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내려와 소년의 머리카락을, 눈동자를, 손등을, 감싸준다. 그리고
물,
이 흐른다. 잔잔하고 아름답게.
그 위를 서서히 타고 내려오는 것이 있다.
어느 소녀의
시체.
충격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는 소년들의 발랄함과 물소리를 타고 내려온 오프닝 씬에서 시체, 라니. 아름다운 자연의 선율을 배반한 하나의 시체를 둘러싸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녀의 마음을 가진 66세 미자로부터.
손자와 함께 사는 미자는 요즘 시를 배우러 다닌다. 그녀가 다니는 강좌의 김용탁(시인 김용택) 씨는 말한다. 시를 쓰는 것이란, 보는 것과 흰 종이의 여백 그리고 연필을 깎는 것, 이라고. 시를 통해 또 하나의 순수와 아름다움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믿는 미자.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결코 아름답지 못한 실제. 그녀는 현실의 고통과 추함을 시를 찾음으로써 잊으려한다. 피하려한다. 눈을 감고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그 속에서 아름다움이 있을지도 모르는 그곳을 향해 노래하고자 한다. 그리고 엔딩에서 마침내 그녀는 하나의 시를 짓고 사라진다. 짓밟혀 가는 아픔과 고통 속에서 그것을 참아내며 순수를 잃지 않으려는 하나의 열매로써. 그 열매를 아래에 소개한다. 영화의 엔딩을 장식했던 한 구절 한 구절이 의미심장하고,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에 의미를 부여해줌으로써, 온몸이 서늘해지게 만들던 착잡하고 답답해오면서도 아름답고 긴장을 풀게 하는 한 편의 시를.
아네스의 노래
이창동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 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처음부터
소녀의 죽음을 알렸고, 시가 죽었음을 알리고, 그 속에서 현실 속 순수와 아름다움이 죽었음을 느끼게 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나 정작 현실 속 우리 자신은 그저 그런 음담패설의 주인공일 뿐이라고. 그래서일까. 요즘 새롭게 얼굴 내미는 시들에서도, 소설에서도, 햇빛 한가득을 담고 맑고 시원한 말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래서 미자는 힘들었떤 걸까. 들려오지 않는 소리를 찾느라고.
미자의 목소리로 '아네스의 노래'가 읊어진다. 그녀의 발자취를 떠올리면서. 어느 새 죽은 소녀가 그녀의 시를 건네받아 낭송한다. 소녀의 발자취를 통해. 그리고
물,
이 흐른다.
고통으로 허덕이는 슬픔을 가득 안고, 소녀를 다독이고자 흐르면서. 자꾸만 씻어내리면서. 너는 순수하구나, 몸은 더렵혀졌을지라도 마음은 여전히 맑구나, 널 위협하는 조그만 슬픔의 파동을 잠재워주련다, 라고. 계속해서 흐르면서 그녀를 다독인다. 소녀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변함 없던 세상에 대한 맑은 눈을. 미자의 나이를 위협할 수 없었던 순수함을.
시는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써야만 한다. 아름다운 시를.
세상은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보아야만 한다. 아름다운 세상을.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을 만들고, 볼줄 알고, 지킬줄 알아야함을, 묻는 것일까.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늘 힘겹다.
그래도 그의 영화를 놓칠 수는 없다.
세상에 쫓겨 사는 뇌와 가슴에게 한 칸의 공상의 시간과 반성으로 지성의 목마름을 달래기위해.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NO.82500102
일상의 하나.
영화 <시>의 마지막에 흐르는 '아네스의 노래'를 들으면서 바라보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궁금증이 증폭됐다.
'아네스의 노래'는 결코 이미 있던 시가 아닐 것이다.
이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은 물론 한 장면 한 장면을 마음에 담고 있는 이의 작품이다.
예술이다, 라고.
그래서 추측하건대
이창동 감독이 시인 김용택 님을 아우른 시인들 몇 명을 초대해 미리 소소한 시사회를 갖고 일정 기간을 두어 시를 한 편 짓게 했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상상을 담고 집에 돌아와 작가 추적에 나섰다. 왠일일까. 어딜 쫓아가든 작가는 나와있지 않고 '이창동'이라는 이름만 제시된다. 작자미상인 걸까.
온갖 망상을 안고 있다가 그 시가 정말로 이창동 감독의 작품임을 알고는 소름이 끼쳤다.
그는 정말 예술이다,
라는 생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