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 Paju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필자의 <로미오와줄리엣>서평에서 말한 바 있다. 사랑은 산울림이어야 하지 않을까. 라고.
 
생기발랄한 젊은 두 남녀의 추억을 담아 시공간을 넘나들어 감동을 전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산울림, 그것은 ‘연인은 여름 바람에 흔들리는 거미줄 위로도 떨어지지 않고 걸어 다닌다지. 그처럼 사랑의 기쁨은 가벼운 것이지.(제2막 6장)’라는 신부의 말처럼 그 많은 아픔과 기쁨을 안고도 사랑이라는 힘으로 가벼운 몸이 되어 지금까지 그 울림을 전해주는 산뜻한 몸짓이 아닌가 한다. 해묵은 증오의 결실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생을 빼앗아 가고 그들의 아침에 서글픈 평화를 안겨다 주던 추억쯤이야 사랑이라는 힘으로 가뿐히 웃어넘기겠다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보낸 산울림의 속셈인지도 모른다. (끌's 서평 中)

이렇게 서로의 응답이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라고.

<파주>는 의문을 제기한다.
박찬옥 감독의 의도대로 리뷰를 남긴 독자들은 사랑은 안개처럼 피고 지는 것이라는 목소리를 낸다. 라는 것에 대하여. 
그럴까. 스멀스멀 피어오르다가 차갑게 사그라드는 안개. 일까.
솔직히
모른다. 사람들이 내뱉는 사랑한다 라는 말. 그래서

힘들었다.
극중 김중식(이선균)이 보여주는 처제 최은모(서우)에 대한 사랑을 이해
한다는 건.

머리로 이해할지 모르나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일은 내게는
힘든 일이다.
나 자신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그렇게나 아낄 수 있다는 것이 내겐 이해되지도 다가오지도 않는 이상,
그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내게는 꽝이다.
드러나있으나 드러나있지 않은 응축되어진 시대배경이라든가 철학적 깊이라든가 숨겨진 감독의 거대한 의도라든가
는 중요하지 않다.
평한다는 건 지독히도 주관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영역이니깐.
 
내게 있어 사랑은 여전히 산울림이다. 안개 위 피고 지는 사랑은 이미 사랑

아니다.
산울림의 의미상 소통이란 말을 함부로 올려놓을 수는 없으나
서로에게 산울림을 건넨다면 그것
만으로 족하다.
반응없는 것도 일시적인 것도 무한한 배려도 용납할 수 없다. 응답하고 욕심부리고 아파하고 잔잔하기도 산뜻하기도한
그것이 내가 잡으려는 산울림
임을 믿고 간다.


NO.821190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름다운 마무리
법정(法頂) 지음 / 문학의숲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은 종종 하늘의 존재를 잊는다. 그런 이들을 법정 스님은 꾸짖지는 않으실 것이다. 다만, 차를 건네며 물으실 것 같다. “하늘색이 어떤가?”라고. 이에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본다. 묵묵히. 오랫동안. 그리고 대답할 것이다. “약간 짙은 연두색입니다.”라고. 

『아름다운 마무리』, 그는 약간 짙은 연둣빛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여름향기를 꼬리남기며 사라져갔다. 무더우면서도 싱싱한 향기가 은은하게 퍼지고 있다. 모든 것은 본래 모습 그대로 수행하고 있어(p.220) 인간의 삶은 본분(本分)의 열정으로 부풀어 무덥다. 삶의 기술이란 개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깨어있는 관심(p.54)이기에 매순간의 싱그러움이 무더워진 삶을 식혀준다. 무더우면서도 싱싱한 삶, 이것이 ‘내려놓음’을 배우게 하고 ‘아름다운 마무리’로 안내한다.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며 새로운 시작’임을 알리고자 『아름다운 마무리』가 태어났다.   

