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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ㅣ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평점 :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만들어 놓은 가정 속에 갇히어 우리는 타인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틀 속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정신의 거대한 비누방울 속에 우리는 갇히어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회의 한 요소로 살아가야만 그 거대한 비누방울을 깨뜨리지 않고 이상의 세계를 향해 끝없이 떠오르리라는 믿음을 갖고 말이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접하기 전까지도 여름의 한낮을 따가운 햇볕이 온몸을 지침이라는 구렁텅이에 몰고 가는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정을 받아들였었다. 축축한 흙 알갱이가 모두 자신이 다스리는 국가의 백성인양 휘감고 서있는 고목나무처럼, 뿌리 깊이 내렸던 생각은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접하는 동안 서서히 들썩거리고 있었다. 인간은 홀로 풀 수 없는 고독 속에 갇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이 소설에서는 콜롬비아 내륙 지방에서 담배를 경작하던 부지런한 본토인인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마콘도 마을을 건설하고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를 제외한 나머지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이 선조의 이름의 일부를 되풀이하여 물려받게 된다. 이러한 자신만의 이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접하게 만들었다. 이 가문의 후손들은 대부분 즉흥적인 여행이나, 전쟁참여, 혹은 외국에서 공부를 하는 등 마콘도를 떠나나 결국 마콘도로 돌아오고 만다. 감출 수 없는 고독의 빛을 흘리면서 말이다. 이러한 부엔디아의 가문의 마지막 후예가 마콘도의 멸망을 목도하는 것으로 대화는 끝이 났다. 백 년 동안의 고독에 시달린 종족은 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한 대목에서처럼 말이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접하며, 질주하는 스포츠카의 바퀴처럼 다리의 움직임이 빨라져 원을 그리면 낭떠러지도 무사히 건너가는 디즈니만화의 주인공인 듯,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무지개를 미끄럼틀 삼아 타고 노는 동화 속 요정인 듯, 마르케스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혼란의 미로 속에 갇혀 쉽게 길을 찾아 나올 수가 없었다. 머리와 상반신이 여자이고 살갗이 매끄러운 고래들이 살고, 얼음이 끓고, 양탄자를 타고 날아다니고, 4년 11개월에 걸친 대홍수가 일어나고, 나비들에 둘러싸여 사람이 자취를 감추게 되고, 죽은 멜뀌아데스나 푸르덴치오 아귈라와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대화를 나누고, 이러한 거침없이 쏟아내는 마르케스의 손으로 세어보다 포기하게 만드는 혼란스러운 이야기들에 갇혀서 말이다. 전공에의 어떠한 의무감에 얼음이 끓는다고 하였을 때에는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려고 무단히 애를 썼다. 드라이아이스의 그 차가움 속에서 화상을 입는다고 하는 것처럼, 즉흥적인 승화 현상에 의하여 얼음이 끓는 것처럼 느낀 거라고 나름대로의 위로를 하면서 말이다. 이공계 학생의 일부이기에 마르케스의 이야기를 자꾸만 부정하려 하였기에 이 첫 만남은 위태롭고 혼란스럽기만 하였다. 그래서 나의 전공을 접어두고 그의 이야기를 이유 없이, 과학적 증명 없이 다시 접하는 노력을 해야 할 시간이 요구되었다. 그렇다. 그의 이야기는 물이 고지대에서 저지대로 흘러가듯이, 해가 지면 달이 떠오르듯이, 그렇게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한 노력 속에 마르케스와 만나면서, 부엔디아 가문의 선조들이 아름다운 꽃의 가시를 경계하듯, 여기저기 엉켜버린 그들의 혈육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 앞에 섹스를 경고하고 그들 사이의 돼지꼬리의 치욕을 들었을 때에는 정말이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몰랐다. 그의 거침없는 세계 속에 생겨난 돼지꼬리라고 하나, 빗방울이 땅에서 하늘로 쏟아진다는 이야기처럼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문득 돼지꼬리를 가진 사람들의 사진이 기사에 실렸다던 실화를 떠올리며, 아직도 난 거미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헤어 나오려고 발버둥 치면 더욱 휘감겨 거미줄에 갇히는 한 마리 잠자리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온 세상을 마음껏 누리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몸은 어느새 마르케스의 거미줄에 걸려들어 거울에 비쳐지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던 것이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현실에 있음직한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꾸며낸 허구이며, 허구이지만 사실적이어야 한다는 아이러니, 우리가 현실이라 생각하는 세계는 우리의 지각이 생각해낸 허구의 세계일 수도 있다던 강의가 떠올랐다. 부엔디아 가족을 불안하게 하였던 돼지꼬리의 치욕은 믿을 수 없지만 믿어야만 한다는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돼지꼬리의 실화를 접하면서 어쩌면 우리가 허구라고 말하는 그 세계는 실제로 있는 일, 사람들의 생각이 결정내린 제한 속에 진실을 허구라 하는 어리석음이 아닌가 생각하여 본다. 그만큼 우리의 생활은 호접지몽(胡蝶之夢), 허구와 진실을 구별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허구와 진실의 화학적 결합 속에서 각각의 자취를 잃어버린 세계에 빠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는 유리에서 새싹이 돋아나 꽃을 피운 것과 같은 상황 속에 처해지게 되었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가 이 원고를 해독하게 되는 순간부터 마콘도는 인간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며, 여기에 적힌 글들은 영원히 어느 때에도 다시 되풀이 될 수 없을 것이니, 그것은 백 년 동안의 고독에 시달린 종족은 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부분 말이다. 지금까지 벽에 초콜릿으로 못을 박아 놓는 듯 혼란 속을 오르내리게 하였는데, 그 동안의 이야기는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멜뀌아데스의 양피지를 해독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양피지에 실린 부엔디아 가문의 근친상간으로 인한 몰락을 미리 예언한 부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허구 아닌 허구의 세계 속에는 멜뀌아데스의 허구 아닌 허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평화롭기만 한 시조 속의 지상낙원과 같았던 마콘도의 이야기는 허구 속 존재일 뿐이었던 것이다.
