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여 오른다 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문에 있는 신의 천사가 내게죄의 정죄(淨罪)를 허락지 않으니, 죽는 날까지 죄를 회개하지 않은 벌. 여기서 기다려야 하는 세월은살았던 세월과 같도다.
은총 안에 살아가는 사람의 기도가도와준다면 짧아지겠으나, 다른 기도는 하늘에서 들어주지 않으리.
연옥에서는 (신의) 은총 안에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한 마음으로 올리는 기도가 우리를 도와준다면 그 영혼은 정해진 시간보다 빨리 하늘에 오를 수 있다고 말한다. 연옥에 있는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는 사고방식은 교리적으로는 이미 존재했지만,
단테가 이처럼 문장으로 명료하게 나타냄으로써 중세말엽부터 교회의 관습으로 넓게 뿌리내렸다.
현세에 사는 사람이 진정으로 올리는 기도가 있으면 연옥의 영혼은 그만큼 구원에 가까워질 수있다. 천국에 있는 혼이 신에게 기도를 올리면 효과는 보다 크다.
여기에서 각별히 언급해 두고 싶은 구절은 연옥의 정화 여행의 특색을 잘 표현한 제3곡의 마지막 행, 나폴리 왕 만프레디의 말이다. - P340
살아 있는 자의 기도로 빨리 나아간다. 이 행은 그 앞의 명시를 받는 대명사가 많아서 1행으로 번역하기 힘들었는데, 직역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현세에 사는 사람의 기도로발걸음을 크게 내딛으므로‘ 가 된다.
그렇다면 기도란 본래 무엇인가. orazione는 기도를 가리키는데근원이 된 라틴 어 oratio와 비슷하며 동시에 이는 대화‘ 를 의미한다.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은 신과 이야기‘ 를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연옥에서 고통받는 영혼을 위해 신앙이 더 깊은 사람이 기도하면, 그 기도가 신에게 받아들여져 연옥에 있는 영혼이 산을 오르는 일이 그만큼 쉬워진다.
이러한 연유로 연옥에 있는 영혼의 구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연옥원조자매회(陳援助姉妹會)‘라는 수도회도 생겨났다.
그리스도교가 아직까지 세간의 이해를 얻지 못한 일본에서는 명칭이 변경되었지만, 일찍이 종교적인 이름을 가진 수도회가 성립한 것도 신학적인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외국에는 이 명칭을 그 - P341
킨다. 연옥편에서는 Cato라는 라틴 이름으로도, Catone라는 이탈리아이름으로도 성명을 밝히지는 않았다. 지옥편의 일곱 번째 계곡, 자살한자들이 모여 있는 부분에서 언급했지만(지. 14.15), 베르길리우스의『아이네이스」 (6 · 434-439, 8 · 670)에서 그의 자살은 자유를 추구하고의를 위한 것이었다고 칭찬하고 있으며, 단테도 『향연』 4권 28장 말미162행에서 고귀하고 우아한 덕(nobilita)이 카토에게서 극치에 달했다.
고 찬미했다. 또한 『제왕론』에서도 2권 5장 134행 이하에서 불명예로살아가기보다는 자유를 위해 죽음을 택한 사람으로서 카토에게 존경을 표했다. 그러므로 현재 상식으로는 쉰 안팎의 그를 옹(翁, veglio)이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위엄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그가 자살했지만 자살한 자들이 가는 지옥의 일곱 번째 계곡에 떨어지지 않고 연옥의 파수꾼이 된 까닭은 그가 자유를 갈망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은 연옥의 산을 오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옥에 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베르질리오가 카토에게 단테를 지나가게 해 달라고요청할 때 단테에 대해 그가 찾아와 자유를 청하나니, 무릇 그 지극한소중함은 그것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만이 아는도다 (Libertà vacercando, che si cara,/come sa chi per lei vita rifiuta)‘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사수했던 분이라면 아시겠지요)(연 · 1.71-72)라고 한 말은 유명하다.
이렇게 연옥에서는 자유를 추구할 수 있으므로 그곳은 자유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인간적 행위의 장이 된다. - P342
니다. 영영 돌아올 길 없는 곳, 캄캄한 어둠만이 덮인 곳으로 갑니다. 그믐밤 같은 어둠이 깔리고 깜깜한 가운데 온통 뒤죽박죽이 된 곳, 칠흑 같은 흑암만이 빛의 구실을 하는 곳으로 갑니다" 라는 표현이 있다.
