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의 역습은 돈이다. 돌의 역습이 가능했던 것은 돈의 힘이다. 쉽게 말해 돌(칼)이면 무엇이든 되던 것이 돈이면 무엇이든 되는 시대로 바뀌었다. 저자는 그 분기점인 산업사회 이후를 인간이 상품에 의해 쓸모없어진 시대라 했다. 돌과 돈은 불가분의 한통속이긴 하지만 돌이 돈에게 주도권을 양도해 준 뒤 핵탄두로 물러나 팔장을 끼고 지켜보고 있다. 돈이 돌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나를 감시하며 아차하면 보턴을 누를 참이다. 돌이 실리콘으로 숨어들어 글까지 빛으로 화해 태양신을 화상으로 숭배하기에 이른다. 돌칼이 글과 야합해 신 왕 귀족으로 하여금 주체성을 억압하더니 산업혁명의 대폭발로 상품으로 편재해 문화의 탈을 쓴 돈으로 둔갑한다. 돌의 식민시대가 돈의 식민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성을 폭력으로 차지하려는 이 시대의 성폭력범은 돌식민의 후예이자 돌도 글도 휘두르지 못하는 못난 잔재이거나 돈도 여자도 없는 자의 괜한 외출이자 상품화로 쓸모없이 된 생명의 어설픈 부르짖음인 셈이다. 그대에게 이 글을 바친다고 선불하면 돌도 돈도 숨길 수 있을 텐데 글은 후불로 미루고 그대를 사랑한다며 결혼부터 요구해 돌도 돈도 숨길 수 없게 하는 생명의 순진한 부르짖음처럼 말이다. 돌과 돈의 경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잘못이 있다. 애초에 경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돌과 돈의 내면에는 상호 시간의 습벽과 공간의 압박이 잠재해 있다는 것을 잊기 쉽다. 돌의 시대에는 9사람의 식량생산자가 1사람의 비식량생산자를 먹여살렸고 돈의 시대에는 9사람의 비식량생산자가 1사람의 식량생산자를 먹여살린다. 비식량생산자가 식량생산자를 먹여살리다니 말이 안되는 말인만큼 저자의 실랄한 비판을 받는다. 1사람의 식량생산자가 필요로 하는 기계 기술 생필품 재화 등을 9사람이 제공하는 만큼 쓸모없어진 10분의 1의 쓸모는 그대로 9사람의 비식량생산자에게도 적용되어 모든 사람들이 상품과 전문가에 의해 쓸모없어져 버린다. 상품 교육 의료 등 필요가 포화에 이르면 스스로를 마비시키는 임계점을 만나 공생의 환상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만다. 쓸모있는 실업할 권리로 자발적인 행동능력인 자급을 권고하며 침몰하는 비산업문화에 바치는 애도사를 마무리한다. 그러나 저자의 진상회복에 대한 급진적 논의에는 역사는 가역되지 않고 재활용될 뿐이라는 가상의 원죄적 장애지의 타성과 악마적 근력확장의 압력이 간과되어 있다. 쉽게 말해 누가 내 자지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에 대한 물음은 배제되어 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25세에 로마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푸에르토리코로 건너가 신부가 되어 단군의 자손인 아메리카원주민(손성태 지음 "우리민족의 대이동" 참조)을 만나 우리의 고대 토착문화를 통해 돈(상품)없는 돌생활의 진수를 목격한다. 41세에 저자는 거대 관료조직이 된 교회와 세속의 꼭두각시가 된 성직자들을 비판하는 "사라져가는 성직자"를 출간해 바티칸의 노여움을 사 2년 뒤 사직한다. 