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모던 - 60년대 한국 개발 체제의 기원
한석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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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으로 전체 모습을 재단하는 태도는 설득력이 없다.”



이 책은 내가 평소 좋아하던 조승연 작가로부터 추천을 받아 읽게 되었다. 이 분이 학생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한국인의 문화적 특징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읽었다고 해서 관심이 갔다.



한국인의 기질, 예를 들어 빨리빨리 문화, 철저한 서열제, 체벌 등 이러한 경향이 어디서 왔는가를 탐구하는 책이다. 이러한 문화는 조선 시대의 문화도 아닐뿐더러 서구의 문화라고 하기에도 고개가 저어진다. 작가는 이 기원을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에서 찾고 있다. 개발 독재 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민족적 기질이 만주국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며 실제로 만주국 출신의 인사들이 국가의 재건을 담당했다.



이 책은 한국인의 기질적 특성의 기원을 만주국으로 설정하고 그 근거를 마치 연구 논문처럼 기술하기 때문에 초반부에는 조금 지겹게 느끼기도 했으며 배경 지식을 하나하나 다 설명하려 해서 장광설처럼 늘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상당히 정치적으로 빠지기 쉬운 주제임에도 학술적으로 현상을 분석하려는 객관적 태도는 긍정적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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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29
피터 싱어 지음, 노승영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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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철학강의”를 통하여 헤겔을 접하고 역사가 의미 있게 발전하느냐는 생각이 계속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헤겔에 대해 더욱 알아보고 싶었다. 입문서로 괜찮다는 평이 많아 피터 싱어의 헤겔을 구매했다. 고유서가 첫 단추 시리즈에서 낸 책인데 책 디자인도 괜찮고 소지도 용이하여 첫 느낌이 좋았던 거 같다.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내준다면 계속 구매할 거 같다. 저자가 헤겔 철학을 각 분야로 나누어서 쉽게 설명해주기 때문에 읽는데 어려움 없이 금방 읽을 수 있었으며 딱딱하지 않고 재밌게 서술하기 때문에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입문서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저자도 말하듯이 헤겔은 역사에 모종의 의미와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대 과학의 견해는 멕베스의 인생관처럼 “소음과 광란이 가득하고 아무런 뜻 없는 바보 이야기” 에 가깝다. 대다수 현대 사상에서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무수한 인간의 온갖 개별적 목적을 넘어서는 궁극적 목적이 역사에 있다는 가정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역사에서 이유를 찾는 헤겔의 사상은 이제 폐기 처분을 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문득 사마천이 사기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사기”의 열전에 첫 번째 목차는 백이숙제 열전이다. 백이와 숙제라는 고죽국 왕자들이 있었는데 둘 다 서로에게 왕위를 양보하다가 같이 도망쳐 나왔다. 주 문왕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으나 이미 주 문왕은 죽었고 주 무왕이 상중에 은 주왕을 정벌하는 것을 보고 경악하며 말 고삐를 잡고 말린다. 형제들은 강태공의 변호로 겨우 목숨을 건지지만 주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거부하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고 살다가 주나라 백성이 이 수양산도 주나라 땅이 아니냐는 말에 부끄러워하며 고사리도 먹지 않다가 굶어 죽었다. 그에 반해 도척이라는 도적이 있었는데 태산에 웅거하며 9천 명의 부하를 이끌면서 제후를 공격하고 약탈할 정도로 기세가 대단했다. 토벌당했다는 기록도 없어서 사마천은 백이숙제 같은 선인은 굶어 죽고 도척같은 악인은 천수를 누리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과연 천도가 있는가? 라는 물음을 던진다. 물론 헤겔이 말하는 역사 발전은 이런 선인이 복을 받고 악인이 벌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와 다른 점이 많지만 결국 역사에서 이유를 찾는다는 점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공통적인 것 같다.