또 구약성서 시편 139장 8절에는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고 지하에 가서 자리 깔고 누워도 거기에도 계시며" 라는 구절이 있다. 인간은 유대교 시대부터 절대적인 지옥과는 달리 은총을 내리시는 신이 늘 함께 계시는 장소를 사후세계의 하나로 여겨 왔다.
연옥과 지옥의 구별은 그다지 확실치 않았고 명부 맨 밑바닥에 지옥 같은 장소가 있으며명부 조금 위쪽에 연옥 같은 곳이 있다고 여겼던 시기도 있다. 그러나단테가 생각하기에 연옥은 북반구 지하에 있는 지옥의 지구 중심부를통과해 반대편으로 나온 곳에 있으므로 남반구에 있다.
연옥의 의미
그렇다면 연옥과 같은 장소는 왜 생각해 냈을까.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자유를 추구했던 지사(志士) 카토(제1곡), 게으른 자이긴 했으나나쁜 의도는 없었던 벨라좌(제4곡) 외에도 지옥에 보내기에는 죄가 가벼운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 중 한 예를 제5곡에서 노래한다.
단테는 베르질리오를 따라걷다가 야코포 델 카세로와 본콘테 다 몬테펠트로, 피아 등과 같은, 분쟁의 와중에 죽어 간 사람들의 혼과 마주친다. 지금 우리가 이들에 관해 일일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그 옛날 횡사로 죽은 자들이니, 그리하여 임종에 이를 때까지 죄인이었으나, 그때 하늘의 빛이 우리를 깨우치시어 - P343
스스로 뉘우치고 용서하였노라, 신은 즉 그를 뵙고자 하는 소망으로 우리 마음을 격려하시니 그와 화해한 몸으로 세상을 나섰도다 (연·5, 52 57 야마카와)
횡사‘란 뜻을 채 이루지 못하고 전쟁에서 죽었거나 첩자나 배신자때문에 죄 없이 살해당한 것을 뜻한다. 권력자가 제멋대로 법을 휘두르던 시대에는 왕이 명령을 내려 죽이는 일도 흔히 있었다. 정직 결백하고 왕에게 바른 말을 간한 사람이 갑자기 살해당하기도 한다.
그들이설령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갑작스럽게 살해당하기 때문에 대부분은 죽음에 대한 채비를 제대로 할 수 없다. 따라서 마지막고해나 기도도 올릴 수 없고, 게다가 상대를 원망한 채로 죽어 갔을지도 모르니 그런 의미에서는 온전한 신앙을 성취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은 지옥에 가야만 하는가. 그리스도교는 이렇게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 처우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겼다. 죽은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었다 해도 죽는 순간 신앙을 가진 자로서 적합한 행동을 하지 못했으면 지옥에 가야만 하는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의견을말했지만 그로 인해 부정한 자들에게 살해당한 사람이 지옥에 가도 괜찮을까. 이런 문제의식이 바로 13세기 이후 연옥이 급격하게 일반화된 원인이기도 하고, 또한 단테가 시 속에서 그 구조를 분명히 밝히려 한 커다란 동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각으로 본다면 연옥편 제4곡과 제5곡은 단테가 연옥이 필요하다고 느낀 이유를 사례를 들어 명확히 밝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후세계에는 지옥과 천국 외에 연옥이 있으며, 지옥에 떨어질 만큼 악하지 않고 천국에 갈 만큼은 훌륭하지 않은 사람들, 요컨대 그런 의미에서 mediocrita (중간자, 보통사람)인, 대부분 그러한 무리에 속할 우리에게도 사후에 직면하게 될 장소로 열 - P344
려 있다는 사실이 단테가 주는 일종의 안도감일 것이다. 그는 세간을중간자의 세계라고 보았을 것이다.
밤의 평가와 연옥
그런데 일반적으로 낮은 노동의 시간, 밤은 휴식의 시간 이라는 사고가 있다. 낮에는 여러 가지 것들을 보고 듣는다.
밤은 『만요슈』에 ‘질흑 같은 밤‘ 이라고 나와 있듯이 매우 어둡다. 캄캄한 밤에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신을 떠올릴 수 있다. 밤에 단순한 자연 상태에서 자신의 주위를 정화하면 주위의 아름다운 사람, 편리한 도구, 예술 작품, 자기가하고 싶은 일의 소재 같은 가시적 대상은 모두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자기 마음만 남게 되므로 밤이야말로 기도할 시간이라고 말한다. 수도원에서는 세속을 끊어 내는 그러한 밤 시간을 중시했다.
