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사고 한길그레이트북스 7
레비 스트로스 지음, 안정남 옮김 / 한길사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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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의 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의 대원칙 -신화시론




평등가치는 실재하는 가치라기보다 가치의 편중이라는 불평등가치를 막는 이상향적인 가치다. 자연이라는 개념의 이상은 모든 생명이 평등한 상태를 지향하는 조화 그 자체다. 자연을 존재의 평등한 조화로 인식하는 것은 이상이지 현실이 아니다. 현실은 결코 전체일 수 없고 부분의 구체일 뿐이다. 따라서 전체적 이상인 평등한 조화를 위한 부분적 현실의 불평등한 존재는 나름대로의 논리 즉, 신비적인 행동규범을 생존방편으로 갖게 된다. 존재자체가 한계와 자유의 규범이다.

육체적 한계와 정신의 자유, 정신의 한계와 육체의 자유사이에서 적절한 질서와 규범을 찾아 문화라는 언어가 생성된다. 최초의 인류는 언어학 박사였다. 언어를 창조한 사람들이 미개인일수는 없다. 정작 미개인은 창조된 언어로 창조과정을 더듬어 오르지 조차 못하는 언어학자와 인류학자들이다. 우리는 언어가 없는 인간들의 사유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며 언어 생성과정 또한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언어인과 비언어인의 평등을 위해서 이러한 가치 뒤집기는 필요하다. 최초의 인류를 신화적 과학의 총체인 신비체로 생각하지 않고 문명인에 대해 열등한 미개인으로 생각하는 한 자연과 인간에 대한 논리적 대응은 불가능하다. 추상개념의 발달이나 도움 없이 구상개념만으로 삶의 총체를 꾸려가는 논리가 추상개념의 도움으로 꾸려가는 논리보다 못하지 않듯이 구상개념이라는 언어의 도움 없이 이미지만으로 삶의 총체를 꾸려가는 논리가 언어의 도움으로 꾸려가는 논리 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는 전제하에서만 자연은 인간에 대해 그 어떤 자기표현이 가능하다. 자연으로서의 인간이 최초의 자기표현을 시도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소에 대한 어떤 원칙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살만 발라먹고 뼈를 갈아 소에게 되돌려주다가 광우병이라는 호된 벌을 받고 있다. 이런 인간 자연의 상관논리 하에서의 문학적 의인화는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신교육을 받은 현대 인도인들도 마찬가지다. 소를 신성시하던 시대나 신성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소를 잡는 백정을 천하게 여기는 시대에는 소와 인간의 관계에 금기나 금기에 가까운 논리적 영향이 작동하고 있었다. 신성시와 천시는 생존을 위해 역우를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최소한의 논리적 장치였다. 자연의 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라고 하는 상관논리가 소라는 개체에 작용한 것이다. 비문자인들에게는 이러한 장치가 훨씬 복잡하고 까다로운 논리적 변증을 거친다.

인간의 열 배에 가까운 체중을 지탱하는 튼튼한 골격의 막강한 힘을 지닌 들소를 처참하게 죽여 먹이로 삼기 위해서는 무자비한 심리적 부담을 상쇄하는 논리적 장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온갖 신화와 제의가 생겨났다.

북아메리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가진 수렵부족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옛적에 들소는 맹수였고 뼈만 남은 동물이었다. 사람이 식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람을 잡아먹는 동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들소가 인간의 처녀를 사랑하여 제짝으로 삼기를 원했다. 이 처녀는 한 인간 집단 내에서 유일한 여성이었다. 어떤 남자가 가시 있는 나무에 찔린 뒤 그 나무의 정기로 임신이 되어 낳은 딸이었다. 남자들은 이 처녀를 무척 사랑했지만 한편으로는 들소를 두려워했다. 그들은 결혼에 동의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선물을 모아 들렸다. 선물도 하나하나가 들소 몸의 각 부분들을 대신하는 것들이었다. 활, 화살, 화살통 등 이렇게 해서 들소는 ‘뼈 밖에 없다’에서 ‘살 밖에 없다’로 바뀌고 사람을 잡아먹는 들소에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대홍수가 나서 시뻘건 강물이 범람하면 강의 생명이나 정령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산채로 들소를 강물에 던지거나 죽여서 재단의 재물로 바쳤다.

