그런 문학 뿌리에 질투를 느끼기도 했었다.

그런데 엠뽕님께서 이 책을 톱10 중 하나로 올리신 것을 보고, 꼭 읽어야겠다는 다짐. 빌리길 잘했다는 나 혼자만의 칭찬을 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그건 그냥 그리움이었던 것 같아요. 조금 이상한 말이긴 한데…….
그런 마음, 나도 알아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누군가 혹은 되어본 적 없는 나를 그리워하는 마음.
페른베, 그걸 독일어로 페른베라고 해요.
먼 곳을 향한 동경 같은 건데요, 전혜린은 먼 데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번역했어요. 여기 아닌 다른 곳을 향한 마음 같아요. 만날 수 없어도, 갈 수 없어도 나도 모르게 향하는 마음 같기도 하고. 나는 그런 마음을 나한테 느껴요. 여기 아닌 어딘가에 진짜 내가 있을 것만 같거든요. 그런 나를 그리워하고 있고. 99p


6년간 사귄 남자 친구와 이별, 사랑하지만 힘든 엄마와 떨어지는 방법은 직업을 핑계로 타 지역으로 가는 것이 최고다. 살던 도시보다 아주 한산한 지역의 마음 콜센터 상담원으로 일하는 희수. 일시적 고통을 덜어주는 이름 없는 대나무 숲 같은 존재인 상담원은 요청자의 전체 서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파편적으로 나열된 단어를 엮어 스토리를 재구성하는 마치 단편 소설에 가까운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다.
남의 불행을 받아 적는 일을 하는 사람.

그런 희수의 눈에 들어온 초대문

우아하고 완벽한 곡선
쓸수록 선명해지는 세계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극장이 있던 자리에 요양병원이 생길 만큼 젊은 인력이 거의 없는 이 도시에 도시 재생 프로젝트로 젊은 친구들이 원도심에 한 켠을 활용하고 있었다. 1층은 이곳을 지킨다는 사명을 갖고 무려 20년 그 자리를 지키는 글방으로 올라가기 전 가교 역할을 하는 카페가, 3층엔 글방이 있었다.

교환 글쓰기의 짝꿍은 이 글방을 이끌고 있는 ‘니나’와 짝이 되었다. 전혜린이 번역한 <생의 한가운데>의 주인공 이름을 쓰는 니나. 도저히 쓸 수 없는 글은 계속 미완성이었다.
늘 먼 거리 자신의 집까지 꼭 오라고 했던 남자친구. 언젠가 꼭 뮌헨을 여행하자고 함께 모은 여행 통장은 결국 돌려받지 못했다. 돈을 아낀다고 에너지를 아낀다고 늘 집에서만 지냈던 둘의 관계에서 마지막에 떠난 해남 여행도 결국 중간에서 돌아오고 말았다. 그들의 인연은 이미 정해졌던 것일까?

혼자 자신을 키워낸 일이 너무도 대단한 일이기에 언제나 자신의 이런 애씀을 피력하는 엄마와의 관계도 울컥 울컥 속에서 올라오는 화를 누르기에 바쁜 동이 씨와의 관계도 이대로 괜찮을까? 어떤 생명도 동이 씨의 손에서 오래가지 못했는데 유일하게 잘 키워낸 생명이 나라는 일에 그저 감사하는 것이 맞는 걸까?

#제로책방 #책리뷰 #책기록 #책추천 #한국문학 #소설추천 #그리움 #중편소설 #북스타그램

어떤 삶은 글자가 아니라 음표로 써야 한다는 것을 안다. 55p

어떤 날은 뭐가 진짜 나인지 모르겠어요. 이 거리도, 나도 다 가짜 같아요. 진짜는 과거에, 저 벽 속에 있고요. 나는요, 삶이 비처럼 내릴 때 그 빗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이고 싶었어요. 그게 내가 되고 싶었던 나인지, 한때 나였던 사람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떤 날에는 내가 생각하는 나는 저 벽에 적힌 이름 같아요. 당신이 보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73p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78p

전혜린의 책을 읽으면서도 그것이 궁금했다. 개인의 기억, 혼란, 감정, 그런 것들을 타인에게 건네는 이유를. 나의 고독이 당신과 나눠도 괜찮을만큼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 부럽기도 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동시에 누군가 봐주길 바랐을 것이다. 보여주기 싫으면서 봉주고 싶고, 보고 싶지 않으면서 보고 싶은 사람의 이 이중적인 마음을 알아채고 나면 뭐가 달라질까. 나에게서 가장 먼 나에 닿게 되면 그다음은? 원소로의 환원인가? 128p

모녀의 관계에 너무 몰입했다. ㅠ 강희 님 선물로 <생의 한가운데>를 읽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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