경제침체로 사람들의 어깨는 구부러져 있다. 엉거주춤한 자세에 걱정에 눌려진 미간을 지탱하며 오늘도 출근전쟁길 속으로 들어선다. 전철 안, 버스 안, 신호를 기다리는 차 안, 땀 한 방울 제대로 닦을 수 없는 문명의 틀 속에 갇혀서, 혹은 도로 위 살을 파고드는 바람을 헤치면서 사람들은 하루를 시작한다. 그래서 자꾸만 잊어간다. 하늘색을. 한 걸음 멈추고 보는 하늘이 아닌, 잔디에 드러누워 오직 하늘만 생각하면서 바라본 하늘색을. 하늘에 떠다니는 수많은 물음들을. 나는 누구인지, 삶은 누구이고 욕망은 누구이며 죽음은 누구인지, 등의 물음들을. 

그래서 스님은 생각의 공간을『아름다운 마무리』에 흘려놓았다. 스님의 생각을 들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독자들은 베스트셀러의 거센 물줄기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에세이보다는 소설을 고집하는 내게도 그는 찾아왔다. 그리고 찾아냈다. 스님의 약간 짙은 연둣빛 카드. 그리고 ‘나는 남의 물음에 바르게 답하고 있는가.(p.224)’라는 평생동안 안고 갈 속삭임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겨울 내 얼었던 몸을 녹이려고 꿈틀거리는 봄에게, 소소리바람은 다그친다. 땅속으로 스며들어 깊은 잠에 빠진 새싹을 차고 매서운 손길로 깨워준다.

지나간 시간에 함께한 일들은 어찌 되는 건지 당신은 알고 있소이? 당신한테 묻고 싶은 말을 내 딸애한테 물었더니 내 딸은 엄마가 그런 말을 하니 너무 이상해, 하면서도, 사라지는 게 아니라 스며드는 거 아닐까, 엄마! 합디다. (p.235)

엄마는 그랬다. 봄이 다가오면 숙제와 시험을 반복하는 학교생활에 몸서리치는 내게 잔잔하지만 차고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 용기와 열정으로 당당히 서야한다고. 그렇게 엄마는 곁에 있지 않아도 소소리바람이 되어 내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힘든 시간 속에서도 일어설 수 있게 해주는 목소리였다. 나는 믿었다.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와 아줌마가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신경숙의 ‘엄마’는 더 이상 위대한 아줌마가 아니었다.

이젠 당신을 놔줄 테요. 당신은 내 비밀이었네. 누구라도 나를 생각할 때 짐작조차 못할 당신이 내 인생에 있었네. 아무도 당신이 내 인생에 있었다고 알지 못해도 당신은 급물살 때마다 뗏목을 가져와 내가 그 물을 무사히 건너게 해주는 이였재. 나는 당신이 있어 좋았소. 행복할 때보다 불안할 때 당신을 찾아갈 수 있어서 나는 내 인생을 건너올 수 있었다는 그 말을 하려고 왔소. (p.236)

엄마도 여자다. 엄마는 한 명의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런데도 우리의 엄마를 철인이라 부른다. 엄마도 엄연히 얼굴에 열기가 피어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일을 우리는 인식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 우리들이 엄마를 혼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몰아왔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하다는 것을 무시한 채.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서울역에 서 있는 엄마는 손톱이 바짝 잘린 투박한 두 손을 빈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눈물이 그렁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때의 엄마 눈이 소 눈을 닮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p.110)

잃어버린 엄마를 보았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눈을 기억했다. 신경숙은 어떻게 소의 눈을 생각해냈을까. 시골에서 자란 나는 어릴 적 보았던 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소는 촉촉하면서도 크고 선한 눈을 갖고있었다. 그러면서도 억셌다. 소의 눈을 떠올리자 신경숙이 그려낸 엄마가 더 절실히 다가왔다. 여리면서도 강한 엄마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던 순간들이 손가락에 미세한 떨림을 가져왔다.

