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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시장 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이반 일리치 지음, 허택 옮김 / 느린걸음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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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역습은 돈이다. 돌의 역습이 가능했던 것은 돈의 힘이다. 쉽게 말해 돌(칼)이면 무엇이든 되던 것이 돈이면 무엇이든 되는 시대로 바뀌었다. 저자는 그 분기점인 산업사회 이후를 인간이 상품에 의해 쓸모없어진 시대라 했다. 돌과 돈은 불가분의 한통속이긴 하지만 돌이 돈에게 주도권을 양도해 준 뒤 핵탄두로 물러나 팔장을 끼고 지켜보고 있다. 돈이 돌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나를 감시하며 아차하면 보턴을 누를 참이다. 돌이 실리콘으로 숨어들어 글까지 빛으로 화해 태양신을 화상으로 숭배하기에 이른다. 돌칼이 글과 야합해 신 왕 귀족으로 하여금 주체성을 억압하더니 산업혁명의 대폭발로 상품으로 편재해 문화의 탈을 쓴 돈으로 둔갑한다. 돌의 식민시대가 돈의 식민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성을 폭력으로 차지하려는 이 시대의 성폭력범은 돌식민의 후예이자 돌도 글도 휘두르지 못하는 못난 잔재이거나 돈도 여자도 없는 자의 괜한 외출이자 상품화로 쓸모없이 된 생명의 어설픈 부르짖음인 셈이다. 그대에게 이 글을 바친다고 선불하면 돌도 돈도 숨길 수 있을 텐데 글은 후불로 미루고 그대를 사랑한다며 결혼부터 요구해 돌도 돈도 숨길 수 없게 하는 생명의 순진한 부르짖음처럼 말이다.

돌과 돈의 경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잘못이 있다. 애초에 경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돌과 돈의 내면에는 상호 시간의 습벽과 공간의 압박이 잠재해 있다는 것을 잊기 쉽다. 돌의 시대에는 9사람의 식량생산자가 1사람의 비식량생산자를 먹여살렸고 돈의 시대에는 9사람의 비식량생산자가 1사람의 식량생산자를 먹여살린다. 비식량생산자가 식량생산자를 먹여살리다니 말이 안되는 말인만큼 저자의 실랄한 비판을 받는다. 1사람의 식량생산자가 필요로 하는 기계 기술 생필품 재화 등을 9사람이 제공하는 만큼 쓸모없어진 10분의 1의 쓸모는 그대로 9사람의 비식량생산자에게도 적용되어 모든 사람들이 상품과 전문가에 의해 쓸모없어져 버린다. 상품 교육 의료 등 필요가 포화에 이르면 스스로를 마비시키는 임계점을 만나 공생의 환상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만다. 쓸모있는 실업할 권리로 자발적인 행동능력인 자급을 권고하며 침몰하는 비산업문화에 바치는 애도사를 마무리한다. 그러나 저자의 진상회복에 대한 급진적 논의에는 역사는 가역되지 않고 재활용될 뿐이라는 가상의 원죄적 장애지의 타성과 악마적 근력확장의 압력이 간과되어 있다. 쉽게 말해 누가 내 자지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에 대한 물음은 배제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25세에 로마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푸에르토리코로 건너가 신부가 되어 단군의 자손인 아메리카원주민(손성태 지음 "우리민족의 대이동" 참조)을 만나 우리의 고대 토착문화를 통해 돈(상품)없는 돌생활의 진수를 목격한다. 41세에 저자는 거대 관료조직이 된 교회와 세속의 꼭두각시가 된 성직자들을 비판하는 "사라져가는 성직자"를 출간해 바티칸의 노여움을 사 2년 뒤 사직한다. 이듬해 44세에 "의식의 축제"를 출간해 산업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자로 자리매김하며 에리히 프롬의 찬사를 받는다. 45세에 "학교없는 사회" 49세에 "의학의 응보" 52세에 본 저서를 출간함으로서 지적 심볼을 격정적으로 휘두르는 글발을 과시한다. 76세로 타계하기까지 저자를 지켜본 친구는 그가 육체적 고통과 우정에 대한 좌절의 고통과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말년을 보냈다고 술회했다. 본 저서를 출간한 뒤 24년을 더 살았지만 그의 대안적 삶인 '현대의 자급'은 비전보다는 좌절을 안겨준 듯하다. 현대의 자급 구성원들은 이미 가상화되고 핵가족화 되어 공동체의 직접적인 심적 위계의 억압을 견딜만한 생존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듯하다.

현대는 생존이 해결된 사회이며 자급은 놀이와 운동을 이간질하는 치사한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장애지의 근력팽창인 돌들의 자지싸움은 누구도 원치 않는다. 살과 몸을 부대끼며 사는 것은 가족으로 충분하며 공동체로까지 그 억압을 연장시키고 싶지 않다. 현대의 자급과 자유는 세포핵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으며 공생과 절제 역시 돈의 자율에 맡겨진 엥겔계수로 환산될 수밖에 없다. 돈의 내면은 생물학적인 자녀양육조차 부담스러워 하고 부모 모시는 것조차 꺼린다. 병들거나 노후된 몸은 가족이나 친족보다 생면부지의 남에게 맡기는 게 더 편타. 핵네트워크 공동체의 전형적인 내면풍경이다. 핵은 생명체의 마지막 도망처이자 피난처다. 사육경작에서 상품생산까지의 생존을 위한 도망의 경로릂 인류는 핵공동체에 멈춰 서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음을 확인한다. 돌이켜보면 먹이이동은 진격이자 도망이었다. 먹이공동체가 커져 억압이 생기고 억압을 피해 진격의 도망을 돌연히 감행하는 변이를 모색한다. 호모사피엔스의 신분으로 아프리카에서 한반도까지 가장 멀리 도망쳐온 우리민족은 다시 부족국가들의 피비린내나는 억압을 피해 캄차카반도를 지나 아메리카로의 대이동을 감행한다. 거기서 유럽에서 이동해온 저자를 만나 돌의 내면과 돈의 내면을 교환한다.

독신의 막다른 은신으로 숨어든 개척자의 성기는 양기를 입으로 옮겨 돌의 내면을 옹호해 보지만 총과 활의 피비린내나는 전선에서 생활터전을 잃은 원주민 성기는 발기부전을 돈의 내면인 마약으로 달래며 멸종으로 내몰린다. 북미원주민의 높은 자살율과 자살율 세계 1위의 한국민은 도망(이동)의 민족답게 돌과 돈의 내면적 충격을 죽음으로까지의 도망으로 드러내며 자존을 진격의 도망으로 지켜낸다. 막다른 골목에서 핵으로 자신을 지키는 북한과 IT로 자신을 지키는 남한이 돌과 돈의 충돌을 피해 아메리카원주민에 의해 폭발된 저자의 사상으로 더욱 강건한 내면의 자존을 생성하리라 믿는다. 돌과 돈의 경계를 허무는 관건은 장애지와 근력팽창의 핸디캡이다. 가상의 언어와 진상이라고 믿는 도구는 불가분의 것이며 인공적 가상의 계보를 이루는 자연의 진상에 대한 핸디캡이다. 최초의 도구인 돌의 내면(말)은 자유와 억압을 동시에 안겨준 "최선의 타락"이자 "악의 신비"다. 하물며 핵이며 IT랴만 너무 거대하면 보이지 않으니 시시각각 자유와 억압을 정의하고 사사건건 장애와 공평을 사랑하며 자연으로의 도망을 흠모해야 한다. 돈의 내면은 니까짓께 도망가 봤지로 비웃는 방종의 블랙홀이자 가상의 빅뱅일지 모르지만 쓸모에 대한 끊임없는 각성으로 사물과 이웃을 돌아봐야 한다. 쓸모의 신천지에서 그가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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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초선 2022-10-19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과 돈의 내면 좋은 지적입니다
 
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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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와 정신문화 -에너지 비평




헨리 데이빗 소로우 씨. 150년 전의 당신에게 이토록 친근함을 느끼는 건 왜일까요? 자연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느끼는 친근함, 그 자체를 문제 삼아 당신과 잠시 얘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소와 정신문화의 상관관계를 에너지 레벨로서 얘기해 보고 그 논점을 예술비평으로 옮겨가 에너지 비평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는 일이지요.

당신이 187살이고 내가 57살이니 당신이 나보다 130살이 더 많군요.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하면 그러하지만 당신의 기록인 ‘월든’이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1854년) 인류의 정신문화 나이(대략 2만년)를 더하면 당신의 나이는 21854살이고 나는 22004살이 되는 셈이어서 내가 150살이 더 많은 게 되네요. 생물학적 나이로는 당신이 35살에 월든을 썼고 내가 35살쯤에 월든을 읽었으니 동갑인 셈이지만 당신이 45살에 죽었고 내가 지금 57살인데도 살아있으니 내가 십여 살 연배이나 당신이 39살에 찍은 사진을 보면 지금의 나보다 노숙해 보이니 나이라는 게 부질없다 싶기도 하네요.

그러나 문화의 나이는 축적된다는 데는 당신도 의의가 없겠지요. 과학과 예술은 그 축적양상이 좀 다르긴 하지만요. 그런 의미에서 문화는 자연에 유형무형으로 작용하는 에너지인 게지요. 정신문화가 축적되는 에너지라는데 동의한다면 그 에너지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축적되어온 것일까요? 역사의식이 없는 정신문화는 허구일 수밖에 없다는 걸 몸소 보여주고 있는 소중한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무거운 역사의 짐을 지고 온 에너지 체(体), 소인 게지요.

소는 인간의 정신을 문화화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해왔지요. 인간의 정신이 문화화 하는 데는 힘(에너지)의 확대가 필연적이지요. 수렵채집환경에서 인간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식물과 동물을 먹이로서 섭취해야 합니다. 생물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 다른 생, 무생물의 에너지를 탈취해야 하니까요. 생물과 무생물, 생물과 생물 간의 에너지 레벨의 위상을 형성하는 인간 측 에너지 값이 정신이며 문화며 예술인가하면 다른 생, 무생물의 에너지를 탈취하는 수단이나 방법이며 결과가 정신, 문화, 예술인 셈이지요.

풀을 먹고살려면 초식동물(羊)처럼 풀(艹)과 상시 입맞춤(善) 해야 하고 열매를 따먹으려면 열매(米)가 상시(靑) 보이는(示) 곳에 원숭이(申)처럼 붙들려(精神) 있어야 하고 육식을 하려면 가장 손쉬운 개구리나 물고기를 잡으려도 나무막대기나 창(문화 에너지)의 힘을 빌어야 하며 그래서 사냥(矛)과 사랑(盾)이 둘이 아님을 깨닫기까지 해야 하지요.

소로우 씨, 개구리나 물고기를 맨손으로 잡아본 일이 있으신지요. 개구리란 놈도 평소에는 잘 도망가지 않다가 막상 잡아먹으려고 하면 뱀을 만났을 때처럼 어떻게나 잽싸게 도망가든지 나무막대기가 없으면 잡기가 쉽지 않지요. 사람이 개구리 한 마리를 잡기 위해 비겁하게 무기(도구)를 들다니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바보스러운 일인지요. 에너지레벨이 비슷한 사람끼리도 맨손에 무기로 대항하면 비겁하다고 플라이급과 헤비급으로 나누면서 개구리의 맨몸에 무기로 맞서면서도 전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 모순과 이율의 배반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휴머니즘과 스피시지즘은 본질적으로 다른 거라며 막무가내로 생태불의를 저질러도 되는 걸까요?

이처럼 문화의 태동은 생태불의(生態不義)의 에너지로부터 비롯되지요. 그래서 육식을 마다하고 채식을 하는지 모르지만 과연 식물과 동물이 그렇게나 다른 걸까요? 설사 그러하다 하더라도 야생열매 채집이 얼마나 먹이경쟁이 심한지 그리고 곡기 없는 잎 채식만의 섭취량이 얼마나 많아야 살 수 있는지 안다면 도구의 힘을 빌은 생태불의의 육식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에너지효율로 인한 문화의 태동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지요.

개구리를 잡는 막대기 하나와 물고기를 잡는 창 하나의 에너지효율은 어디까지나 개인차원의 문화에너지 최소단위이지요. 문화단위가 씨족집단으로 확대되면 사냥감은 토끼, 사슴, 멧돼지, 들소로 그 에너지레벨 또한 확대되어 에너지효율이 극대화되지요. 처음에는 나무막대기 하나의 에너지를 식물에게서 빌려오던 것을 점차 마모되지 않는 동물의 뼈와 독을 빌려와 창촉을 만들어 바르니 마침내 사람보다 열 배나 에너지레벨이 높은 들소사냥의 환희에 중독되어서는 종교적 치유의 제의로 신화화되지요.

라스크 동굴벽화의 들소를 통해 우리는 집단차원의 문화에너지를 축제화 함으로서 펼쳐지는 정신의 희열 찬 자기최면이 생태불의의 개체질서를 마비시키는 문화 확대의 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지요.

소로우 씨, 문화가 축적되는 것이라 인정하셨듯이 집단문화가 개체사냥에 나서는 생태불의를 정신문화의 토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신지요. 한 마리의 소에게 씨족단위의 인간들이 손에손에 창과 독으로 무장하여 떼거지로 달라붙어 고함을 지르는 비열한 사냥의 축제가 생태교란의 에너지잉여로 쌓여 문화 확대의 토대가 되어온 인간정신의 참담한 본질을 외면할 수 있으신지요. 사자들이 들소를 공략하고 늑대들이 야생말을 공격하듯 갸륵한 자연의 협동정신이라고 칭송하기에는 뒤이은 문화에너지의 확대가 끔직 하리만치 무자비하게 진행 -청동기, 철기, 유기(油器)- 되어온 게지요.

한 마리의 들소사냥으로 인한 환희의 축제. 그것은 한 씨족 전체의 든든하고 넉넉한 안정된 행복의 추구이자 여유로운 예술과 기술에의 여지이며 여백이었던 게지요. 개구리나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축제를 벌일 수는 없으며 열매나 채식채집으로 환희의 고함을 지를 수는 없는 게지요.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개인차원의 즐거움이며 영혼의 조용한 내재인 게지요. 문화가 축적되어 집단축제로 꽃피고 그것이 인간보다 열 배 이상이나 큰 들소사냥의 에너지잉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즐거움으로 스며든 내재령(內在灵)이 광란의 초월령(超越灵)으로 뛰쳐나옴으로서 광장의 문화가 꽃피게 된 거라고나 할까요.

