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15.

 

갑갑한 공기가 싫어 산행을 갔다. 곳곳에 야생화와, 초록의 싱그러움이 눈을 맑게 해줬다. 특히 맛있고 상쾌한 공기. 조금 더 올라가니 편백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다. 나를 반겨주는 소리없는 속삭임과 침묵들. 가지고 온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한구절 설해목(雪害木)을 읽었다. 오랜 산사에서 보낸 스님의 명상의 시간들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떠난자들이 그립다.

 

내용을 옮겨 보았다.

  

해가 저문 어느 날, 오막살이 토굴에 사는 노승(老僧)앞에 더벅머리 학생이 하나 찾아왔다. 아버지가 써준 편지를 꺼내면서 그는 사뭇 불안한 표정이었다. 사연인즉, 스님이 알아서 사람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물른 노승과 그의 아버지는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편지를 보고 난 스승은 아무런 말도 없이 몸소 후원에 나가 늦은 저녁을 지어왔다. 저녁을 먹인 뒤 발을 씻으라고 대야에 가득 더운 물을 떠다주는 것이었다. 이때 더벅머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아까부터 훈계가 있으리라 은근히 기다려지기까지 했지만 스님은 한마디 말도 없이 시중만을 들어주는 데에 크게 감동한 것이다. 훈계라면 진저리가 났을 것이다. 그에게는 백천마디 좋은 말보다는 다사로운 손길이 그리웠던 것이다.

 

이제는 가버리고 안 계신 한 노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게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노상의 상()이다. 산에서 살아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들이 많이 꺽이고 만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러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꺽이게 된다.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하얀 눈에 꺽이고 마는 것이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꺽이는 메아리가 울려올 때, 우리들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에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겨울이 지나면 앓고 난 얼굴처럼 수척하다.

 

사아밧티이의 온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살인귀 앙굴리마알라를 귀의 시킨 것은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신통력이 아니었다. 위엄도 권위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자비였다. 아무리 흉악무도한 살인귀라 할지라도 차별 없는 훈훈한 사랑 앞에서는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인 것을(불교신문, 1968.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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