밤이 신과 만나는 시간이라는 생각은 중세 신앙서 속에서 많이 발견되며, 기도수도회 예를 들면 베네딕트회나 시토회(트라피스트회)에서는밤에도 시종(時鐘)에 맞춰 몇 번이고 일어나서 성당으로 향하고 기원을 노래한다. 밤 아홉 시경 그날의 마지막 기도를 올리면 방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든다.
한밤중인 자정에 일어나 모두 함께 40분 정도 시편을 낭송하는 기도를 행한다. 다시 잠들었다가 새벽 세 시쯤 일어나 기도한다. 카르투지오회는 이를 혼자서 행한다. 밤은 기도의 시간이다.
그러나 밤은 한편으로 다른 사람의 눈도 없고 자신이 해야 하는 일로부터 벗어나 있으므로 나쁜 일을 생각할 가능성도 있다. 검은 옷을입은 악마는 밤에 슬그머니 찾아온다. 대부분의 죄는 밤에 일어난다.
따라서 밤은 신이 부여해 주신 시간이긴 하나 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는 13세기 신학적 문제의 하나였다. - P345
아직 연옥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연옥 들판에 있던 베르질리오와 단테는 성을 향해 가던 도중 우연히 마주친 소르델로(Sortells)에게 지름길을 묻는다. 그러자 소르델로는 ‘위로 오르는 일은 밤에는 할 수 없으니 (ed andar sul di notte non si puete;) (연 · 7.44)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문답은 이어진다.
그것은 어인 연유요, 밤에 오르고자 하는 이는 다른 이에게 방해를 받기 때문이오, 아니면 힘이 미치지 않아 스스로 오르지 못함이오. 착한 소르델로가 손가락으로 땅을 그으며 이르기를, 보시오, 그대는 해가 진 후에는 이 금 하나도 넘기 어려우리허나 오르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밤의 어둠뿐이니, 그 어둠이 힘을 앗아 의지를 가로막으리 (연 · 7. 49-57 야마카와)
이 세상의 밤은 신에게 다가가는 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죄로 기우는 때이기도 하다. 그에 비해 연옥에서는 밤의 어둠이 사람의 힘을빼앗아 의지를 약화시킨다. 따라서 연옥에서는 밤에 움직이면 안 된다. 우리는 하루 종일 온갖 일들에 마음을 빼앗겨 신을 생각할 수 없다.
밤에야말로 신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밤은 아름다운 상상을 할 수 있는 시간이므로 밤에야말로 사색의 능력이 커지고 사색의 의지도 강해진다. 그러한 시간엔 우리의 마음도 천국을 향한 방향으로 조금은 가까워진다.
그러나 동시에 밤에는 나쁜 마음이 일거나 사악한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현세를 사는 우리의 마음에는 양극성이 있다. 그에 비해 연옥의 밤은 부정성 하나로 결정되어 있으며 그것은 죽음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단테의 지옥과 연옥은 모두 현세 자체를 깊게 생각하게 하는 것들로 - P346
가득 차 있다. 지옥편에서는 이 세상에서 절망하면 그것이 곧 지옥임을 배웠는데, 밤이 가지는 양면성 중에서 밤의 어둠 속에서 자신의 의지가약해지고 능력도 빼앗길 때는 살아 있으되 연옥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읽어 나가면 지옥이나 연옥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문학의 의미를 통절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신곡』은 현세를 사는사람들에게 현세와는 다른 세계를 현세의 현실 행위와 관련시켜 생생하게 묘사해 줌으로써 어느새 현세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해 깊은 질문을던지게 하는 책이다. 이는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만인에게 열린 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의 본질에 관하여
자, 그렇게 본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단테가 종교를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알 수 있다. 단테는 ‘종교란 무엇인가 라고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넌지시 일러준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종교에는 세 가지 특색이 있다. 첫째로 종교는두 개의 세계를 기반으로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세와 그것을 지배하는 초월적인 세계로 나누는 것이다. 초월적 세계에는 부처님이든 하느님이든 초월자가 존재한다.
e vidi uscir dell‘ alto e scender giùedue angeli con due spade affocate, (Purg. VII, 25-26) 보라 천상에서 땅으로 내려 선두 천사는 불의 검을 가졌다. - P347
따라서 현세의 살아 있는 하느님이나 산 부처에게 기도하면 성취할수 있다는 생각은 종교의 본래적인 의미에서 벗어난 것이다. 종교에서이 두 세계를 이어 주는 존재는 이를테면 천상적 존재, 초월적 존재여야만 한다.