“역사철학강의”를 읽고 나서도 헤겔 철학의 여러 개념은 모호한 점이 많았는데 이 책에서 다시 설명해줘서 개념화를 잘 할 수 있었다. 정신과 실재의 관계, 절대지에 어떻게 다다르는가의 문제도 이렇게 쉽게 설명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쉽게 설명해주었다. 헤겔의 정반합 변증법을 역사에 대입하여 예시를 든 것도 흥미로웠다. 공동체와 개인이 조화된 그리스 사회가 정, 기독교 사회하에서 개인의 양심을 중요시한 종교개혁이 반, 그리고 공동체와의 조화와 개인의 양심이 합일된 1830년대 독일이 합, 이런 식으로 설명해주니 역사가 어떻게 변증법하에서 발전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역사철학강의”에서 숱하게 읽은 것이지만 간단하게 도식화해주니 더 각인된 거 같다. 1830년대 독일 사회가 과연 합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나 말고도 아주 많은 사람이 비판했기에 굳이 거기에 더하지는 않기로 한다. 헤겔의 종교관도 논란이 많지만, 정확히 정리해줬다.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다.”라는 말을 신과 세계에 대입하는 발상이 신선하기까지 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지만, 세포의 합 이상이다. 마찬가지로 신도 세계로 구성되어 있지만, 세계의 합 이상이다. 그리고 세계로 현현한다. 정신과 실재의 관계와 맥락이 일치하는 것 같아서 헤겔의 일관된 관점이 아닐까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역사에 이유가 있다면 우리 삶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거 또한 일종의 아편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조금의 아편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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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선언 고전의 세계 리커버
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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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편견 없이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역사상 가장 파란을 일으킨 책 중 하나라고 누구나 뽑을 “공산당 선언”이다. 가장 최근에 번역된 버전을 구매했는데 상당히 얇다. 구성도 공산당 선언만 넣기에는 너무 내용이 적다고 생각했는지 공산주의 원칙, 서문들, 그리고 해제까지 첨부했다. 공산당 선언 자체는 상당히 명문이라 할만하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같은 누구나 한 번씩 들어보았을 명문들이 많이 나온다. “공산주의 원칙”은 아무래도 사회과학적인 내용이다 보니 읽기가 지루했다. 해제를 넣어준 것은 좋았던 거 같다. 읽은 것을 다시 정리해 볼 수 있었다.



공산주의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결단코 객관적이지 않다. 사실 편견이 많은 편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한 진지한 사유보다는 “공산당 선언”에서 직관적으로 느낀 감상 위주로 글을 적고자 한다. “지상낙원을 만들려는 노력이 항상 지상지옥을 만들어왔다.” 하이에크가 “노예의 길”에서 공산주의와 파시즘과 같은 극단적인 사상을 비판하며 한 말이다. 저걸 7~8년 전쯤에 읽었는데 그때와 지금 똑같이 전적으로 동의하는 몇 안 되는 생각이다. 뭐 우리네 인생에 저걸 적용할 만큼의 권력이 주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국가나 사회만큼 큰 수준이 아니더라도 회사, 가정에서도 충분히 적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완벽해지려고 하면 파국에 이르고 만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내용 중 지금 사회에서 적용되고 있는 사항도 많은 거 같다. 가령 복지제도 같은 경우는 오히려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보다 더 진보되었다고 여겨진다. 혁명 주체를 의식이 없는 프롤레타리아로 설정한 것도 흥미로웠다. 나 같으면 잘 교육된 엘리트층을 떠올렸을 거 같아 프롤레타리아가 왜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의 논리 방향이 재밌었다. 마르크스 자신은 나름 예언을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대부분 틀렸다. 공산혁명이 러시아에서 일어났다는 것부터 마르크스의 이론과는 맞지 않았으니 말이다. 시작부터 꼬여서인가 세계의 절반을 가지고 한 공산주의 실험은 결국 실패로 끝났고 공산주의는 현대에 와서 무서운 유령이 아니라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가 어찌 알 수나 있을까 우스꽝스러운 망령이 다시 무서운 괴물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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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학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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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저서들을 다시 읽어보기로 하고 선택한 첫 번째는 “도덕의 계보학” 이다. 여기서는 제1 논문인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을 위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도덕, 선한 것과 악한 것,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있다. 그런 의문을 다들 한 번쯤 품었을 거 같다. 우리가 나면서부터 선악을 구별하는 것인가? 아니면 후천적으로 교육에 의해 사회에 의해 선악을 구별하게 된 것인가? 아니 애초에 선악이라는 것이 실재하는 개념인가? 니체는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도덕의 족보를 따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선악 도덕개념이 어디서 비롯하였는지 작정하고 따져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선악이 아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었다. 지배층들 즉 귀족들은 자신의 특징인 고귀한, 강력한, 아름다운, 행복한, 신의 사랑을 받는 등을 좋은 것이라 규정했고 그에 대응하는 노예들의 특징인 가련한, 가난한, 무력한, 비천한, 고통받는, 궁핍한, 병든, 추한 등을 나쁜 것이라 규정했다. 이것이 원래 있던 좋음과 나쁨이다. 그런데 이런 귀족들에 대항하여 노예들이 원한을 갖게 되었다. 특히 니체가 언급하는 바는 대표적인 사제 민족, 유대 민족이 원한을 갖고 물리적인 복수가 아닌 정신적인 복수를 2천 년 동안 감행하였다는 것이다. 즉 “가련한 자만이 선한 자이고, 가난한 자, 무력한 자, 비천한 자만이 선한 자이며, 또한 고통받는 자, 궁핍한 자, 병든 자, 추한 자만이 경건한 자이자 신에 귀의한 자이며, 오직 그들에게만 축복이 있다. 그 반면에 너희 고귀하고 강력한 자는 영원히 사악하고 잔인한 자, 음란하고 한없이 탐욕스러운 자, 신을 부인하는 자이다. 또한 너희는 영원히 축복받지 못하고 저주받으며 천벌 받을 것이다!”