돌칼을 사용하기 이전의 무딘 돌을 사용하던 길고 긴 전, 중기 구석기 시대(200만년)의 고요한 문화는 에너지레벨이 낮은 개구리나 물고기, 열매나 채식 채집으로 살아가던 개인차원의 평화로운 자연에 대한 은밀한 보호색이었지요. 침팬지들도 이따금씩 동족끼리 집단살생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일상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듯이 열매를 따먹고 살던 조용한 원시인들이 야만인이라는 광폭한 이름을 갖게 된 것은 큰 짐승(들소)들을 사냥하고 부터가 아닐까 싶지요.

“낚시를 할 때마다 자신에 대한 존경심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깨닫는다.”고한 예민하고 섬세한 소로우 씨의 영혼이 글짓기(수사예술)를 할 때마다 자신에 대한 존경심이 점점 확대되는 것을 느낀다면 이 두 극심한 각성의 차이가 갖는 영혼의 간극에는 그 어떤 힘(에너지)이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육식에 대한 존경심이 줄어드는 것이 선천적 자연현상인지 후천적 문화현상인지를 가름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심리현상을 자연과 문화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가축과 작물의 순치현상이 자연의 문화현상이듯- 소로우 씨 자신도 “황야에 살아야 한다면 본질적인 사냥꾼이나 낚시꾼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전제 하셨듯이 일단 문화적 직관의 문제로 보고 문화각성의 차원에서 얘기를 전개할까 합니다.

씨족구성원들이 각자 흩어져서 개구리, 물고기, 열매를 수렵채집 해 와서 조용히 둘러앉아 먹다가 들소 한 마리를 몰이해 잡았다고 칩시다. 그 환호며 희열 찬 축제분위기는 언어의 감탄기원설처럼 가히 종교적 문화예술로 형상화 되고 제의화 되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을 창출케 했을 테지요. 그러나 그 열띤 축제 뒤에 찾아드는 알 수 없는 공허와도 같은 생태불의에의 막연한 각성에 침잠한 영혼은 일순에 엄청난 에너지 효율성을 안겨준 인식대상인 그 들소로부터 초월하지 않을 수 없는 인식주체의 각성을 요구받고 비겁하게도 들소사냥을 포기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들소를 형식(의식)상의 제물로 바침으로서 신의 노여움이라는 생태불의의 꺼림직 함을 해소하며 더 많은 들소사냥을 기원하지 않았나 싶은 게지요.

이처럼 소는 그 엄청난 에너지규모로 인해 인간의 정신에너지를 확대하는 본질기전(本質機轉)으로서의 근본동력이었던 게지요. 따라서 정신문화는 소로 의한 생태불의의 육식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아야지요.

수렵채집환경에서의 비문자인에게도 그러했지만 사육경작환경에서의 문자인에게도 소는 사육경작정신의 에너지주역이었지요. 개인차원에서는 에너지효율이 낮은 개구리를 잡아먹어 가지고는 개구리벽화를 그릴 정신적인 당위와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지 않듯이 개인차원의 에너지효율이 낮은 괭이로 논밭을 갈아 가지고는 광범위한 문명을 일굴 정신적인 열의와 시간적인 여유를 마련해 줄만한 에너지잉여가 생기지 않지요.

라스코의 들소사냥으로 에너지효율에 눈이 어두워진 인간은 BC 5000년 전부터 소를 가축화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식우에서 역우로 효율을 극대화해 고기와 우유와 식량생산의 노역잉여까지 낳아 부족국가라는 광범위한 생태불의의 자연지배 체제를 형성하였지요. 신술을 앞세워 학술과 예술과 기술의 삼두체제를 구축하는 사육경작정신의 틀이 짜여 진 셈이지요. 소의 에너지 효율이 극대화되자 소의 무분별한 도살과 약탈이 자행되었고 이를 막기 위해 소를 신성시하는 제도까지 생기게 되었고요.

에너지효율이 높은 소로 논밭을 갈아야 겨우 열 사람 중 한두 사람의 일손을 식량생산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잉여가 생겨 지배자와 피지배자, 정신적인 귀족계급과 육체적인 천민계급, 문화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로 일의 분화와 계층분화가 이루어진 게지요. 소로 인한 생태계의 종간불의가 인간간의 불의로 확대되어 자연성과 문화성간의 갈등과 화해를 신본주의로 무마하려 했지만 종간불의로 태동한 문화의 번성으로 인본주의의 전제체제가 생태계를 지배하게 된 게지요.

소로 논밭을 갈아야 만이 식량생산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일손으로 예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무감각한 채 크노소스궁의 크레타 예술가들은 ‘황소와 곡예사’ ‘투우사의 벽화’(BC 1500~1600년)를 그리며 소를 노리개로 하는 정신적 유희를 즐기기까지 했으니까요. 생태불의가 극한으로 치달아 인간정신과 소의 정신이 완벽한 불평등의 하모니를 이룬 정신 나간 예술을 경탄해 마지않던 사람들은 생태불의에 대한 막연한 각성과 소를 함부로 대하므로인해 소의 수요와 공급이 불안정해지자 소의 계획적인 관리를 통한 역우확보를 위해 식우를 금함으로서 소를 신성시하는 제도를 마련하지 않으면 예술은 물론 모든 기술과 신술마저도 존립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게지요.

사실 그러한 것은 자기존립을 위해 진실을 호도한 것에 지나지 않지요. 태초의 생태불의가 도구사용으로 인한 것임을 눈가림으로 덮어버리고 살생을 금하는 동식물을 차별하는 애매모호한 생태정의를 자기존립을 위해 들고 나온 게지요. 생각해 보세요. 소의 코청에 코뚜레를 꿰어 고삐를 매어서는 죽도록 부려먹는 것은 생태불의가 아니고 그에 비하면 오히려 정직하기까지 한 식우(들소사냥)만이 생태불의가 된다는 불살생의 모순된 생명관은 아무래도 식량생산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기 위한 현실적인 자기존립에의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을 내태(內胎)한 논리일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정신세계의 귀족들과 불가촉천민이 양립될 수밖에 없듯이 인간의 정신과 동물의 정신은 양립되는 것이며 그 우열은 피치 못할 업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모든 생물은 평등하다는 새로운 정신문화는 불살생이라는 동식물의 차별화가 아닌 도구문화의 생태불의에 대한 각성이어야지요.

인간의 정신문화가 소와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물질문명에서 변환한 에너지의 값이라면 소로우 씨, 인간의 심리현상에서 인간성과 짐승성(야만성)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며 오히려 지금까지 짐승에게 뒤집어 씌웠던 온갖 악덕을 거두어서 인간성에 뒤집어씌우는 생태적 각성이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그동안 있었던 짐승성과 야수성의 악덕은 모두 도구(잔꾀)사용에 의한 것이며 도구가 쥐어져 있지 않은 인간은 그야말로 생태적 무능의 정의를 실현할 수밖에 없는 절제되고 순수한 성숙을 엿보이는 진선미의 표본이라 할 만한 생령을 자랑할 수 있을 터이지요. 

돌이켜보면 개개의 생물들이야말로 절제의 화신이라 할 만하지요. 도구사용을 절제하는 것은 정신을 절제하는 것이며 정신을 절제할 수 있는 인간은 생물들처럼 순간순간 죽음으로 습합되는 더 높은 삶의 법칙에 순응하는 고결한 자존을 획득할 수도 있을 터이지요.

소로우 씨. 돼지가 절제와 순결을 모른다고요? 천만에요. 적어도 인간에게만은 절제와 순결의 스승이라 할 만하지요. 돼지에게 과함이 있다면 그 큰 덩치를 타고난 것이며 인간처럼 뭐든지 먹는 잡식성이라는 점이지요. 멧돼지의 그 큰 덩치가 지렁이와 쇠뜨기뿌리를 캐먹으며 살아가는 것을 보면 소를 잡아먹는 인간으로서는 경외감이 일지 않을 수 없도록 그 삶은 절제되고 순수하기 이를 데가 없지요. 모든 생물들은 자기 몸 이외의 욕구는 잠으로 충족하지만 인간에게 축적되는 문화적 욕구는 대량사육과 대량살상을 그 배경 속에 온갖 각성제들로 잠재우고 있지요.

문화야말로 절제와 순결을 모르는 아귀인 셈이지요. 맨손 맨몸으로는 개구리 한 마리도 제대로 못 잡고 나뭇가지 하나도 제대로 못 꺾는 절제와 순결을 타고난 무능한 인간이기에 아귀 같은 문화의 반려가 필요한 거라고 솔직히 진실을 토로하고 수성(獸性)과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재정립해야지요.

소로우 씨가 말한 “보다 높은 정신적인 삶을 추구하는 본능”인 인성과 “원시적이고 상스럽고 야만적인 삶을 추구하는 본능”인 수성이 결합한 반수반인의 형상을 한 숲의 본능이 신성인지 아니면 신성과 수성이 결합한 본능이 인성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세 가지 성품이 모두 결합된 존재가 인간이라고 한다면 소로우 씨, 우리의 일상적인 성품들에서 과연 이것은 수성이고 이것은 인성이고 이것은 신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규정하는 그 순간, 규정하는 자는 관찰자인 인간이기에 관찰내용은 모두 인성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나는 소로우 씨가 그토록 찬미해 마지않는 자연 속에서의 동물적인 삶의 자태가 어느 순간 소로우 씨의 바로 그 찬미의 입술에서 무참하게 비천한 그 무엇으로 추락하여 - “건강하되 순수하지는 못한”, “절제와 순결이 아닌”, “자기 내부에서 동물적인 요소가 날마다 조금씩 죽어가고 신적인 면이 확립되어 가는 것을 확인하는 사람은 행복한” - “보다 높은 법칙들”을 찾아 비상해야 하는 모순을 발견하고 적이 당황해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소로우 씨. 역사적으로 축적되어온 의식속의 문화적 이미지들이 모두 정당성을 갖는 것일까요? 신본주의는 무참하게 인본주의에 의해 그 정당성을 잃어왔고 이제 인본주의는 다시 종본주의(생태주의)에 의해 참담한 각성을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제 동물, 인간, 신의 삼단논법은 정당성의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동물과 인간 사이의 생태불의로 문화가 태동했고 그 문화로서의 생태불의를 중재하는 신이 등장했지만 불의는 여전했고 아니 그로인해 불의는 더욱 심화되어 신이 들어준 인간의 손을 무신의 과학이 아예 그대로 깁스를 해버림으로서 생태불의가 영구히 고착되어버렸으니까요.

자연환경이 좋으면 인간의 편을 들었다가 자연환경이 나빠지면 종간(생물)의 편을 들 수밖에 없는 실존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정신의 도리나 법칙마저 이랬다저랬다 해서야 인간 자신에 대한 신뢰나 자존이 정녕 무참하게 비천한 그 무엇으로 추락 할 수밖에요.

소로우 씨, 자연애의 찬미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문화와 자연사이의 법리적 해석에 찢김(모순)과 헷갈림(혼돈)이 없도록 해야지요. “저급한 동물적인 기질로 말미암아 부끄러워 할”게 아니라, ‘비겁한 인간(문화)적인 기질로 말미암아 부끄러워 할’ 이유를 갖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도록 해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동물과 인간과 신이 따로 삼단으로 나누어진 발전적인 단계를 갖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장(場)으로 혼재 된 존재로 인식해야지요. 동물에게도 인간적인 품성(각성)과 신적인 품성(계시)이 존재함을 믿고 하나의 창조적 법칙 속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가이아적인 에너지 위상으로 어우러진 상호분신의 조화로운 상생체로 찬미해야지요. 문화에너지(욕망)를 마구 확장하여 타급타족의 죄의식에 사로잡힐게 아니라 문화에너지를 한껏 절제하여 자급자족의 자의식에 돈독히 서서 자생의 자연에너지를 한껏 즐겨야지요. 맨손 맨몸으로 즐길 수 있는 모든 욕구는 죽음으로 삼투해 들도록 신이 허락하였으니 서로의 자유가 마음껏 유영토록 하여야지요.

자, 그럼 소로우 씨, 식량생산으로부터의 거짓 자유를 누리기 위해 인간정신이 소의 정신을 기만한 생태불의의 코뚜레(고삐)로부터 석가도, 간디도, 타고르도, 아니 우리 중 그 누구도 영원히 자유롭지 못하게 된 정신문화의 실존 속으로 유영해 볼까요? 소로우 씨도 영원의 나라에서 떠도는 소문 속을 여행하고 계시어 잘 아실 테지만 당신이 영원의 나라로 이주해간 뒤 31년이 지났을 즈음 소의 코뚜레가 인간의 코로 옮겨와 인간의 코청을 뚫고 코뚜레를 하는 문화에너지의 코페르니쿠스적 대전이식(大轉移式)이 거행되었지요.

이른바 동력 경운기(1893년)의 출현이지요. 인간 스스로 대체 소의 모습으로 자존을 획득하는 듯 했지만 생태적 무자비, 물질예종의 고삐는 문화에너지의 의존도를 더욱 높여 인류의 정신문화를 한껏 옥죄고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정신문화는 에너지의 확대와 자율(자급자족)사이에서 스스로의 실존을 어떻게 정립해야하며 그러기 위한 고뇌와 갈등의 방향을 정신문화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예술비평을 통해 여하히 설정해야 하는 걸까요?

내가 아는 한 소의 에너지효율에 최초로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바로 소로우 씨 당신이지요. 당신은 소를 신성시하는 동기와 정 반대되는 동기에서 소 대신 자신의 노동력을 신성시하려 했지요.

“땅을 가는 데에 소를 사용하는 것보다 손수 삽을 써서 갈아엎는 게 돈이 적게 들며… 사람은 그 노동교환의 일부로서 소의 여물을 만들기 위해 6주 동안 건초를 마련하는 작업을 하는데 이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모든 점에서 소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나라, 즉 철학자들의 나라가 있다면 동물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 같은 큰 실수는 결코 범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가축의 힘을 빌려 불필요하거나 기예적인 일뿐만 아니라 사치스럽고 낭비적인 일까지 하기 시작하면 몇몇 사람들이 소와 바꾸어서 하는 일을 떠맡아 하게 되는 것은, 다시 말하면 몇몇 사람들이 가장 강한 자들의 노예가 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짐승을 위하여 일 할뿐 아니라 이의 상징으로서 자기의 외부에 있는 짐승을 위해서도 일하게 된다.”

