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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명강 동양고전 - 대한민국 대표 인문학자들이 들려주는 ㅣ 인문학 명강 시리즈 1
강신주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논어에서의 배움이란
논어는 '학'으로 시작해 '명'으로 끝난다
'끊임없이 배움'과 '한계'를 알고 속도를 낮출줄 아는 균형잡힌 인생의 필요성.
결국 논어가 말하는건 '나'를 아는 지혜.
배우고 또 배우라는 논어의 말에는 배우다 미쳐라가 아닌 한계를 알고 멈출줄도 알으라는 지혜 또한 담겨있다.
곤이불학 민사위하의
'곤', 즉 배움을 거부하는 심리, 물리, 사회, 정치적 조건 한마디로 갖가지 핑계들을 삼아 현재의 조건을 넘어서지 못하면 발전이 없다는 것.
배우는데에 있어서 현실적인 조건에 굴복해선 안된다는 것. 위에서 말한 한계는 자신이 가진 한계이지 현실적 한계는 아니다. 그래서 그저 자기자신에 대해 잘 알아야한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가 배워야하는 것은 뭘까? 수학 과학은 아닐 것.
다름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 마음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사람의 마음에는 하늘의 명령이 본성으로 부여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의 주인이 되는 삶이 모든 사람의 이상적 삶이다.
흔히 고전에서 멀게만 느껴지는 성인, 도를 깨닫는것.
고전에서 말하는 '도'는 멀고 깊은게 아니라
우리 사람 사는 인생이 인생다운것, 사람다운것이다.
공자가 말한 '도'를 아는 것은 인생에서 나에게 가치있는, 정말로 의미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결국 그걸 위해 나에 대해 공부하고 내 마음을 바라보고 배워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움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지 성인들만의 것이 아니다.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인생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못 읽는다해서 불행해지는 일은 없으나,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보지 못하는 자는 불행할 수 밖에 없다.
영혼의 당뇨병 시대, 하도 설탕을 많이 투여해서, 위로를 너무 해줘서 당뇨병에 걸리겠다.
우리들의 마음은 굽어져있다.
우리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 자기망각, 자기상실의 시대.
부모에 의해 훈육되고 사회가 길들이기 전의 나는 누구인가?
고전을 통해 배우는 삶
지식은 바깥의 것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지만, 지혜는 안의 것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동양고전에서 강조하는건 결국 단 하나, 마음이다.
사소한 것들을 들여다 보는 힘, 즉 통찰하는 힘이 바로 동양 고전에 있다.
사소한 것을 통찰할수 있다는 건 쉽게 말해 지나가는길에 꽃 한 송이를 봐도 그 아름다움에 행복해질줄 아는 것. 내 마음이 예쁘면 뭐든 다 아름답고 예뻐보이지만, 정작 내 마음이 삭막하고 여유가 없을땐 길거리에 핀 꽃은 하물며 주변에 일어나는 사소한 것들에도 마음이 가질 않는다. 노래 가사처럼 결국 모든건 마음의 문제.
무불경, 세상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것이 없다
고전은 우리에게 이해할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화를 위해서는 뉴욕이아니라 강진 해남의 흙 색깔을 보라는 저자의 말처럼 삶을 의미있게 살기위해선 삶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멀리 볼게아니라 당장 내 주변에 핀 꽃 한송이, 내가 밟고있는 흙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는것이다.
자잘한 걱정들이 나날이 쌓여가고, 그러다 큰 걱정이나 재난이 엄습하면 어찌할줄 모르고 허우적대는게 우리 인생의 모습.. 삶을 배우지 않으면 마음은 잡초로 뒤덮이고, 세상은 캄캄해진다.
그래서 책을 읽고 지식을 찾는다.
지식이 길을 밝혀주니 오직 그때라야 정신의 뿌리가 튼튼해지고 활동이 균형을 얻는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견디게 해주는게 인문학이고,
그걸 일찌감치 배운 사람들에게서 배우는게 고전학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고전을 배워야하는 이유.
격몽요결
너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있다
자기 자신을 찾으려면 외부 신이나 다른 권위를 빌릴 필요가 없다. 이미 내 마음속에 모든 문제와 답이 있다는 것. 답은 나자신에게서 찾으라는 것이다.
신을 의존하지말고 나 자신을 믿어라.
결국 신에게 기도하는것도 내 마음속에 간절하게 비는것과 같은 것.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인 격몽요결의 한 구절이다.
격몽요결의 중요한 네 가지.
입지, 혁구습, 인, 지신
입지, 내 인생을 위한 결단과 용기.
어느 길 위에 섰을때 이 길을 과연 내가 갈 것인가?
정말 이 길에 내 인생을 걸 것인가?
이러한 선택의 갈림길 위에서 만약 가기로 결정했다면,
바깥 세상이나 주변의 말, 시선등에 신경쓰지않고 결단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어느 길을 내가 내 인생을 위해 선택한거라면, 주변 사람들의 말이나 시선은 신경쓰지 않아야하는게 맞지만 어디 요즘세상이나 그 시절 사람들이나 절대 쉬운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의 인생이 아닌 내 인생을 위해 꼭 필요한 결단력과 용기, 입지이다.
혁구습, 익숙한 일상의 혁명.
남과 다르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말아라.
부귀를 너무 부러워하거나 가난을 혐오하지 말고, 세속잡사에 연연하지 말라.
여기서 나온 라캉의 유명한 한구절,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다."
마음을 수련하는 것은 외부의 자극을 통제하는데서 출발한다.
인, 인생은 참고 견뎌야 할 세상.
세상에는 일어날 일만 일어난다.
