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일 뿐인 어머니에 대한 이 가당찮은 반감은, 실은 마땅히가해자한테로 향해야 할 분노가 차단된데서 생긴 엉뚱한 부작용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응당 가해자의 멱살을 붙잡고 떳떳이 분노를 터뜨려야 하는데, 도무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빨갱이로 몰릴까봐 두려운 것이다. 피해자인 섬사람들은 삼만이 죽은 그 엄청난 비극을 이렇게 천재지변으로 치부해버린다.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것, 자신이 반복해서, 아무래도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서 당했거니 하고 체념해버린다. 허울 좋은 이념 때문에 폭동을 일으켜 살인, 방화를 일삼던 장본인들의 죽음이야 자업자득이라 하겠지만, 어째서 양민의 숱한 죽음들마저 자업자득이란 말인가. 그것을 자기 박복한 탓으로, 전생에 무슨 죄가 있는 탓으로 돌리다니.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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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떼죽음당한 마을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던가. 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에 누구 한사람이, 아니면 적어도 사촌까지 중에 누구한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군경 전사자 몇백과 무장공비 몇백을 빼고도 삼만명에 이르는 그 막대한 주검은 도대체 무엇인가? 대사를 치르려면 사기그릇 좀 깨지게 마련이라는 속담은 이 경우에도 적용되는가. 아니다. 어디 그게 사기그릇 좀 깨진 정도냐. 아, 멀리 육지에서 바다 건너와 그 자신 적잖은 희생을 치러가면서 폭동을 진압해준 장본인들에게 오히려 원한을 품어야 하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인연인가.
그러나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죄악은 삼십년 동안 여태 단 한번도 고발되어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가그건 엄두도 안 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군지휘관이나 경찰 간부가 아직도 권력 주변에 머문 채 떨어져나가지 않았으리라고 섬사람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섣불리 들고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려웠다. 고발할 용기는커녕 합동위령제 한번 떳떳이 지낼 뱃심조차 없었다. 하도 무섭게 당했던 그들인지라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결코 고발이나 보복이 아니었다. 다만 합동위령제를 한번 떳떳하게 올리고 위령비를 세워 억울한 죽음들을 진혼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해자가 쉬쉬해서 삼십년 동안 각자의 어두운 가슴속에서만 갇힌 채 한번도 떳떳하게 햇빛을 못 본 원혼들이 해코지할까봐 두려웠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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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자기만 행복하면 왠지 나쁜 놈이 되는 시대였거든. 그래, 바보 같았던 거지……."
그 시절의 내가 그랬다. 딱히 개인적으로 행복한 일도 없었지만, 나만 행복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혼자만 행복해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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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보다 갖지 못한 것이 많다. 잘하는 것보다 서툴고 부족한 것이 많다. 그런 내가 이 세상에 던져지고서 번번이 느낀 결핍감과 우울감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기만 하다. 하지만 비교로 인한 감정이 더는 나를 다치게 하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비교 자체가 무의미해진 순간도찾아왔다. 바로 내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받아준 산에서 보낸 시간이 켜켜이 쌓이면서 맞이한 순간이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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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의 소리를 따르기로 했다. 크고 높은 산에 가고 싶다는, 언제나 내 마음 가득 차올라 있던 그 소리를. 나는 생각했다. 산은 눈으로, 추억으로, 상상으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심장으로, 가슴으로, 두 다리로 올라야 한다고. - P33

그동안 수많은 계획 아래 내가 가진 능력치와 한계치를 가늠하며 리스크가 적은 쪽에, 가능성이 좀 더 기우는 쪽에, 좀 더 안전한 쪽에 패를 던지고 살아왔다. 그러나 산이라는 공간에서는 그러한 저울질이 무의미하다.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 것, 모든 일들이 예측한 대로 이뤄지지만은 않는 것, 그래서 좌절하고 실패하는 것이 산에서는 훨씬 더 자연스럽다.
그런데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을 수 있지만 계획 이상의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 모든 일이 예측한 대로 이뤄지지만은 않지만 내 예측보다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 성취와 성공보다 더 멋지고 감동적인 좌절과 실패가 있을 수 있는 것 또한 산에서 배웠다. 무엇보다 산은 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줬다. - P58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멈출 수 없다. 이제는 안다. 힘들어서 좋았다는 걸 쉽지 않아서 좋았다는 걸 힘들어도 쉽지 않아도, 멈추지 않고 조금씩 오르고 오르다 보면 산등성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고, 모든 것을 용서할 멋진 풍경도 펼쳐질 것이고, 지나온 길들을 돌아보면서 뿌듯해할 것이고, 그러다 길게 잘 뻗은 내리막이라도 만난다면 다시 모든 걸 잊고 달려볼 거란 걸 힘들고 지겹고 그만하고 싶기도 하지만 결국 나한테는 이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걸.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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