이러한 당신의 글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당신 자신이 당신 스스로를 기예 인으로 생각하느냐 이며 기예인으로 생각한다면 소의 힘을 빌려 논밭을 갈아 식량을 마련하는 농부나 농노의 수고가 불가피하다는 사회전반의 에너지교환에 대한 통찰이 자책적인 것이냐 하는 게지요. 당신이 가고 없는 150년 동안 당신의 글이 문학적 기예(수사예술)의 기념비라는 평가가 내려졌지만 당신 자신은 아무래도 기예의 기자(技字)를 빼고 싶은, 예술인이면 모를까 기교가는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느낌을 지울 수가 없군요. 기술과 예술이 한 짝이라는 기예를 당신도 어렴풋이 인정은 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요. 단순한 기예를 지향하는 의미에서 당신은 한사코 일기문의 형식을 지향하지 않았나 싶고요.

소의 에너지효율에 최초로 의문을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의식의 곡괭이는 철저하게 에너지자율을 파고들지 않았고 문화에너지의 타율적 계몽에 매달려 더 높은 정신의 법칙을 위해 숲 생활을 떠나지 않았나 싶지요.

소로우 씨, 정신의 법칙이 물질의 법칙을 온전히 장악,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정신의 법칙을 초월해 살수는 있어도 물질의 법칙을 초월해 살수는 없다는 엄연함을 물질문명의 범람 속에 맥없이 떠밀려가는 정신문화를 보며 절감하지요. 소로우 당신이 첨단문명 속의 오늘을 살았다면 어떤 발언을 하며 어떤 삶을 영위했을지 궁금하군요.

“건축가들의 종교와 예술애호에 관해 말하면서 건물의 뼈대는 허영심이며 이 허영심은 마늘과 버터 바른 빵을 애호하는 심리에 의해 부추김을 받고 있다.”고 하면서도 당신은 정작 이런 건축을 짓기 위한 개발 선두주자격인 측량일과 목수일, 막일을 하여 기초생활비를 충당했듯이 수사예술의 기예를 한껏 발휘해 -깨달음과 생활이 별개였던 인도의 정신적 초월주의자들처럼 불가촉천민이나 농노들이 소를 부려 지은 농산물을 탁발하듯- 소박한 정신적 귀족의 신분을 유지했을 테지요.

당신이 2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숲 생활을 한 것은 ‘한번 해보기’에 지나지 않았으며 당신은 평생을 기예적인 수사예술에 몰두했지요. 정신적 귀족주의자들의 한번 해보기의 삶과 전심전력을 다한 생존차원의 자급자족한 삶과 강제된 천민이나 농노들의 삶은 완전히 다르지요. 당신의 숲 생활의 경제 명세와 보여주기 식의 토막 난 삶 속에는 절절한 애환이 끈적거릴 농밀함이 없지요.

집짓기에서 당신은 통나무집이라고는 하지만 겨우 뼈대만을 손수 마련했지 디테일한 모든 것은 헌 판자 집을 그대로 뜯어와 옮겼고 생활경제 역시 많은 부분 외부에서 먹을거리와 입을 거리를 들여와 토막 난 삶을 영위했지요. 말하자면 도시에서 유입된 도시노동자들의 에너지와 가축과 시골농민들의 에너지에 상당부분 의존한 삶이었던 게지요. 따라서 당신이 숲 생활에서 터득한 진리인 “사람이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는 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적은 노력밖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간의 가치교환의 불의와 종간간의 생태에너지의 불의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반증이 아닐 런지요. 그런 점에 있어서는 당신시대보다 작금의 나의 시대가 훨씬 심각하다고 할 수 있지요.

일절 외부에너지의 유입 없이 자급자족한다고 가정을 해 볼까요. 어디 정말 사람이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적은 노력밖에 들지 않는지요. 우선 도끼 한 자루와 칼 한 자루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칩시다. 집이야 당신 말대로 “기껏해야 하루 이틀 만에 지을 수 있고 불과 몇 시간이면 뜯어버릴 수 있는 오두막”을 간단히 짓는다 합시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인은 다섯 식구가 하루 동안 먹을 밀가루를 빻거나 쌀 방아를 찧어야겠지요. 그건 찧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정도의 시간과 끈기와 땀 깨나 빼는 일이지요. 여자의 일 중에 가장 힘든 일이라고들 하지요. 그런 다음 빵을 굽거나 밥을 지어야지요. 그 동안 남자는 논둑이나 밭둑에 무성한 거름용 풀베기를 하지요. 소를 키워 그 배설물로 거름을 만들 때는 힘들게 소꼴을 먹이다보면 양질의 거름이 생겼는데 가축 없이 논 거름을 준비하려면 엄청난 양의 풀을 베어 썩혀야만 하지요.

휴경으로 땅의 힘을 돋운다고요. 땅 부자인 당신의 나라에서도 요즈음은 휴경이 사치가 되었을 걸요. 과잉생산으로 영구휴경이면 모를까. 아무튼 남자에게 가장 힘든 일은 거름 만들기임에는 틀림없지요. 아이들은 그 시간에 농작물을 해치는 짐승들을 쫓거나 아침공부를 해야겠지요. 이 시대에 가장 큰 딜레마가 교육의 자급자족이지요. 소로우 씨 자신이 독신이고 최고의 대학을 나왔기에 그 점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는 것 같은데 소로우 씨 아들은 소로우 씨 정도의 교육을 자급자족 할 수 있을 테지요. 그렇게 좋은 조건에서도 엄청난 시간과 관심을 투여해야만 하지요.

그러나 대체로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에게 교육의 자급자족이란 그 아비에 그 아들격인 무지렁이 만들 각오를 해야지요. 의무교육조차 외부에너지로 간주하고 사양해야 하니까요. 보다 높은 정신의 법칙을 교육의 자급자족으로 깨달아 실천하는 일이 가능한가는 별문제로 치더라도 말이지요. 소로우 씨 자신에게 투입된 타급타족적 교육도 별개로 하구요.

아침을 먹고 나면 부부가 함께 하루 종일 콩밭을 매야하고 뒤이어 땅콩 밭 깨밭 그리고 논의 김매기가 두 벌 세 벌 차례를 기다리고 있지요. 저녁을 먹고 나면 피곤해서 저절로 눈이 스르르 감겨버리지요. 농번기가 지나면 수월하지 않느냐고요. 자급자족체계에서는 농한기라는 게 따로 없지요. 한 겨울에도 남자는 가마니와 새끼, 그 박에 멍석, 바지게, 짚과 골 풀 대나무로 온갖 생필품을 만들어야 하며 여자는 길쌈을 해야지요. 그리고 밥 짓기에 필요한 땔감과 긴긴 겨울밤 군불을 지필 땔감을 마련하는 것과 밤에 불을 밝히는 것은 시간과 노동을 초월하여 당신의 지적대로 불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제 1의 천성으로 몸을 바꾸는 수 밖예요.

사람과 나무(땔감)의 밀도에 상대적으로 종속되어있는 에너지위상 속에서 제대로 자급자족하려면 몸을 바꾸어야할 정도의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데 반해 타급타족하는 데는 당신의 말대로 “오직 육신의 노동만으로… 일 년 중 약 6주일간을 일하고도 필요한 모든 생활비용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절망(반성)하지 않고 한껏 고무되어 있는 당신과의 대화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실로 난감해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나는 당신이 대학 졸업식에서 한 연설 “상업의 정신”을 접해보지 못했지만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노동이 화폐로 교환되는 일이 인간불의와 종간불의를 심화시키는 자연에 대한 문화에너지의 심각한 교란으로 시작되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군요. 당신의 나무꾼 친구가 돈의 편리함을 이야기하며 “한 마리의 소를 그의 재산으로 친다면 바늘과 실을 가게에서 사려고 하는 경우 그때마다 소의 일부분을 그 값만큼 저당 잡히는 것은 불편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했다지요. 가령 그 나무꾼이 나무를 한 짐 지고 시장에 가지고 나가 나무하는 연장을 구입하려고 할 경우 돈으로 나무의 가격과 연장의 가격이 정해져 있어서 나무 한 짐 가격으로는 낫 정도밖에 구입할 수 없고 정작 자기에게 필요한 도끼는 구입할 수 없을 테지요.

이때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원천적 핸디캡(불이익)이 되는 것은 ‘나무’와 ‘나무꾼’이라는 ‘자연성’이지요. 왜냐하면 자연성이란 무(無)노동성 내지 반(半)노동성을 의미하는 쉽게 말해 ‘공짜’이기 때문이지요. 자연이 수고해놓은 일을 인간은 그저 장소만 옮겨놓는 원시적인 일차산업은 그 반노동성으로 인해 평가 절하되는 종간불의의 시원(始原)이 되는 게지요.

그 다음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원천적 플러스(이익)가 되는 것은 ‘도끼’와 ‘대장장이’라는 ‘인위성’이지요. 인위성이란 인간의 노력과 능력을 집대성한 전(全)노동성을 의미하는 ‘인간의 값’이니까요. 자연을 인간의 수고로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놓는 인공적인 이차산업은 그 전 노동성으로 인해 평가 절상되는 인간불의의 원천이 되지요. 인공을 가치의 정점에 두어 자연성의 가치를 떨어뜨림으로서 나무꾼의 나무는 교환가치에서 불이익을 받게 되고 따라서 나무꾼역시 노동 가치에서 불이익을 받아 대장장이 보다 못한 신분으로 전락한다는 게지요.

너도나도 대장장이가 되려고 해도 자연자원(나무)의 생산성이 인공자원(도끼)의 생산성보다 항상 높고 수요 또한 인공자원이 한정적이어서 대장장이는 소수의 전문직으로 늘 부가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는 게지요. 이처럼 문화의 에너지레벨은 후발적일수록 부가가치가 높아서 자연성인 소를 재원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인공성인 바늘을 재원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시장에서는 늘 불리한 조건에 놓이게 될 수밖에 없는 인간불의를 감수해야하며 소와 나무의 자연성은 더욱 많은 생산과 소비에 대처해야하는 종간불의로 훼손될 수밖에 없기에 상업의 정신은 결국 모두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생태불의의 원천적인 문화에너지인 셈이지요.

지구라는 작은 샘에서 태동한 사소한 생태불의가 문화에너지의 축적으로 인해 적조처럼 번지면 죽음의 샘이 되는데 그 매 단계는 소의 코뚜레에 의한 1차 산업과 노동자의 코뚜레에 의한 2차 산업과 소와 노동자의 코뚜레에 의한 3차 산업인 상업으로서 재화야말로 모든 불의의 원천에너지라 할 만하지요.

소로우 씨 당신의 소박한 삶에 대한 절제된 청빈주의는 그래서 소중하며 에너지탈취의 문명비판에 유효하여 당신 자신의 예술비평에도 높은 에너지자율을 부여하는 단초가 될 수 있지요. 당신의 통찰대로 소는 인간 개개인에게는 노역에의 부담만을 안겨주는 에너지 탈취자지요. 한 개인이 자신의 중량의 열배가량 되는 소를 관리한다는 것은 열 가족을 거느리는 것만큼의 노역에의 부담을 안겨주는데 가족은 어느 정도 지나면 구성원 각자가 에너지자율성을 획득하지만 소는 들소처럼 완전 야생으로 되돌리지 않는 이상 역우로서의 에너지 탈취만큼의 추가 노역이 필연적이지요.

라스코의 들소역시 한 개인이 사냥하여 식우화 하는 것은 에너지 마이너스의 비효율적 부담만을 안겨주어요. 그러나 집단사냥에 의한 집단 식우화는 에너지 효율성을 배가하지요. 마찬가지로 대가족제도하에서의 역우 역시 노약자의 유휴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에너지효율을 높일 수 있고요. 높여봤자 열 사람 중 한 두 사람의 일손을 쉬게 할뿐인데 소로우 씨도 그 한두 사람에 속하므로 인해 자연예찬의 수사적 업적을 남길 수 있었지요.

당신은 증기기관이 발명 된지 40년이 지나 기선이 대서양을 횡단할 때 태어나 기차가 막 대지 위를 질주하던 시대를 살았지요. 동력경운기가 발명되기 전의 소에 의한 쟁기질로 여전히 식량을 생산하던 한 두 사람에서 막 두 사람 세 사람의 일손이 식량생산으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하는 에너지확대의 과도기를 살면서 황홀한 에너지자율의 신성한 노동력을 예찬하는 숲 생활의 경제학을 피력할 수 있었어요. 그 놀라운 직관력을 칭송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 뒤 동력경운기가 발명되어 열 사람 중 여덟아홉 사람의 일손을 에너지자율로부터 쉬게 하여 자연훼손의 에너지타율(확대)에 종사케 하는 공멸의 시대를 미리 내다보기라도 하듯이 말이지요.

그러나 소로우 씨. 우리 지금부터 우리자신들을 실제보다 냉철하고 냉정한 냉점(0)으로 다운시켜 봄이 어떨까요? 소로우 씨나 나나 과연 얼마만큼이나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고 있는 걸까요? 보다 정확하게 말해 에너지자율의 총량이 얼마나 되는 걸까요? 타율적 에너지는 그것이 아무리 자연을 소재로 한 것이라 하더라도 소의 코뚜레처럼 생태불의에 의한 것이므로 자연친화적인 거라고 할 수 없으니까요. 에너지자율의 량은 수량화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에너지타율의 량으로 역산해볼 수밖에 없겠지요.

가장 모범적이라고 생각되는 소로우 씨의 숲 생활(8개월) 기록 중 에너지 타율부분을 열거해 볼까요. 에머슨 씨로부터 빌린 대지, 농지, 어떤 이웃으로부터 빌린 도끼, 연장들, 자신의 보트, 구입한 판자지붕과 벽에 쓴 헌 널빤지, 욋가지, 유리가 달린 헌 창문 2개, 헌 벽돌 1000개, 석회2통, 석회 솜, 벽난로용 철제 틀, 못, 돌쩌귀 및 나사못, 빗장, 백묵, 운반비, 쟁기와 소 한 쌍과 인부 한사람, 농기구, 종자, 쌀, 당밀, 호맥 분, 옥수수가루, 돼지고기, 밀가루, 설탕, 돼지기름, 사과, 말린 사과, 고구마, 호박1개, 수박1개, 소금, 세탁, 옷 수선, 옷, 등유 그리고 당신이 태어나서부터 30년 동안에 축적된 문화에너지 다시 말해 양육, 교육 등이 있지요.

내가 주목하는 것은 마지막 부분인 당신의 정신이나 영혼을 형성하고 있는 에너지타율의 문화총량이지요. 나는 당신이 건축이나 의복이나 음식 등의 물질적인 화려한 취향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절제와 소박을 강조하면서 당신자신의 문학적 수사의 화려함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관대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순수예술의 수사적 화려함은 예술적 완성도를 높이는 시적 정신의 정화이지만 응용예술의 수식적 화려함은 실용적 완결성을 저해하는 천박한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가요?

