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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똥 - 비디오 테이프
(주)아이타스카 스튜디오 제작 / 인피니스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나는 ‘강아지 똥’이라는 휴머니즘 동화를 스피시지즘 동화로 패러디해 채령에게 읽어 주었다.
스피시지즘 동화 ‘강아지 똥’
분이네 검둥이가 길섶에 똥을 눴어요. 조그만 강아지가 조그만 똥을 눈물처럼 찔끔 흘리고 갔어요. 참새를 닮은 작은 새 한 마리가 강아지 똥을 보더니 그 곁에 내려앉았어요.
거기서 뭐 하니?
응, 죽어간 것들이 보고 싶어서.
너무 슬퍼하지 마. 죽음은 잠시 쉬어가는 것이래.
위로해 줘서 고마워 나 같은 똥을…
너는 왜 늘 그렇게 자신을 하찮게 생각하니?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다들 그러는 걸.
그런 사람들은 무시해 버려.
사람에게 길든 내가 어떻게 사람을 무시하니?
사람에게 길든 건 강아지고 너는 이제 강아지로부터 독립한 강아지 똥이잖니? 그리고 똥이 더럽다는 것은 사람들만이 가진 감정이야. 우리들은 모두 똥에서도 뭘 알뜰히 찾아 먹잖니? 나도 네게서 뭘 먹을 게 없나 하고 이렇게 내려앉았잖아.
바로 저만치 경운기바퀴자국에서 뒹굴고 있던 붉은 흙덩이가 곁눈질로 힐끗 쳐다보고 웃었어요.
뭣 땜에 웃니 넌. 똥 먹는 얘기가 우스우니?
우스운 게 아니라 강아지 똥이 좋은 친구를 만나 좋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기 좋아서 그래. 새 친구 얘기가 맞아. 똥은 더럽고 쓸모없는 게 아니라 생명과 생명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같은 거야. 그리고 다시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해 잠시 쉬는 쉼표 같은 거기도 하구 말이야.
넌 어디서 왔는데 그렇게 아는 체 하니?
강아지 똥은 낯선 얼굴을 한 붉은 흙덩이가 잘난 체하는 게 얄미워 퉁명스레 물었어요.
응, 본래 나는 저쪽 산허리 깊숙한 곳에서 태고 적부터 잠자던 야생의 황토 흙인데 얼마 전부터 산허리를 잘라내어 길을 내는 토목공사가 벌어져 세상에 나왔어.
그런데 왜 여기 와서 뒹굴고 있니?
강아지 똥이 물었어요.
너희들처럼 좋은 친구를 만나 어울려 놀라고 운명의 신이 땅에서 내보내신 모양이야.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너희 같은 생명친구들과 어울려 놀아본 적이 없거든. 그래서 내게는 풀씨가 없다는 걸 알고 사람들이 나를 모판흙으로 쓰려고 가져가다가 여기 떨어뜨린 거야. 모판흙이 되지 못해 쓸쓸해 하다가 너희들을 만났지. 우리 좋은 친구가 되지 않을래. 나도 어서 생명친구들을 품고 놀고 싶어.
나는 보다시피 생명친구도 못되는 똥이야. 똥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개똥이야. 이 몸으로 너의 그 태고의 순수한 몸과 어울려 놀 수 있겠니?
무슨 소리야. 조금 전에 새 친구 얘기 듣고도 그러니?
마음의 병이 들어 그래. 흙덩이 네가 잘 좀 위로해 줘. 나는 친구들이 불러 가봐야겠어. 나중에 또 보자. 잘 있어.
새 친구가 다른 새 친구들이 부르자 그쪽으로 날아가 버렸어요. 강아지 똥은 붉은 흙덩이와 단둘이 마주 보고 앉은 자신이 더욱 초라하게 보였어요.
네 살결은 어쩌면 그렇게 붉고 곱니?
이 붉은 살결이 곱다고? 나는 핏빛처럼 붉은 이 살결이 흉해서 숨기고 싶은 걸. 나는 검게 탄 네 얼굴이 더 건강해 보여 좋아.
내 얼굴이 보기가 좋다고? 그게 정말이니? 설마 날 놀리는 건 아니겠지.
놀리다니? 세상의 모든 색을 사랑하면 흰색과 검은 색이 된다잖아. 너야말로 세상의 모든 풀과 나무들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살결을 지니고 있어. 실제로 너의 부드러운 살결이 그들을 사랑스레 어루만져 주잖니?
모르겠어. 남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고 더럽다고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아 슬금슬금 구석진 곳으로 자꾸만 피하게 돼. 왜 그럴까? 왜 자꾸 그런 마음이 드는 거지?
아마도 친구들과 너무 멀어져서 그럴 거야. 앞으로 나와 친하게 지내면 차츰 나아질 거야. 친하게 지내다보면 너와 내가 없어져. 너와 내가 없는데 불쌍한 마음이 끼어들 곳이 어디 있겠니? 세상에 똑같이 태어나는데 잘나고 못나고 가 어디 있어. 친구들과 친하게 어울리다보면 그런 마음들이 없어질 거야.