천사는 천상적 존재자의 사자에 불과하지만, 그의 손에 들린 불의 검은 계율을 어기는 자를 벌하거나 추방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로, 종교는 어떠한 형태로든 사후세계를 생각한다. 그것은 일견전적으로 형식적으로 보이기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장례식을 떠올려보면 어떤 종교든 고별사가 있어서 돌아가신 분의 은혜를 추모한다.
이렇듯 종교는 죽은 자를 매개로 사후세계와 일종의 연관성을 가진다. 신화의 사후세계는 지하의 저승뿐이지만 종교는 천상과 낙원도 가지고있다.
단테 생각에 사후는 종교적 도덕 혹은 신에 대한 도덕에 따라 삼분되어 있다. 성스러운 행위를 한 사람은 천국으로, 신을 모독한 악한자는 지옥으로 가지만, 세상 대부분의 사람은 중간자이므로 사후에는소 카토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처럼 정죄를 위한 수련의 장이 마련되는데, 그곳이 바로 연옥이다.
Correte al monte a spogliarvi lo scoglio, ch‘esser non lascia a voi Dio manifesto, (Purg. 11. 122-123)
산으로 치달려 허물을 벗으라그리하지 않으면 신은 나타나지 않으리
셋째로, 종교는 기원을 동반한다. 그것은 병에 걸렸을 때 의사에게 "병을 고쳐 주십시오" 라고 부탁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의사에게는 "좋은 약과 좋은 수술로 낫게 해 주십시오" 라고 현실적인 사람의 - P348
힘에 소망하는 것이지만, 신이나 부처에게 기도할 때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기도한다. 평상시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자신이 반드시 도와야할 사람을 위해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부디 내생명을 대신 가져가시고 저 사람을 구해 주십시오" 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신에게 기원한다. 이는 침묵과 비밀 속에서 자주 행하는 기원이다.
또한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도 통절한 기도인 경우도 있다. 종교에는 영속적으로 또는 순간적으로 이런 절대적인 기원을 환기시키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신의 은총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마지막 비원(悲願)이 담겨 있는 경우가 있다. 그중 한 예는 단테가 알고지내던 재판관 니노 비스콘티(Nino Visconti)가 한 말이다. 이것도 내번역으로 소개하겠다.
Vieni a veder che Dio per grazia volse. là dove alli ‘nnocenti si risponde (Purg. VIII. 66-72)신의 은총을 보러 오라죄 없는 자에게는 하늘이 응하시니.
이상 세 가지가 종교의 본질이다. 이를 관통하는 것은 세상은 하나가 아니며 현실에 살아 있는 세계와 이를 초월하는 또 하나의 세계가있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현세에는 지극히 훌륭하게 살았던 사람이지만, 다른 하나의 세계인 초월적 세계를 마음에 두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될까. 그 문제는 다음과 같이 논의된다. - P349
단테의 종교관
앞에서 서술한 세 가지 특색을 가진 종교는 전체적으로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단테의 종교관을 살펴보기로 하자. 강의 텍스트로 늘야마카와 선생의 번역을 펼쳐 보는데, 이 부분은 내가 경애하던 선배노가미 소이치 선생의 번역을 먼저 펼쳐 보자.
그리하여 내가 제5원으로 빠져나오자,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땅에 엎드려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내 영혼이 속진에 처박혔으니 그들이 몹시도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소리를 들었으나, 그 말의 의미는 거의 알 수 없었다. (연·19·70-75 노가미)
제5원에 이르렀을 때, 나는 보았나니 여기에 무리가 있어, 그들이 모두 땅에 고개 숙여 엎드려 흐느끼더라내 영혼이 속진에 처박혔으니, 나는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소리를 듣기는 하였으되, 그 말은 거의 이해하기 힘들고 그 탄식은 깊고 깊더라 (연·19·70-75 야마카와)연옥의 제5권역으로 나오면 사람들이 여럿 보인다.
그중에는 1276년교황으로 선출된 하드리아누스 5세(Adoriano V)도 있다. 그들은 땅 위에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울고 있다. 내 영혼이 속진에 처박혔으니‘ 는 불가타 판 시편의 라틴어 Adhaesit pavimento aniina mea에 방점(이 번역서에서는 볼드체로 표기 - 옮긴이)을 찍은 것은 그 부분이 이탈번역이다.(번역 - P350
그들은 극악한 죄를 범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내 영혼이 속진에 처박혔으니‘ 곧 내 영혼이 땅, 먼지, 지상의 세상사에 집착했었다며 땅 위에 엎드려 흐느낀다. 생전에 종교적인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현세의 이익에 집착하며 살아 온 사람들이다. 내 번역을 시도해 본다.