당신이 가우디의 건축을 보았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가 궁금하군요. 나는 당신과 가우디가 문학과 건축분야에서 버금가는 예술적 수사의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며 자연을 배경으로 완곡한 표현예술을 구축했으니까요. 예술은 본질적으로 화려한 귀족주의적 수사를 지향하는 게 아닐까싶지요. 예술은 기술처럼 항상 새로움을 먹고살며 남이 그 새로움(노하우)의 권좌를 항상 우러르되 염탐치 못하도록 모호함의 장막을 쳐야 살아남으니까요. 낯설음과 모호함이라는 창과 방패는 귀족을 천민으로부터 보호하는 예술의 생존전략인 게지요. 따라서 예술의 귀족주의적 사치성은 비예술의 천박성으로부터의 차별화로서 당신의 화려한 글 무늬가 갖는 문학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지요.

‘예술은 사치다.’ 라는 말에 당신은 결코 동의할 수가 없을 테지요. 당신은 의상을 예술이라 할 수 없다고 하며 “사람의 몸에서 벗겨진 옷은 보잘 것 없고 우스꽝스럽다”고 했지만 자연의 몸에서 벗겨진 예술도 보잘 것 없고 우스꽝스럽기는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인적이라고는 없는 대자연의 숲 속에 걸려 진 고호나 피카소의 그림을 새들이나 짐승들이 바라보고 느끼는 것만큼이나 예술은 인간에게 에너지타율의 사치성을 암시하지요.

나는 당신이 글쓰기(수사문학)에 바치는 에너지의 량을 그대로 집짓기에 옮겨보도록 권고하고 싶군요. “테베의 신전”은 아닐지라도 “사람이 집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집이 사람을 소유할만한” “살고 있다기보다 차라리 감금되어” 있을법한 규모의 집이 되리라는 것만은 확실하겠지요. 자연에 감동해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서 자연에 감동하는 듯 자연을 찬미하기 위해 항상 부자연스런 메모도구를 지참하고 자연을 찾는 것이 꼭 모차르트 베토벤의 교향곡 CD를 이어폰으로 꽂고 숲 속을 찾는 것과 진배없는 예술적 강박 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가 쉽지요.

존재는 시간이며 시간은 에너지인데 예술적 강박 속에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면 그만큼 자연은 설자리가 없는 게지요. 예술에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하는 만큼 그만큼 기술의 시간과 에너지에 의존하는 것이며 기술의 시간과 에너지에 의존하는 만큼 그만큼 자연의 시간과 에너지를 탈취하는 에너지타율의 연쇄 속에 꽃피는 예술이 어찌 온전히 자연을 예찬하는 게 되며 자연 친화의 삶이 되는 건지요.

당신은 노자보다 공자를 칭송하는데 아마도 노자의 번역서는 친구가 빠뜨리고 당신에게 보내지 않았던 게지요. 하기야 노자역시 작위적 예술을 무작위로 비판하긴 했지만 에너지자율을 정치적 결가부좌로 도모하려 했으니 에너지타율의 연쇄 속에 꽃피는 도(道)가 되고 말았지요.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아무리 높은 자연친화적 깨달음에 이르렀다하더라도 비언어적 생물의 입장에서 볼 때는 에너지타율의 생태불의를 저지르는 한낱 개체일 뿐이지요.

에너지타율의 깨달음은 휴머니즘에만 유효하며 스피시지즘에서의 깨달음은 에너지자율의 정도에 의해 가름되지요. 마찬가지로 에너지타율의 예술성 또한 휴머니즘 예술에만 적용되며 스피시지즘 예술에서의 예술성은 에너지자율에 의해 평가되지요. 인간으로서의 예술성은 에너지타율의 아름다움에 의해 평가되지만 동물(자연)로서의 예술성은 에너지자율의 아름다움에 의해 평가된다는 게지요. 전자는 마음먹기에 달렸지만 후자는 무얼(物)먹기에 달렸지요.

소로우 씨. 당신의 시대에 ‘생명 있는 도구’ ‘말할 줄 아는 가축’으로 불리던 에너지타율을 상징하던 노예, 노예무역, 인간수렵, 인간재산, 인간성기 라는 말들이 노예해방이라는 말로 순화되는 일련의 일들이 있었지요. 그런 일들이 과연 마음먹기에 달린 일일까요? 무얼(物)먹기에 달린 일일까요? 인간불의가 비겁한 도구문화를 사용한 생태불의로부터 태동하였음을 일차 말씀드렸듯이 노예란 인류의 정신문화가 갖는 식량생산(식우, 역우)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필연적 가치생산의 ‘귀족성에 상대되는 예속성’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지요. 말하자면 에너지타율체제에서의 정신적 귀족주의를 생산하는 물질적 천민주의인 게지요.

따라서 인류의 정신문화가 귀족주의를 청산하지 않는 한 노예는 제도화의 허울 속에 은밀히 숨어살게 마련이지요. 정신문화가 식량생산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최초의 전문화(귀족)로 비롯되었듯이 오늘날의 노예문화는 전문화라는 에너지타율체제(기술체제)속에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인류가 발명해낸 말 중에 가장 위대한 허울로서 제도화되어 있지요.

소로우 씨가 알면 아마 기겁을 하게 될지도 모를 때밀이, 발맛사지사 라는 기괴한 전문직이 이 나라에는 버젓이 3D직종을 제치고 가까스로 노예화의 바닥신세를 면하고 있는 것을 다행스러워하고들 있지요. 아마 내가 이 말을 했다고 어쩌면 직업모욕죄로 고발을 할지도 모를 희한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진공 속의 자존’에 매달려 있지요.

소로우 씨. 노예를 정의 내릴 때 ‘인격을 부인당하고 타인에게 소유되어 권리와 자유의 태반 또는 전부를 박탈당한 자’로 규정한다면 이 시대에 노예는 한사람도 없겠지만 놀랍게도 직업의 평등과 자유를 부여하고 있는 전문화라는 허울이 개인으로 하여금 ‘인격의 자발적 부인’을 통해 ‘피지배적인 자발적 소유물’이 되게 하여 ‘권리와 자유의 자발적 박탈’을 아무렇지도 않게 의지케 하다니 이 아니 놀라지 않을 수 있는지요.

소로우 씨가 피력한 숲 생활의 경제학을 통한 자발적 가난이란 것은 이러한 에너지타율로 사회화된 자발적 노예화에 대한 해방적 직관이 아닐는지요. 당신의 “시민의 불복종”은 그러한 직관의 사회적 대응이고요. 그러나 나는 조금 전에 인용한 소로우 씨의 에너지타율의 목록들에서 소로우 씨가 그 목록들의 대부분이 어쩌면 노예들의 노역에 의한 정신적 코뚜레의 산물일지도 모른다는 상상력을 구사한 글 무늬나 사상무늬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지요. 그 점에 있어서 소로우 씨는 적이 나를 실망시켰지만 정신문화나 자신의 예술에 있어서의 에너지타율에 대한 각성은 솔직히 별 기대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당신의 직관은 상당히 그에 가까이 도달해 있음을 당신이 통나무집을 지으면서 “남에게 전할 만한 생각이나 학자다운 생각은 별로 하지 않으면서 예술과 과학이 부는 바람에 날개가 돋쳐 날아가 버림을 홀로 노래한” 글 무늬를 통해 그 심저에 얼룩진 사상의 무늬를 미약하나마 읽을 수 있었지요.

인류의 정신문화 속에 나타나는 그러한 직관들이 검소한 자발적 가난에만 소극적으로 몰두했지 에너지자율의 광범위한 확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은 왜일까요? 그러나 문화축적의 위험성(인간불의와 생태불의)을 스스로 견제하려는 안간힘으로 곡식탁발이 안고 있는 축적성을 경계하기 위해 쉬 상해 무로 돌아가는 조리된 음식탁발을 깨달음의 정점에 둔 것은 그나마 정신문화의 갸륵함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 역시 달걀로 바위치기여서 완강한 물질문명의 타율성과 축적성을 막을 수가 없었지요.

소로우 씨. 정신성이란 그토록 완고한 물질성으로부터의 도망이라고 하면 피안이라는 말로 한사코 바로잡으려 하시겠지요. 그러나 도구라는 정신적(꾀) 물질성이 획득됨으로서 언어와 사물이 분화되고 도망은 피안이라는 보다 높은 곳에 모셔지고 정신은 귀족, 물질은 천민이 되어 예술과 기술은 문화예종의 ‘보이지 않는 노예’를 사고팔게 된 게 아닐까요.

동양의 차(茶)문화는 문화예종의 좋은 본보기가 되지요. 차 문화는 인간간의 관계를 꽃피우는 막간의 음식문화인데 동양의 정신적 귀족주의가 이를 예화(禮化)하여 인간을 종속시키지요. 손님이 오면 차를 끓여 대령하는 하인을 따로 두다가 그 하인이 해방되어 나와 찻집을 차려서는 손님들을 받게 되었지요. 공자의 예(정신)가 재화화 되었다고나 할까요?

모든 예술도 이와 동일한 문화예종의 과정을 거치지요. 우리는 재화화된 예술의 노예인 셈이고요. 예술이 인간불의와 생태불의의 에너지(힘)를 획득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1만5000년 전의 라스코벽화의 들소를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게지요. 아무런 불의가 저질러지지 않았다면 그 이전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단순하고 소박한 문화자율의 시대에 편입되어 인간과 들소는 예술을 모르고도 아니 알 필요조차 없이 공존하며 살았겠지요.

당신이 문화는 제2의 천성이라 했던가요. 인류가 “불의 따뜻함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것을 계속 사용함으로서 처음에는 사치품이던 것이 나중에는 그 옆에 쬐고 있어야하는 현재와 같은 필요성이 생겼으리라”고 했지요. 그리고 불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원시인의 강건함과 문명인의 지능을 겸비하는 것은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으셨지요.

소로우 씨. “고양이와 개들이 제2의 천성에 젖어드는 것을 보듯이” 제1의 천성인 야성은 문화를 위해서도 존재하지만 문화는 문화를 위해서만 있는 게 아닐까요. 지성은 야성을 필요로 할지 모르지만 야성은 지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게지요. 야성 그 자체가 스스로의 지성이니까요. 들소사냥에 나선 인간의 야성은 잘못된 야성, 즉 생태불의의 도구문화를 필요로 한 최초의 지성, 광기의 야성인 게지요.

이처럼 인간의 지성은 광기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불의의 도구를 사용하고도 불의인줄도 모르는 신성(신명)이라 불리던 지성이었던 게지요. 인간의 최초의 성품은 야성이라는 이름의 지성이었고 그 다음이 에너지확대의 흥분과 광기를 신과 멋으로 돋우어 낸 신성이라는 이름의 지성이었고 그 다음이 에너지확대의 자존과 자만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합리화한 이성(인성)이라는 이름의 지성이었다면 이제 에너지확대의 불의를 인간을 포함한 생태공멸의 위기로 인식하는 종성(種性)이라는 이름의 지성이 인간의 마지막 품성으로 대두되기에 이르렀지요.

종성이라는 이름의 지성은 모든 유(唯)개념을 불식하고 새로운 류(類)개념으로 평등과 자율로 에너지 체에 봉사하며 종성예술의 글 무늬, 그림무늬, 소리무늬를 유기적으로 교감해 낼 테지요. 종성예술은 동물, 신, 인간의 품성을 아울러서는 그 각 품성을 철저하게 부정하여 새로운 품성으로 승화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어야 하며 그것은 준엄한 생태적 각성에 이르는 각고여야 할 테지요. 인성예술(휴머니즘)이 예술이 예술을 긍정하는 예술주의로 나아가듯이 종성예술(스피시지즘)은 예술이 예술을 부정하는 생물학주의로 나아가 뼈를 깎는 인본, 신본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 몸이라는 하나의 개체 속에 인성, 신성, 야성의 에너지가 더 높은 법칙을 형상화하는 카타르시스로 녹여내야겠지요.

담합에너지로서의 문화예술이 협잡에너지체로서의 문화예술체제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가히 자해나 자폭에 이르도록 불행의 공동책임과 불행으로부터의 도망이 용이한 에너지자율체제를 새로이 형성해내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겠지요.

소로우 씨. 체제에의 편입 없이 체제를 바꾸는 일이 가능할까요? 침몰하는 배를 구하기 위해 우르르 배 안으로 몰려가는 일이 가당키나 한가요? 생태불의의 에너지확대체제인 기술체제에 편입한 예술체제는 배의 무게를 가중시킬 뿐이지 결코 배의 무게를 가벼이 할 수는 없는 게 아닐까요? 예술이 있으나 없으나 기술체제는 에너지가 고갈될 때까지 자기침몰을 계속할 것이라면 예술체제는 기술체제를 오히려 연장하거나 강화하는데 기여할 뿐이라는 게지요. 그런 의미에서 체제에 편입하지 않으려는 에너지자율의지만이 배의 무게를 가벼이 하는 자기구원과 사회구원의 부양자가 될 수 있다는 게지요.

어떠한 논리로도 예술의 깊이를 알 수 없다 해도 차라리 예술 따위는 알 필요조차 없는 무심한 삶을 사는 게 예술을 보다 예술답게 하는 예술의 자율에 이르는 게 아닐 런지요.

꿈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요? 꿈이 오는 길목에 자리 잡고 살아야하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꿈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아는 순간 그 꿈은 사라져 버린다고도 하고 꿈은 무작정 찾아 나서거나 추구하는 것이라고도 하지요. 그러나 꿈은 건강한 기억으로부터 샘솟는 게 아닌가 하지요. 하늘의 영감으로부터 떨어진다고들 지금까지 말해오지만 그냥 몸의 깊숙한 곳에서 건강을 위해 외부의 건강하지 못한 자극을 받고 샘솟는 게 아닌가 하지요.

예술도 그냥 샘솟는 거지 마냥 찾아 나선다고 되는 게 아니지요. 찾아 나서는 꿈이나 예술은 헛되기 마련이지요. 꿈도 예술도 건강을 위해 샘솟는 거라면 누구든 꿈을 꾸거나 예술을 하지 않을 수 없고 나 역시 그러하겠지요.

아, 그런데 소로우 씨. 지난 역사는 어찌하여 그렇게 건강하지 못한 꿈들을 꾸어 왔을까요? 그 눈부신 지혜의 여인이 그토록 무참하게 몸을 더럽히다니. 그 영광스런 신의 은총이 그토록 처참하게 피조의 몸을 난자하다니. 우리의 논두렁길을 한번 걸어보시지요. 자연예찬의 메모지를 적막과도 같은 전율이 하얗게 질린 슬픔으로 떨게 할 테지요. 월든의 자연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나요. 월든에도 ‘이제 봄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누군가가 귀띔해 주긴 했지만 그보다 당신의 몸에서 들려오는 봄의 소리를 듣고 싶군요.