특별한 생존방편을 합리화하는 이러한 논리적 장치에는 자연이 인간화되고 인간이 자연화 되는 상호연쇄로 침투하는 추상적 감정들이 구상적으로 형상화되어있다. 생각과 행함이 문학적 신화로 얽혀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생각 따로 행함 따로 문학 따로 삶 따로 분리되어 ‘소의 슬픈 눈빛’과 ‘광우병’이 어떠한 연결조차 없이 의인화와 살 처분의 반 논리로 대립해있다. 자연과 문화의 갈등을 대비와 합일로 해소해온 지성들의 사유구조이자 유심적 심리체계의 전형이다.

놀랍게도 그 속에는 모든 갈등이 해소된 무풍지대의 고요가 전율하고 있다. 갈등의 고요가 태풍의 눈으로 발달하고 있었다. 나는 감히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태풍의 눈 속에 공동화된 백치지성으로 단정한다. 피곤하게 그의 사유체제 전체를 장황하게 거론할 생각은 없다. 그냥 간단하게 내 생각만 말하겠다.

위 그의 상부(정신)구조는 대비(변별)로 시작해서 합일(유사)로 끝난다. 그의 상부구조가 대응(분석)으로 시작해서 발전(변증)으로 끝나는 사르트르의 상부구조를 비판하는 것이라면 나의 상부구조는 그의 상부구조를 비판하는 것으로서 외연(기생)으로 시작해서 내포(숙주)로 끝난다. 이 세 사유체제를 간단한 도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역사주의     인간 ․ 문화 ․ 문자인 ․  2    = 2 ……… 발전 

                    종간 ․ 자연 ․ 비문자인 ․ 1

 

구조주의      인간 ․ 문화 ․ 문자인 ․  1   = 1 ……… 합일 

                    종간 ․ 자연 ․ 비문자인 ․ 1 

                                            

본위주의      인간 ․ 문화 ․ 문자인 ․  1    = 1 ·········     내포

                    종간 ․ 자연 ․ 비문자인 ․ 2       2

 

 

사르트르와 레비스트로스의 논쟁에 끼어들 생각은 없지만 그 논쟁이 시대  정신의 필연적 단계를 이루고 있어서 그 단계의 관성이랄까 연속성에 강하게 떠밀려 다음 단계의 사유구조가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논쟁과는 아무 상관없이 역사주의와 구조주의는 통시성과 공시성만큼이나 철저하게 현대인의 사유구조를 형성하고 있고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문명의 한계와 극심한 자연 훼손으로 인해 두 사유구조의 논쟁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새로운 제 3의 사유구조로 이미 우리의 정신은 나아가고 있다. 이른바 자연본위의 사유구조다.

신 자연주의의 대두는 역사는 발전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역사는 진보하는 게 아니라 진행할 뿐이라는 논의로까지 나아왔지만 결코 그에도 만족할 수 없어 역사는 잘못 진행되고 있다는 강한 의문을 다시금 제기한다. 과거와 현재가 차가움과 뜨거움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 이대로 계속 뜨거워져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각성에 걸 맞는 사유구조를 이미 배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가움과 뜨거움의 논리구조가 대비에서 외연(기생)으로 합일에서 내포(숙주)로 본위화 되고 있었다. 부분과 부분의 변별 유사구조에서 전체와 부분의 숙주기생(모태)구조로 변환을 뛰어넘어 환원되고 있었다.

역사진행 자체가 끊임없이 새로움을 주긴 하지만 사실 자연본위의 사유구조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너무나 케케묵은 것이어서 잊혀져왔을 뿐이다. 신화적 사고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새로이 해석될 뿐이다.

