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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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

요즘은 시대가 옛날처럼 남녀 차별받던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들 하지만. 직장에서, 사회인식이, 그리고 가정에서도 뿌리깊게 박힌 인식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점에서 공감간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들었을때 무심코 여자 입장만을 생각한것도 어떻게 보면 내 머리에도 그런 사회적 인식이 깊숙히 자리잡은걸지도. 

알게모르게 주변이든 나 자신에게든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말하는것처럼 내 아이들에게만은 그런 인식에서 자유롭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은 항상 하지만. 나 자신도 고정관념속에, 그런 인식에 무심코 젖어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제목에서 뭔가 불편한 기운을 느꼈던지,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한다고 굳게믿는 사람이든지 봐볼만한 책.

이 책이 만들어진 저자의 TED 강연도 볼만하다.




p.16

우리가 어떤 일을 거듭 반복하면, 결국 그 일이 정상이 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거듭 목격하면, 결국 그 일이 정상이 됩니다. 

만일 남자들만 계속해서 회사의 사장이 되는 것을 목격하면, 차츰 우리는 남자만 사장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기게 됩니다.


p.23

그들에게 나도 남자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나도 똑같은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그저 사소한 일이지만, 때로는 사소한 일이 가장 아픈 법입니다.


p.24

오늘날 젠더가 기능하는 방식은 대단히 불공평합니다. 나는 화가 납니다. 우리는 모두 화내야 합니다. 분노는 예로부터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분노에 더해 내게는 희망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더 나은 자신으로 변하는 능력이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p.28

지금보다 좀더 공정한 세상을, 스스로에게 좀더 진실함으로써 좀더 행복해진 남자들과 좀더 행복해진 여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딸들을 지금과는 다르게 키우는 것입니다. 우리 아들들도 지금과는 다르게 키워야 합니다.


p.37

오늘날 젠더의 문제는 우리가 각자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도록 돕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이어야만 하는지를 규정한다는 점입니다.


p.42

나는 내 여성성을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여성스러움을 간직한 나 자신으로서 존중받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럴 만하니까요.


p.49

문화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문화를 만듭니다. 만일 여자도 온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정말 우리 문화에 없던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 문화가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p.52

나는 페미니스트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맞아, 오늘날의 젠더에는 문제가 있어, 우리는 그 문제를 바로잡아야 해, 우리는 더 잘 해야 해, 하고 말하는 사람이라고요. 여자든 남자든, 우리는 모두 지금보다 더 잘해야 합니다.


p.78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어서 확실한 페미니스트이고, 그 세계관은 어떻게든 내 글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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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고 되새기는 고전 국가 클래식 브라운 시리즈 3
김혜경 지음, 플라톤 원저 / 생각정거장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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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1

우리는 과연 기게스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기게스와 다른 삶을 사는 것이, 기게스가 걸었던 길과 정반대로 가는 것이 어리석은 선택인가? 다른 어떤 가능성이 우리에게 열려 있는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아니,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당연히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부정의와 기게스의 행동에 '왜?'라는 물음을 던진다.

우리가 기게스와 같이 행동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뭘까?

인간의 본성은? 우리가 정의를 옳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뭘까? 정의를 따라야만 하는 이유는?


p.34

그러니 정의가 부정의보다 더 낫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로만 보이지 마세요. 그것들 각각이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 그 자체로 무엇을 하기에 신들과 사람들이 알든 알지 못하든, 하나는 좋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쁜 것인지도 밝혀 보여 주십시오.


p.47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의롭다 혹은 부정의하다는 등의 평판이고 거기에 따라오는 보상과 처벌이지, 정의와 부정의 그 자체가 아니다. 현 인류의 적나라한 실상을 고발하는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호소는 이런 것이었다.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게 두려워 정의를 지킨다는 것은 조금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기게스처럼 투명인간이 될수있다면 우리는 정의를 지킬 이유가 없는걸까.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해 정의가 필요한 이유가 뭘까.

이 문제에 대답할 수 없다면, 플라톤이 우리에게 던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도 답할 수가 없다.


p.55

수호자는 시민들을 지켜 낼 만큼 강해야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못하다. 수호자들은 그 강함을 무기삼아 자신이 지켜야 할 시민들에게 사납게 구는 늑대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이것이 수호자를 잘 교육해야 하는 이유의 하나다."


