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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더 넓은 지평을 향하여
박만섭 지음 / 이슈투데이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책의 시작은 신고전파에 대한 비판이다.
일반균형이론ㅡsmd 정리
후생경제학ㅡ 불가능성 정리
게임이론ㅡ 구전 정리
좌측의 신고전파의 기초를 이루는 이론들은 이를 반박하는 우측의 이론들로 약점이 노출됐는데 이는 신고전파 이론이 덜 완성된 것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는 서로 영향을 줌에도 개인만을 우위에 두기에 생기는 신고전파 방법론 자체의 문제 때문이며 진정한 경제학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면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후 소개되는 여러가지 학파들은 신고전파와는 다르게 사회적인 면을 고려하는 이론들이며 각 학파의 전문가들이 각각의 이론을 설명하면서 대안적 관점들을 소개한다. 책에 소개된 여러가지 학파들이 있지만 스라피언 경제학과 맑스 경제학만 간략히 정리해보려한다.
스라피언 경제학은 신고전파의 한계주의와 대치되는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칼 맑스로 이어지는 고전파의 잉여접근법을 재구성한다. 한계주의는 교환관계이므로 단순히 일직선상의 흐름이지만 잉여접근법은 재생산을 중시하므로 순환적인 흐름이다. 또 한계주의는 자본, 노동, 토지라는 생산요소들의 분배변수가 수요와 공급의 교차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지만 잉여접근법은 각각의 요소들의 분배변수가 결정되는 방법이 다르다고 본다.
지대
ㅡ외연지대
생산량이 증대될 때, 비옥도가 높은 토지와 낮은 토지의 차이
ㅡ내연지대
동일한 크기의 토지에서 생산량이 더 많은 기술과 더 적은 기술 간의 차이
임금
ㅡ애덤 스미스
자본과 노동의 협상
ㅡ데이비드 리카도
생계비 수준
ㅡ칼 맑스
산업예비군의 크기
이윤
ㅡ리카도의 지대이론에서의 한계토지가 이윤의 기준이 되므로 지대는 분석대상이 아니다.
사회적 총생산물(Q) - 필수적 투입물의 사용량
Q - [총임금(W) + 물질적 투입물의 소모량(K)] = 사회적 잉여(S) = 이윤(P)
S/W+K=Q/W+K-1=이윤율(R)
이윤율을 구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총생산물과 필수적 투입물의 사용량을 알면 되며 이윤율을 구하기 위해 잉여접근법은 3가지를 주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S1 생산기술상태
ㅡ사회적으로 사용 가능한 기술의 집합이 주어져 있다.
S2 임금률
ㅡ사회적인 협의에 따라 임금률이 이윤율보다 먼저 결정된다.
S3 사회적 생산 수준과 구성
ㅡ기술상태와 수요에 따라 결정되지만 사회의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으므로 순수이론이라기보다 역사적 요인에 따른다.
S1에 따라 한 단위 상품 생산에 필요한 노동투입량을 알 수 있으며 이에 S2를 곱하면 W를 알 수 있다. S3에 따라 한 단위 상품 생산에 필요한 물질적 투입물의 양을 알 수 있다. 이것에 S3에서 주어진 Q를 곱하면 K를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Q, W, K가 동일한 측정단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서로 다른 측정단위를 가진 것들을 동등한 척도로 측정하기 위해 가치론을 이용했다. 애덤 스미스는 지배노동가치론을 이용했는데 이는 이윤율이 변하면 사회적 총생산물도 같이 변하고 전자를 알기 위해서는 후자가 필요한데, 후자를 알기 위해서도 전자가 필요하므로 순환논법에 빠진다.
데이비드 리카도와 칼 맑스는 투하노동가치론을 이용했는데 이는 스미스의 논리적 오류는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투하노동가치론도 정확한 이윤율을 구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노동과 자본의 비율이 사회적 평균이어야만 정확환 이윤율을 구할 수 있는데 실제로 이럴 가능성이 없기에 오차가 발생한다. 정확한 이윤율을 구하기 위해서는 상대가격이 필요한데 상대가격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윤율이 필요하다. 결국 투하노동가치론도 순환논법에 빠지는 것으로 보인다.
피에로 스라파는 상대가격과 이윤율이 동시에 결정되는 방정식을 통하여 스미스부터 리카도, 맑스가 맞이한 난점들을 해결한다.