들소신화로 다시 돌아가 보자. 레비스트로스는 이를 혼인교환으로 보고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매개 기구로서의 작용을 읽어낸다. 나는 이를 에너지 교환으로 보고 자연과 문화의 단순한 변별적 매개가 아니라 보다 복잡한 가치교환의 심리적 종교적 속죄의식으로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우선 들소에 대응하는 집단을 여성이 없는 집단으로 설정한 것은 들소사냥의 반여성성과 가부장적 힘의 잔혹성, 그 대가로 주어지는 에너지효율로 인한 여성의 역할축소 등이 담긴 의미구조를 드러낸 것이다. 가시 있는 나무의 반인간적 자연의 간섭으로 인간적 반자연의 한 남자가 딸을 잉태한 것은 들소사냥의 에너지효율로 인한 가치의 대전환을 의미한다. 가시에 찔리며 벌레와 열매를 따거나 작은 짐승들을 힘겹게 사냥하던 에너지효율이 낮은 자연과의 대응에서 모든 것이 한꺼번에 주어지는 집단적인 힘의 협심체제의 가치가 대두된다. 그리하여 축제와도 같은 혼인의례의 가치교환이 유일한 여성과 온갖 축적된 문화적 선물들을 바치면서까지 종교적 속죄의식으로 상쇄된다. 인간의 몸무게보다 열배나 무거운 들소를 잔인하게 죽여 먹이로 취하는 심리적 부담을 상쇄하는 엄청난 대가를 40가지나 넘는 대응물들과 유일한 여성으로도 모자라 들소가 사람을 잡아먹는 맹수였다는 터무니없는 심리적 가치치환까지 덧붙인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등가적 교환이라고 해석하는 자연과 문화 간의 에너지교환의 가치체계다. 과연 등가일까? 등가인데도 그토록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걸까? 나는 결코 등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등가라면 인구가 불어날 수가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등가는 곰이 막대기라는 도구를 사용해 개미를 잡아먹듯 도구문화의 에너지효율이 확대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맨손으로는 결코 들소를 잡을 수가 없다. 도구를 사용해 들소를 잡는 한 들소의 수와 인구의 수를 조절하려면 도구사용의 절제와 확대를 인위적으로 통제해야 하는데 역사적으로 도구축소의 의지는 한 번도 발현된 적이 없다. 따라서 야생의 사고 역시 레비스트로스가 콤플렉스에 가깝도록 가치우열의 등가에 매달린 것처럼 그렇게 등가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 구석기 시대의 야생의 사고는 어느 정도 등가 교환에 충실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스코의 들소사냥 이후에는 등가교환이 점차 차등교환으로 이행되어 왔을 터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해주는 등가의 차원에서 그의 주특기인 도식으로 그와 사르트르와 나의 사유구조를 비교해보자. (도식참조) 

  

               들소신화                                             축우신화

 독화살  → 들소 ⇐ 가시나무․풀             사료 → 축우 ← 초지

        ↑   ⇙   ↑   ⇘   ↓                               ↑  ↙  ⇓   ↘  ↓ 

     남자 ⇒  여자  ⇐   남자                      남자 ⇐ 여자 ⇒ 남자 

         ↑   ⇘   ⇑   ⇙   ↓                              ↑  ⇘  ⇓   ⇙  ↓ 

         활   ← 남자  ←    독                        가공 ← 남자 ← 곡물  

             문화에너지 8                                    문화에너지 10 

             자연에너지 8                                    자연에너지  6 

 

                                   개구리신화 

                  나무막대 → 개구리 ← 나무막대 

                             ↑    ⇙   ⇓   ⇘     ↑      

                         아들   ⇒  여자  ⇐   남자      

                             ↑    ⇖   ⇓    ⇗    ↑ 

                 나무(열매) ⇒   딸   ⇐ 나무(열매) 

                                 문화에너지  6 

                                 자연에너지 10

 

레비스트로스의 에너지등가 1은 0으로부터 벗어나 진행 중이므로 들소신화의 합일구조도 언젠가는 사르트르의 축우신화인 발전구조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순수에의 상부구조는 정신과 육체, 이론과 실제의 분리지점으로부터 출발한 미미한 차이 즉, 모순과 대립개념의 양화된 에너지구조가 불확실성으로부터의 확률적인 등차구조로 확대된다. 상부구조가 아무리 불변이라 해도 아니 불변이면 불변일수록 하부구조인 도구문화가 축적 확대됨에 따라 두 구조 사이에는 통제 불능과 소통불능의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대해 백치지성이라는 공허와 무기력을 보여줄 뿐이다.