소의 눈을 닮은 그녀의 엄마에게서 난 소소리바람을 본다. 이른 봄 살을 스며드는 매서운 바람, 그렇지만, 한 해를 일으켜 세우는 아름다운 영혼에 시선을 고정한다. 피에타상 앞에서만 부탁한다고 할 수밖에 없던 엄마와 만난다. 이 추운 겨울에도 엄마는 우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오는 바람이다. 지난 시간들에 지쳐서 새로 시작하는 새해가 두려워질 때면 따스하면서도 매서운 소소리바람으로 다그쳐주려고 자신을 숨긴다.

엄마의 손을 잡아야겠다. 소소리바람 옷을 벗고 함께 기대어 울자고 해야겠다. 엄마가 아닌 사람으로 새롭게 살아갈 엄마는 어떨지. 그녀의 얼굴에 번질 열기가 내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린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나무아래곰 2008-12-31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소소리바람이 읽는 나에게도 불어오는 듯한 글에 그만 마음이^^엄마를 부탁해는 굳어져버린 내 마음을 아프고 아름답게 치유해준 소설이었답니다.

xhvk 2009-01-12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엄마 팔짱을 끼고 영화를 보고 엄마만의 재래시장 노하우를 배우고 하루종일 함께 했습니다. 함께 하루를 보내주는 것-그것만으로도 엄마는 웃어주셨습니다.
 
통합의 리더십 - 열린 대화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미래형 문제해결법
아담 카헤인 지음, 류가미 옮김 / 에이지21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출퇴근 시간, 전철 안에서 밀려나가고 떠다닌다. 모든 일상을 CCTV가 감시하고 있다. 교육은 이미 정답을 적어둔 채 창의적 사고를 하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답답함' 그것이다. 이것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단 하나의 올바른 해답이라는 것은 교과서에나 있는 것이었다. 현실에서는 명쾌한 해답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P.33)

대학수업에서 얻은 진실 - 교과서는 정답이 아니다.
세상은 너무나도 복잡하며 시끄럽게 마찰하고 소리내려 한다. 매끄럽고 부드럽기를 원하는 하나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아니다. 세상을 지탱하는 톱니바퀴의 일부가 녹이 슬고 부서져야 '철커덕' 큰 소음을 내며 힘겹게 돌아가는 공간이다.

당신의 이성적인 주장과 나의 이성적인 주장이 맞설 때는 심각하고 위험한 갈등을 발생하지 않습니다. 심각하고 위험한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당신의 이성적이 주장이 나의 맹점을 치고 나의 이성적인 주장이 당신의 맹점을 칠 때입니다. (P.139)

더 나은 미래를 위하고자 열린 회의에서 오로지 자신의 주장만을 쏟아내는 사람들. 좀처럼 '들을 줄 모르는' 사람들. 언제쯤 타인의 목소리를 들어줄 것인지.

아담 카헤인은 말한다. 들을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치유의 힘을 통한 이 책을 통해 내뱉는다. '들어보라고'. 이러한 그의 생각을 들으며 디자인부분에 별을 다섯개 꾸욱 눌러버렸다. 의미심장한 표지에 씩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나는 지금까지 그런 식의 인사를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오른손을 구부려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왼손으로 그 주먹을 감쌌다.
......
"오른손은 열린 말하기를 뜻합니다. 그러나 주먹을 꽉 쥐어서는 안 됩니다. 주먹 안으로 연필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은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열린 말하기가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의논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왼손은 열린 듣기를 상징합니다." (P.195)

독자들이 살아온 삶에 있어서 자신을 말하려고만 한 적은 없는지, 혹은 자신은 듣는 것을 좋아한다는 주문을 걸어 들으려고만 한 적은 없는지 돌아보게 한다. 사람들 안에 있는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안에 있는 말을 건넬 줄 알아야 한다. 위계질서에 얽매인 대화 환경이 개선되어야 한다.