잉여접근법은 모든 산업에서 이윤율이 균등해지는 장기위치를 다룬다. 모든 산업에서 이윤율이 균등화되는 이유는 한 산업의 이윤율이 높으면 지속적으로 다른 산업에서 그 산업으로의 이동이 발생하며 많아진 경쟁자들의 존재로 그 산업에서의 이윤율이 낮아지고 다른 산업은 경쟁자들이 줄어들어 이윤율이 높아지게 되어 결국에는 모든 산업에서 이윤율이 균등화된다. 이것이 잉여접근법의 경쟁 개념이다.
이윤율을 균등하게 만드는 요소는 상대가격이며 이 상대가격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한계주의와 잉여접근법의 차이다. 전자는 수요와 공급에 따라 상대가격을 이해하지만 후자는 이윤율 균등화에 따라 장기적 상황을 상정하는 이론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잉여접근법은 이윤율과 상대가격을 세 가지 조건에 따라 결정한다. 이 결정에 관한 것이 가치분배이론인데 이는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나타낼 수 있지만 이 세 가지 조건이 결정되기 위한 상황은 수학적인 것보다 더 광범위한 역사적인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 결정되기 위한 시기, 그 시기의 사회ㆍ정치적 상황 등. 이는 역사적 관점은 배제한 체 순수이론으로만 결정된다는 신고전파 이론과는 다른 것이다.
스라파의 공헌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맞이한 난점들을 해결하고 잉여접근법을 구체화하여 새로운 경제학의 토대를 개척했다는데 있다.
맑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철학, 정치학 속에 경제학이 종속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류동민은 엄밀히 맑스 경제학은 분과학문으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가치중립성을 표방하는 신고전파와 비교하는데 각 분과학문 별로 발달한 신고전파에 비해 맑스 경제학은 총체적이며 미분화되었지만 상품에서 시작하여 사회적 관계로까지 나아가므로 미시와 거시를 하나로 포괄하는 학문이며 가치, 잉여가치, 축적과 재생산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밝힌다.
앞선 스라피언 경제학에서 본 것처럼 맑스도 잉여접근법을 취했으므로 가치가 필요했다. 자동차의 가치결정식을 보면
ㅡ자동차 한 대의 가치
자동차 한 대를 만드는 노동량(직접노동)+자동차 한 대에 필요한 철판을 만드는 노동량(간접노동)+자동차 한 대 분의 철판에 필요한 철강을 만드는 노동량(간접노동)...... 이런 식으로 자동차를 만드는 데 필요한 상품들을 과거까지 소급해서 노동량으로 더해줘야한다.
하지만 각각의 노동이 동질한지가 문제가 되는데 맑스는 추상노동이라는 개념으로 동질화했고 당시의 노동은 결합노동으로써 동질의 노동이라 봐도 큰 무리가 없었을 수 있으나 지식노동이 중시되는 현 시점에서는 서로 다른 노동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과제가 된다.
또 가치를 계산하기 위해서 과거노동에 이자를 붙이지 않고 바로 계산하는데 이는 가치는 사회적 평균의 노동량이라는 맑스의 정의에 부합하지만 일부에서는 비판이 따른다. 특히 스라파는 맑스와 다른 식으로 과거노동을 처리하는데
맑스
직접노동 + 간접노동(이자율 계산 없이 현재의 가치로 바로 계산)
스라파
직접노동 + 간접노동(복리로 이자율 계산)
스라파는 맑스와 다르게 날짜붙은 노동이라는 개념으로 과거의 노동에 복리 이자율을 붙이므로 한때 노동집약적 기술이 이 개념으로 자본집약적 기술이 되기도 하는 기술재전환이라는 개념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분배이론 비판에 중요한 요소로써 기여한다.