이건 내 얘기이기도 한데 나는 당신이 자연예찬의 예술에 몰입한 에너지 -시적 초월에너지- 만큼 당신 몸의 자연을 찬미하는 생의 에너지 -삶의 내재에너지- 에 몰입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지울 길이 없답니다. 당신은 숲 생활의 경제학에서는 다소 자연을 에너지체로 보는 듯 했으나 그 외의 많은 부분은 자연을 영체로만 보거나 초월적 관조의 정서체로 봄으로서 자신의 몸과의 상관성을 도외시하지 않았나 싶더군요. 그토록 높은 경지의 자연과 교감하면서 정작 자신의 체내자연에는 도외시하여 자연과의 친화 속에서 자연과의 밀도를 계속 떨어뜨리며 건강을 해쳐온 게지요.

자연예찬의 글을 쓰면서 자연훼손의 우를 범하는 아이러니는 모든 예술가들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감추고 싶은 본질적인 치부일수 있지요. 마치 병약함이 예술적인 영감을 부르기라도 하듯 도착되어 예술적인 영감이 사물과 몸을 떼어놓음으로서 병약함을 부른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은 게지요. 예술문화와 생활문화를 분리시킴으로서 정신의 본질은 인식대상이자 생식대상인 사물로부터 몸을 떼어놓는 것, 초월적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이며 몸의 본질은 사물을 한사코 몸으로 끌어들이려는 것, 내재적 존재임을 욕구 하는 것임을 까마득히 잊게 함이지요. 예술에 몰입하는 순간순간이 몸의 활력을, 몸의 자연을 억압하는 순간순간임을 잊게 하다니. 자연을 찬미하는 예술의 무상함이 아닐 수 없지요. 지상의 모든 생물들은 순간순간을 몸의 활력과 몸의 자연을 자유하게 하는 온갖 예찬으로 살아가지요

소로우씨. 월든의 초판 2천부 중 334부밖에 팔리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당신의 지도위로 숭숭 포장도로가 지나갔더라면 당신의 월든이 얼마나 슬퍼했을까요? 예술적 성공이라는 괴물이 숭숭 포장도로를 내며 지나가면 온갖 덩굴 식솔들은 손에 손을 뻗어 상대적 박탈감으로 다운된 마음들을 어루만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숭숭 지나가는 자동차바퀴에 손들은 잘려나가고, 도로 여기저기에선 짐승들의 비명소리와 창자 터지는 소리가 끊일 날이 없겠지요. 역사의 지도위로 숭숭 포장도로가 지나가면 소로우씨, 존재는 그 지도의 그물 속에 갇혀 얼마나 들 외로워하는지, 새로움은 늘 다른 새로움에 의해 위축되고 창조는 늘 다른 창조에 의해 보잘 것 없어지는, 문예비평의 한 그물코 속에 갇혀 볼품없어진 왜곡된 자연주의를 아시는지요.

당신은 “인간이 지닌 의무 전체는 단 한마디로 요약해서 스스로 몸이 되는 것이라”고 하고서도 “연극과 오페라의 재미는 생계를 꾸려나가는 재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고서도 그러한 “단순한 재미가 배태시킨 시”를 또한 편애하였듯이 인류는 자연을 흠모하면서도 자연주의를 그다지 초라하게 하였을까요? 글 무늬가 인쇄술의 발달로 얼룩지고 그림무늬가 사진술의 거부로 물결치고 소리무늬가 온갖 도구들의 소란으로 춤추게 된 것도 까마득히 잊고 예술가들은 자연주의를 쾌락주의적 무신론들의 교리(16세기)로 몰아세우는가 하면 초경험적, 형이상학적, 신적인 힘이 존재하지 않는 가지(可知)적 현상세계나 우주적 기계론(18세기) 속으로 가두는가 하면 인간으로부터 보다 높은 열망과 이상을 제거함으로서 인간을 동물적 차원으로 끌어내리어 동물도 인간도 마치 자아를 전혀 갖고 있지 않은 편협하고 경향적인 존재(19세기)로 타락시켰으며 위선적인 도덕적 태도와 사회적 패악을 폭로하는 노동자 계급의 생활투쟁에 참여하여 생활과 예술사이의 간극이나 메우는 존재(20세기)로 위축시켜왔지요. 

소로우씨, 자연은 ‘모든 것’이며 그러기에 자연은 ‘항상 옳다’고 하면 단번에 생물학주의로 몰아붙이는 편협함을 어이 할까요? 비평이 논리나 합리의 칼을 도구로 사용하는 한 우리의 몸과 정신은 토막 나지 않게 단단히 자연을 붙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나는 당신이 당신의 입으로 무신론자임을 누누이 고백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인적이라고는 없는 숲 속에서 한 마리 짐승으로 오롯이 살아가는 사람의 입에서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면 신이 그 말을 믿을까요? 신은 인간의 말을 믿는 게 아니라 말이 거느린 신의 그림자를 보지요. 신의 그림자인 자연의 계시와 인간들이 믿고 있는 언어적인 신의 계시는 양립 할 수 없으며 “탄력 있는 다리를 가진 여우의 조건”을 쫓는 ‘말(馬)의 다리와 개의 코와 온갖 야비함을 앞세운 여우사냥의 조건’ 만큼이나 서로 믿음이 없는 게지요.

자연과의 대화에 가축을 내세우듯 신과의 대화에 통역자나 자신의 목소리(기도)를 내세우는 우스꽝스러운 일을 신은 여우의 다리가 되어 보고 있을 테지요. 신은 결코 정신으로 삶을 셈하지 않으며 또 그렇게 셈하도록 만들어 놓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에너지잉여의 생산자이자 소비자인 정신으로 인간불의와 생태불의를 빚어 만드는걸 보시고는 여우의 다리로 그 삶을 셈하지요. 정신은 단지 위로에 불과하도록, 오직 몸을 통해서만 삶을 셈하도록 잉여 없는 에너지자율로 만물을 빚어 만드신 게지요. 불의를 의심하면서도 서로의 볼을 맞비비는 가면을 쓴 얼굴이 바로 우리의 정신인 게지요.

소 뒷걸음치다 쥐를 잡는 영감의 예술이 소의 다리만큼이라도 강건했더라면 기술로 하여금 스스로의 코에 코뚜레를 하여 서로를 의심하도록 하지는 않았겠지요.

나의 입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게 사랑인가요. 에너지자율만이 사랑을 온전히 현현하는 거라면 웃겠지요. 그렇게 다정한 새들도 먹이만은 스스로의 입으로 찾아 쪼아 먹으며 사랑을 온전히 돋우지요. 사랑은 사회적 최소단위를 지향하면서 극히 개인적인 은밀함을 요구하는 오묘한 완결성으로 무언가를 암시하지요. 도구문화나 에너지타율의 개입이 없는 자연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주는 어떤 계시라고나 할까요? 한 번도 누군가를 증오해 본적이 없는  마음이 불의의 도구문화로 에너지타율에 개입하는 그 순간부터 사랑은 온전함을 잃고 증오와 한 짝이 되어 자연의 계시에 냉담할 테지요.

소로우씨, 예술이 에너지확대의 흥분과 자축, 증오와 냉담에 대한 위기의식의 반영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인쇄술의 발달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가 팡파르를 울렸고 방직기와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낭만주의와 자연주의 그리고 사실주의가 서로에게 침을 뱉으며 술잔을 부딪쳤고 동력경운기(가솔린 기관)와 디젤기관의 발명으로 모더니즘이 술과 섹스와 마약으로 인사불성이 되어 천국여행을 떠났으니까요.

당신이 에너지타율의 위기를 직관하고서도 순수예술의 창작에너지에 대해서만은 관대했던 것도 당신이 살던 지역에서 유행하던 초월주의운동의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지요.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을 독립 초월하는 즐거움, 정신이 물질을 독립 초월하는 우월성, 자연의 경험 속으로 내재하려 하지 않고 그로부터 독립 초월하여 신비적 선험으로 관조하는 형이상학적 로망주의에 자신도 모르게 취해 있지 않았나 싶지요. 사실 모든 예술의 무늬는 이러한 즐거움, 우월성, 관조성을 벗어날 수 없지요. 삶의 바닥 속에 농밀하게 부착되는 후각, 미각, 촉각을 거부하고 삶을 무슨 관상처럼, 여행처럼, 산책처럼 부유하여 시각에만 의존하게 되는 것은 에너지타율의 꺼림칙한 자유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예술이라는 농사를 짓는데 얼마나 많은 코뚜레들(후각, 미각, 촉각의 노예들)의 에너지가 유입되어 있는지 술에 취한 전제군주의 눈으로는 가름하기조차 어렵지요. 예술을 상상력의 시각독재(이미지)에 의한 후, 미, 촉각의 노예화라고나 할까요?

문화에너지는 축적되지만 자연에너지는 순환되지요. 순환에너지와 축적에너지와의 충돌로 인한 위기의식으로 신화적 예술이 형상화되는데 이 에너지가 문화반성보다는 문화자축으로 확대되어 점차 외부화 됨으로서 내부갈증으로 인한 더욱 높은 에너지레벨에의 필요욕구를 창출하지요. 그러나 문화에너지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으며 놀랍게도 그 법칙은 자연에너지의 법칙을 충실히 따르지요. 어디 그 개요 나마 간단히 열거해 볼까요.

‘불을 사용하기 때문에 불이 필요하다.’ 문화에너지 제1법칙이다. 문화에너지는 사용하기 때문에 필요하며 사용하지 않으면 필요하지 않다. 문화는 사용하지 않으면 자연에너지로 충족된다. 자연에너지는 문화에너지가 작용하지 않는 한 정지한 채로 있거나 등속도 운동을 계속한다.

‘불의 사용은 불에 대한 결핍과 필요를 불러일으킨다.’ 문화에너지 제2법칙이다. 문화에너지는 사용하면 할수록 문화에너지의 결핍과 필요를 불러일으킨다. 문화에너지의 변화는 자연에 작용하는 문화에너지의 방향으로 일어나며 문화에너지의 크기에 비례한다.

‘불은 스스로의 몸을 사용한다.’ 문화에너지 제3법칙이다. 문화에너지는 자연에너지를 태워 없앰으로서 그 연소한 에너지만큼 문화화 된다. 자연과 문화가 서로 에너지를 미치고 있을 때 자연에 미치는 에너지와 문화에 미치는 에너지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이다.

문화에너지는 운동법칙뿐 아니라 열역학 법칙에도 충실히 따르지요.

‘불은 평형을 원한다.’ 문화열역학 제0법칙이다. 문화는 문화간 또는 문화 내부간 자연적 평형상태를 성립시킨다. 자연과 멀리 떨어진 문화일수록 자연에의 평형의지가 강하다.

‘불은 붙여야만 붙는다.’ 문화열역학 제1법칙이다. 외부에너지의 유입 없이 영구적인 문화 창조는 불가능하다. 에너지를 감소시키지 않는 문화는 있을 수 없다. 문화는 소비자이지 생산자는 아니다. 문화는 스스로 꽃피울 수 없다.

‘불은 끄지 않아도 꺼진다.’ 문화열역학 제2법칙이다. 외부에너지의 유입이 없으면 문화는 자연 소멸된다. 문화의 방향은 비가역적이며 문화쇠퇴 없는 영구적인 문화효용은 꿈에 불과하다. 외부에너지의 유입이 없는 고립상태에서의 문화 엔트로피는 증가하게 되어있으며 문화체온은 싸늘한 죽음을 맞게 되어있다.

‘불은 절대온도를 원한다.’ 문화열역학 제3법칙이다. 문화는 절대적 자연을 극한으로 하는 0의 통계학적 정지 상태인 에너지자율의 실존에서 살기를 원한다. 더 이상 줄어들 것도 물러설 것도 없는 기저문화를 기대한다.

소로우씨,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유산이라고 하는 고전이라 불리는 예술들이 물질문명에 놀아나는 춤에 불과하다면 정신적인 대화라는 것도 위로에 지나지 않겠지요.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술적 고전들은 물질적인 큰 물결을 예비하거나 맞바람처럼 맞아서 술렁인 커다란 반향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지요. 따라서 위대한 작품들은 물질적인 커다란 변혁기에 태어나며 그 위대함이라는 것은 고작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의 물거품처럼 흥분과 위기의식의 잔해에 불과한 게 아닐까 싶지요. 대자연의 삶의 엄숙함에 비하면 그렇다는 얘기지요. 그런데도 이 땅의 모든 예술지망생들은 시도 때도 없이 위대함의 물거품을 품고 꿈도 야무진 방랑의 취객으로 살아가지요.

셰익스피어의 입에서 게운 물거품은 소로 인한 에너지확대의 절정에 이른 시대에서 에너지타율의 한계와 갈등을 노래한 휴머니즘 문학의 위대한 기념비지요. 토인비가 도구로 규정한 도구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범선시대를 있게 한 에너지 주역인 소의 슬픈 눈망울을 찬란하게 소외시킨 결과가 바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인 게지요.

범선은 상업정신의 깃발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상업정신은 인간이 생의 극한에서 인간의 머리카락을 잘라 팔듯이(羅生門) 추위의 극한에서 남의 옷을 벗겨 입듯이(외투) 인류가 양에게 차마하지 못할 짓을 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또 내다 팔아 양모무역의 깃발을 높이 내거는 데서부터 본격적으로 그 불의를 오대양 육대주로 퍼트리기 시작했으니까요. 셰익스피어는 양모전쟁과 농민봉기가 끊일 날이 없던 그 불의의 와중에서 생태불의에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오직 불의의 산실인 왕실 난장판을 미화하는데 만 급급했지요. 그런 작자가 인류문학의 최고봉으로 추앙 받는 슬픈 역사야말로 휴머니즘 예술의 뼈아픈 한계이자 교훈이라고 할 수 있지요.

셰익스피어 이후 200년 동안은 이상하게도 예술사적으로는 별다른 변화가 없는 대신 철학사냥꾼들이(베이컨, 데카르트, 홈즈, 로크, 뉴턴) 경험을 앞세워 근세를 열더니 소의 슬픈 눈망울 사냥에 나섰지요. 소의 코뚜레를 풀고 도살장으로 보내기 위해 동력경운기의 전신인 증기기관의 황홀한 꿈을 향해 사유의 시위를 당긴 게지요. 노예무역만큼이나 비정한 양모무역을 폭발적으로 증대시킨 방직기와 증기기관이 발명되자 새로운 예술적 고전들이 봇물이 터지듯 쏟아져 나왔으며 그러한 인류사적 대폭발은 동력경운기가 출현하기까지 1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지요.