니체는 이 두 가지 가치관을 헬레니즘 대 헤브라이즘, 로마 대 유대로 규정하였다. 유대 민족의 정신적 복수가 2천 년 동안 서서히 감행되었기에 우리는 주인 도덕이 노예도덕으로 전복되었는지도 모른 채 노예도덕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논리가 과장된 부분은 있지만, 처음에는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고 지금은 선악 도덕을 강렬하게 혐오하게 되었다. 선악 이분법 논리가 만연한 지금 현실에서 생각해볼 거리를 많이 제공하는 거 같다.



제1 논문에서 언급한 바는 아니지만, 니체는 도덕의 족보를 찾고 도덕을 해체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선악 도덕을 없애고 기준 없이 사는 것은 오히려 선악 도덕이 있을 때보다 더 비참한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 니체는 각자 자신이 입법자가 되어 자신에게 좋은 것들로 가치를 만들어 살라고 한다. 사실 나는 이 부분에서 몇 년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나 자신이 입법자가 되어 내가 내 가치를 창조해라’는 외침에도 가치에 대한 나의 판단을 보증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 어렴풋이 내린 결론은 나는 수없이 의심하고 수많은 정보를 계속해서 받아들인다. 애당초 절대적 선악은 그것이 존재하더라고 인간이 알 수도 없는 것이라면 내게 좋은 것, 내가 옳다고 판단한 것이 내 삶에 있어 기준점으로 삼아도 그렇게 무리수가 아니지 않을까? 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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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3
B. 파스칼 지음, 이환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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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니체의 저작을 다시 읽어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니체의 원전들이 상당히 아포리즘의 형식을 가지기 때문에 예열 차원에서 아포리즘 부류의 책을 읽어보고자 하였고 나름의 명성이 있는 파스칼의 “팡세”를 구매하게 되었다. 이 책은 파스칼이 책으로 낸 것이 아니라 파스칼이 “기독교 호교론”이라는 책을 준비하면서 남긴 여러 단문을 사후에 재구성하여 책으로 낸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용이 이어지지 않고 뚝뚝 끊기는 느낌이 많이 든다. 그리고 앞에 언급했듯이 아포리즘의 형식이라 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읽기가 어려울 거 같다.



솔직한 감상으로는 기대한 만큼의 대단한 저작은 아니었다. 번역의 문제인지 원전 자체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깔끔하지 않고 듬성듬성한 느낌이 많이 들어서 읽기에 퍽 불편하였다. 물론 전체적인 구성이나 논리 방향은 읽을 만 했던 거 같다. 파스칼이 더 오래 살아서 본인이 책을 냈다면 훨씬 더 좋은 작품이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살면서 익숙히 들어왔던 명언들이 “팡세”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특히나 인간 본성에 대해서 날카롭게 분석하여 압축한 거 같아서 그런 부류의 잠언을 읽을 때면 경이감을 느끼기도 했다. 인간의 비참함을 너무 할 정도로 논박하는데 인간의 비참에서 인간의 위대가 나온다는 역설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종종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아예 모르고 사는 것이 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비참의 필요성과 비참을 알아야 비참을 극복할 수 있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자신의 비참을 모르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모르고 자신의 비참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이 구절이 “팡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인 거 같다. 인생에서도 신과 비참, 오만과 절망 그 둘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파스칼을 단순히 수학자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거 같다. 이 책이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을 책은 아닌 거 같지만 인간 파스칼의 치열한 사유를 엿볼 수 있는 것으로 가치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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