그러면 맑스가 직ㆍ간접 노동을 현재 시점에서 더해주는 것의 의의는 무엇일까? 불변자본은 자신의 가치를 상품에 그대로 이전할 뿐이며 가변자본만이 순생산물의 가치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가치결정식에 따르면 간접노동인 철강으로도 철강가치를 계산할 수 있으며 현재 시점에서 노동만이 가치를 창출한다는 명제는 옳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노동가치론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본제를 보는 시각이 달라는지는 것이 주요한 이유다. 신고전파의 효용이론은 자원의 합리적 배분과 그 교환관계에 초점을 맞추지만 노동가치론은 자연을 인간이 어떻게 개발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의 사회적 관계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사회적 차원의 노동의 배분과 그 노동생산물의 처분, 즉 이윤의 원천과 이윤의 이동이 핵심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반면 신고전파 경제학에서는 이윤과 이자의 구분이 명백하지 않으며 이윤도 맑스 경제학만큼으로 중요한 관점이 아니다.
맑스의 노동가치론을 사용하게 되면 이윤의 원천은 잉여가치 착취가 된다. 착취라고 하면 뭔가 규범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간단히 말하면 노동자의 노동생산성보다 실질임금의 수준이 더 낮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맑스는 노동력과 노동의 구분으로 이러한 개념을 도출했고 루이 알튀세르는 이를 맑스를 리카도와 단절시키는 주요한 개념이라고 주장했다. 오키시오 노부오와 모리시마 미치오는 수학적으로 이를 증명하여 맑스주의 기본정리라는 개념을 정립하기까지 한다.
이 개념은 신고전파 경제학의 한계생산성 개념을 이용하면 착취가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다. 한계생산성이 실질임금보다 높을 수도 있고 낮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회적인 평균 노동생산성 개념을 이용해야만 한다. 이점에서 신고전파와의 차이가 또 드러난다.
하지만 맑스주의 기본정리는 자본제 사회의 특수한 착취가 아니며 다른 체제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착취이다. 맑스주의 기본정리의 수학적 조건은 그대로 따르면서 노동력을 땅콩으로 바꿔 땅콩이 착취를 당한다고 비꼰 새뮤얼 보울스 등의 땅꽁가치론은 자본제 사회에의 특수한 착취이론이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보였다.
맑스는 자본제 사회에서의 착취를 보이기 위해 여러가지 개념들을 보였는데
ㅡ잉여노동
노동력을 판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자본제의 특수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노동력을 판매하면 노동자는 사용자의 통제 아래에 놓이게 된다. 이때 노동자에게 필요한 생계비가 4시간의 노동이면 충분히 충족되지만 사용자가 8시간의 노동을 명령하면 노동자는 이를 따라야한다.
필요노동시간<총노동시간
0<이윤
이를 뒤집으면
필요노동시간>총노동시간
0>이윤
자본제에서 이윤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은 총노동시간이 필요노동시간보다 커야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왜 필요노동시간이 총노동시간보다 클 수가 없는지에 대한 이론도 필요하다. 이에 대한 이론이 상대적 과잉인구다.
ㅡ상대적 과잉인구(산업예비군)
자본제는 기술의 발전을 요하는 사회이므로 c/v에서 v를 줄이는 방식으로 발전한다. 그러므로 필요한 노동인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잉한 인구가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이논리의 약점은 이러한 과잉인구가 항상 존재하는지, 그리고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불균등한 권력관계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비폭력적인 자본제 사회에서 이러한 관계가 항상 가시적인지가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맑스는 아래의 개념으로 착취를 설명하기도 한다.
ㅡ사회적 생산력의 자본의 생산력으로의 전환
자본제 이전의 사회는 개별노동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자본제에서는 개별노동이 결합노동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사회적 생산력이지만 이것이 자본의 생산력으로 바뀌어 이에 따른 생산물들의 처분 권한을 오로지 자본만이 가지게 되는 사회구조를 비판하는 경제 민주주의적 이론이다.
제라르 뒤메닐과 던컨 폴리의 신해석(NI)은 미셸 아글리에타 등으로부터 시작된 노동시간의 화폐적 표현으로부터 맑스의 가치론을 국민소득통계등을 통해 조작가능한 범주로 만들었다.
mㅡ노동시간의 화폐적 표현
Pㅡ시장가격
Yㅡ경제전체의 순생산물
Nㅡ총노동시간
Wㅡ노동시간의 화폐 임금
VLPㅡ노동력의 가치
m=PY/N
VLP=W/m=W/(PY/N)=WN/PY
신해석에서의 노동력의 가치는 국민소득 내에서 임금소득의 비율과 같은데 이는 노동소득분배율과 일치하며
0<VLP<1
이와 같은 식으로부터 앞선 자본주의의 착취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제 마지막으로 축적과 재생산만이 남았다. 이를 위해서는 맑스의 이윤율 저하라는 개념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통상적으로 기술진보란 자본절약적, 노동절약적, 중립적 기술진보의 세 가지로 나뉜다. 이들 시이의 우월성은 없으며 자본가가 비용최소화 이윤극대화에 따라 선택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맑스의 기술진보 개념은 다른데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고도화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통념대로 자동화, 기계화가 고도화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맑스의 기술진보 개념은 자본제의 발달에 따라 고도화된 것이 맞다. 하지만 맑스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논란이 된다.