-철학에선 칸트로부터 야스퍼스까지, 음악에선 하이든에서부터 차이코프스키까지, 미술에선 고야부터 피카소까지, 문학에선 괴테부터 카프카까지-

그 시기에 과학기술의 기반이 되는 전신, 전화, 전기, 가솔린기관, 디젤기관 등이 모두 발명되었다는 사실과 맞물리면서 예술과 기술은 결코 둘이 아님을 알게 되지요, 셰익스피어의 휴머니즘예술이 희곡이라는 장르를 통해 이루어진 것은 도구문화의 필연적 제약이라 할 수 있는 인쇄술과 교통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은 구어문화의 반영이었다면 발자크로부터 시작된 소설이라는 장르는 인쇄술과 교통의 발달에 따른 문자문화의 반영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니까요.

이는 필연적으로 시와 산문의 분화, 로망주의와 리얼리즘의 분화를 통해 삶의 실존적 분열과 해체를 통렬하게 보여주는 모더니즘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게지요. 열 사람 중 여덟아홉 사람을 식량생산으로부터 자유롭게 한 인간불의, 생태불의의 절정에 이르는 광기의 시대를 연 동력경운기가 출현한 이후 전개된 모더니즘은 그래서 휴머니즘문학의 ‘끝 간 데’라고 할 수 있고요.

소로우 씨. 당신의 표현대로 “날개를 가진 황소에게 끌려가는 썰매 같은 돛배”로 상징되는 고전주의의 축력시대(18세기), 질풍노도의 황소에게 떠밀려가는 기선으로 상징되는 사실주의의 축동력시대(19세기), 인간이 초현실의 신이 되어 하늘을 나는 쇠붙이 새로 상징되는 모더니즘의 동력시대(20세기), 에너지황제 황소를 쓰러뜨리고 그 황소를 부리는 인간마저 쓰러뜨리는 종간의 마왕인 최소단위 에너지체 바이러스로 상징되는 스피지시즘의 몸력, 생명력시대(21세기), 이 격랑의 역사가 그리는 문화에너지의 포물곡선에 현기증을 느끼며 떠올리는 것은 병색이 완연한 자연의 초췌한 얼굴이어요.

각 시대의 거울에 비춰본 자연은 실로 자신을 몰라보도록 찌그러트려지고 뒤틀려서 왜곡되거나 피해망상 환자처럼 위축되어 있지요. 그것은 자연의 세상에 대한 실연의 표정이며 침묵의 형상화라고 할 수 있어요.

소로우씨의 자연문학이 지닌 문화에너지의 위상은 축력과 동력과 생명력사이에서 예술이 기술에의 위로에 지나지 않는 단절과 침묵을 사랑과 평화로 소통하는 일이었어요. 설사 소로우씨가 “일 년 중 6주일을 일하고도 필요한 모든 생활비용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것이 인간불의와 생태불의에 의한 것임을 절감하지 못했다하더라도 소로우씨는 내게 이런 구름 잡는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 이런 잡히지도 않을 전파를 날려 보낼 수 있겠어요.

소로우씨, 테크놀로지체제를 벗어나기 위한 안간힘으로 농사라는 걸 짓는데 예술체제에 편입되지 않으려는 예술이란 무엇인지요? 설사 그것이 자연과 문화사이의 에너지강박에 지나지 않는다하더라도 강물위에 흘려보내는 방랑시인의 시문처럼 못내 그리워할 테지요. 당신이 “혼자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나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며 그토록 일기에 매달렸듯이 나도 어쩔 수 없이 이런 넋두리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나의 넋두리에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해도 판타지 정도로 흘려버려도 좋겠지요.

가상현실인 테크놀로지 체제하에서의 종교라는 것도 어차피 판타지로 얼룩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새들과 수많은 벌레들과 짐승들, 그리고 인간들이 깃드는 나무에도 분명 불살생이 적용되어야한다면 그게 어찌 판타지가 아니겠어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콩밭을 보호하기 위해 1, 2년생 토끼를 잡을 때보다 하루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10, 20년생 나무를 쓰러뜨릴 때가 더 숙연한 느낌인 게 사실이지요.

저녁들판에서 들려오는 소의 울음소리와 어눌한 정신지체아이의 자유로운 흥얼거림이 이토록 평화롭게 느껴지는 이유를 우리는 끝내 알지 못할 테지요.

                       

        소로우씨를 사유발채에서 내려놓으며

나는 소로우씨를 늘 무거운 사유덩어리로 지고 다녔다. 그만큼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그럴수록 하고 싶은 말들이 무겁게 쌓여갔다. 이제 조금 홀가분한 느낌이다. 처음에는 소설이라는 발채에 담아 덜어낼까 하다가 그러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편지글로 바꾸었다. 말이 잘 전달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다소 서툰 곳이 있더라도 소로우씨가 워낙 능하니까 해독에도 문제가 없으리라 믿는다.

나는 왠지 말 친구를 두지 못한다. 대화를 하면 감정이 격해져서 말로는 의사소통이 어렵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래서 글을 쓰나보다. 일상적인 대화야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지만 의지가 개입되면 나의 사유체계를 담아낼만한 말들을 찾아내기가 쉽지가 않아 가슴부터 뛴다. 그러다가 서툴게 튀어나온 말이 상대방에게 잘 전달되지 못해 상대방이 오해를 하게 되고 그래서 다시 되돌아온 오해의 말에 여지없이 감정을 다치면 나의 말은 톤부터 달라진다. 일단 톤이 높아지기 시작하면 고여 있던 사유포탄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서로가 마음을 다쳐 말문을 닫게 된다.

가슴속에 고여 있는 무거운 사유덩어리들이 대강 빠져나오고 나면 좀 괜찮아 지려는지 모르겠다. 단순한 추억의 덩어리들도 있는데 그건 별로 무게감을 느끼지 못해 덜어내고 싶은 욕구가 별 생기지 않는다. 그래도 말끔히 들어내는 게 개운할 것이다. 언제쯤 다 덜어내게 될까? 덜어내는 방식은 내용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무래도 추억덩어리들은 소설이나 희곡의 형식을 빌어야하는데 그게 또 무게감으로 다가오니 왠지 하기가 싫은 것이다.

아무 것도 덜어내지 않고 살수는 없는 것일까? 속에서 그냥 덩어리들과 사귀면서 지내도 상관이야 없겠지만 그러려면 늘 혼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한다. 그럴 만큼 나의 바지게는 넓고 크지 못하며 그 무게를 지탱하고 버틸 만큼 강건하지도 못하다. 나는 한 마리 짐승만큼 큰 존재는 못된다. 작은 소인배인 인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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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사고 한길그레이트북스 7
레비 스트로스 지음 / 한길사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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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의 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의 대원칙 -신화시론




평등가치는 실재하는 가치라기보다 가치의 편중이라는 불평등가치를 막는 이상향적인 가치다. 자연이라는 개념의 이상은 모든 생명이 평등한 상태를 지향하는 조화 그 자체다. 자연을 존재의 평등한 조화로 인식하는 것은 이상이지 현실이 아니다. 현실은 결코 전체일 수 없고 부분의 구체일 뿐이다. 따라서 전체적 이상인 평등한 조화를 위한 부분적 현실의 불평등한 존재는 나름대로의 논리 즉, 신비적인 행동규범을 생존방편으로 갖게 된다. 존재자체가 한계와 자유의 규범이다.

육체적 한계와 정신의 자유, 정신의 한계와 육체의 자유사이에서 적절한 질서와 규범을 찾아 문화라는 언어가 생성된다. 최초의 인류는 언어학 박사였다. 언어를 창조한 사람들이 미개인일수는 없다. 정작 미개인은 창조된 언어로 창조과정을 더듬어 오르지 조차 못하는 언어학자와 인류학자들이다. 우리는 언어가 없는 인간들의 사유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며 언어 생성과정 또한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언어인과 비언어인의 평등을 위해서 이러한 가치 뒤집기는 필요하다. 최초의 인류를 신화적 과학의 총체인 신비체로 생각하지 않고 문명인에 대해 열등한 미개인으로 생각하는 한 자연과 인간에 대한 논리적 대응은 불가능하다. 추상개념의 발달이나 도움 없이 구상개념만으로 삶의 총체를 꾸려가는 논리가 추상개념의 도움으로 꾸려가는 논리보다 못하지 않듯이 구상개념이라는 언어의 도움 없이 이미지만으로 삶의 총체를 꾸려가는 논리가 언어의 도움으로 꾸려가는 논리 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는 전제하에서만 자연은 인간에 대해 그 어떤 자기표현이 가능하다. 자연으로서의 인간이 최초의 자기표현을 시도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소에 대한 어떤 원칙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살만 발라먹고 뼈를 갈아 소에게 되돌려주다가 광우병이라는 호된 벌을 받고 있다. 이런 인간 자연의 상관논리 하에서의 문학적 의인화는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신교육을 받은 현대 인도인들도 마찬가지다. 소를 신성시하던 시대나 신성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소를 잡는 백정을 천하게 여기는 시대에는 소와 인간의 관계에 금기나 금기에 가까운 논리적 영향이 작동하고 있었다. 신성시와 천시는 생존을 위해 역우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최소한의 논리적 장치였다. 자연의 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라고 하는 상관논리가 소라는 개체에 작용한 것이다. 비문자인들에게는 이러한 장치가 훨씬 복잡하고 까다로운 논리적 변증을 거친다.

인간의 열 배에 가까운 체중을 지탱하는 튼튼한 골격의 막강한 힘을 지닌 들소를 처참하게 죽여 먹이로 삼기 위해서는 무자비한 심리적 부담을 상쇄하는 논리적 장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온갖 신화와 제의가 생겨났다.

북아메리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가진 수렵부족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옛적에 들소는 맹수였고 뼈만 남은 동물이었다. 사람이 식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람을 잡아먹는 동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들소가 인간의 처녀를 사랑하여 제짝으로 삼기를 원했다. 이 처녀는 한 인간 집단 내에서 유일한 여성이었다. 어떤 남자가 가시 있는 나무에 찔린 뒤 그 나무의 정기로 임신이 되어 낳은 딸이었다. 남자들은 이 처녀를 무척 사랑했지만 한편으로는 들소를 두려워했다. 그들은 결혼에 동의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선물을 모아 들렸다. 선물도 하나하나가 들소 몸의 각 부분들을 대신하는 것들이었다. 활, 화살, 화살통 등 이렇게 해서 들소는 ‘뼈 밖에 없다’에서 ‘살 밖에 없다’로 바뀌고 사람을 잡아먹는 들소에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대홍수가 나서 시뻘건 강물이 범람하면 강의 생명이나 정령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산채로 들소를 강물에 던지거나 죽여서 재단의 재물로 바쳤다.

특별한 생존방편을 합리화하는 이러한 논리적 장치에는 자연이 인간화되고 인간이 자연화 되는 상호연쇄로 침투하는 추상적 감정들이 구상적으로 형상화되어있다. 생각과 행함이 문학적 신화로 얽혀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생각 따로 행함 따로 문학 따로 삶 따로 분리되어 ‘소의 슬픈 눈빛’과 ‘광우병’이 어떠한 연결조차 없이 의인화와 살 처분의 반 논리로 대립해있다. 자연과 문화의 갈등을 대비와 합일로 해소해온 지성들의 사유구조이자 유심적 심리체계의 전형이다.

놀랍게도 그 속에는 모든 갈등이 해소된 무풍지대의 고요가 전율하고 있다. 갈등의 고요가 태풍의 눈으로 발달하고 있었다. 나는 감히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태풍의 눈 속에 공동화된 백치지성으로 단정한다. 피곤하게 그의 사유체제 전체를 장황하게 거론할 생각은 없다. 그냥 간단하게 내 생각만 말하겠다.

위 그의 상부(정신)구조는 대비(변별)로 시작해서 합일(유사)로 끝난다. 그의 상부구조가 대응(분석)으로 시작해서 발전(변증)으로 끝나는 사르트르의 상부구조를 비판하는 것이라면 나의 상부구조는 그의 상부구조를 비판하는 것으로서 외연(기생)으로 시작해서 내포(숙주)로 끝난다. 이 세 사유체제를 간단한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역사주의     인간 ․ 문화 ․ 문자인 ․  2    = 2 ……… 발전 

                    종간 ․ 자연 ․ 비문자인 ․ 1

 

구조주의      인간 ․ 문화 ․ 문자인 ․  1   = 1 ……… 합일 

                    종간 ․ 자연 ․ 비문자인 ․ 1 

                                            

본위주의      인간 ․ 문화 ․ 문자인 ․  1    = 1 ·········     내포

                    종간 ․ 자연 ․ 비문자인 ․ 2       2

 

 

사르트르와 레비스트로스의 논쟁에 끼어들 생각은 없지만 그 논쟁이 시대  정신의 필연적 단계를 이루고 있어서 그 단계의 관성이랄까 연속성에 강하게 떠밀려 다음 단계의 사유구조가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논쟁과는 아무 상관없이 역사주의와 구조주의는 통시성과 공시성만큼이나 철저하게 현대인의 사유구조를 형성하고 있고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문명의 한계와 극심한 자연 훼손으로 인해 두 사유구조의 논쟁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새로운 제 3의 사유구조로 이미 우리의 정신은 나아가고 있다. 이른바 자연본위의 사유구조다.

신 자연주의의 대두는 역사는 발전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역사는 진보하는 게 아니라 진행할 뿐이라는 논의로까지 나아왔지만 결코 그에도 만족할 수 없어 역사는 잘못 진행되고 있다는 강한 의문을 다시금 제기한다. 과거와 현재가 차가움과 뜨거움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 이대로 계속 뜨거워져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각성에 걸 맞는 사유구조를 이미 배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가움과 뜨거움의 논리구조가 대비에서 외연(기생)으로 합일에서 내포(숙주)로 본위화 되고 있었다. 부분과 부분의 변별 유사구조에서 전체와 부분의 숙주기생(모태)구조로 변환을 뛰어넘어 환원되고 있었다.

역사진행 자체가 끊임없이 새로움을 주긴 하지만 사실 자연본위의 사유구조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너무나 케케묵은 것이어서 잊혀져왔을 뿐이다. 신화적 사고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새로이 해석될 뿐이다.