말하자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사르트르의 역사주의에는 지성으로 유효하나 나의 본위주의에는 백치에 가깝다. 다만 역사주의가 본위주의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단계에 불과하다. 밖에서는 자연과 문화의 갈등이 종말에 이르도록 질풍노도인데 안에서는 차가움과 뜨거움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며 태풍을 부인하는 고요의 눈을 하고 있다면 그런 지성은 그야말로 먹물이거나 샌님에 지나지 않는다. 개구리 한 마리 잡는데도 막대기가 필요한 인간의 자기 정체성은 개구리신화의 본위주의적 상부구조에 이르는 강력한 가역의지로서만 확립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들소와 개구리는 생존상관물로서의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들소는 문화 창출과 문화소비의 엄청난 부담으로 상관하지만 개구리는 그야말로 인간의 생리생태에 걸 맞는 부담 없는 자연에너지로 흡수된다. 들소 떼가 많아지면 인간 무리는 줄어들고 인간무리가 많아지면 들소 떼가 줄어들기 마련인 직접적인 생존경쟁 관계에 있다. 더 나아가 들소 떼가 어느 정도의 한계까지 줄어들면 인간무리 또한 줄어든다. 그 조절장치를 하는 것이 상부구조인데 들소신화에서 여자와 모든 문화축적물까지 바쳐 가치치환을 하는 조절장치는 분명 자연본위구조를 충분히 예감하고 있다. 개구리신화는 그러한 가치치환의 조절장치조차도 필요 없는 자연본위구조의 모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부구조의 도구문화는 그러한 상부구조를 무위로 돌릴 만큼 강력한 축적 욕과 권력욕의 태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르트르처럼 온통 역사 자체를 변증의 태풍으로 몰아치도록 상부구조 자체를 무모한 발전신화로 바꾸어 놓기까지 한다. 진보신화의 사르트르에게 진행신화의 레비스트로스가 백치지성일수 없듯이 진행신화의 레비스트로스에게 진보신화의 사르트르 또한 무모한 광기의 지성일수 만은 없다. 둘 다 동일한 하부구조위에서 춤을 추는 생존태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진보를 하든지 진행을 하든지 우리는 축우신화와 들소(사냥)신화 속에서 인류의 부피와 무게를 공룡의 운명으로 늘여가고 있다.

이러한 하부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선 상부구조가 대응-대비-기생으로, 발전-합일-숙주로, 역사주의-구조주의-본위주의로 이행되어야 함을 인정해야 한다. 역사주의는 진보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야 하며 구조주의는 진행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리하여 퇴화 퇴보 퇴행의 콤플렉스로 과감하게 진입하여 자연인 숙주에 대해 기생 문화로서의 자신을 솔직히 인정해야한다. 설사 상부구조가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부구조 스스로가 생존을 위해 생태 관성의 법칙 속으로 삼투해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 가서 무색해지지 말고 하루속히 먼저 앞장서서 하부구조를 이끌어야 상부구조로서의 체면이 설게 아닌가.

상하가 따로따로 놀게 되는 것은 순전히 언어 때문인데 언어가 몸-소리-말-글-정보로 이행되어 오면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 역리적 구조 속으로 접혀드는 역설과 은유를 시시각각 창출해 내야 할 것이다.

추상개념을 구상개념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시라면 시는 이 시대의 신화이다. 일상 삶의 언어가 곧 은유였던 신화시대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몸과 개념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문학 속에서나마 자연의 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의 대원칙을 흩트리지 말아야 한다. 그 원칙이란 자연본위의 사유구조인데 자연의 인간화는 자칫 인간중심적이기 쉬워 조심해야 한다.

구조주의의 상부구조는 최소한 인간중심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하부구조만은 인간중심주의에 어쩔 수 없이 닿아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도구문화자체가 인간중심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으니까. 역사주의의 상부구조가 너무나도 오랫동안 인간중심주의에 젖어있어서 그 타성과 관성으로부터 누구나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인간중심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생명윤리를 포함한 지나치게 윤리적인 것과 지나치게 비윤리적인 것이다. 윤리에 대한 강박이나 열등이 심화되면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라고 보아도 좋다. 인간의 바른 마음들이 투영되어 있다고 해도 자연본위적인 사유의 틀을 잃지 말아야한다. 우선 자연의 품성이 잘 드러나야 하고 인간의 품성을 자연의 품성으로 인도해야한다. 자연 인간 양쪽 다 각각의 습성이 우연의 윤리 즉 우화를 형성함에 있어서 쥐어짬이 없어야한다.

인터넷세대들은 사물(자연)을 통해 이미지(문화)가 형성되지 않고 이미지를 통해 이미지가 형성된다. 사물에 대한 감각적 이해는 백치에 가깝다. 사물에 대한 과학적 지식만 무성하지 사물이 왜 존재하며 왜 거기 놓여있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느끼려고도 하지 않고 감각을 열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에 대한 느낌 자체가 불가능하다. 느낌 이전에 이미 이미지가 존재를 삼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는 것이다. 사물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니라 노리개일 뿐이다.

사물이나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억지로 자연을 인간화하거나 인간을 자연화 하는 게 아닌지 은유나 의인화 의자화(擬自化)에 재삼 자연본위의 사유구조를 대입해 보자.

개구리신화를 개구리시론으로 자리매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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