이에 문학평론가․서강대 교수인 김욱동은 『백 년 동안의 고독』은 문학적 실험실이며, '끓고 있는 얼음‘처럼, 일종의 모순 어법에 해당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은 역사적․문학적으로 큰 혼란을 겪어 온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이 창안해 낸 독특한 문학적 산물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장치나 세계 인식을 통하여 그들의 특유의 경험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마르케스의 작품은 좁게는 콜롬비아, 넓게는 라틴 아메리카라는 특정한 지방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지방성을 초월하는 보편적 문학, ’초월적 지방주의‘라고 하였다. 또한, 이 소설은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수탈 행위를 폭로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고발 소설이라 하였다. 미국 바나나 회사에 맞서 파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노동자들을 정부군에 의하여 학살되며, 이로 인한 시체들을 사람들이 볼 수 없는 한밤중에 화물차에 실어다 바다에 수장한, 엄청난 계략의 언급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역사는 진실과는 거리가 먼, 한낱 권력을 장악한 지배 계급이 조작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고, 이것이 바로 프랑스의 역사가 미셸 푸코를 비롯하여 미국의 두 역사가 헤이든 화이트와 도미닉 라카프카, 영국의 역사가 조너선 클락 등이 주장하는 포스트모던 역사 이론이라 하면서 말이다.
역사적 지식이 얕기에 김욱동의 해설은 또 다른 생각들을, 마르께스의 이야기 중에서, 낳으라고만 하면 새끼를 치던 가축과 낳으라고만 하면 달걀을 낳던 닭처럼 연달아서 머리를 가득 채웠다. 요즘 가정소설․애정소설이면서도 그에 벅차는 사랑을 받고 있는 박경리의 대하소설《토지》를 떠올렸다. 최서희와 머슴인 길상이를 결혼시키는 이야기는 소설에의 반영론적 요소이다. 또한 1930년대의 총독부와 빈민 사이의 중류 사회를 담은 염상섭의 《삼대》와, 1970년대의 군사독재나 산업화시대의 현실을 반영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같은 소설도 머릿속의 빈틈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이 채워 나갔다. 이러한 반영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 개념은 흔히 ‘모방’으로 대상의 재구성에의 중요성을 두었는데, 이러한 행위의 중요성의 인식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반영개념의 확대해석과 변형론을 종합해 본 Terry Eagleton은 반영론의 중심행위인 재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설명했다. 문학은 그 대상과 반영적이며 대칭적이며 일대일 대응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대상은 변형되고 굴절되고 용해된다. 거울이 그 대상은 ‘재’현하는(비추는) 것과 같은 의미보다는 연극공연이 연극대본을 재‘현’하는(각색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재현된다. 또는 좀 더 모험적인 경우를 들면, 자동차가 재료들을 조립하고 모아놓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재현된다. 연극 공연은 연극 대본의 ‘반영’ 그 이상이다.
이처럼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작품 또한 라틴 아메리카의 콜롬비아가 스페인의 지배와 통치 아래에 있다가 19세기 초엽에서야 해방되어 독립국가로 새롭게 태어난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는 이 소설에서 고독 속에 갇히어 멸망하는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 속에서 스페인계 상인 가문의 우르슬라 이구아란의 현실적인 힘을 쥐고 살아가는 모습과, ‘카탈로니아의 현인’이라 불리는 스페인 사람을 삽입시켜 정신적인 부를 상징하는 서점을 경영하는 모습을 제시한 것이다.