들소신화로 다시 돌아가 보자. 레비스트로스는 이를 혼인교환으로 보고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매개 기구로서의 작용을 읽어낸다. 나는 이를 에너지 교환으로 보고 자연과 문화의 단순한 변별적 매개가 아니라 보다 복잡한 가치교환의 심리적 종교적 속죄의식으로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우선 들소에 대응하는 집단을 여성이 없는 집단으로 설정한 것은 들소사냥의 반여성성과 가부장적 힘의 잔혹성, 그 대가로 주어지는 에너지효율로 인한 여성의 역할축소 등이 담긴 의미구조를 드러낸 것이다. 가시 있는 나무의 반인간적 자연의 간섭으로 인간적 반자연의 한 남자가 딸을 잉태한 것은 들소사냥의 에너지효율로 인한 가치의 대전환을 의미한다. 가시에 찔리며 벌레와 열매를 따거나 작은 짐승들을 힘겹게 사냥하던 에너지효율이 낮은 자연과의 대응에서 모든 것이 한꺼번에 주어지는 집단적인 힘의 협심체제의 가치가 대두된다. 그리하여 축제와도 같은 혼인의례의 가치교환이 유일한 여성과 온갖 축적된 문화적 선물들을 바치면서까지 종교적 속죄의식으로 상쇄된다. 인간의 몸무게보다 열배나 무거운 들소를 잔인하게 죽여 먹이로 취하는 심리적 부담을 상쇄하는 엄청난 대가를 40가지나 넘는 대응물들과 유일한 여성으로도 모자라 들소가 사람을 잡아먹는 맹수였다는 터무니없는 심리적 가치치환까지 덧붙인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등가적 교환이라고 해석하는 자연과 문화 간의 에너지교환의 가치체계다. 과연 등가일까? 등가인데도 그토록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걸까? 나는 결코 등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등가라면 인구가 불어날 수가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등가는 곰이 막대기라는 도구를 사용해 개미를 잡아먹듯 도구문화의 에너지효율이 확대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맨손으로는 결코 들소를 잡을 수가 없다. 도구를 사용해 들소를 잡는 한 들소의 수와 인구의 수를 조절하려면 도구사용의 절제와 확대를 인위적으로 통제해야 하는데 역사적으로 도구축소의 의지는 한 번도 발현된 적이 없다. 따라서 야생의 사고 역시 레비스트로스가 콤플렉스에 가깝도록 가치우열의 등가에 매달린 것처럼 그렇게 등가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 구석기 시대의 야생의 사고는 어느 정도 등가 교환에 충실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스코의 들소사냥 이후에는 등가교환이 점차 차등교환으로 이행되어 왔을 터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해주는 등가의 차원에서 그의 주특기인 도식으로 그와 사르트르와 나의 사유구조를 비교해보자. (도식참조) 

  

               들소신화                                             축우신화

 독화살  → 들소 ⇐ 가시나무․풀             사료 → 축우 ← 초지

        ↑   ⇙   ↑   ⇘   ↓                               ↑  ↙  ⇓   ↘  ↓ 

     남자 ⇒  여자  ⇐   남자                      남자 ⇐ 여자 ⇒ 남자 

         ↑   ⇘   ⇑   ⇙   ↓                              ↑  ⇘  ⇓   ⇙  ↓ 

         활   ← 남자  ←    독                        가공 ← 남자 ← 곡물  

             문화에너지 8                                    문화에너지 10 

             자연에너지 8                                    자연에너지  6 

 

                                   개구리신화 

                  나무막대 → 개구리 ← 나무막대 

                             ↑    ⇙   ⇓   ⇘     ↑      

                         아들   ⇒  여자  ⇐   남자      

                             ↑    ⇖   ⇓    ⇗    ↑ 

                 나무(열매) ⇒   딸   ⇐ 나무(열매) 

                                 문화에너지  6 

                                 자연에너지 10

 

레비스트로스의 에너지등가 1은 0으로부터 벗어나 진행 중이므로 들소신화의 합일구조도 언젠가는 사르트르의 축우신화인 발전구조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순수에의 상부구조는 정신과 육체, 이론과 실제의 분리지점으로부터 출발한 미미한 차이 즉, 모순과 대립개념의 양화된 에너지구조가 불확실성으로부터의 확률적인 등차구조로 확대된다. 상부구조가 아무리 불변이라 해도 아니 불변이면 불변일수록 하부구조인 도구문화가 축적 확대됨에 따라 두 구조 사이에는 통제 불능과 소통불능의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대해 백치지성이라는 공허와 무기력을 보여줄 뿐이다.

말하자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사르트르의 역사주의에는 지성으로 유효하나 나의 본위주의에는 백치에 가깝다. 다만 역사주의가 본위주의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단계에 불과하다. 밖에서는 자연과 문화의 갈등이 종말에 이르도록 질풍노도인데 안에서는 차가움과 뜨거움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며 태풍을 부인하는 고요의 눈을 하고 있다면 그런 지성은 그야말로 먹물이거나 샌님에 지나지 않는다. 개구리 한 마리 잡는데도 막대기가 필요한 인간의 자기 정체성은 개구리신화의 본위주의적 상부구조에 이르는 강력한 가역의지로서만 확립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들소와 개구리는 생존상관물로서의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들소는 문화 창출과 문화소비의 엄청난 부담으로 상관하지만 개구리는 그야말로 인간의 생리생태에 걸 맞는 부담 없는 자연에너지로 흡수된다. 들소 떼가 많아지면 인간 무리는 줄어들고 인간무리가 많아지면 들소 떼가 줄어들기 마련인 직접적인 생존경쟁 관계에 있다. 더 나아가 들소 떼가 어느 정도의 한계까지 줄어들면 인간무리 또한 줄어든다. 그 조절장치를 하는 것이 상부구조인데 들소신화에서 여자와 모든 문화축적물까지 바쳐 가치치환을 하는 조절장치는 분명 자연본위구조를 충분히 예감하고 있다. 개구리신화는 그러한 가치치환의 조절장치조차도 필요 없는 자연본위구조의 모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부구조의 도구문화는 그러한 상부구조를 무위로 돌릴 만큼 강력한 축적 욕과 권력욕의 태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르트르처럼 온통 역사 자체를 변증의 태풍으로 몰아치도록 상부구조 자체를 무모한 발전신화로 바꾸어 놓기까지 한다. 진보신화의 사르트르에게 진행신화의 레비스트로스가 백치지성일수 없듯이 진행신화의 레비스트로스에게 진보신화의 사르트르 또한 무모한 광기의 지성일수 만은 없다. 둘 다 동일한 하부구조위에서 춤을 추는 생존태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진보를 하든지 진행을 하든지 우리는 축우신화와 들소(사냥)신화 속에서 인류의 부피와 무게를 공룡의 운명으로 늘여가고 있다.

이러한 하부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선 상부구조가 대응-대비-기생으로, 발전-합일-숙주로, 역사주의-구조주의-본위주의로 이행되어야 함을 인정해야 한다. 역사주의는 진보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야 하며 구조주의는 진행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리하여 퇴화 퇴보 퇴행의 콤플렉스로 과감하게 진입하여 자연인 숙주에 대해 기생 문화로서의 자신을 솔직히 인정해야한다. 설사 상부구조가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부구조 스스로가 생존을 위해 생태 관성의 법칙 속으로 삼투해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 가서 무색해지지 말고 하루속히 먼저 앞장서서 하부구조를 이끌어야 상부구조로서의 체면이 설게 아닌가.

상하가 따로따로 놀게 되는 것은 순전히 언어 때문인데 언어가 몸-소리-말-글-정보로 이행되어 오면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 역리적 구조 속으로 접혀드는 역설과 은유를 시시각각 창출해 내야 할 것이다.

추상개념을 구상개념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시라면 시는 이 시대의 신화이다. 일상 삶의 언어가 곧 은유였던 신화시대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몸과 개념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문학 속에서나마 자연의 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의 대원칙을 흩트리지 말아야 한다. 그 원칙이란 자연본위의 사유구조인데 자연의 인간화는 자칫 인간중심적이기 쉬워 조심해야 한다.

구조주의의 상부구조는 최소한 인간중심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하부구조만은 인간중심주의에 어쩔 수 없이 닿아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도구문화자체가 인간중심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으니까. 역사주의의 상부구조가 너무나도 오랫동안 인간중심주의에 젖어있어서 그 타성과 관성으로부터 누구나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인간중심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생명윤리를 포함한 지나치게 윤리적인 것과 지나치게 비윤리적인 것이다. 윤리에 대한 강박이나 열등이 심화되면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라고 보아도 좋다. 인간의 바른 마음들이 투영되어 있다고 해도 자연본위적인 사유의 틀을 잃지 말아야한다. 우선 자연의 품성이 잘 드러나야 하고 인간의 품성을 자연의 품성으로 인도해야한다. 자연 인간 양쪽 다 각각의 습성이 우연의 윤리 즉 우화를 형성함에 있어서 쥐어짬이 없어야한다.

인터넷세대들은 사물(자연)을 통해 이미지(문화)가 형성되지 않고 이미지를 통해 이미지가 형성된다. 사물에 대한 감각적 이해는 백치에 가깝다. 사물에 대한 과학적 지식만 무성하지 사물이 왜 존재하며 왜 거기 놓여있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느끼려고도 하지 않고 감각을 열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에 대한 느낌 자체가 불가능하다. 느낌 이전에 이미 이미지가 존재를 삼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는 것이다. 사물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니라 노리개일 뿐이다.

사물이나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억지로 자연을 인간화하거나 인간을 자연화 하는 게 아닌지 은유나 의인화 의자화(擬自化)에 재삼 자연본위의 사유구조를 대입해 보자.

개구리신화를 개구리시론으로 자리매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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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똥 - 비디오 테이프
(주)아이타스카 스튜디오 제작 / 인피니스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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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아지 똥’이라는 휴머니즘 동화를 스피시지즘 동화로 패러디해 채령에게 읽어 주었다.



                     스피시지즘 동화 ‘강아지 똥’



분이네 검둥이가 길섶에 똥을 눴어요. 조그만 강아지가 조그만 똥을 눈물처럼 찔끔 흘리고 갔어요. 참새를 닮은 작은 새 한 마리가 강아지 똥을 보더니 그 곁에 내려앉았어요.

거기서 뭐 하니?

응, 죽어간 것들이 보고 싶어서.

너무 슬퍼하지 마. 죽음은 잠시 쉬어가는 것이래.

위로해 줘서 고마워 나 같은 똥을…

너는 왜 늘 그렇게 자신을 하찮게 생각하니?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다들 그러는 걸.

그런 사람들은 무시해 버려.

사람에게 길든 내가 어떻게 사람을 무시하니?

사람에게 길든 건 강아지고 너는 이제 강아지로부터 독립한 강아지 똥이잖니? 그리고 똥이 더럽다는 것은 사람들만이 가진 감정이야. 우리들은 모두 똥에서도 뭘 알뜰히 찾아 먹잖니? 나도 네게서 뭘 먹을 게 없나 하고 이렇게 내려앉았잖아.

바로 저만치 경운기바퀴자국에서 뒹굴고 있던 붉은 흙덩이가 곁눈질로 힐끗 쳐다보고 웃었어요.

뭣 땜에 웃니 넌. 똥 먹는 얘기가 우스우니?

우스운 게 아니라 강아지 똥이 좋은 친구를 만나 좋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기 좋아서 그래. 새 친구 얘기가 맞아. 똥은 더럽고 쓸모없는 게 아니라 생명과 생명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같은 거야. 그리고 다시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해 잠시 쉬는 쉼표 같은 거기도 하구 말이야. 

넌 어디서 왔는데 그렇게 아는 체 하니?

강아지 똥은 낯선 얼굴을 한 붉은 흙덩이가 잘난 체하는 게 얄미워 퉁명스레 물었어요.

응, 본래 나는 저쪽 산허리 깊숙한 곳에서 태고 적부터 잠자던 야생의 황토 흙인데 얼마 전부터 산허리를 잘라내어 길을 내는 토목공사가 벌어져 세상에 나왔어.

그런데 왜 여기 와서 뒹굴고 있니?

강아지 똥이 물었어요.

너희들처럼 좋은 친구를 만나 어울려 놀라고 운명의 신이 땅에서 내보내신 모양이야.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너희 같은 생명친구들과 어울려 놀아본 적이 없거든. 그래서 내게는 풀씨가 없다는 걸 알고 사람들이 나를 모판흙으로 쓰려고 가져가다가 여기 떨어뜨린 거야. 모판흙이 되지 못해 쓸쓸해 하다가 너희들을 만났지. 우리 좋은 친구가 되지 않을래. 나도 어서 생명친구들을 품고 놀고 싶어.

나는 보다시피 생명친구도 못되는 똥이야. 똥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개똥이야. 이 몸으로 너의 그 태고의 순수한 몸과 어울려 놀 수 있겠니?

무슨 소리야. 조금 전에 새 친구 얘기 듣고도 그러니?

마음의 병이 들어 그래. 흙덩이 네가 잘 좀 위로해 줘. 나는 친구들이 불러 가봐야겠어. 나중에 또 보자. 잘 있어.

새 친구가 다른 새 친구들이 부르자 그쪽으로 날아가 버렸어요. 강아지 똥은 붉은 흙덩이와 단둘이 마주 보고 앉은 자신이 더욱 초라하게 보였어요. 

네 살결은 어쩌면 그렇게 붉고 곱니?

이 붉은 살결이 곱다고? 나는 핏빛처럼 붉은 이 살결이 흉해서 숨기고 싶은 걸. 나는 검게 탄 네 얼굴이 더 건강해 보여 좋아.

내 얼굴이 보기가 좋다고? 그게 정말이니? 설마 날 놀리는 건 아니겠지.

놀리다니? 세상의 모든 색을 사랑하면 흰색과 검은 색이 된다잖아. 너야말로 세상의 모든 풀과 나무들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살결을 지니고 있어. 실제로 너의 부드러운 살결이 그들을 사랑스레 어루만져 주잖니?

모르겠어. 남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고 더럽다고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아 슬금슬금 구석진 곳으로 자꾸만 피하게 돼. 왜 그럴까? 왜 자꾸 그런 마음이 드는 거지?

아마도 친구들과 너무 멀어져서 그럴 거야. 앞으로 나와 친하게 지내면 차츰 나아질 거야. 친하게 지내다보면 너와 내가 없어져. 너와 내가 없는데 불쌍한 마음이 끼어들 곳이 어디 있겠니? 세상에 똑같이 태어나는데 잘나고 못나고 가 어디 있어. 친구들과 친하게 어울리다보면 그런 마음들이 없어질 거야.