Si come l‘occhio nostro non s‘aderse in alto, fisso alle cose terrene, così giustizia qui a terra il merse. (Purg. XIX 118-120)
생전에 우리의 눈이 땅에만 박혀하늘을 우러르지 못한 탓으로, 눈을정의가 여기에서도 땅으로 내리누른다. 신분은 종교상 최고 자리에 있었더라도 지상의 권위나 정치, 재물에만 눈길을 주며 기본적으로 속세적, 물질적인 삶을 산다면 영혼은 먼지에 처박혀 있는 것과 다름없으며, 그것은 곧 비종교적인 삶이다.
물론비종교적이지만 윤리적으로는 훌륭하게 사는 사람도 많지만, 신을 믿는 눈으로 보면 그것만으로는 결코 충분치 못하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것은 초월적인 신이므로 땅에 연연하지 말고 하늘을 우러러야 하며, 우리에게는 사후세계가 있으니 허망하게 쇠해 갈 것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그리고 기도가 필요하다.
이들 시구에서 종교에 관한 단테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왜 오늘날에도 때에 따라 전례적인 행사들을 따르는 걸까. 새해가 되면 참배를 하러 간다. 절이나 교회로 말씀을 들으러 가는 사 - P351
람도 있다. 친척이나 친한 사람이 사망했을 때는 장례식을 치른다. 혹시 그것을 단순한 이 세상의 의무라고만 여기며, 장례식에 가지 않으면 그 사람을 애도하지 않는 것이니 참석하자‘, ‘그 단체 회장이 돌아가셨다니 앞으로의 교제를 생각해서 얼굴을 내밀자‘ 라는 마음으로 장례식에 참석한다면, Adhaesit pavimento anima mea와 마찬가지로 종교성과는 동떨어진 사교적인 기회로 전례를 이용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는 땅에 엎드려 용서를 구걸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전례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나 자신의 죽음도 생각해 봐야 한다‘, ‘저 사람에게는 정말로 신세를 많이 졌다. 부디 천국에 가길바란다‘ 라고 한순간
만이라도 진지하게 기원한다면 그 사람은 그 순간만큼은 대지로부터 벗어난다. 전례가 가지는 종교적 분위기는 결코 시대에 뒤떨어지는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단테가 말하는 땅에 처박혀 있는 데에서 인간의 영혼을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하는 일이다.
- P352
예로부터 사람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하늘 에 헌상물을 올리며 엄숙한 의식을 행했다. 정해진 제복(祭服)을 입고 정해진 말을 모두 함께거나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며 기도한다. 그러는 와중에 인간의 마음은 차차 위로 향해 간다. 마음을 위로 올리는 일이 가능하다.
혼을 위로 올리려면 지상의 것이 아닌 것들을 생각한다. 지상에 없는 것을 생각하는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예를 들어자신이 거쳐 온 운명을 되돌아보면 인생은 설계대로 살아진 게 아니라,
전혀 함께할 가능성이 없을 듯한 사람과 연결되거나 천재지변과 전쟁에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힘을 훨씬 능가하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은총이나 구원을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지상의 것에 얽매이지 않고, 눈을 높이들어 위를 바라보는 태도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일 것이다. 전례는 사람에게 그렇게 할 것을 권한다.
단테라는 서양의 시인과 종교에 대해 논하면서 한자 설명부터 시작하는 것은 순서가 반대일지도 모르겠으나, 전례‘ 란 이탈리아 어로는liturgia 이고 라틴 어도 같으며, 그리스어 autovoria (leitourgia)에서 유래한다.
말뜻은 ‘봉사(service)‘ 이다. 전례가 없는 종교는 없으며 종교란 신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우리의 눈 지상의 것에만 기울어, 높이 들어 볼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정의는 여기에서 이를 땅에 잠기게 하노라 (연·19,118-120 야마카와)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게 할 만한 것은 연옥에는 없다. 전례는 현세에만 있다.
현세에는 땅으로 향하려는 눈을 분위기로써 순간적으로나마 위로 향하게 하는 종교 의식이 있다. 이처럼 생각해 보면 전례는 현 최고의 보물이 아닐까 그것은 연옥에도 지옥에도 없다 설령 그곳에 종교가 있다고 해도 전래는 두 군데 모두 없다.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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