4장 골든맨과 아이언맨.

수호자의 역할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국가에서 수호자를 잘 교육해야 함을 피력하면서 '고상한 거짓말'을 통해 그들을 교육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은 전부 형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수호자는 국가를 수호하는 역할에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일반 시민들이 가진 재산, 집 등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아내도 남편도 없고 아이들도 공유한다. 수호자가 그것들을 가지면 여기서 나오는 양치기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여기서 나오는 수호자의 처자 공유는 최상의 남녀에게 최상의 자식이 나온다는 논리인데 비윤리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다.


애초에 수호자가 필요한건 더 크고 부유한 국가를 만들기 위한 욕심인 듯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것이 필요없는 글라우콘이 말했던 돼지들의 나라, 소크라테스가 말한 건강한 나라는 어찌보면 인간의 본성과 안 맞는 이상일지도 모른다. 

양치기가 늑대가 되는 것을 막기위해서는 수호자들이 그렇게 엄격하게 통제되는 것 이외의 방법은 없는걸까?


나라의 존재 이유가 모든 구성원이 행복하기 위해서라면 수호자들은 저 공간에서 과연 행복할지, 그리고 또 사람이 행복하게 되는 조건은 무엇인지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정의로운 나라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본성에 맞는 일을 하고 다른 구성원들을 형제라 여기며 산다. 또한 나쁘게 세워진 국가에는 부정의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추구하는 국가에서는 전체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까.


이에 <국가>에서는 그렇기때문에 수호자를 잘 교육해야 하며, 교육을 통해 "정의"로운 것들, "좋은" 것들을 본 수호자는 올바르게 시민들을 위해 희생하고 정치에 힘써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즉, 현실의 정치처럼 이것을 권력이라 여기고 물질적으로 뭔가를 얻으려 하는게 아니라 이상적인 수호자는 교육을 통해 다스리는 일보다 더 나은 것을 알고있고, 이를 시민들과 함께 향유하기 위해 다스리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여긴다.


p.93

처자 공유, 가족 제도의 폐지가 공동체 구성원들로 하여금 서로를 나의 아이, 나의 부모라고 부르며 가깝게 대하기는 커녕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게 만들 것이고, 사유재산을 없앤다면 그것은 수호자들을 정당하게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비판하는 핵심 논리다. (...) 플라톤은 애초에 하나일 수 없는 공동체를 하나로 만들려고 무리한 주장을 폈다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p.95

이 모든 문제들의 원인은 한 가지라오. 노령이 아니라 사람의 성격입니다, 소크라테스. 사람이 단정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노년도 감당할 만한 짐이니까요.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노년도, 젊음도 견뎌 내기 힘들지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정의로운 삶이나 부정의한 삶은 우리에게 어떤 이익과 불이익을 주는가.

나라의 지혜로움은 수호자의 지혜, 용기, 정의로움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모든 수호자의 본성은 용기있고 지혜로운가? 그러한 본성을 지닌 수호자를 뽑아서 잘 교육시킨다하면, 변질될 가능성은 없을까? 그 중 한명이라도 잘 양육되지못한다면 다른 수호자들도 그리고 다른 구성원들에게도 영향을 주지않을까. 수호자들이 정의롭고 지혜롭다해도 그것이 모든 구성원들의 정의와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변질된 수호자에 대해서도 말한다. 욕망에 사로잡히거나 본인에게 정해진 일 이외의 것을 하려고 하거나 할 때 변질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조차도 다스려야할 사람에게 다스릴 의무가 없으며 다스려져야할 사람이 원하면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은 편하고 좋아보일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부정의하게 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나라의 모든 구성원들이 자신의 본성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정의라고 했다. 그리고 그에 안맞게 본인의 역할이 아닌 것을 하거나 갑자기 바꾸거나 하는 것은 부정의, 악행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골든맨 아이언맨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떠나 사람이 수호자의 역할을, 농부의 역할을 하도록 태어났는지는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그걸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을까.

보면 볼수록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이라는 느낌.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에 동감하게 된다.


p.139

아이들 안에 나라와 같은 정치체제가 수립될 때까지, 또한 우리에게 있는 최상의 부분으로 그들 최상의 부분을 돌봐서 그들 안에 우리 것과 닮은 수호자와 통치자를 안착시킬 때까지, 우리는 아이들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네.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아이들을 자유롭게 해 줄 것이네.