그때 저쪽에서 경운기가 덜컹거리며 오더니 붉은 흙덩이를 짓뭉개며 지나갔어요. 붉은 흙덩이가 부수어져 강아지 똥에게로 밀려 내려왔어요.
흙덩이야 어디 있니? 다치지는 않았니?
강아지 똥이 안타까이 소리쳤어요.
나 여기 있어.
어디?
네 얼굴에.
강아지 똥은 붉은 흙덩이를 뒤집어쓰고 붉은 흙덩이는 강아지 똥을 뒤집어쓴 꼴이 되었어요. 둘은 한 몸이 되어 서로를 마주 보았어요. 속에서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어요.
정말 둘이 하나가 되었네.
강아지 똥은 자신이 더럽다거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똥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깔깔거리며 웃었어요.
환한 웃음처럼 봄이 왔어요. 어미 까투리 한 마리가 새끼 꿩 여섯 마리를 데리고 지나다가 강아지 똥을 들여다봤어요. 암만 봐도 너구리 똥인지 흙덩인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냥 가버렸어요.
보슬보슬 봄비가 내렸어요. 강아지 똥 앞에 파란 민들레 싹이 돋아났어요.
너는 뭐니?
강아지 똥이 물었어요.
나는 예쁜 꽃을 피우는 민들레야.
얼마만큼 예쁘니? 하늘의 별만큼 고우니?
그래, 방실방실 빛나.
어떻게 그렇게 예쁜 꽃을 피우니?
그건 하느님이 비를 내려주시고 따뜻한 햇볕을 쬐어주시기 때문이야.
그래 애… 그렇구나.…
강아지 똥은 민들레가 부러워 한숨이 나오려했어요. 그때 흙덩이가 강아지 똥의 옆구리를 간질댔어요. 그러자 한숨대신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어요.
너도 웃을 때가 다 있구나. 홍당무처럼 웃으니까 너도 예쁘구나. 그런데 한 가지 꼭 필요한 게 있어.
민들레가 말하면서 강아지 똥을 봤어요.
…네가 거름이 돼 줘야 한단다.
내가 거름이 되다니?
네 몸뚱이를 고스란히 녹여 내 몸 속으로 들어와야 해. 그래야만 별처럼 고운 꽃이 핀단다.
어머나, 그러니 정말 그러니.
강아지 똥은 얼마나 기뻤던지 민들레 싹을 힘껏 껴안으려 했어요. 그때 흙덩이가 강아지 똥의 옆구리를 쿡 찔렀어요. 강아지 똥은 뒤로 벌렁 나자빠졌어요.
왜 그래? 민들레를 도와 줘야지. 별처럼 고운 꽃을 피우게.
도우는 건 좋은 일이지만 너처럼 그렇게 덤비면 좋은 일도 그르치게 돼. 네 발밑에 있는 민들레 씨앗은 너 때문에 지금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있잖니? 저기 저 밭에 나있는 웃자란 작물들을 좀 봐. 그리고 저기 묘소를 찾아오는 뚱뚱한 아이들을 좀 봐. 좋은 일에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 해. 먹는 음식은 적은 듯해야 맛도 있고 몸에 좋은 법이야. 민들레야 그렇지 않니? 넌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지 않니? 그래야 민들레답게 자란다며?
그래, 사람들이 너를 민들레라고 부르는 건 어려움을 견디며 사는 민중을 상징하는 들꽃의 이미지를 지녔기 때문이래.
강아지 똥이 사람들에게서 주워들은 이야기로 붉은 흙덩이를 거들었어요.
너희들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
그럼 우리 같이 비가 좀 더 내리기를 기다리자. 비가 우리들의 친분을 알맞게 어울려 놀게 해 줄 거야.
비는 사흘 동안 내렸어요. 강아지 똥은 야성의 광물성 미네랄을 품은 붉은 흙덩이와 함께 비에 맞아 자디잘게 부서졌어요. 부서진 채 땅 속으로 스며들어 가 민들레 뿌리로 알맞게들 모여들었어요. 줄기를 타고 올라와 꽃봉오리를 맺었어요. 봄이 한창인 어느 날 민들레 싹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웠어요. 야무지고 다부진 건강한 모습이었어요. 향긋한 꽃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져나갔어요. 방긋방긋 웃는 꽃송이엔 귀여운 강아지 똥과 붉은 흙덩이의 친밀함이 가득 어려 있었어요.
소설 '초록드레스' 중에서
권정생의 휴머니즘동화 '강아지똥'을 스피시지즘(種間主義)동화로 패러디한 내용과 비교해 보세요.