그랜트는 양심적 리얼리즘과 대응이론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리얼리즘의 대응론은 이른바 문학의 양심의 표현이다. 이 양심은 외부세계를 무시하거나 경시할 때 항의하고,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부터 자양분을 끌어내고, 또 그 상상력을 위해서 존재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중략)문학의 양심으로서의 리얼리즘은 스스로 현실세계에-의심할 바 없이 자신을 의탁하는 현실세계에 일종이 보상의무를 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그랜트의 양심적인 리얼리즘은 현실의 충실한 재현을 기본으로 하나, 지나친 경우에는 단순한 묘사주의로 빠지기 쉽다는 것을 알린다. 이에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돌아본다.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하에 있었던 콜롬비아의 과거에의 현실세계를 반영하고, 그러한 진실을 허구 속에 감추어 둔 것이다. 그러나, 그랜트의 양심적인 리얼리즘처럼 서구의 측면은 배제된 채로 마르케스에 의하여 선택되어진 fact 위에 그 자신만의 event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한 현실 속에 몰락하는 부엔디아 가문과 그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하던 ‘고독’이라는 존재의 당위성을 설명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에 부엔디아 가문은 어쩔 수 없이 백 년 동안의 고독에 시달린 종족이기에 몰락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 소설 속에서의 부엔디아 가문 자체의 내적 결함을 회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들의 존경 속에서 독특한 발상과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던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집시들이 전해온 문명의 굴레 속에서 현실을 버린 채, 그 현실 상황에서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일에 몰두하게 되며, 그의 후손들은 성적 욕망에 사로잡히어, 비상구가 하나인 건물에 갇히어 그 건물의 화재(火災)로 쫓기듯이 하나같이 ‘고독’이라는 비상구로 몰려간 것이다.
이 이야기를 풀어 놓으며 마르케스는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우리는 현 시점에서 마르케스가 말하고자 한 것을 알게 되었을 수도, 그가 말하고자 한 것 이상으로 깨달았을 수도,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을 벗어나 자신만의 생각으로 그의 생각을 단정 짓기 쉽다. 또한 마르케스가 독자가 자신의 의도대로 깨우침을 받길 원한다면, 그것은 의도의 오류인 것이다. 언젠가 수용론에의 수용미학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수용하는 사람이 좋아한다면 그 작품은 최고의 가치를 갖게 된다는 것, 마르케스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는지 그 답을 구하기에 앞서 마르케스의 이야기에서 독자 스스로의 수용적인 요소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김욱동의 해설, 테리 이글턴의 반영론, 그랜트의 양심적 리얼리즘 등에 대한 깊이 있는 부분을 보며 머릿속을 채우던 생각들은 한 걸음 뒤에 돌려놓고자 한다.
『백 년 동안의 고독』순수한 그 자체에서 받아들인 요소, 그 요소에 가치를 두고 싶다. 시계바늘이 정해진 시간 속에 정해진 각도만큼 돌아가듯, 노래방에서 주어진 박자와 리듬에 나의 소리를 박아가며 노래를 하듯, 1분의 오차도 없이 9시면 어김없이 9시 뉴스가 방영되듯, 무시할 생각도 못한 채 그 정해진 틀 속에 갇힌 상상에의 위험을 앞서 보고 조심조심하는 독자를 꾸짖듯이 마르케스는 거침없이 쏟아낸 것이다. 자신에게서 무한히 피어오르는 상상을, 그 창의적 세계를 말이다. 그러한 틀에 현실을 허구로 몰아 구석에 박아 놓은 채, 진실을 허구라 하며 허구를 진실이라 하는 우리들의 혼란을 뿌리 깊이 내린 고목나무를 뽑아내듯 마르케스는 조심스레 꺼내어 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에 어릴 적 단순히 즐거움을 송긋송긋 얼굴 내밀게 하던 비누방울 놀이를 떠올려 본다. 또한, 만화 속에서 비누방울을 타고 세상을 여행하던 주인공들을 떠올려 본다. 투명한 그 경계 속에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내려다보던 모습, 자신이 동경하던 세상에서는 그 속에 발을 들여 놓으려고 하나 비누방울에 갇히어 구경만 해야 하던 모습, 자신도 모르게 어느 순간 비누방울을 깨트리어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공간에 놓인 모습, 그러한 만화 속 주인공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에 『백 년 동안의 고독』과 함께 호흡한 내 자신을 돌이켜 본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작품 그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속에 만들어 놓은 바늘로 마르케스가 태워 주려던 비누방울을 자꾸만 터뜨리던 모습, 어릴 때의 순수한 그 상태로 돌아가려는 노력 속에서 마르케스가 씌워준 내 주변의 비누방울의 형상, 마르케스가 보여주는 현실과 허구를 분류할 수도 없고 분류해서도 안 되는 세상과의 만남, 그 속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던 철저하게 믿어왔던 가정의 흔들림, 사람들이 허구라고 부르는 것의 뒤에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날 조롱해오던 진실이라는 녀석,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이렇게 많은 경험을 가져다주었다. 이것이야말로 마르케스가 전해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비누방울에 갇히어 울려오던 그의 메아리를 회상하여 본다. 비누방울에 갇혔던 그 순간만큼 순수한 마음으로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마음속에 만들어 놓았던 유리 상자를 깨고, 비누방울로 감싸두려 한다. 내 자신이 가까이 다가서면 쉽게 터뜨리고 받아들일 수 있는 비누방울 속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