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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을 읽는다
박희병 지음 / 돌베개 / 2006년 4월
평점 :
발승암 기문
까마귀는 뭇 새가 검다고 믿고,
백로는 안 흰새를 의아해 하네.
흑 백 모두 자기가 옳다고 하니,
하늘도 판정하길 싫어한다지.
사람들 모두 두 눈 있지만,
한 쪽 눈 없어도 또한 본다네.
하필 두 눈 있어야 밝게 보일까?
외눈박이만 사는 나라도 있는데.
두 눈도 오히려 적다고 여겨,
이마에 눈 하나를 보태기도 하네.
또한 저 관음보살은,
변신하여 눈이 일천개라지.
천 개의 눈을 어디에 쓰리?
장님도 검은 것은 볼 수 있다마다.
김군은 몹쓸 병 걸려 몸이 불편해,
부처에 의지해 연명한다지.
돈을 쌓아두고 쓰지 않으면,
가난한 거지와 무어 다를까?
중생들 제각각 살면은 되지,
억지로 남을 배울 건 없네.
대심이 뭇사람과 다르다 보니,
이 때문에 의아히들 여기는게지.
세상엔 맞춰진 기준과 편견이 있는법. 휘둘리지말자.
큰누님 박씨 묘지명
울면서 그 옛날 누님이 빗을 떨어뜨리던 걸 생각하니,
유독 어릴 적 일이 생생히 떠오르는데
그때에는 또한 기쁨과 즐거움이 많았으며 세월도 느릿느릿 흘렀었다.
그 뒤 나이 들어 우환과 가난을 늘 근심하다 꿈결처럼 훌쩍 시간이 지나갔거늘 형제와 함께 지낸 날은 어찌 그리도 짧은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웃음이 줄어드는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시절에는 뭐든 이뤄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게 기쁘고 즐겁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인생에 회한을 느끼고 현실을 알고 근심이 늘어나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뭐든지 없어지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해주신 말들
항상 주옥같은 말들로 내 머릿속을 먹먹하게 만드신다.
갑자기 떠올랐다.
내 어린 시절 내가 꿈꿔왔던 나는 어디있을까?
말똥구슬
유금의 시집인 '말똥구슬'이 '말똥구슬'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배경이 된 연암 박지원의 '말똥구슬' 서문.
현대 문학과 달리 고전문학은 이러한 서문 자체도 하나의 장르, 문학작품이 될 수 있다.
이 서문에는 연암 박지원의 사상인 '中'이 계속 강조되는데, 흔히 아는 황희 정승의 일화가 바로 이것이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 즉, 양시론이다.
이 '중'(中)에 대해서 황희 정승의 일화와 임백호의 일화 두개가 나온다.
임백호의 일화는
임백호가 목화와 갖신을 짝짝이로 신은 것에 대해 마부가 지적하자 백호가
"길 오른쪽에서 보는 사람은 내가 목화를 신었다 할 것이요, 길 왼쪽에서 보는 사람은 내가 갖신을 신었다고 할 테니, 내가 상관할 게 무어냐!" 라며 꾸짖는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서 목화를 신었는지 갖신(가죽신)을 신었는지가 달리 보인다. 즉, '진리', 여기서 말하는 진정지견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통찰은 옮음과 그름, 그 사이에 있다.
어떤 일에 대해서 사람이 무엇을 쉽게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갈등은 양극화되어있어서 어느 한쪽 편에만 있으면 당연히 갈등만 생긴다.
이에 연암 박지원은 '양극단에 치우치지 마라'고 하면서 '中'을 지양하라. 즉, 어느 한 쪽에도 다리를 걸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것을 '장자'에 나오는 말똥구리와 용 얘기에 연결시켜서 사람도 누군가가 그 사람을 더 우월하고 더 열등하다고 쉽게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말똥구리는 제가 굴리는 말똥을 사랑하므로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고,
용 또한 자기에게 여의주가 있다 하여 말똥구리를 비웃지 않는 법일세.
더 우월하고 더 열등하다고 가치의 기준을 만들고 순위를 매기는건 인간과 인간, 국가와 국가에만 존재하고 자연은 그렇지 않다.
말똥구리에겐 자신의 말똥의 가치가 용의 여의주보다 소중하고, 용 또한 자신의 여의주의 가치가 소중하니까 다른 사람의 것이 더 열등하다거나 비웃지 않는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알게모르게 슬슬 열등감도 생기고, 자존감도 점점 낮아져서 그런지 너무 좋았던 대목
유금은 이 말똥구리의 이야기를 듣고 시집의 이름을 '말똥구슬'이라고 짓는다. 자신의 시집은 말똥구슬이지만 그 가치를 소중히 여겨 용의 여의주를 보며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자존감을 해학적, 역설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만약 그대의 시집을 보고 한쪽에서 여의주라고 여긴다면 이는 그대의 갖신만 본 것이요, 다른 한쪽에서 말똥구슬이라고 여긴다면 이는 그대의 목화만 본 것일 테지. 그러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다고 해서 정령위의 깃털이 달라지는 건 아니며, 자기 책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걸 제 눈으로 보지 못한다고 해서 자운의 '태현경'이 달라지는 건 아닐 테지.
박지원은 유금의 시집의 훌륭함을 세상이 몰라준다고 해도 그 가치를 속단할 수 없고, 시집이 널리 알려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에 덧붙여서 정령위의 깃털은 '비단옷을 입고 컴컴한 밤길을 간 격' (대단한 재능을 갖고 있음에도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 것) 이라 하였고, 자운의 '태현경'은 '장님이 비단옷을 입은 격' (살아 생전에 비단이 되지 못한 것)이지만 그 사람의 재능, 훌륭한 작품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의 재능을, 훌륭함을 세상이 몰라준다고 해서 그 가치를 속단할 수 없고, 그 가치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취업도 다가오고 생각도 많아지는 요즘같은 시기에 꼭 마음 속에 새겨둬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왜 우리는 항상 남들과 비교하고 자기 자신의 소중한 가치에 기준을 만들어 놓고 재고 따지면서 힘들게 사는걸까.
정말 연암의 사상인 '中' 처럼 세상 모든 일은 또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자신만의 소중한 재능이 있고 가치가 있고 그것을 누구도 좋다 나쁘다 할 수 없는 건데.
경쟁하고 서로 재기 바쁜 시대에 정말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말똥구리의 말똥처럼 자기 자존감을 키우고 자신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