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 - 개정판
조영래 지음 / 돌베개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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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전태일이 기성복 일을 하며 휴머니즘의 억압에 몸을 던질 때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밎춤복 일을 하며 스피시지즘의 억압에 영혼을 던져 도대체 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닉 속으로 빠져든다.

   전태일평전에 보면 전태일의 사랑이야기가 잠깐 나오는데 그를 모티브로 전태일을 오빠라고 부르며 따르던 여인을 후일 사랑하게 됨으로서 일과 사랑을 통해 사용자와 노동자, 진보와 보수의 관계를 규명해 본다.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서 많은 부분 전태일평전을 인용하였다. 인용 부분을 제외한 전태일이 나오는 주요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왠지 오빠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 다시 건물로 뛰어 올라갔다. 3층 어둠침침한 곳에서 갑자기 오빠가 나타나 나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나의 입술에 진한 기름 냄새가 나는 키스를 퍼부었다.

오빠는 나를 밀쳐내고 정신없이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한동안 멍해 있던 나는 순간 뜨거운 그 무엇이 가슴을 쳤다.

오빠 안 왜!

나는 기겁을 하고 오빠한테로 달려갔다. 

오빠는 보이지 않고 커다란 불덩어리 하나가 활활 타오르며 사람들 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

불덩어리 속에서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불 짐승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나는 웃옷을 벗어 정신없이 불을 끄기 시작했다. 이윽고 불이 꺼지자 시커먼 숯덩이가 드러났다.

오빠, 오빠…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덜덜 떨면서 오빠를 내려다보며 울었다. 기자들이 뛰어와서 수첩을 꺼내들고 오빠에게 무언가를 물었다. (중략)



그제야 오빠는 잠잠해지며 깊은 안식에 들었다. 그러나 오빠는 바로 옆에서 줄곧 지켜보고 있는 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에 있는 줄 몰라서 일까? 그렇다하더라도 어쩌면 그렇게 한번 찾지 조차 않는지? 나는 아연한 먼 나라로 뚝 떨어져 혼절한 느낌이었다. 너무나 슬퍼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저 지켜만 보고 있던 나는 이 뜻밖에 찾아든 충격 때문에 무슨 말을 건네기는커녕 숨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중략)

배가 고프다…


    그리고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오빠는 끝내 나를 찾지 않았다.

나는 임종의 곡소리에도 침대가 옮겨지는 분주한 소리에도 슬픔인지 아픔인지 모를 멍멍한 혼절의 상태에 있었다. 그저 몽유의 걸음으로 시체가 가는 길을 따라갈 뿐이었다. 야단스런 장례식의 오열 속에서도 나는 내내 울지 않았다. 언제나 가족들이 중심자리에 있었고 오빠의 마지막 기억의 자리에서 밀려났듯이 나는 장례식의 소란으로부터 완전히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나는 꽃 한 송이 향 한 번 피워보지 못하고 한쪽에 우두커니 서서 과연 오빠가 나를 지금 이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을까를 곱씹으며 오빠와의 영혼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생전의 오빠 같으면 저 많은 조문객들을 보며 흐뭇해할 테지만 세속의 욕이 끊긴 지금이야 정신을 차리고 나를 쳐다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헛된 갈애를 내내 끊지 못하고 있었다.

    ‘노동운동의 신기원을 이룩한 장렬한 열사의 죽음’

이렇게 세상이 오빠를 영웅으로 만드는 사이 나의 사랑은 오빠로부터 빠르게 소외되어갔다. 나는 오빠의 영웅심과 입맞춤 사이에서 오랫동안 방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입맞춤은 영웅심의 노리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 영웅심이란 게 소외된 자와의 입맞춤을 위한 것이면서도 말이다. 인간은 그처럼 더러운 것이다. 썩어 문드러진 것을 위해 썩어 문드러지는 게 인간이다. 노동운동이라는 게 여성의 곪아터진 웅덩이에 남성의 심벌을 담그는 것이련만 그 새로운 운동이 새 고름을 만들 새 웅덩이를 쫓는 심벌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와 그 자식이 과연 뭐가 다른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왜 그를 오빠라고만 했을까? 지금 이토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오빠의 이름 석 자를 왜 나는 한 번도 마음 놓고 불러보지 못했을까? 오빠를 그이라고 부르지 못한 것은 한 번도 나를 그녀라고 불러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의 그 누구도 오빠의 이름과 나의 이름에 그 어떤 연관을 지어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 생전에 오빠와 옷깃만 스쳤어도 노조간부가 되고 노동운동의 선구자가 되는 세상으로 변해갈 때 나는 청계피복노조에도 가입하기가 싫어 청계천을 떠났다. 
 