그 베인 상처는 양쪽에서 아물다가 하나로 붙을 겁니다. 원래 갈라진 살들은 하나가 되기를 원하니까요. (P.223)

처음부터 싸우고자 대화를 시작하는 사람은 드물다. 다만 우리는 어떻게 대화해야하는지 몰랐을뿐. 어떻게 들어야하는지 몰랐을뿐. 갈라진 살들은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 그 염원이 실천으로 행해지는 순간 살은 아문다. 우리는 싸우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 염원을 실천으로 옮길 때가 왔다. 다함께 실천으로 옮기는 순간 우리들의 상처는 아물기 시작할 것이다. 가족에서도, 친구 사이에도, 사회에서도, 지구에서도 이제 우리는 우리 안의 이야기를 꺼내고 그것을 들을 귀가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만들어 놓은 가정 속에 갇히어 우리는 타인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틀 속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정신의 거대한 비누방울 속에 우리는 갇히어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회의 한 요소로 살아가야만 그 거대한 비누방울을 깨뜨리지 않고 이상의 세계를 향해 끝없이 떠오르리라는 믿음을 갖고 말이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접하기 전까지도 여름의 한낮을 따가운 햇볕이 온몸을 지침이라는 구렁텅이에 몰고 가는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정을 받아들였었다. 축축한 흙 알갱이가 모두 자신이 다스리는 국가의 백성인양 휘감고 서있는 고목나무처럼, 뿌리 깊이 내렸던 생각은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접하는 동안 서서히 들썩거리고 있었다. 인간은 홀로 풀 수 없는 고독 속에 갇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이 소설에서는 콜롬비아 내륙 지방에서 담배를 경작하던 부지런한 본토인인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마콘도 마을을 건설하고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를 제외한 나머지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이 선조의 이름의 일부를 되풀이하여 물려받게 된다. 이러한 자신만의 이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접하게 만들었다. 이 가문의 후손들은 대부분 즉흥적인 여행이나, 전쟁참여, 혹은 외국에서 공부를 하는 등 마콘도를 떠나나 결국 마콘도로 돌아오고 만다. 감출 수 없는 고독의 빛을 흘리면서 말이다. 이러한 부엔디아의 가문의 마지막 후예가 마콘도의 멸망을 목도하는 것으로 대화는 끝이 났다. 백 년 동안의 고독에 시달린 종족은 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한 대목에서처럼 말이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접하며, 질주하는 스포츠카의 바퀴처럼 다리의 움직임이 빨라져 원을 그리면 낭떠러지도 무사히 건너가는 디즈니만화의 주인공인 듯,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무지개를 미끄럼틀 삼아 타고 노는 동화 속 요정인 듯, 마르케스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혼란의 미로 속에 갇혀 쉽게 길을 찾아 나올 수가 없었다. 머리와 상반신이 여자이고 살갗이 매끄러운 고래들이 살고, 얼음이 끓고, 양탄자를 타고 날아다니고, 4년 11개월에 걸친 대홍수가 일어나고, 나비들에 둘러싸여 사람이 자취를 감추게 되고, 죽은 멜뀌아데스나 푸르덴치오 아귈라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대화를 나누고, 이러한 거침없이 쏟아내는 마르케스의 손으로 세어보다 포기하게 만드는 혼란스러운 이야기들에 갇혀서 말이다. 전공에의 어떠한 의무감에 얼음이 끓는다고 하였을 때에는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려고 무단히 애를 썼다. 드라이아이스의 그 차가움 속에서 화상을 입는다고 하는 것처럼, 즉흥적인 승화 현상에 의하여 얼음이 끓는 것처럼 느낀 거라고 나름대로의 위로를 하면서 말이다. 이공계 학생의 일부이기에 마르케스의 이야기를 자꾸만 부정하려 하였기에 이 첫 만남은 위태롭고 혼란스럽기만 하였다. 그래서 나의 전공을 접어두고 그의 이야기를 이유 없이, 과학적 증명 없이 다시 접하는 노력을 해야 할 시간이 요구되었다. 그렇다. 그의 이야기는 물이 고지대에서 저지대로 흘러가듯이, 해가 지면 달이 떠오르듯이, 그렇게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한 노력 속에 마르케스와 만나면서, 부엔디아 가문의 선조들이 아름다운 꽃의 가시를 경계하듯, 여기저기 엉켜버린 그들의 혈육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 앞에 섹스를 경고하고 그들 사이의 돼지꼬리의 치욕을 들었을 때에는 정말이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몰랐다. 그의 거침없는 세계 속에 생겨난 돼지꼬리라고 하나, 빗방울이 땅에서 하늘로 쏟아진다는 이야기처럼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문득 돼지꼬리를 가진 사람들의 사진이 기사에 실렸다던 실화를 떠올리며, 아직도 난 거미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헤어 나오려고 발버둥 치면 더욱 휘감겨 거미줄에 갇히는 한 마리 잠자리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온 세상을 마음껏 누리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몸은 어느새 마르케스의 거미줄에 걸려들어 거울에 비쳐지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던 것이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현실에 있음직한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꾸며낸 허구이며, 허구이지만 사실적이어야 한다는 아이러니, 우리가 현실이라 생각하는 세계는 우리의 지각이 생각해낸 허구의 세계일 수도 있다던 강의가 떠올랐다. 부엔디아 가족을 불안하게 하였던 돼지꼬리의 치욕은 믿을 수 없지만 믿어야만 한다는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돼지꼬리의 실화를 접하면서 어쩌면 우리가 허구라고 말하는 그 세계는 실제로 있는 일, 사람들의 생각이 결정내린 제한 속에 진실을 허구라 하는 어리석음이 아닌가 생각하여 본다. 그만큼 우리의 생활은 호접지몽(胡蝶之夢), 허구와 진실을 구별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허구와 진실의 화학적 결합 속에서 각각의 자취를 잃어버린 세계에 빠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는 유리에서 새싹이 돋아나 꽃을 피운 것과 같은 상황 속에 처해지게 되었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가 이 원고를 해독하게 되는 순간부터 마콘도는 인간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며, 여기에 적힌 글들은 영원히 어느 때에도 다시 되풀이 될 수 없을 것이니, 그것은 백 년 동안의 고독에 시달린 종족은 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부분 말이다. 지금까지 벽에 초콜릿으로 못을 박아 놓는 듯 혼란 속을 오르내리게 하였는데, 그 동안의 이야기는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멜뀌아데스의 양피지를 해독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양피지에 실린 부엔디아 가문의 근친상간으로 인한 몰락을 미리 예언한 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허구 아닌 허구의 세계 속에는 멜뀌아데스의 허구 아닌 허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평화롭기만 한 시조 속의 지상낙원과 같았던 마콘도의 이야기는 허구 속 존재일 뿐이었던 것이다.