그때 저쪽에서 경운기가 덜컹거리며 오더니 붉은 흙덩이를 짓뭉개며 지나갔어요. 붉은 흙덩이가 부수어져 강아지 똥에게로 밀려 내려왔어요.

흙덩이야 어디 있니? 다치지는 않았니?

강아지 똥이 안타까이 소리쳤어요.

나 여기 있어.

어디?

네 얼굴에.

강아지 똥은 붉은 흙덩이를 뒤집어쓰고 붉은 흙덩이는 강아지 똥을 뒤집어쓴 꼴이 되었어요. 둘은 한 몸이 되어 서로를 마주 보았어요. 속에서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어요.

정말 둘이 하나가 되었네.

강아지 똥은 자신이 더럽다거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똥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깔깔거리며 웃었어요.

환한 웃음처럼 봄이 왔어요. 어미 까투리 한 마리가 새끼 꿩 여섯 마리를 데리고 지나다가 강아지 똥을 들여다봤어요. 암만 봐도 너구리 똥인지 흙덩인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냥 가버렸어요.

보슬보슬 봄비가 내렸어요. 강아지 똥 앞에 파란 민들레 싹이 돋아났어요.

너는 뭐니?

강아지 똥이 물었어요.

나는 예쁜 꽃을 피우는 민들레야.

얼마만큼 예쁘니? 하늘의 별만큼 고우니?

그래, 방실방실 빛나.

어떻게 그렇게 예쁜 꽃을 피우니?

그건 하느님이 비를 내려주시고 따뜻한 햇볕을 쬐어주시기 때문이야.

그래 애… 그렇구나.…

강아지 똥은 민들레가 부러워 한숨이 나오려했어요. 그때 흙덩이가 강아지 똥의 옆구리를 간질댔어요. 그러자 한숨대신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어요.

너도 웃을 때가 다 있구나. 홍당무처럼 웃으니까 너도 예쁘구나. 그런데 한 가지 꼭 필요한 게 있어.

민들레가 말하면서 강아지 똥을 봤어요.

…네가 거름이 돼 줘야 한단다.

내가 거름이 되다니?

네 몸뚱이를 고스란히 녹여 내 몸 속으로 들어와야 해. 그래야만 별처럼 고운 꽃이 핀단다.

어머나, 그러니 정말 그러니.

강아지 똥은 얼마나 기뻤던지 민들레 싹을 힘껏 껴안으려 했어요. 그때 흙덩이가 강아지 똥의 옆구리를 쿡 찔렀어요. 강아지 똥은 뒤로 벌렁 나자빠졌어요.

왜 그래? 민들레를 도와 줘야지. 별처럼 고운 꽃을 피우게.

도우는 건 좋은 일이지만 너처럼 그렇게 덤비면 좋은 일도 그르치게 돼. 네 발밑에 있는 민들레 씨앗은 너 때문에 지금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있잖니? 저기 저 밭에 나있는 웃자란 작물들을 좀 봐. 그리고 저기 묘소를 찾아오는 뚱뚱한 아이들을 좀 봐. 좋은 일에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 해. 먹는 음식은 적은 듯해야 맛도 있고 몸에 좋은 법이야. 민들레야 그렇지 않니? 넌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지 않니? 그래야 민들레답게 자란다며?

그래, 사람들이 너를 민들레라고 부르는 건 어려움을 견디며 사는 민중을 상징하는 들꽃의 이미지를 지녔기 때문이래.

강아지 똥이 사람들에게서 주워들은 이야기로 붉은 흙덩이를 거들었어요. 

너희들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

그럼 우리 같이 비가 좀 더 내리기를 기다리자. 비가 우리들의 친분을 알맞게 어울려 놀게 해 줄 거야.

비는 사흘 동안 내렸어요. 강아지 똥은 야성의 광물성 미네랄을 품은 붉은 흙덩이와 함께 비에 맞아 자디잘게 부서졌어요. 부서진 채 땅 속으로 스며들어 가 민들레 뿌리로 알맞게들 모여들었어요. 줄기를 타고 올라와 꽃봉오리를 맺었어요. 봄이 한창인 어느 날 민들레 싹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어요. 야무지고 다부진 건강한 모습이었어요. 향긋한 꽃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져나갔어요. 방긋방긋 웃는 꽃송이엔 귀여운 강아지 똥과 붉은 흙덩이의 친밀함이 가득 어려 있었어요.

 

                                                                              소설 '초록드레스'  중에서 



   권정생의 휴머니즘동화 '강아지똥'을 스피시지즘(種間主義)동화로 패러디한 내용과 비교해 보세요.
   아이들에게 자연을 가르치기 위해 쓰여진 권정생의 강아지똥을 감히 휴머니즘동화로 규정하는 것은 하찮은 강아지똥도 쓸모가 있다는 주제 자체가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인 발상에서 시작되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전혀 다른 이야기 전개가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인간을 뛰어넘은 종간의 자연은 지나치게 윤리적이지도 지나치게 비윤리적이지도 않은 관계의 균형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자연의 인간화인 의인화는 자칫 인간의 자연화인 의종화(疑種化)를 그르칠 수 있기에 늘 유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어요. 
   내 아이의 순수한 동심이 자칫 인간중심적인 의인화나 휴머니즘에 무심코 길드는 게 아닌지 늘 유의해서 관찰하지 않으면 만연된 동화의 오염에서 아이를 영영 구출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당신의 아이에게 읽어줄 동화로 당신 스스로 패러디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확인해 주지 않아요. 
   그만큼 아직 종간주의 문학이 성숙해 있지 않으니까요. 
   당신 스스로 종간주의 문학의 주역이 되셔야지요.
    

   참고1. 네이브 지식IN 오픈백과 (문학) '네추럴 르네상스, 동화의 몫' 을 참고 하십시요.
 

                    내추럴 르네상스 -동화의 몫




‘강아지 똥’이라는 동화를 보고 나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까무러칠 정도는 아니고 휴머니즘 문학의 억압에 가히 질려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자연을 몰라도 너무나 모른다 싶은 게 자연의 의인화에 따르는 오류가 이다지 동심을 억압 왜곡시켜도 되는가 하는 깊은 의심이 가슴을 쳤다. 자연은 결코 인간이 아니다. 따라서 자연을 의인화(擬人化) 할 때는 자연에 대한 충분한 숙고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이다. 따라서 인간을 의자화(擬自化) 할 때는 어느 정도의 자의성이 허용된다. 왜냐 하면 인간은 자연의 부분이지만 자연은 결코 인간의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연화는 인간을 각성시키는데 필요하지만 자연의 인간화는 인간을 각성시키기 위해 자연을 왜곡하기 쉽다.

각성이란 잘못한 쪽을 고치는 것이며 잘못한 쪽은 인간이지 자연이 아니다. 따라서 잘못한 인간이 잘못이 없는 자연에 인간의 잘못된 성품을 부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해충과 익충이 인간중심으로 분별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어디까지나 부분적 시각임을 환기하는 전체적 안목이 전제되지 않으면 무효가 된다. 살인에도 정당방어라는 것이 있듯이 해충은 인간의 목숨을 직접해칠 때만 해충이지 평소에는 익충임을 명심해야 한다.

역사적 의인화의 오류는 익충에까지도 나쁜 인간의 품성을 부여해 해충으로 인식하게 하는 문학적 병리현상을 꾸준히 강화해 왔다. 오늘날의 환경문제와 휴머니즘문제는 이로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의 의인화는 휴머니즘문학의 한계를 고스란히 담고 이를 아프게 상징한다. 

강아지 똥은 자연의 의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인간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교육적인 면모를 자연에 덮어씌워 자연본래의 모습을 왜곡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비교육적인 오류투성이의 인간에 대해 자연은 항상 옳기 때문이다. 인간의 윤리는 인간에게만 적용된다. 그러나 자연의 윤리(섭리)는 인간과 자연 모두에게 적용된다. 인간의 윤리가 자연으로서의 인간에게 억압이 되듯이 인간이외의 모든 자연에게도 억압이 된다.

자연의 인간화는 자연의 입장에서 인간을 비판해야지 인간의 입장을 자연에 뒤집어 씌워 인간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마구 주물러 오던 인간본위의 인본주의시대의 산물이다. 인간본위의 인본주의라는 말 자체가 틀린 말이다. 인간은 자연의 작은 영역에서 인간 중심의 삶을 꾸릴 뿐이지 광범위한 영역에까지 그 위상을 떨치는 본(本)이 될 수는 없다.

자연만이 본이 되는 자연본위가 맞는 말이다. 자연본위시대에서는 인간의 면모를 함부로 자연에 뒤집어 씌워서는 안 된다. 자연의 면모를 인간에 뒤집어씌우거나 자연의 면모로서 인간을 비판하는 것만 허용된다. 자연은 교육의 모체이지 교육받을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유한욕망을 지닌 자연으로서의 인간화만 허용되지 무한욕망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인간화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 의인화의 본질이며 동화의 본질이다.

‘강아지 똥’은 인간들의 사랑에 대한 강박과 열등을 자연에 뒤집어씌워 ‘초연한 자연의 사랑’을 왜곡시킨다. 야생 상태의 민들레는 척박한 곳에서라야 민들레답게 자란다. 강아지 똥을 먹고 웃자란 민들레는 가뭄에 약해져 쉬 죽을지도 모른다. 너구리 똥이면 몰라도 야생 똥이 아닌 약 범벅의 사료를 먹고 자란 강아지 똥은 별로 고마워 할 것 같지 않다. 자연은 결코 눈물어린 사랑을 원치 않는다. 날 좀 냅 둬! 하고 소리치는 순수한 동심의 자연에 인간도덕의 오물을 뒤집어씌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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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 개정판
조영래 지음 / 돌베개 / 2001년 9월
평점 :
절판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전태일이 기성복 일을 하며 휴머니즘의 억압에 몸을 던질 때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밎춤복 일을 하며 스피시지즘의 억압에 영혼을 던져 도대체 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닉 속으로 빠져든다.

   전태일평전에 보면 전태일의 사랑이야기가 잠깐 나오는데 그를 모티브로 전태일을 오빠라고 부르며 따르던 여인을 후일 사랑하게 됨으로서 일과 사랑을 통해 사용자와 노동자, 진보와 보수의 관계를 규명해 본다.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서 많은 부분 전태일평전을 인용하였다. 인용 부분을 제외한 전태일이 나오는 주요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왠지 오빠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 다시 건물로 뛰어 올라갔다. 3층 어둠침침한 곳에서 갑자기 오빠가 나타나 나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당겼다. 그리고 나의 입술에 진한 기름 냄새가 나는 키스를 퍼부었다.

오빠는 나를 밀쳐내고 정신없이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한동안 멍해 있던 나는 순간 뜨거운 그 무엇이 가슴을 쳤다.

오빠 안 왜!

나는 기겁을 하고 오빠한테로 달려갔다. 

오빠는 보이지 않고 커다란 불덩어리 하나가 활활 타오르며 사람들 속으로 달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

불덩어리 속에서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불 짐승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나는 웃옷을 벗어 정신없이 불을 끄기 시작했다. 이윽고 불이 꺼지자 시커먼 숯덩이가 드러났다.

오빠, 오빠…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덜덜 떨면서 오빠를 내려다보며 울었다. 기자들이 뛰어와서 수첩을 꺼내들고 오빠에게 무언가를 물었다. (중략)



그제야 오빠는 잠잠해지며 깊은 안식에 들었다. 그러나 오빠는 바로 옆에서 줄곧 지켜보고 있는 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에 있는 줄 몰라서 일까? 그렇다하더라도 어쩌면 그렇게 한번 찾지 조차 않는지? 나는 아연한 먼 나라로 뚝 떨어져 혼절한 느낌이었다. 너무나 슬퍼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저 지켜만 보고 있던 나는 이 뜻밖에 찾아든 충격 때문에 무슨 말을 건네기는커녕 숨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중략)

배가 고프다…


    그리고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오빠는 끝내 나를 찾지 않았다.

나는 임종의 곡소리에도 침대가 옮겨지는 분주한 소리에도 슬픔인지 아픔인지 모를 멍멍한 혼절의 상태에 있었다. 그저 몽유의 걸음으로 시체가 가는 길을 따라갈 뿐이었다. 야단스런 장례식의 오열 속에서도 나는 내내 울지 않았다. 언제나 가족들이 중심자리에 있었고 오빠의 마지막 기억의 자리에서 밀려났듯이 나는 장례식의 소란으로부터 완전히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나는 꽃 한 송이 향 한 번 피워보지 못하고 한쪽에 우두커니 서서 과연 오빠가 나를 지금 이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을까를 곱씹으며 오빠와의 영혼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생전의 오빠 같으면 저 많은 조문객들을 보며 흐뭇해할 테지만 세속의 욕이 끊긴 지금이야 정신을 차리고 나를 쳐다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헛된 갈애를 내내 끊지 못하고 있었다.

    ‘노동운동의 신기원을 이룩한 장렬한 열사의 죽음’

이렇게 세상이 오빠를 영웅으로 만드는 사이 나의 사랑은 오빠로부터 빠르게 소외되어갔다. 나는 오빠의 영웅심과 입맞춤 사이에서 오랫동안 방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입맞춤은 영웅심의 노리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 영웅심이란 게 소외된 자와의 입맞춤을 위한 것이면서도 말이다. 인간은 그처럼 더러운 것이다. 썩어 문드러진 것을 위해 썩어 문드러지는 게 인간이다. 노동운동이라는 게 여성의 곪아터진 웅덩이에 남성의 심벌을 담그는 것이련만 그 새로운 운동이 새 고름을 만들 새 웅덩이를 쫓는 심벌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와 그 자식이 과연 뭐가 다른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왜 그를 오빠라고만 했을까? 지금 이토록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오빠의 이름 석 자를 왜 나는 한 번도 마음 놓고 불러보지 못했을까? 오빠를 그이라고 부르지 못한 것은 한 번도 나를 그녀라고 불러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의 그 누구도 오빠의 이름과 나의 이름에 그 어떤 연관을 지어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 생전에 오빠와 옷깃만 스쳤어도 노조간부가 되고 노동운동의 선구자가 되는 세상으로 변해갈 때 나는 청계피복노조에도 가입하기가 싫어 청계천을 떠났다. 
 

전태일을 운동권 시각에서만 보던 안목을 한층 넓혀 보았다. 그러나 모든 세상사가 그렇듯 좁은 것은 좁은 대로 넓은 것은 넓은 대로 의미가 있다.

어느 한 쪽 의미만 존재하는 세상 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다면 한 번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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