전태일을 운동권 시각에서만 보던 안목을 한층 넓혀 보았다. 그러나 모든 세상사가 그렇듯 좁은 것은 좁은 대로 넓은 것은 넓은 대로 의미가 있다.

어느 한 쪽 의미만 존재하는 세상 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다면 한 번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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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어거스틴의 참회록 (완역본) - 개역개정성경인용
성 어거스틴 지음, 송용자 옮김 / 씨뿌리는사람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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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초록드레스'의 프롤로그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저 세상으로 가서 나와 이심전심으로 나누는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내가 기독교를 알게 되면서부터 줄곧 이심전심의 영적(本名) 동화자(同化者)로서 함께해 왔는데 그때마다 그는 나로 전화(轉化)되어 지난날에 대한 반성의 염을 토로하는 거였다. 그가 나로 환생한 게 아니라 직선적으로 영통하여 그의 영혼이 이 시대의 내 영혼으로 지속되는 듯했다. 내가 나의 이단적 발언으로 인해 기독교친구를 잃고 상심하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내가 기독교를 변호하기위해 비정형화된 성서의 신을 삼위일체론으로 정형화하지만 않았어도 많은 형제들이 이단으로 내몰리지도 않았을 텐데… 당신친구가 당신의 책을 읽고 당신을 멀리 하듯이 말이지요. 불과 한 달 전에 만나 술을 사며 당신책의 출판을 축하해주던 친구가 그 책을 다 읽고는 당신의 성탄축하 문자도 받지 않은 것은 당신친구의 내면이 나의 이론으로 무장되어 당신의 책 내용들을 밀쳐내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독실한 신자인 그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삼위일체의 한 위격만을 곳곳에서 분리해내는 당신의 표현들에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게지요. 당신의 책이 내가 다시 쓴 참회록이라는 사실을 그 친구가 알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테지만 그러기위해서는 당신이 나의 회심을 보다 엄밀하고도 친절하게 변호해주어야만 할 것이오. 

   참회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에 대해 길게 언급한다. 나는 태초의 원형인간을 통해 창세기를 재구성하는데 저 세상에는 원형인간과 베드로, 베드로모친,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빈 등이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원형인간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역사 이전의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그중 한 대목이다.
 

남자 분보다 여자 분이 질문에 주로 답변을 더 많이 하셨는데 여자 분이 기억력이 더 좋아서 인가요. 아니면 평소의 생활이 여자중심의 모계벤더로 이루어져서 인가요. 마치 여자의 갈비뼈로 남자를 지어 만든 게 아닌가할 정도이니까요. 뱀의 유혹에 넘어가 원죄의 주역이 된 여자이미지와 비겁하게 여자가 선악과를 먹자고해서 먹었다고 변명을 한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 원죄의 조역이 된 남자이미지와 흡사한 것도 같고요. 아무튼 저는 여자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으니까 태초의 성의 정치학이 몹시 궁금하거든요. 남자분이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베드로의 장모가 좌중의 남자들을 둘러보며 왜 남자이야기만 하느냐는 불만어린 어조로 물었다. 원형남자와 원형여자는 서로를 마주보며 웃더니 원형남자가 얼굴을 붉히며 다소 멋쩍은 듯 자신의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말문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저만 수염이 나고 이 사람은 수염이 나질 않았잖아요. 이 사람이 나보다 더 뱀 머리를 닮아서 그런 얘기들이 나온 게 아닌가 하지요. 털 있는 부모들과의 차별화를 털 없는 것에 둔다면 이 사람이 나보다 더 원형인간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라기보다는 생물에게는 아이 낳는 일이 무엇보다 큰일이고 아이 낳는 일을 이 사람이 하니까 부부생활이 이 사람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게지요. 그리고 아이들이 워낙 무능한 상태로 태어나니까 임신전후의 많은 시간을 이 사람은 아이에 붙들릴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갓난아이를 가진 여자한테는 늘 곁에 몸종이 딸리지 않으면 안 되었고 남자들은 그저 여자몸종 같은 신세를 면치 못했지요. 이게 필요하다 저게 필요하다는 표정과 눈치를 시시각각 보여 오는가하면 맹수들 망보랴 해충들 쫓으랴 그야말로 하인신세를 면치 못했으니까요.

원형남자의 유머어린 제스처를 따라 모두들 웃음꽃을 피웠다.