<국가>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은 현실성이 좀 떨어진다는 인상을 준다.

소크라테스는 이 국가와 구성원, 수호자가 그 생각대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아이때부터 부모가 주는 습성을 버리도록 교육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이상적인 모습의 국가는 만들어질 수 없다.


p.154

그것은 본으로서 하늘에 있네. 누구든 그것을 보고자 하는 자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이 본 그것을 세우고 싶어 하는 자를 위해서 바쳐진 것이지. 그것이 어딘가에 존재하는지 또는 존재하게 될 것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네.


현실 가능성이 없다고 해서 <국가>에서 이상적인 국가에 대한 논의 자체가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이상 국가를 하늘 위에 올려두었지만 이에 대해 사람들이 꿈꾸고 바라게 된다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현실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의로운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함께 고민해보고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탐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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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을 읽는다
박희병 지음 / 돌베개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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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승암 기문 

까마귀는 뭇 새가 검다고 믿고, 

백로는 안 흰새를 의아해 하네. 
흑 백 모두 자기가 옳다고 하니, 
하늘도 판정하길 싫어한다지. 
사람들 모두 두 눈 있지만, 
한 쪽 눈 없어도 또한 본다네. 
하필 두 눈 있어야 밝게 보일까? 
외눈박이만 사는 나라도 있는데. 
두 눈도 오히려 적다고 여겨, 
이마에 눈 하나를 보태기도 하네. 
또한 저 관음보살은, 
변신하여 눈이 일천개라지. 
천 개의 눈을 어디에 쓰리? 
장님도 검은 것은 볼 수 있다마다. 
김군은 몹쓸 병 걸려 몸이 불편해, 
부처에 의지해 연명한다지. 
돈을 쌓아두고 쓰지 않으면, 
가난한 거지와 무어 다를까? 
중생들 제각각 살면은 되지, 
억지로 남을 배울 건 없네. 
대심이 뭇사람과 다르다 보니, 
이 때문에 의아히들 여기는게지.

 

 

 

 

세상엔 맞춰진 기준과 편견이 있는법. 휘둘리지말자.



큰누님 박씨 묘지명 

울면서 그 옛날 누님이 빗을 떨어뜨리던 걸 생각하니,

유독 어릴 적 일이 생생히 떠오르는데

그때에는 또한 기쁨과 즐거움이 많았으며 세월도 느릿느릿 흘렀었다.

그 뒤 나이 들어 우환과 가난을 늘 근심하다 꿈결처럼 훌쩍 시간이 지나갔거늘 형제와 함께 지낸 날은 어찌 그리도 짧은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웃음이 줄어드는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시절에는 뭐든 이뤄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게 기쁘고 즐겁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인생에 회한을 느끼고 현실을 알고 근심이 늘어나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뭐든지 없어지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해주신 말들

항상 주옥같은 말들로 내 머릿속을 먹먹하게 만드신다.

 

갑자기 떠올랐다.

내 어린 시절 내가 꿈꿔왔던 나는 어디있을까?



 말똥구슬

유금의 시집인 '말똥구슬'이 '말똥구슬'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배경이 된 연암 박지원의 '말똥구슬' 서문.

현대 문학과 달리 고전문학은 이러한 서문 자체도 하나의 장르, 문학작품이 될 수 있다.

이 서문에는 연암 박지원의 사상인 '中'이 계속 강조되는데, 흔히 아는 황희 정승의 일화가 바로 이것이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 즉, 양시론이다.

 

이 '중'(中)에 대해서 황희 정승의 일화와 임백호의 일화 두개가 나온다.

임백호의 일화는 

임백호가 목화와 갖신을 짝짝이로 신은 것에 대해 마부가 지적하자 백호가 

"길 오른쪽에서 보는 사람은 내가 목화를 신었다 할 것이요, 길 왼쪽에서 보는 사람은 내가 갖신을 신었다고 할 테니, 내가 상관할 게 무어냐!" 라며 꾸짖는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서 목화를 신었는지 갖신(가죽신)을 신었는지가 달리 보인다. 즉, '진리', 여기서 말하는 진정지견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통찰은 옮음과 그름, 그 사이에 있다.