간단히 c/v를 자본의 유기적 구성(k)이라 정의하면
K=c/v=c/(v+s)×(v+s)/v=c/(v+s)×(1+s/v)
라는 식을 얻는다. 마지막 식을 보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산노동(v+s)에 대한 불변자본의 비율과 잉여가치율(s/v)에 따라 결정된다. 전자는 통념적인 기술진보에 따르면 증대될 것이고 후자는 기술진보와는 상관이 없어보인다. 잉여가치율과 독립적인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구하기 위해 k 대신 c/(v+s)를 쓰자는 의견도 있지만 맑스는 기계화가 진행되면 노동이 더 고되질 것이라 주장했으므로 잉여가치율도 k든지 c/(v+s)든지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무엇이든 이윤율 저하의 논증의 핵심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이다.
이윤율은 투하된 자본총량에 대한 이윤으로 정의되므로 r=s/c+v가 된다. 이식에 v를 나눠주면 r=s/v÷(c/v+1)이 된다. 이는 잉여가치율의 증대 속도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증가 속도보다 빠르지 않은 이상 이윤율은 저하한다는 것이다. 물론 맑스는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는 요인들을 노동가치 이하로의 임금 지불, 불변자본의 가격 저하 등을 언급하기에 단순히 이윤율 저하가 아니라 이윤율 저하와 상쇄요인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봐야한다는 시각들이 있다.
맑스 이전의 경제학자들도 이윤율이 저하할 것이라는 주장을 했는데 스미스는 자본가 사이의 경쟁으로, 리카도는 수확체감의 법칙으로 이윤율이 저하될 것이라 주장했다. 이후의 존 메이너드 케인즈 또한 이윤율이 저하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적이 있으므로 이윤율 저하라는 개념 자체는 흥미가 있는 주제일 수 있다. 하지만 맑스 경제학에서 이윤율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과 잉여가치율에 달려 있고 자본의 유기적 구성 또한 잉여가치율과 연관이 있으므로 이윤율, 자본축적은 모두 계급대립의 결과로 결정된다는 것이 맑스주의 사고이다.
오키시오 노부오는 현행 가격에서 단순히 비용을 절감하는 기술만을 택할 경우 실질임금이 증가하지 않는 이상 균형이윤율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오키시오의 정리를 발표한다. 오키시오의 정리에 따르면 신기술이 기초부문에 도입되면 균형이윤율이 증가하고 비기초부문에 도입되면 균형이윤율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오키시오의 정리에서 균형이윤율의 증가는 일시적 초과이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스라피언 경제학에서 봤듯이 부문 간 이동이 일어나 새로이 생성된 균형점이 이전의 균형점보다 높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키시오의 정리가 단순히 이윤율 저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실질임금의 그대로인 상황에서 맑스주의적인 기술진보가 일어나더라도 이윤율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었다.
오키시오의 정리의 대우명제는 이윤율의 저하가 일어나려면 실질임금의 증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맑스주의에서 보는 자본제의 발전과 변화는 생산영역에서의 노사 간의 계급 대립인데 오키시오의 정리는 이를 분배의 문제로 축소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맑스주의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기술발전, 분배와 계급대립의 연관관계를 만든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수 있다.
맑스가 모든 것이 옳으니 자본론은 성전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오히려 맑스를 배제하는 것이다. 맑스는 인간이었다. 그러니 그가 옳은 것도 틀린 것도 있을 것이다. 스라파든 오키시오든 맑스를 따랐던 사람이었지만 현대적으로 수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부분을 수정하거나, 혹은 좀 더 사고를 확장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제 맑스 경제학도 다양한 경제이론과 융합하여 더욱 발전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반주류 경제학의 바람직한 발전방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