여자눈치 보는 일이 생활의 전부라고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그러지 않으면 곁에 얼씬도 못하게 했으니까요. 남자들끼리의 경쟁에서 얼마나 우위를 차지하느냐보다 여자에게 얼마나 눈치헌신을 잘 하느냐에 따라 여자의 성을 차지할 수 있고 그래야만 자기종족이 보존되었으니까요. 자기먹이를 찾아먹지 못하는 무능한 아이가 둘 셋 딸린 여자란 남자를 상대로 자신의 성과 그 아이들을 무기로 삼지 않으면 생존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일부일처의 몸종구조가 자연스레 생길 수밖에 없었지요. 남자의 성촉발기능이 후각에서 시각이미지로 옮겨온 것도 후각능력의 감퇴라기보다는 여자눈치 보는 오랜 관성으로 비롯된 게 아닌가 하지요. 만약 남자가 발정기 때만 여자를 찾는다고 해 보세요. 여자 혼자서 그 무능한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겠어요. 아마도 그래서 여자 쪽에서 먼저 발정기를 후각에서 시각으로 감추는 기전을 생성해냈을 거예요. 여자의 발정기를 식별해내지 못한 남자는 여자눈치 보는 시각 쪽으로 성감을 촉발시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요. 여자의 관능적인 움직임 하나하나에 따라 남자의 시각이미지가 성을 촉발시킨다는 것은 여자와 아이들의 생존에 필연적인 것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지 않았나 싶어요.

에덴동산도 아닌 원형동산에서 일부일처라뇨? 이해가 되질 않는군요. 유인원들이 일부일처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으니까요.

누군가가 노골적인 야유가 섞인 분노를 드러냈다.

왜 그 질문이 안 나오나 했지요. 사실 유인원의 대부분이 암컷의 성을 강한 수컷이 독차지하잖아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인원의 새끼들은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털을 잡고 내달려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장악력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에 엄마가 새끼로 인해 유동성이나 이동성에 장애를 받지 않지요. 그래서 벤더의 일사불란한 유기적 시스템에 능동적일 수가 있어요. 힘이 센 수컷이 리드하는대로 따라 움직일 수도 있고 그 리더를 따라 움직여야만 먹이채집도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에 일부다처는 아주 자연스런 섭생이라고 봐요. 반면에 저희 원형인간들은 그렇지를 못해요. 우리 어린아이들도 어느 정도의 장악력은 갖고 태어나지만 잡고 달릴 털도 없고 유인원에 비하면 턱없이 약하기 때문에 유동성이나 이동성에 엄청난 장애를 받게 되지요. 그래서 아무리 힘이 센 수컷이라 하더라도 여러 마리의 암컷과 새끼들의 먹이를 조달할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일대일의 맨투맨 식 밀착생존으로 밖에는 어째 볼 도리가 없는 거지요. 간혹 새끼 없는 젊은 암컷들을 여럿 거느리고 다니는 수컷이 있긴 하지만 새끼로부터 자유로운 기간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대개가 자기 딸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 역시 엄마의 슬하에 있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 못하는 거지요. 성폭력을 감행할 여력조차 없을 정도로 바듯한 성의 정치구조가 일부일처를 가장 효율적인 관습으로 정착시켜온 게지요. 그래서 남자가 바깥일을 장악하고 여자가 안일을 장악하는 핵 가정의 권력구조가 생겨난 거구요. 아이들이 자라면서부터는 아이들의 성까지 엄마인 여자가 관리하고 장악하게 되었는데 그것마저도 사춘기와 함께 일찍 독립을 시키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으니까 대가족조차도 형성되기 어려운 형국이었지요. 심지어 우생학적 종족번식을 위해 한 아이를 낳고나면 남자(몸종)를 바꾸는 한이 있어도 힘이 지배하는 일부다처의 생존양식은 불가능했으니까요. 그러다가 육체적 무능에 의한 장애지(障碍智)가 축적되어 큰 동물수렵 등 바깥일이 확장되자 벤더규모가 점점 커지게 되고 남자의 몸종역할도 따라서 중요시되어 마침내 힘과 폭력으로 성이 좌지우지되는 몸종이 왕이 되는 가부장사회가 생겨난 거지요. 따라서 성의 원천구조는 몸종구조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성문화는 오늘날에도 여성패션이라는 화려한 생활미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요. 

 

  요즘 참회록을 끝까지 다 읽는 독자는 흔치 않다. 이 프롤로그도 그에 못지 않게 읽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성의 원천구조에 대한 참신한 생각을 다시 쓰는 참회록에 담아냈다는 것이 새롭다. 이를 여성패션의 기원으로 보고 소설의 프롤로그로 삼은 것은 더더욱 새로운데 이것이 독자에게는 뛰어넘어야 할 장벽이자 통과해야 할 관문이 되고 있다.