이에 문학평론가․서강대 교수인 김욱동은 『백 년 동안의 고독』은 문학적 실험실이며, '끓고 있는 얼음‘처럼, 일종의 모순 어법에 해당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은 역사적․문학적으로 큰 혼란을 겪어 온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이 창안해 낸 독특한 문학적 산물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장치나 세계 인식을 통하여 그들의 특유의 경험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마르케스의 작품은 좁게는 콜롬비아, 넓게는 라틴 아메리카라는 특정한 지방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지방성을 초월하는 보편적 문학, ’초월적 지방주의‘라고 하였다. 또한, 이 소설은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수탈 행위를 폭로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고발 소설이라 하였다. 미국 바나나 회사에 맞서 파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노동자들을 정부군에 의하여 학살되며, 이로 인한 시체들을 사람들이 볼 수 없는 한밤중에 화물차에 실어다 바다에 수장한, 엄청난 계략의 언급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역사는 진실과는 거리가 먼, 한낱 권력을 장악한 지배 계급이 조작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고, 이것이 바로 프랑스의 역사가 미셸 푸코를 비롯하여 미국의 두 역사가 헤이든 화이트와 도미닉 라카프카, 영국의 역사가 조너선 클락 등이 주장하는 포스트모던 역사 이론이라 하면서 말이다.