어떤 일에 대해서 사람이 무엇을 쉽게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갈등은 양극화되어있어서 어느 한쪽 편에만 있으면 당연히 갈등만 생긴다.

이에 연암 박지원은 '양극단에 치우치지 마라'고 하면서 '中'을 지양하라. 즉, 어느 한 쪽에도 다리를 걸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것을 '장자'에 나오는 말똥구리와 용 얘기에 연결시켜서 사람도 누군가가 그 사람을 더 우월하고 더 열등하다고 쉽게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말똥구리는 제가 굴리는 말똥을 사랑하므로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고,

용 또한 자기에게 여의주가 있다 하여 말똥구리를 비웃지 않는 법일세. 


더 우월하고 더 열등하다고 가치의 기준을 만들고 순위를 매기는건 인간과 인간, 국가와 국가에만 존재하고 자연은 그렇지 않다.

말똥구리에겐 자신의 말똥의 가치가 용의 여의주보다 소중하고, 용 또한 자신의 여의주의 가치가 소중하니까 다른 사람의 것이 더 열등하다거나 비웃지 않는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알게모르게 슬슬 열등감도 생기고, 자존감도 점점 낮아져서 그런지 너무 좋았던 대목

 

유금은 이 말똥구리의 이야기를 듣고 시집의 이름을 '말똥구슬'이라고 짓는다. 자신의 시집은 말똥구슬이지만 그 가치를 소중히 여겨 용의 여의주를 보며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자존감을 해학적, 역설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만약 그대의 시집을 보고 한쪽에서 여의주라고 여긴다면 이는 그대의 갖신만 본 것이요, 다른 한쪽에서 말똥구슬이라고 여긴다면 이는 그대의 목화만 본 것일 테지. 그러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서 정령위의 깃털이 달라지는 건 아니며, 자기 책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걸 제 눈으로 보지 못한다고 해서 자운의 '태현경'이 달라지는 건 아닐 테지. 


박지원은 유금의 시집의 훌륭함을 세상이 몰라준다고 해도 그 가치를 속단할 수 없고, 시집이 널리 알려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에 덧붙여서 정령위의 깃털은 '비단옷을 입고 컴컴한 밤길을 간 격' (대단한 재능을 갖고 있음에도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 것) 이라 하였고, 자운의 '태현경'은 '장님이 비단옷을 입은 격' (살아 생전에 비단이 되지 못한 것)이지만 그 사람의 재능, 훌륭한 작품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의 재능을, 훌륭함을 세상이 몰라준다고 해서 그 가치를 속단할 수 없고, 그 가치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취업도 다가오고 생각도 많아지는 요즘같은 시기에 꼭 마음 속에 새겨둬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왜 우리는 항상 남들과 비교하고 자기 자신의 소중한 가치에 기준을 만들어 놓고 재고 따지면서 힘들게 사는걸까.

정말 연암의 사상인 '中' 처럼 세상 모든 일은 또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자신만의 소중한 재능이 있고 가치가 있고 그것을 누구도 좋다 나쁘다 할 수 없는 건데.

경쟁하고 서로 재기 바쁜 시대에 정말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말똥구리의 말똥처럼 자기 자존감을 키우고 자신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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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명강 동양고전 - 대한민국 대표 인문학자들이 들려주는 인문학 명강 시리즈 1
강신주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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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에서의 배움이란 

논어는 '학'으로 시작해 '명'으로 끝난다

 

'끊임없이 배움'과 '한계'를 알고 속도를 낮출줄 아는 균형잡힌 인생의 필요성.

결국 논어가 말하는건 '나'를 아는 지혜.

배우고 또 배우라는 논어의 말에는 배우다 미쳐라가 아닌 한계를 알고 멈출줄도 알으라는 지혜 또한 담겨있다.

 

곤이불학 민사위하의

 

'곤', 즉 배움을 거부하는 심리, 물리, 사회, 정치적 조건 한마디로 갖가지 핑계들을 삼아 현재의 조건을 넘어서지 못하면 발전이 없다는 것.

배우는데에 있어서 현실적인 조건에 굴복해선 안된다는 것. 위에서 말한 한계는 자신이 가진 한계이지 현실적 한계는 아니다. 그래서 그저 자기자신에 대해 잘 알아야한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가 배워야하는 것은 뭘까? 수학 과학은 아닐 것.