챵세기에 대한 해석이 그만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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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1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외 옮김 / 책세상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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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소의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은 아주 재미 있다. 그의 사유의 자유로움과 시대 사조에 붙박힘이 얽혀 만들어내는 발랄한 생각들을 엿보는 일은 내게 있어서 어느 낯선 세계를 여행하는 것 보다 흥미롭다.  

   살고자 하는 욕구가 서로를 피하게 한다면 정신적인 욕구인 정념은 서로를 가까이하게 한다고 그는 말한다. 마치 정신적인 욕구는 살고자 하는 욕구가 아닌 듯이 사랑, 증오, 동정심, 분노는 배고픔이나 목마름과는 별개인 듯이 말이다.

   말을 하지 않고도 포식하고 싶은 먹이를 쫓는다지만 먹이를 쫓지 않고는 하고 싶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억양, 외침, 비명 등의 정신적 정념적 욕구는 먹이를 쫓는 육체적 욕구와 별개일 수 없다.

   정신과 육체가 극단으로 분리되던 과학혁명기를 살던 사람답게 그는 과학주의 물질주의의 심한 반감아래 이런 글을 썼다. 그냥 감탄사가 언어의 기원이었다고 하면 될 걸 가지고 이처럼 물심을 분리해 물질적 체계에 대립되는 정신적 정념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래서 처음의 언어들은 음악적이고 시적이었다고 그는 말한다.물론 오래된 미분화의 것들이 더 복합적이니까 음악적이고 시적이긴 하다.

   그러나 색과 음을 대립해 놓고 색은 영속적인 것 음은 연속적인 것 색은 고정되어 있는 것 음은 움직이는 것 색은 죽어 있는 것 음은 살아 있는 것 색은 공간적인 것 음은 시간적인 것 색은 동시적인 것 음은 이시(異時)적인 것 색은 지속적인 것 음은 사라지는 것 색은 절대적인 것 음은 상대적인 것 색은 독립적인 것 음은 상호적인 것 색은 자연적인 것 음은 인간적인 것 색은 물적인 것 음은 영적인 것 색은 지각적인 것 음은 비지각적인 것 색은 직접적인 것 음은 간접적인 것 색은 이성적인 것 음은 감성적인 것이라고 사뭇 시대적 편견을 강조한다.

   사실 루소 이후 미술사는 많은 변천을 거듭해 왔다. 루소는 음악의 전성기를 살면서 아직 미술의 전성기는 맞이하지 못했다. 그래서 색에 대한 편견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미술사의 소용돌이가 루소가 그토록 거부감을 일으킨 과학의 발달(사진기의 발명)에 기인한다는 것이야말로 놀라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루소가 조목조목 지적한 색의 편견들이 이후 미술사에 등장한 새로운 사조들의 경향들로 채워졌으며 조목조목 재발견된 색의 탁견들로 부활했다.  

   고전주의 이후의 모든 미술사조들은 루소가 지적한 빛과 색에 대한 인식의 미진한 부분들을 화려하게 소생시킨 결과물들이다. 천재 루소는 역설로서 미술사의 혁명을 예언한 것이다. 그의 역설이 오히려 혁명의 소용돌이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 까지 겹겹이 예언한 것이어서 더 놀랍다.

   미술사와 과학사가 맞물려 돌아가면서 오늘날의 첨단 이미지시대의 사이버 문명을 낳아 종말적 환경문제를 야기하며 화려한 퇴화의 해체시대를 열었으니 말이다. 

   그는 언어가 문법체계로 발전하면서 음악적 언어와 선율적 음악이 퇴화했으며 설득하는 솜씨를 연마하여 감동시키는 솜씨를 잃게 했다고 개탄했다. 선율은 에너지를 잃고 화음에 음악의 자리를 내어주고 말에 기원을 둔 예술(음악)은 말에서 독립하여 자연의 목소리였을 때 불러오던 정신적인 효과마저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문자가 말의 아름다운 힘을 잃게 하고 음악성이나 시적 감성의 힘을 사라지게 했다며 진보 자체를 문제 삼던 그가 오늘날 더욱 분절된 인터넷 화상언어를 보면 아마도 종말적 언어라고 한탄할지도 모르겠다. 

   글을 읽지 않고 이미지를 읽는 인터넷세대들은 어쩌면 문자의 단순화를 통해 이미지를 부활하여 자연을 이미지로나 즐기려고 손에는 핸드폰 귀에는 MP3를 꽂고 이미지의 음악화 살아있는 이미지를 살고 있는 게 아닌지.