역사적 지식이 얕기에 김욱동의 해설은 또 다른 생각들을, 마르께스의 이야기 중에서, 낳으라고만 하면 새끼를 치던 가축과 낳으라고만 하면 달걀을 낳던 닭처럼 연달아서 머리를 가득 채웠다. 요즘 가정소설․애정소설이면서도 그에 벅차는 사랑을 받고 있는 박경리의 대하소설《토지》를 떠올렸다. 최서희와 머슴인 길상이를 결혼시키는 이야기는 소설에의 반영론적 요소이다. 또한 1930년대의 총독부와 빈민 사이의 중류 사회를 담은 염상섭의 《삼대》와, 1970년대의 군사독재나 산업화시대의 현실을 반영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같은 소설도 머릿속의 빈틈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이 채워 나갔다. 이러한 반영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 개념은 흔히 ‘모방’으로 대상의 재구성에의 중요성을 두었는데, 이러한 행위의 중요성의 인식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반영개념의 확대해석과 변형론을 종합해 본 Terry Eagleton은 반영론의 중심행위인 재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설명했다. 문학은 그 대상과 반영적이며 대칭적이며 일대일 대응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대상은 변형되고 굴절되고 용해된다. 거울이 그 대상은 ‘재’현하는(비추는) 것과 같은 의미보다는 연극공연이 연극대본을 재‘현’하는(각색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재현된다. 또는 좀 더 모험적인 경우를 들면, 자동차가 재료들을 조립하고 모아놓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재현된다. 연극 공연은 연극 대본의 ‘반영’ 그 이상이다.

이처럼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작품 또한 라틴 아메리카의 콜롬비아가 스페인의 지배와 통치 아래에 있다가 19세기 초엽에서야 해방되어 독립국가로 새롭게 태어난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는 이 소설에서 고독 속에 갇히어 멸망하는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 속에서 스페인계 상인 가문의 우르슬라 이구아란의 현실적인 힘을 쥐고 살아가는 모습과, ‘카탈로니아의 현인’이라 불리는 스페인 사람을 삽입시켜 정신적인 부를 상징하는 서점을 경영하는 모습을 제시한 것이다.

그랜트는 양심적 리얼리즘과 대응이론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리얼리즘의 대응론은 이른바 문학의 양심의 표현이다. 이 양심은 외부세계를 무시하거나 경시할 때 항의하고,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부터 자양분을 끌어내고, 또 그 상상력을 위해서 존재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중략)문학의 양심으로서의 리얼리즘은 스스로 현실세계에-의심할 바 없이 자신을 의탁하는 현실세계에 일종이 보상의무를 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그랜트의 양심적인 리얼리즘은 현실의 충실한 재현을 기본으로 하나, 지나친 경우에는 단순한 묘사주의로 빠지기 쉽다는 것을 알린다. 이에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돌아본다.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하에 있었던 콜롬비아의 과거에의 현실세계를 반영하고, 그러한 진실을 허구 속에 감추어 둔 것이다. 그러나, 그랜트의 양심적인 리얼리즘처럼 서구의 측면은 배제된 채로 마르케스에 의하여 선택되어진 fact 위에 그 자신만의 event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한 현실 속에 몰락하는 부엔디아 가문과 그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하던 ‘고독’이라는 존재의 당위성을 설명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에 부엔디아 가문은 어쩔 수 없이 백 년 동안의 고독에 시달린 종족이기에 몰락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 속에서의 부엔디아 가문 자체의 내적 결함을 회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들의 존경 속에서 독특한 발상과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던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집시들이 전해온 문명의 굴레 속에서 현실을 버린 채, 그 현실 상황에서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일에 몰두하게 되며, 그의 후손들은 성적 욕망에 사로잡히어, 비상구가 하나인 건물에 갇히어 그 건물의 화재(火災)로 쫓기듯이 하나같이 ‘고독’이라는 비상구로 몰려간 것이다.