주인 없는 빈 배가 풀려서 내 배를 들이받았다 생각하는 것.
조삼모사, 어차피 일어날 일만 일어나고 참으나 화내나 어짜피 결국 다 같으니 화낼게 없다.
너무 많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주변 환경이나 외부 자극에 너무 스트레스받거나 자극받지 않아야
남의 인생이 아닌 내 인생을 더욱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신, 몸이 긴장과 균형을 놓치면 마음도 흐트러진다.
이당시때 이 책에서 크게 와닿지는 않는 부분이었는데
요즘같이 긴장이 싹 풀어지고, 이런저런일에 일희일비하고 있는 와중에 마음이 싸해질정도로 와닿는 말이다.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가 아니라, 몸이 균형을 잃으면 마음도 균형을 잃고 흐트러진다.
이렇게 또 세상속에 있다보면 수풀로 가득차는 마음이
가끔 고전의 구절구절들을 읽으면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가 다시 돌아왔다가를 반복한다.
이래서 꾸준히 내 마음을 배우고, 익히고, 언제나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하는구나.
본인 스스로 귀함을 받는 인생
수오지심, 예와 의가 아닌 것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본심
발로 밟아서 주는 밥은 굶어죽어도 안먹으면서
부귀영화앞에서는 남에게 존경받고, 남을 도우기 위한다는 이유로 양심이나 예를 따지지 않고 받는 것.
이러한 모습을 수오지심, 본심을 잃었다고 한다.
남에게 벼슬을 받는것보다 중요한건 인의, 도덕을 행해서 본인 스스로, 자연적으로 귀함을 받는 것이어야한다고 맹자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남이 귀하게 해준 것은 진정한 귀함이 아니다.
남이 귀하게 해준 것은 남이 천하게 할 수 있다.
남이 귀하게 해주는것 즉, '인작'에 눈이 멀면 진정한 자신을 잃는다.
누군가 빼앗을 수 있는 것에 삶의 의미를 부여하면 불행해진다.
내 가치는 내가 매기는 것이고, 날 귀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것도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
다른 사람에게 내 가치를 좌지우지 당해서는 안된다.
어느 누군가에게 칭찬받기 위해서가 아닌, 내가 내 자신을 칭찬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닌, 내가 내 자신을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을 존경하고 귀히 여기자.
장자와 대붕
'장자'의 서막을 여는 대붕 이야기, 그리고 같은 맥락의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의 시 '알바트로스'의 한 구절
폭풍속에서 넘나들며 활잡이를 비웃는 이구름의 왕자를 닮은게 바로 시인.
땅 위로 쫓겨나 놀림당하는 마당에서는 거인같은 날개때문에 걷지도 못하나니.
커다란 날개 때문에 땅에 내려오면 걷지도 못하는 한 새처럼,
우리도 자유와 우리에게 달려있는 커다란 날개의 위대함을 알면서도 세상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못쓴다.
하지만 날개를 버리면, 자유, 꿈을 버리면 세상살기는 편해도 다시는 하늘로 못 올라간다.
아무리 세상속에 살아도 날개 잃지 말자.
꿈을 잃은, 하늘을 바라볼수 없는 인생만큼 슬픈 것도 없는데,
막상 세상의 울타리 안에 갇혀 날개 한번 못펴보는게 우리 인생.
우리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을때,
날개를 피고 하늘에서 땅을 볼 줄 알때,
우리는 진정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우리는 커다란 날개를 가졌다.
억압에서 벗어나 하늘 높이 올라가 자유를 누려라.
자유를 누리는건 이처럼 큰 바람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것이다.
세상 관습, 시선, 돈 .. 등등의 무게를 견디고
나 자신의 인생을 가치있게 사는 것.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인데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사는건 절대 쉽지 않다.
노예가 노예로서의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에 묶여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어느 쪽의 쇠사슬이 빛나는가, 더 무거운가 등.
그리고 쇠사슬에 묶여있지 않은 자유인을 비웃기까지 한다.
하지만 노예들을 묶고 있는 것은 사실 한 줄의 쇠사슬에 불과하다.
그리고 노예는 어디까지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노예는, 자유인이 힘에 의해서 정복하여 어쩔 수 없이 노예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일부 특혜를 받거나 한 자를 제외하면
노예가 되더라도 결코 그 정신의 자유까지도 양도하지는 않았다.
그 혈통을 자랑하고 선조들이 구축한 문명의 위대함을 잊지 않은 채, 빈틈만 생기면 도망쳤다.
혹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노동으로 단련된 강인한 육체로 살찐 주인을 희생의 제물로 삼았다.
그러나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 노예의 옷을 입고 목에 굴욕의 끈을 휘감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랍게도,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가 노예라는 자각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노예인 것을 스스로의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기까지 한다.
- 리로이 존스 1968년, NY할렘에서
너 나 할거없이 노예로 사는 현대인들에게 꿈은 어찌보면 사치일지 모른다.
그렇기 떄문에 격몽요결에 나온 말처럼 내가 택한 길을 갈때에는 세속잡사에 연연하지 않고 결단할 용기가 필요한 것.
사람들 시선이나 세상이 요구하는 것에 휘말리는것이 당분간은 힘들지 몰라도
우리의 단한번 뿐인 인생을 가치있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큰 용기가 필요할지 모른다.
거인같은 날개의 무게를 견디고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힘이 필요한 법이니까.
모든 사람은 자기 꽃을 피워야 한다.
세상이 장미를 요구해도 내가 개나리면 난 개나리로 피어나야 한다.
장미 흉내내는 인생에 만족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