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헤겔 ㅣ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29
피터 싱어 지음, 노승영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철학강의”를 통하여 헤겔을 접하고 역사가 의미 있게 발전하느냐는 생각이 계속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헤겔에 대해 더욱 알아보고 싶었다. 입문서로 괜찮다는 평이 많아 피터 싱어의 헤겔을 구매했다. 고유서가 첫 단추 시리즈에서 낸 책인데 책 디자인도 괜찮고 소지도 용이하여 첫 느낌이 좋았던 거 같다.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내준다면 계속 구매할 거 같다. 저자가 헤겔 철학을 각 분야로 나누어서 쉽게 설명해주기 때문에 읽는데 어려움 없이 금방 읽을 수 있었으며 딱딱하지 않고 재밌게 서술하기 때문에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입문서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저자도 말하듯이 헤겔은 역사에 모종의 의미와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대 과학의 견해는 멕베스의 인생관처럼 “소음과 광란이 가득하고 아무런 뜻 없는 바보 이야기” 에 가깝다. 대다수 현대 사상에서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무수한 인간의 온갖 개별적 목적을 넘어서는 궁극적 목적이 역사에 있다는 가정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역사에서 이유를 찾는 헤겔의 사상은 이제 폐기 처분을 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문득 사마천이 사기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사기”의 열전에 첫 번째 목차는 백이숙제 열전이다. 백이와 숙제라는 고죽국 왕자들이 있었는데 둘 다 서로에게 왕위를 양보하다가 같이 도망쳐 나왔다. 주 문왕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으나 이미 주 문왕은 죽었고 주 무왕이 상중에 은 주왕을 정벌하는 것을 보고 경악하며 말 고삐를 잡고 말린다. 형제들은 강태공의 변호로 겨우 목숨을 건지지만 주나라 백성이 되는 것을 거부하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고 살다가 주나라 백성이 이 수양산도 주나라 땅이 아니냐는 말에 부끄러워하며 고사리도 먹지 않다가 굶어 죽었다. 그에 반해 도척이라는 도적이 있었는데 태산에 웅거하며 9천 명의 부하를 이끌면서 제후를 공격하고 약탈할 정도로 기세가 대단했다. 토벌당했다는 기록도 없어서 사마천은 백이숙제 같은 선인은 굶어 죽고 도척같은 악인은 천수를 누리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과연 천도가 있는가? 라는 물음을 던진다. 물론 헤겔이 말하는 역사 발전은 이런 선인이 복을 받고 악인이 벌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와 다른 점이 많지만 결국 역사에서 이유를 찾는다는 점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공통적인 것 같다.
“역사철학강의”를 읽고 나서도 헤겔 철학의 여러 개념은 모호한 점이 많았는데 이 책에서 다시 설명해줘서 개념화를 잘 할 수 있었다. 정신과 실재의 관계, 절대지에 어떻게 다다르는가의 문제도 이렇게 쉽게 설명할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쉽게 설명해주었다. 헤겔의 정반합 변증법을 역사에 대입하여 예시를 든 것도 흥미로웠다. 공동체와 개인이 조화된 그리스 사회가 정, 기독교 사회하에서 개인의 양심을 중요시한 종교개혁이 반, 그리고 공동체와의 조화와 개인의 양심이 합일된 1830년대 독일이 합, 이런 식으로 설명해주니 역사가 어떻게 변증법하에서 발전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역사철학강의”에서 숱하게 읽은 것이지만 간단하게 도식화해주니 더 각인된 거 같다. 1830년대 독일 사회가 과연 합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나 말고도 아주 많은 사람이 비판했기에 굳이 거기에 더하지는 않기로 한다. 헤겔의 종교관도 논란이 많지만, 정확히 정리해줬다.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다.”라는 말을 신과 세계에 대입하는 발상이 신선하기까지 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지만, 세포의 합 이상이다. 마찬가지로 신도 세계로 구성되어 있지만, 세계의 합 이상이다. 그리고 세계로 현현한다. 정신과 실재의 관계와 맥락이 일치하는 것 같아서 헤겔의 일관된 관점이 아닐까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역사에 이유가 있다면 우리 삶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거 또한 일종의 아편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조금의 아편은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