이 이야기를 풀어 놓으며 마르케스는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우리는 현 시점에서 마르케스가 말하고자 한 것을 알게 되었을 수도, 그가 말하고자 한 것 이상으로 깨달았을 수도,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을 벗어나 자신만의 생각으로 그의 생각을 단정 짓기 쉽다. 또한 마르케스가 독자가 자신의 의도대로 깨우침을 받길 원한다면, 그것은 의도의 오류인 것이다. 언젠가 수용론에의 수용미학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수용하는 사람이 좋아한다면 그 작품은 최고의 가치를 갖게 된다는 것, 마르케스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는지 그 답을 구하기에 앞서 마르케스의 이야기에서 독자 스스로의 수용적인 요소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김욱동의 해설, 테리 이글턴의 반영론, 그랜트의 양심적 리얼리즘 등에 대한 깊이 있는 부분을 보며 머릿속을 채우던 생각들은 한 걸음 뒤에 돌려놓고자 한다.

『백 년 동안의 고독』순수한 그 자체에서 받아들인 요소, 그 요소에 가치를 두고 싶다. 시계바늘이 정해진 시간 속에 정해진 각도만큼 돌아가듯, 노래방에서 주어진 박자와 리듬에 나의 소리를 박아가며 노래를 하듯, 1분의 오차도 없이 9시면 어김없이 9시 뉴스가 방영되듯, 무시할 생각도 못한 채 그 정해진 틀 속에 갇힌 상상에의 위험을 앞서 보고 조심조심하는 독자를 꾸짖듯이 마르케스는 거침없이 쏟아낸 것이다. 자신에게서 무한히 피어오르는 상상을, 그 창의적 세계를 말이다. 그러한 틀에 현실을 허구로 몰아 구석에 박아 놓은 채, 진실을 허구라 하며 허구를 진실이라 하는 우리들의 혼란을 뿌리 깊이 내린 고목나무를 뽑아내듯 마르케스는 조심스레 꺼내어 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에 어릴 적 단순히 즐거움을 송긋송긋 얼굴 내밀게 하던 비누방울 놀이를 떠올려 본다. 또한, 만화 속에서 비누방울을 타고 세상을 여행하던 주인공들을 떠올려 본다. 투명한 그 경계 속에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내려다보던 모습, 자신이 동경하던 세상에서는 그 속에 발을 들여 놓으려고 하나 비누방울에 갇히어 구경만 해야 하던 모습, 자신도 모르게 어느 순간 비누방울을 깨트리어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공간에 놓인 모습, 그러한 만화 속 주인공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에 『백 년 동안의 고독』과 함께 호흡한 내 자신을 돌이켜 본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작품 그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속에 만들어 놓은 바늘로 마르케스가 태워 주려던 비누방울을 자꾸만 터뜨리던 모습, 어릴 때의 순수한 그 상태로 돌아가려는 노력 속에서 마르케스가 씌워준 내 주변의 비누방울의 형상, 마르케스가 보여주는 현실과 허구를 분류할 수도 없고 분류해서도 안 되는 세상과의 만남, 그 속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던 철저하게 믿어왔던 가정의 흔들림, 사람들이 허구라고 부르는 것의 뒤에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날 조롱해오던 진실이라는 녀석,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이렇게 많은 경험을 가져다주었다. 이것이야말로 마르케스가 전해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비누방울에 갇히어 울려오던 그의 메아리를 회상하여 본다. 비누방울에 갇혔던 그 순간만큼 순수한 마음으로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마음속에 만들어 놓았던 유리 상자를 깨고, 비누방울로 감싸두려 한다. 내 자신이 가까이 다가서면 쉽게 터뜨리고 받아들일 수 있는 비누방울 속에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