   하늘나라의 루소도 나처럼 세상을 재미있게 내려다 보리라. 사랑해요, 도와주세요, 루소씨.

 

 

오픈백과 등록 08.06.25

디렉토리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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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대리만족의 시대인지라 독서조차도 대리로 만족한다. 얼마 전에는 TV프로 '낭독의 발견'을 보고 리뷰를 쓴 적이 있다. 작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게 되었다.

   각종 미디어에서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책을 사서 읽으라는 것일 진데 읽지도 않고 읽은 느낌이 들어 리뷰를 쓸 마음까지 생기다니 뭔가 잘못 돼도 한참 잘못 됐다.

   청년기에는 주로 도서관에서 공짜 책을 읽었다. 그 때는 돈이 없어서 이기도 하겠지만 신간은 커녕 고전읽기 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다. 돈이 없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사서 읽을 만한 마음이 내키는 책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도서관이 먼 것도 원인이지만 책값은 아직도 내게는 거금이어서 이따금씩 몇 달에 몇 권을 골라 사서 읽는 게 고작이다. 그래서 미디어의 책 소개 프로그램은 나를 책부자로 만들어 준다. 간단한 책 소개만으로도 영혼의 배가 부르다. 때로는 집중적으로 책 내용을 조명해 주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여간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게 아니다. 

   사실 책의 홍수 속에서 그 많은 책을 다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 관심 분야의 책만 읽는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대충 보고 넘기는 지혜가 필요하다. 대충 읽는 책과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야 하는 책이 있지만 대충 읽고 만 책은 웬 돈이 아깝다.

   나는 책을 빨리 읽지 못 한다. 그러기에 많은 시간이 할애 되는데 읽고 나서 시간이 아까워 괜히 읽었다 싶은 책들도 있다. 미디어를 통한 대리독서가 고마운 또 다른 이유이다.

   책을 쓰는 사람이 대리독서를 고마워 하다니 염치가 없다. 술 취한 사람이 대리운전을 고마워 하기는커녕 돈 몇 푼 집어 주고 말 듯이 그냥 건성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돈을 집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대가의 지불은 고마움을 앗아간다. 대리독서의 특징은 그것이 공짜라는데 있다. 

   대리독서의 상징은 뭐니 해도 앞 못 보는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것이다. 아름다운 낭독의 발견이다. 완전한 자원봉사다. 그래서 고맙고 귀하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 책이 귀했던 시대에는 대리독서가 일반화 되었던 모양이다. 조선시대에는 책 읽어주는 여자 책비가 있었고 귀족들은 재주있는 시종에게 대리독서를 시켰다. 

   세익스피어 시대의 연극도 넓은 의미에서의 대리독서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소설의 영화화 역시 어떤 의미에서의 대리독서다. 이미지세대들이 책을 읽지 않는 것도 어쩌면 이러한 대리독서의 범람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남이 읽은 리뷰만을 읽고 읽었다고 착각하는 나 같은 얌체족은 그래 봤자 저만 손해다. 정독의 묘미는커녕 탐독의 실과는 아예 얻지도 못한다.

   흔히 읽지 않는 사람이 쓴다고 한다. 쓰는 사람은 대개 행동하지 않는다고도 한다. 읽는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다고도 한다. 그럼 도대체 행동하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쓰느라고 읽지 못하면서 남이 읽을 글을 쓰는 것처럼 읽느라고 행동하지 못하면서 남이 행동할 지침을 읽는다니 말이 되는가. 

   적당히 읽고 적당히 쓰고 적당히 행동하기 위해 대리독서가 있음이니.  

 

 

삭제사유 ; 분량 및 형식미달

               개인적인 글은 오픈백과의 취지와 맞지않아 보류됩니다. 감사합니다.

               [오픈백과의 성격과 맞지않아 등록 보류됩니다. 고맙습니다]

디렉토리 ; 문학 08.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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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먹은 늘 그이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웬수 같은 책

어딜 가나 따라 다니며 혹 어여쁜 이에 한눈 팔까

혹 허튼 일에 빠져들까 젊음과 정열과 생기마저

30cm 앞 고독의 형틀에 아 60을 아아 60 평생을

이제 와 뭐 유서나 쓰라고 그러려면 뭐 다시 책을

읽어야 한다고 야 이 이 웬수 같은 책 책 책 책

애라 몰라 어여쁜 이에 한눈이나 팔고 갈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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