다름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 마음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사람의 마음에는 하늘의 명령이 본성으로 부여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의 주인이 되는 삶이 모든 사람의 이상적 삶이다.

 

흔히 고전에서 멀게만 느껴지는 성인, 도를 깨닫는것.

고전에서 말하는 '도'는 멀고 깊은게 아니라

우리 사람 사는 인생이 인생다운것, 사람다운것이다.

 

공자가 말한 '도'를 아는 것은 인생에서 나에게 가치있는, 정말로 의미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결국 그걸 위해 나에 대해 공부하고 내 마음을 바라보고 배워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움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지 성인들만의 것이 아니다.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인생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못 읽는다해서 불행해지는 일은 없으나,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보지 못하는 자는 불행할 수 밖에 없다.

영혼의 당뇨병 시대, 하도 설탕을 많이 투여해서, 위로를 너무 해줘서 당뇨병에 걸리겠다.

 

우리들의 마음은 굽어져있다.

우리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 자기망각, 자기상실의 시대.

부모에 의해 훈육되고 사회가 길들이기 전의 나는 누구인가?



고전을 통해 배우는 삶 

지식은 바깥의 것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지만, 지혜는 안의 것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동양고전에서 강조하는건 결국 단 하나, 마음이다.

사소한 것들을 들여다 보는 힘, 즉 통찰하는 힘이 바로 동양 고전에 있다.


사소한 것을 통찰할수 있다는 건 쉽게 말해 지나가는길에 꽃 한 송이를 봐도 그 아름다움에 행복해질줄 아는 것. 내 마음이 예쁘면 뭐든 다 아름답고 예뻐보이지만, 정작 내 마음이 삭막하고 여유가 없을땐 길거리에 핀 꽃은 하물며 주변에 일어나는 사소한 것들에도 마음이 가질 않는다. 노래 가사처럼 결국 모든건 마음의 문제.


 

무불경, 세상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것이 없다

 

고전은 우리에게 이해할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화를 위해서는 뉴욕이아니라 강진 해남의 흙 색깔을 보라는 저자의 말처럼 삶을 의미있게 살기위해선 삶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멀리 볼게아니라 당장 내 주변에 핀 꽃 한송이, 내가 밟고있는 흙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는것이다.

  

 

자잘한 걱정들이 나날이 쌓여가고, 그러다 큰 걱정이나 재난이 엄습하면 어찌할줄 모르고 허우적대는게 우리 인생의 모습.. 삶을 배우지 않으면 마음은 잡초로 뒤덮이고, 세상은 캄캄해진다.

그래서 책을 읽고 지식을 찾는다.

지식이 길을 밝혀주니 오직 그때라야 정신의 뿌리가 튼튼해지고 활동이 균형을 얻는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견디게 해주는게 인문학이고,

그걸 일찌감치 배운 사람들에게서 배우는게 고전학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고전을 배워야하는 이유.



격몽요결 

너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있다

자기 자신을 찾으려면 외부 신이나 다른 권위를 빌릴 필요가 없다. 이미 내 마음속에 모든 문제와 답이 있다는 것. 답은 나자신에게서 찾으라는 것이다.


신을 의존하지말고 나 자신을 믿어라.

결국 신에게 기도하는것도 내 마음속에 간절하게 비는것과 같은 것.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인 격몽요결의 한 구절이다.


격몽요결의 중요한 네 가지.

입지, 혁구습, 인, 지신


입지, 내 인생을 위한 결단과 용기.

어느 길 위에 섰을때 이 길을 과연 내가 갈 것인가?

정말 이 길에 내 인생을 걸 것인가?

이러한 선택의 갈림길 위에서 만약 가기로 결정했다면,

바깥 세상이나 주변의 말, 시선등에 신경쓰지않고 결단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어느 길을 내가 내 인생을 위해 선택한거라면, 주변 사람들의 말이나 시선은 신경쓰지 않아야하는게 맞지만 어디 요즘세상이나 그 시절 사람들이나 절대 쉬운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의 인생이 아닌 내 인생을 위해 꼭 필요한 결단력과 용기, 입지이다.



혁구습, 익숙한 일상의 혁명.

남과 다르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말아라.

부귀를 너무 부러워하거나 가난을 혐오하지 말고, 세속잡사에 연연하지 말라.


여기서 나온 라캉의 유명한 한구절,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다."