아이들에게 자연을 가르치기 위해 쓰여진 권정생의 강아지똥을 감히 휴머니즘동화로 규정하는 것은 하찮은 강아지똥도 쓸모가 있다는 주제 자체가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인 발상에서 시작되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전혀 다른 이야기 전개가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인간을 뛰어넘은 종간의 자연은 지나치게 윤리적이지도 지나치게 비윤리적이지도 않은 관계의 균형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자연의 인간화인 의인화는 자칫 인간의 자연화인 의종화(疑種化)를 그르칠 수 있기에 늘 유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어요.
내 아이의 순수한 동심이 자칫 인간중심적인 의인화나 휴머니즘에 무심코 길드는 게 아닌지 늘 유의해서 관찰하지 않으면 만연된 동화의 오염에서 아이를 영영 구출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당신의 아이에게 읽어줄 동화로 당신 스스로 패러디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확인해 주지 않아요.
그만큼 아직 종간주의 문학이 성숙해 있지 않으니까요.
당신 스스로 종간주의 문학의 주역이 되셔야지요.
참고1. 네이브 지식IN 오픈백과 (문학) '네추럴 르네상스, 동화의 몫' 을 참고 하십시요.
내추럴 르네상스 -동화의 몫
‘강아지 똥’이라는 동화를 보고 나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까무러칠 정도는 아니고 휴머니즘 문학의 억압에 가히 질려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자연을 몰라도 너무나 모른다 싶은 게 자연의 의인화에 따르는 오류가 이다지 동심을 억압 왜곡시켜도 되는가 하는 깊은 의심이 가슴을 쳤다. 자연은 결코 인간이 아니다. 따라서 자연을 의인화(擬人化) 할 때는 자연에 대한 충분한 숙고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이다. 따라서 인간을 의자화(擬自化) 할 때는 어느 정도의 자의성이 허용된다. 왜냐 하면 인간은 자연의 부분이지만 자연은 결코 인간의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연화는 인간을 각성시키는데 필요하지만 자연의 인간화는 인간을 각성시키기 위해 자연을 왜곡하기 쉽다.
각성이란 잘못한 쪽을 고치는 것이며 잘못한 쪽은 인간이지 자연이 아니다. 따라서 잘못한 인간이 잘못이 없는 자연에 인간의 잘못된 성품을 부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해충과 익충이 인간중심으로 분별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어디까지나 부분적 시각임을 환기하는 전체적 안목이 전제되지 않으면 무효가 된다. 살인에도 정당방어라는 것이 있듯이 해충은 인간의 목숨을 직접해칠 때만 해충이지 평소에는 익충임을 명심해야 한다.
역사적 의인화의 오류는 익충에까지도 나쁜 인간의 품성을 부여해 해충으로 인식하게 하는 문학적 병리현상을 꾸준히 강화해 왔다. 오늘날의 환경문제와 휴머니즘문제는 이로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의 의인화는 휴머니즘문학의 한계를 고스란히 담고 이를 아프게 상징한다.
강아지 똥은 자연의 의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인간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교육적인 면모를 자연에 덮어씌워 자연본래의 모습을 왜곡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비교육적인 오류투성이의 인간에 대해 자연은 항상 옳기 때문이다. 인간의 윤리는 인간에게만 적용된다. 그러나 자연의 윤리(섭리)는 인간과 자연 모두에게 적용된다. 인간의 윤리가 자연으로서의 인간에게 억압이 되듯이 인간이외의 모든 자연에게도 억압이 된다.
자연의 인간화는 자연의 입장에서 인간을 비판해야지 인간의 입장을 자연에 뒤집어 씌워 인간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마구 주물러 오던 인간본위의 인본주의시대의 산물이다. 인간본위의 인본주의라는 말 자체가 틀린 말이다. 인간은 자연의 작은 영역에서 인간 중심의 삶을 꾸릴 뿐이지 광범위한 영역에까지 그 위상을 떨치는 본(本)이 될 수는 없다.
자연만이 본이 되는 자연본위가 맞는 말이다. 자연본위시대에서는 인간의 면모를 함부로 자연에 뒤집어 씌워서는 안 된다. 자연의 면모를 인간에 뒤집어씌우거나 자연의 면모로서 인간을 비판하는 것만 허용된다. 자연은 교육의 모체이지 교육받을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유한욕망을 지닌 자연으로서의 인간화만 허용되지 무한욕망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인간화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 의인화의 본질이며 동화의 본질이다.
‘강아지 똥’은 인간들의 사랑에 대한 강박과 열등을 자연에 뒤집어씌워 ‘초연한 자연의 사랑’을 왜곡시킨다. 야생 상태의 민들레는 척박한 곳에서라야 민들레답게 자란다. 강아지 똥을 먹고 웃자란 민들레는 가뭄에 약해져 쉬 죽을지도 모른다. 너구리 똥이면 몰라도 야생 똥이 아닌 약 범벅의 사료를 먹고 자란 강아지 똥은 별로 고마워 할 것 같지 않다. 자연은 결코 눈물어린 사랑을 원치 않는다. 날 좀 냅 둬! 하고 소리치는 순수한 동심의 자연에 인간도덕의 오물을 뒤집어씌우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