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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세계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세상에는 파헤치지 않는 게 좋은 장소, 손을 대지 않는 게 좋은 장소란 것도 있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장소라면 반드시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요." [p.310]
주말에 신나게 읽어내려간 온다리쿠의 어제의 세계는 도쿄에서 회사원으로 일하던 남자, 이치가와 고로가 상사의 송별회 자리에서 홀연히 모습을 감추고, 그 1년 후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탑과 수로의 고장 M마을, 이 마을의 물이 없는 강에 걸쳐진 다리, 미나즈키 다리에서 복부를 찔린채 쇼크사한 살인인지 사고인지 모를 사건을 다루고 있다. 특별히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평펌한, 눈을 떼자 마자 금세 기억의 바닥에 매몰되어 잊어버릴 얼굴이지만 한 번 봤던 것을 카메라처럼 기억하는 신비한 능력을 갖은 사람이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서 이 마을의 역사를 가르쳐 달라고 했던 남자. 회사를 퇴사하고 이 마을에 정착해도 됐을텐데 사라지듯 가명을 쓰면서까지 그곳에 살면서 그가 알아내려고 한 것들이 무엇인지 그의 죽음에 호기심을 갖고 이 마을 찾은 당신. 그는 왜 그렇게 사라질 수 밖에 없었을까, 범인은 누구일까, 왜 죽였을까 등등 과거와 현재 번갈아가며 밝혀지는 남자의 행적.
커피숍 여주인, 모닥불 피우는게 취미인 고등학생, 역무원, 전직 고등학교 교사인 향토사,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쌍둥이 할머니, 전직경찰등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으로 이야기되다보니 점점 이 사건은 범인이 누구인가 보다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도에 흔적도 없는 세 개의 탑을 둘러싼, 이 마을 사람들이 지켜내고자 하는 이 마을의 특별한 비밀같은 존재에 대한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이끌리고 마는것이 큰 특징인 듯~ 그녀 스스로 '내 문학세계를 집대성한 책'이라 말할 만큼의 자부심이 물씬 묻어나올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연이은 살인사건 속 하나 둘 밝혀지는 마을의 비밀. 그리고 진짜 범인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것이 너무나 의외라 살짝 김빠지기도 했지만 세상 모든일이 사실은 그렇듯 평범한데 받아들이는 우리네들의 마음속 이기심이 그렇게 다르게 보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보고픈대로, 생각하고 싶은대로 ~
바람이 불면 통장수가 돈을 번다는 ~ '나비효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텔레비전에서 본 옛날 드라마 내용이라며 싸움에 지고 도망친 여덟 명의 무사가 어떤 마을을 찾아가지만 마을 사람들이 그들이 갖고 있던 돈과 칼과 갑옷을 빼앗기 위해 서로 짜고서 환대하는 척하며 그들을 방심하게 만들어 살해한 다음 비밀로 한다는 명탐정에 의해 밝혀지는 사건을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내가 읽은 요코미조 세이시의 '팔묘촌'을 이야기한 것이라 신기하더라.
비밀이란 희한한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비밀이어도 다른 누군가 에게는 비밀이 아니기도 하다. [p.272]
줄거리만 따지자면 정말 별 것 아닌 내용을 500여페이지가 넘는 이야기로 채워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온다리쿠.
이번 책 역시나 신비롭고 오묘한 온다리쿠만의 세계에 푹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오늘이라는 새로운 하루만큼, 어제까지와는 다른 '온다리쿠'만의 새로운 세계가 막 시작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