마음을 수련하는 것은 외부의 자극을 통제하는데서 출발한다.


인, 인생은 참고 견뎌야 할 세상.

세상에는 일어날 일만 일어난다.


주인 없는 빈 배가 풀려서 내 배를 들이받았다 생각하는 것.

조삼모사, 어차피 일어날 일만 일어나고 참으나 화내나 어짜피 결국 다 같으니 화낼게 없다.


너무 많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주변 환경이나 외부 자극에 너무 스트레스받거나 자극받지 않아야

남의 인생이 아닌 내 인생을 더욱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신, 몸이 긴장과 균형을 놓치면 마음도 흐트러진다.

이당시때 이 책에서 크게 와닿지는 않는 부분이었는데

요즘같이 긴장이 싹 풀어지고, 이런저런일에 일희일비하고 있는 와중에 마음이 싸해질정도로 와닿는 말이다.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가 아니라, 몸이 균형을 잃으면 마음도 균형을 잃고 흐트러진다.

이렇게 또 세상속에 있다보면 수풀로 가득차는 마음이

가끔 고전의 구절구절들을 읽으면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가 다시 돌아왔다가를 반복한다.

이래서 꾸준히 내 마음을 배우고, 익히고, 언제나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하는구나.



본인 스스로 귀함을 받는 인생 

수오지심, 예와 의가 아닌 것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본심


발로 밟아서 주는 밥은 굶어죽어도 안먹으면서 

부귀영화앞에서는 남에게 존경받고, 남을 도우기 위한다는 이유로 양심이나 예를 따지지 않고 받는 것.

이러한 모습을 수오지심, 본심을 잃었다고 한다.


남에게 벼슬을 받는것보다 중요한건 인의, 도덕을 행해서 본인 스스로, 자연적으로 귀함을 받는 것이어야한다고 맹자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남이 귀하게 해준 것은 진정한 귀함이 아니다.

남이 귀하게 해준 것은 남이 천하게 할 수 있다.


남이 귀하게 해주는것 즉, '인작'에 눈이 멀면 진정한 자신을 잃는다.


누군가 빼앗을 수 있는 것에 삶의 의미를 부여하면 불행해진다. 

내 가치는 내가 매기는 것이고, 날 귀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것도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

다른 사람에게 내 가치를 좌지우지 당해서는 안된다.


어느 누군가에게 칭찬받기 위해서가 아닌, 내가 내 자신을 칭찬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닌,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을 존경하고 귀히 여기자.



장자와 대붕 

'장자'의 서막을 여는 대붕 이야기, 그리고 같은 맥락의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의 시 '알바트로스'의 한 구절


폭풍속에서 넘나들며 활잡이를 비웃는 이구름의 왕자를 닮은게 바로 시인.

땅 위로 쫓겨나 놀림당하는 마당에서는 거인같은 날개때문에 걷지도 못하나니.


커다란 날개 때문에 땅에 내려오면 걷지도 못하는 한 새처럼,

우리도 자유와 우리에게 달려있는 커다란 날개의 위대함을 알면서도 세상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못쓴다.


하지만 날개를 버리면, 자유, 꿈을 버리면 세상살기는 편해도 다시는 하늘로 못 올라간다.

아무리 세상속에 살아도 날개 잃지 말자.

꿈을 잃은, 하늘을 바라볼수 없는 인생만큼 슬픈 것도 없는데,

막상 세상의 울타리 안에 갇혀 날개 한번 못펴보는게 우리 인생.


우리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을때, 

날개를 피고 하늘에서 땅을 볼 줄 알때,

우리는 진정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우리는 커다란 날개를 가졌다.

억압에서 벗어나 하늘 높이 올라가 자유를 누려라.


자유를 누리는건 이처럼 큰 바람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것이다.


세상 관습, 시선, 돈 .. 등등의 무게를 견디고

나 자신의 인생을 가치있게 사는 것.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인데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사는건 절대 쉽지 않다.


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에 묶여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등.

그리고 쇠사슬에 묶여있지 않은 자유인을 비웃기까지 한다.
하지만 노예들을 묶고 있는 것은 사실 한 줄의 쇠사슬에 불과하다.
그리고 노예는 어디까지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노예는, 자유인이 힘에 의해서 정복하여 어쩔 수 없이 노예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일부 특혜를 받거나 한 자를 제외하면 
노예가 되더라도 결코 그 정신의 자유까지도 양도하지는 않았다.
그 혈통을 자랑하고 선조들이 구축한 문명의 위대함을 잊지 않은 채, 빈틈만 생기면 도망쳤다.
혹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노동으로 단련된 강인한 육체로 살찐 주인을 희생의 제물로 삼았다.

