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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한 흥미로운 책.
남자주인공이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 하나하나에서 끝을 예감하고 끝을 맞으면서 인생에서 사랑이 갑작스레 끝났을때 남자가 느끼는 허탈감, 절망감들을 너무나도 자세히 썼다. 어찌보면 사랑은 분석적으로 쓸 수 없는 감정인데 철학적 개념과 함께 사랑에 빠지며 느끼는 감정들을 하나하나 조금은 유머스럽게 보일정도로 분석적으로 쓰여져있다. 너무 재밌기도 하고 이 때 감정이 이렇게까지(?) 쓰여질 수도 있구나 싶어서 흥미롭기도 해서 남겨둔 구절이 굉장히 많았던 책이다.
사랑에 빠지면서, 혹은 하면서, 아니면 끝나가면서 외사랑이 되어버린 순간에 남주 자신이 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 그리고 클로이의 행동 하나하나를 이렇게 무언가의 이론으로 연결시켜 이야기를 끌어나간다. 사랑만큼 복잡한 감정이 없는데 그걸 이렇게 자세하게 그것도 이성적으로 쓸 수 있을까. 클로이에게 사랑에 빠지는 부분에선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그 감정들에 대한 표현이 너무 소름돋아서 조금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표현력이 정말 엄청나다는 생각. 클로이와 다투고 사랑하는 과정에선 나도 같이 그 감정에 공감하기도 하면서 수없이 많은 구절을 메모해두었다. 그 구절만 다시 읽어도 여전히 흥미롭고 재미있다. 어찌보면 굉장히 현실적이면서도 감정에 대해선 굉장히 이성적인(?). 아무튼 읽어보면 안다. 오랫만에 엄청 몰입해서 순식간에 읽은 책. 너무 재밌다.
p.33
욕망 때문에 나는 실마리들을 악착같이 쫓는 사냥꾼이 되었다. 모든 것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낭만적 편집증 환자가 되었다. 가장 매력적인 사람은 곧바로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락하는 사람이나 절대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희망과 절망의 양을 적절하게 안배하여 상대의 마음에 안겨줄 줄 아는 사람이다.
사랑에 빠지면서 모든 클로이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두고 '낭만적 편집증 환자'라고 표현하는 부분. 요즘 말로는 밀당 잘하는 클로이에게 매력을 느끼는 부분. 이쯤에서 주인공이 클로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부여하는 모습이 공감(?)도 되고 너무 현실적이어서 웃겼던.
p.65 ~ p.66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안전하게 고통스럽다. 자신 외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초한 달곰씁쓸하고 사적인 고통이다. 그러나 사랑이 보답을 받는 순간 상처를 받는다는 수동적 태도는 버려야 하며, 스스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책임을 떠안을 각오를 해야 한다.
p.70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똑같은 요구를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리는 상태의 핵심에 그 요구가 놓여 있다. ..... 만일 우리 내부에 부족한 데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겠지만, 상대에게서도 비슷한 부족한 데를 발견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답을 찾기를 기대했지만, 우리 자신의 문제의 복사본만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p.79
사랑하는 여자를 더 잘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당혹감은 머릿속에서 작곡한 놀라운 심포니를 나중에 대편성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소리로 들었을 때의 느낌과 같다. 우리의 생각 가운데 많은 부분이 연주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에 감명을 받기는 하지만, 아주 사소한 것들이 의도와는 다르게 연주되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 없다. 공상이 실제 연주되는 순간, 의식 속을 떠다니던 천사 같은 존재들은 지상으로 내려와 자기 나름의 정신적이고 육체적 역사를 가진 물질적 존재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p.157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낙인이 찍히고, 성격 부여가 되고, 규정될 수밖에 없듯이,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도 우리를 바비큐 꼬치에 꿰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다만 적합하게 꿰는 사람일 뿐이다. 대체로 우리 스스로 사랑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점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 대체로 우리가 이해받고 싶어하는 점들에 대해서 우리를 이해하는 사람인 것이다. 클로에바와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은 적어도 지금 당장은 우리에게 우리의 복잡성이 요구하는 대로 팽창할 만한 공간이 주어졌다는 뜻이었다.
가장 공감한 구절. 클로이와 사랑을 시작하면서 주인공은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과 짜증을 부리는 주인공의 모습을 두고 이상적이라고 기대했던 클로이에게 결국 자기 자신의 문제의 복사본만을 보게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랑을 하면서 이상적으로 상상했던 애인의 모습에 실망하면서 클로이에게 자꾸 상처만 주는 주인공의 모습. 그저 클로이에게 빠지면서 혼자 사랑을 주고 상상할때와 달리 클로이의 사랑을 받으면서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사랑을 주는것보다 받는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 나온 것처럼 사랑을 받는 순간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책임도 떠안아야 하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씁쓸했던 부분.
p.183 ~ p.184
"너를 이런 식으로 미워할 수 있다는 게 기분 좋아. 네가 이것을 받아들이니까 마음이 놓여. 내가 너한테 꺼지라고 말하면 너는 나한테 뭘 집어던지기는 하지만 떠나지는 않거든. 그게 안심이 돼." 우리는 서로 소리를 지를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서로 소리지르는 것을 견딜 수 있을지 없을지 보기 위해서라도 그런 과정이 필요했다. 우리는 서로의 생존능력을 시험하고 싶었다. 서로 파괴하려고 해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우리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p.196
마치 사랑의 끝은 그 시작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사랑의 붕괴의 요소들은 그 창소의 요소들 안에서 이미 괴괴하게 전조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p.202
사랑은 첫눈에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빠른 속도로 죽지는 않는다. 클로이는 나를 떠나는 것, 심지어 우리 관계에 대한 의심을 입 밖에 내어 이야기하는 것도 너무 성급하다고, 그랬다가는 더 나을 것도 없는 삶을 택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느린 헤어짐의 과정이 나타났다. 감정의 석조 장식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몸체로부터 느릿느릿 떨어져나가는 과정이었다. 한때 귀중하게 여겼던 대상에게 책임감만 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 유리잔 바닥에 남은 당밀 액체같이, 완전히 사라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p.204
일단 한쪽이 관심을 잃기 시작하면, 다른 한쪽에서 그 과정을 막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 정직한 대화는 짜증만 일으키고, 그것을 소생시키려다가 사랑만 질식시킬 뿐이다. ..... 연인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짝에게 다시 구애를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게 되고, 그 결과 낭만적 테러리즘에 의존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에 대한 응답을 강요하려고 여러가지 꾀를 부리기도 하고, 그 앞에서 폭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테러리스트가 된 연인은 현실적으로 자신의 사랑이 보답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쓸모없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일을 안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꼭 누가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말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하는 말도 있는 법이다.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낭만적 테러리즘 부분. 클로이와의 관계가 끝을 달리면서 나오는 부분인데, 한 쪽이 관심을 잃기 시작하면 감정이 남은 다른 한쪽이 어떻게든 응답을 강요하면서 때로는 폭발하기도 하는 모습을 테러리스트에 비유했다. 이름하야 '낭만적 테러리즘'이라고. 클로이의 마음이 떠났다는것을 알면서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걸 알면서도 계속 요구하고 떼를 쓰는 남주의 모습을 그리며 나온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