이듬해 44세에 "의식의 축제"를 출간해 산업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자로 자리매김하며 에리히 프롬의 찬사를 받는다. 45세에 "학교없는 사회" 49세에 "의학의 응보" 52세에 본 저서를 출간함으로서 지적 심볼을 격정적으로 휘두르는 글발을 과시한다. 76세로 타계하기까지 저자를 지켜본 친구는 그가 육체적 고통과 우정에 대한 좌절의 고통과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말년을 보냈다고 술회했다. 본 저서를 출간한 뒤 24년을 더 살았지만 그의 대안적 삶인 '현대의 자급'은 비전보다는 좌절을 안겨준 듯하다. 현대의 자급 구성원들은 이미 가상화되고 핵가족화 되어 공동체의 직접적인 심적 위계의 억압을 견딜만한 생존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듯하다. 현대는 생존이 해결된 사회이며 자급은 놀이와 운동을 이간질하는 치사한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장애지의 근력팽창인 돌들의 자지싸움은 누구도 원치 않는다. 살과 몸을 부대끼며 사는 것은 가족으로 충분하며 공동체로까지 그 억압을 연장시키고 싶지 않다. 현대의 자급과 자유는 세포핵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으며 공생과 절제 역시 돈의 자율에 맡겨진 엥겔계수로 환산될 수밖에 없다. 돈의 내면은 생물학적인 자녀양육조차 부담스러워 하고 부모 모시는 것조차 꺼린다. 병들거나 노후된 몸은 가족이나 친족보다 생면부지의 남에게 맡기는 게 더 편타. 핵네트워크 공동체의 전형적인 내면풍경이다. 핵은 생명체의 마지막 도망처이자 피난처다. 사육경작에서 상품생산까지의 생존을 위한 도망의 경로릂 인류는 핵공동체에 멈춰 서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음을 확인한다. 돌이켜보면 먹이이동은 진격이자 도망이었다. 먹이공동체가 커져 억압이 생기고 억압을 피해 진격의 도망을 돌연히 감행하는 변이를 모색한다. 호모사피엔스의 신분으로 아프리카에서 한반도까지 가장 멀리 도망쳐온 우리민족은 다시 부족국가들의 피비린내나는 억압을 피해 캄차카반도를 지나 아메리카로의 대이동을 감행한다. 거기서 유럽에서 이동해온 저자를 만나 돌의 내면과 돈의 내면을 교환한다.독신의 막다른 은신으로 숨어든 개척자의 성기는 양기를 입으로 옮겨 돌의 내면을 옹호해 보지만 총과 활의 피비린내나는 전선에서 생활터전을 잃은 원주민 성기는 발기부전을 돈의 내면인 마약으로 달래며 멸종으로 내몰린다. 북미원주민의 높은 자살율과 자살율 세계 1위의 한국민은 도망(이동)의 민족답게 돌과 돈의 내면적 충격을 죽음으로까지의 도망으로 드러내며 자존을 진격의 도망으로 지켜낸다. 막다른 골목에서 핵으로 자신을 지키는 북한과 IT로 자신을 지키는 남한이 돌과 돈의 충돌을 피해 아메리카원주민에 의해 폭발된 저자의 사상으로 더욱 강건한 내면의 자존을 생성하리라 믿는다. 돌과 돈의 경계를 허무는 관건은 장애지와 근력팽창의 핸디캡이다. 가상의 언어와 진상이라고 믿는 도구는 불가분의 것이며 인공적 가상의 계보를 이루는 자연의 진상에 대한 핸디캡이다. 최초의 도구인 돌의 내면(말)은 자유와 억압을 동시에 안겨준 "최선의 타락"이자 "악의 신비"다. 하물며 핵이며 IT랴만 너무 거대하면 보이지 않으니 시시각각 자유와 억압을 정의하고 사사건건 장애와 공평을 사랑하며 자연으로의 도망을 흠모해야 한다. 돈의 내면은 니까짓께 도망가 봤지로 비웃는 방종의 블랙홀이자 가상의 빅뱅일지 모르지만 쓸모에 대한 끊임없는 각성으로 사물과 이웃을 돌아봐야 한다. 쓸모의 신천지에서 그가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