그러나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 노예의 옷을 입고 목에 굴욕의 끈을 휘감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랍게도,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가 노예라는 자각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노예인 것을 스스로의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기까지 한다.


- 리로이 존스 1968년, NY할렘에서


너 나 할거없이 노예로 사는 현대인들에게 꿈은 어찌보면 사치일지 모른다.

그렇기 떄문에 격몽요결에 나온 말처럼 내가 택한 길을 갈때에는 세속잡사에 연연하지 않고 결단할 용기가 필요한 것.


사람들 시선이나 세상이 요구하는 것에 휘말리는것이 당분간은 힘들지 몰라도

우리의 단한번 뿐인 인생을 가치있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큰 용기가 필요할지 모른다. 

거인같은 날개의 무게를 견디고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힘이 필요한 법이니까.


모든 사람은 자기 꽃을 피워야 한다.


세상이 장미를 요구해도 내가 개나리면 난 개나리로 피어나야 한다. 

장미 흉내내는 인생에 만족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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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한 흥미로운 책.

남자주인공이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 하나하나에서 끝을 예감하고 끝을 맞으면서 인생에서 사랑이 갑작스레 끝났을때 남자가 느끼는 허탈감, 절망감들을 너무나도 자세히 썼다. 어찌보면 사랑은 분석적으로 쓸 수 없는 감정인데 철학적 개념과 함께 사랑에 빠지며 느끼는 감정들을 하나하나 조금은 유머스럽게 보일정도로 분석적으로 쓰여져있다. 너무 재밌기도 하고 이 때 감정이 이렇게까지(?) 쓰여질 수도 있구나 싶어서 흥미롭기도 해서 남겨둔 구절이 굉장히 많았던 책이다.


사랑에 빠지면서, 혹은 하면서, 아니면 끝나가면서 외사랑이 되어버린 순간에 남주 자신이 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 그리고 클로이의 행동 하나하나를 이렇게 무언가의 이론으로 연결시켜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사랑만큼 복잡한 감정이 없는데 그걸 이렇게 자세하게 그것도 이성적으로 쓸 수 있을까. 클로이에게 사랑에 빠지는 부분에선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그 감정들에 대한 표현이 너무 소름돋아서 조금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표현력이 정말 엄청나다는 생각. 클로이와 다투고 사랑하는 과정에선 나도 같이 그 감정에 공감하기도 하면서 수없이 많은 구절을 메모해두었다. 그 구절만 다시 읽어도 여전히 흥미롭고 재미있다. 어찌보면 굉장히 현실적이면서도 감정에 대해선 굉장히 이성적인(?). 아무튼 읽어보면 안다. 오랫만에 엄청 몰입해서 순식간에 읽은 책. 너무 재밌다.


p.33

욕망 때문에 나는 실마리들을 악착같이 쫓는 사냥꾼이 되었다. 모든 것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낭만적 편집증 환자가 되었다. 가장 매력적인 사람은 곧바로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락하는 사람이나 절대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희망과 절망의 양을 적절하게 안배하여 상대의 마음에 안겨줄 줄 아는 사람이다.


사랑에 빠지면서 모든 클로이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두고 '낭만적 편집증 환자'라고 표현하는 부분. 요즘 말로는 밀당 잘하는 클로이에게 매력을 느끼는 부분. 이쯤에서 주인공이 클로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부여하는 모습이 공감(?)도 되고 너무 현실적이어서 웃겼던.


p.65 ~ p.66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안전하게 고통스럽다. 자신 외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초한 달곰씁쓸하고 사적인 고통이다. 그러나 사랑이 보답을 받는 순간 상처를 받는다는 수동적 태도는 버려야 하며, 스스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책임을 떠안을 각오를 해야 한다.


p.70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똑같은 요구를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리는 상태의 핵심에 그 요구가 놓여 있다. ..... 만일 우리 내부에 부족한 데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겠지만, 상대에게서도 비슷한 부족한 데를 발견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답을 찾기를 기대했지만, 우리 자신의 문제의 복사본만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p.79

사랑하는 여자를 더 잘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당혹감은 머릿속에서 작곡한 놀라운 심포니를 나중에 대편성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소리로 들었을 때의 느낌과 같다. 우리의 생각 가운데 많은 부분이 연주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에 감명을 받기는 하지만, 아주 사소한 것들이 의도와는 다르게 연주되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다. 공상이 실제 연주되는 순간, 의식 속을 떠다니던 천사 같은 존재들은 지상으로 내려와 자기 나름의 정신적이고 육체적 역사를 가진 물질적 존재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p.157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낙인이 찍히고, 성격 부여가 되고, 규정될 수밖에 없듯이,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도 우리를 바비큐 꼬치에 꿰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다만 적합하게 꿰는 사람일 뿐이다. 대체로 우리 스스로 사랑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점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 대체로 우리가 이해받고 싶어하는 점들에 대해서 우리를 이해하는 사람인 것이다. 클로에바와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은 적어도 지금 당장은 우리에게 우리의 복잡성이 요구하는 대로 팽창할 만한 공간이 주어졌다는 뜻이었다.


가장 공감한 구절. 클로이와 사랑을 시작하면서 주인공은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과 짜증을 부리는 주인공의 모습을 두고 이상적이라고 기대했던 클로이에게 결국 자기 자신의 문제의 복사본만을 보게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랑을 하면서 이상적으로 상상했던 애인의 모습에 실망하면서 클로이에게 자꾸 상처만 주는 주인공의 모습. 그저 클로이에게 빠지면서 혼자 사랑을 주고 상상할때와 달리 클로이의 사랑을 받으면서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사랑을 주는것보다 받는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 나온 것처럼 사랑을 받는 순간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책임도 떠안아야 하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씁쓸했던 부분.


p.183 ~ p.184

"너를 이런 식으로 미워할 수 있다는 게 기분 좋아. 네가 이것을 받아들이니까 마음이 놓여. 내가 너한테 꺼지라고 말하면 너는 나한테 뭘 집어던지기는 하지만 떠나지는 않거든. 그게 안심이 돼." 우리는 서로 소리를 지를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서로 소리지르는 것을 견딜 수 있을지 없을지 보기 위해서라도 그런 과정이 필요했다. 우리는 서로의 생존능력을 시험하고 싶었다. 서로 파괴하려고 해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우리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p.196

마치 사랑의 끝은 그 시작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사랑의 붕괴의 요소들은 그 창소의 요소들 안에서 이미 괴괴하게 전조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p.202

사랑은 첫눈에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빠른 속도로 죽지는 않는다. 클로이는 나를 떠나는 것, 심지어 우리 관계에 대한 의심을 입 밖에 내어 이야기하는 것도 너무 성급하다고, 그랬다가는 더 나을 것도 없는 삶을 택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느린 헤어짐의 과정이 나타났다. 감정의 석조 장식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몸체로부터 느릿느릿 떨어져나가는 과정이었다. 한때 귀중하게 여겼던 대상에게 책임감만 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 유리잔 바닥에 남은 당밀 액체같이, 완전히 사라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p.204

일단 한쪽이 관심을 잃기 시작하면, 다른 한쪽에서 그 과정을 막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 정직한 대화는 짜증만 일으키고, 그것을 소생시키려다가 사랑만 질식시킬 뿐이다. ..... 연인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짝에게 다시 구애를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게 되고, 그 결과 낭만적 테러리즘에 의존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에 대한 응답을 강요하려고 여러가지 꾀를 부리기도 하고, 그 앞에서 폭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테러리스트가 된 연인은 현실적으로 자신의 사랑이 보답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쓸모없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일을 안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꼭 누가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말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하는 말도 있는 법이다.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낭만적 테러리즘 부분. 클로이와의 관계가 끝을 달리면서 나오는 부분인데, 한 쪽이 관심을 잃기 시작하면 감정이 남은 다른 한쪽이 어떻게든 응답을 강요하면서 때로는 폭발하기도 하는 모습을 테러리스트에 비유했다. 이름하야 '낭만적 테러리즘'이라고. 클로이의 마음이 떠났다는것을 알면서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걸 알면서도 계속 요구하고 떼를 쓰는 남주의 모습을 그리며 나온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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