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의 보름
R. C. 셰리프 지음, 백지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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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잠시 눈을 쉬게 하려고 신문을 내려놓았고 생각에 잠겨서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p. 119)'

스티븐슨 가족은 구월이 되면 시뷰라고 불리는 곳의 허깃 부부에게 객실을 빌려 보름 동안 휴가를 보낸다. 20년째다. 스티븐슨 씨는 그곳으로 가는 열차 안 맞은편 의자에 앉아 졸고 아내를 쳐다본다. 파란 서지 코트와 치마를 입고 있는데 벌써 이 년 전에 산 옷이라 어깨 부분이 바랜다. 아내의 흰 머리카락도 보인다.

스티븐슨 씨가 아내를 만난 건 회사 동료 톰의 여동생이 출연하는 뮤지컬에서였다. 우유 짜는 여자들 사이에서 아내는 황홀한 작은 미의 화신이었다. 신혼여행 때 세인트 매슈스 로드에 있는 허깃 부부 객실을 빌린 인연이 20년간 계속된 것이다. 아이들은 커서 메리는 곧 스무 살이 되고 딕은 열일곱 살, 막내 어니는 열 살이다.

아이들이 성장한 만큼 허깃 부부의 객실도 변했다. 검게 변한 가스등 받침대, 닳고 닳은 서랍장, 무너질 것 같은 세면대, 해진 커튼의 가장자리 등등. 스티븐슨 부부가 자는 침대도 가운데가 꺼져 언제 베개 받침을 놓아야 했다. 하지만 스티븐슨 가족은 객실이 우중충하고 끔찍할 정도 형편없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

R. C. 셰리프의 <구월의 보름>은 스티븐슨 가족이 영국에서 가장 햇볕이 좋다는 보그너 레지스로 휴가를 떠나기 위해 준비하는 것부터 휴가 마지막 날까지 하루하루를 다룬 소설이다. 극적인 반전이나 계획에 흐트러짐 없이 휴가를 보낸다. 하지만 스티븐슨의 가족은 각자의 방법으로 소소한 행복을 찾아 휴가를 즐긴다. 서로 피해 주지 않으려는 가족의 유대를 유지하면서.

스티븐슨은 저녁을 먹은 다음 파이프 담배를 채우고 자신만의 조용한 길을 따라 걷는다. 스티븐슨 부인은 설거짓거리도 없고, 차려야 할 아침 식탁도, 닦아야 할 신발도,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한 시간을 앉아 그저 게으르게 보낸다. 메리는 남자 친구를 만나는 모험을 즐기고, 딕은 혼자 해변을 따라 나가 바다를 보면서 자신의 지난 일 년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들에게는 객차 안에서 떨어져 앉았다가 함께 모여 앉는 것마저도 행복하다.


작가 세리프는 보그너 레지스에서 사람들을 지나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 가운데 가족 하나를 무작위로 선택해 그들이 바닷가에서 연례 휴가를 보내는 이야기가 쓰고 싶어 안달이 났다고 한다. 평범한 가족의 보름간 여름휴가 이야기, 결국 우리들의 이야기여서 이 소설에 빠지게 된다.

'인생의 황금 같은 시간은 기억이 꼭 붙들 수 있는 예리한 윤곽을 남기지 않는다. 읊조린 말들도, 작은 몸짓이며 생각도 남지 않으니, 깊은 감사함만이 시간에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머무른다. (pp. 341, 342)'

확실한 윤곽이나 반전이 없어 지난 일이 희미하지만 스티븐슨 가족의 여름휴가 이야기처럼 나의 언젠가 보름을 떼어 놓으면 <구월의 보름>이 되는 것이다. 행복하다 여기고 감사하게 되는 그런 보름 동안 나날 말이다.

정리를 다루는 유튜브를 아내가 본 모양이다. 앨범을 정리해놓지 않고 죽으면 아이들에게 짐이 된다고 소리를 들었는지 지난 일주일 동안 앨범을 꺼내 놓은 사진을 떼기 시작했다. 뭘 하려고 하면 계속 불러댄다.
"자기야 이 사진 좀 봐. 이때 기억나?"
"우리 애들이 이렇게 귀여웠어~"

세월이 그때 그 일의 예리한 윤곽을 무디게 해놓아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날 하루가 몽땅 생각나기 시작했다. 사진을 보며 그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행복해 저절로 웃음 짓게 만든다. 그래서 앨범 하나 정리하는 데 하세월일 수밖에 없다.

'천천히 잡지가 그녀 무릎 위로 떨어졌고 그녀는 남편을 응시하며 앉아 있었다. 일 년에 딱 한 번 그들은 이렇게 앉았다. 서로를 마주하고 가까이 말이다. 다른 때는 이런 일이 벌어지는 법이 전혀 없었다. (p. 104)'

마주 앉아 본 적이 있었나? 마주 앉기는 했지만 각자 할 일을 했다. 밥을 먹거나, 스마트폰을 보거나... 자세히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사진 가지고 수다 떨다가 앨범 정리하는 아내를 쳐다봤다. 나이보다 젊다는 소릴 많이 듣던 아내다. 게다가 늦게 결혼해 아이를 낳다 보니 또래 아이들의 부모 나이 취급을 받았다.

목에 주름을 발견했다. 흰 머리카락도 눈에 띈다. 나만 나이들은 줄 알았더니 조용히 나이 먹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 큰 병을 앓거나 사고가 없어 눈여겨보지 않았던 아내의 모습, 예리한 윤곽을 남기지 않아 아내가 한 말, 아내의 몸짓이 남아있지 않지만... 내 삶에 동반자로 살아줘서 내가 허물어지지 않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지난날들도 스티븐슨 가족의 '구월의 보름' 같은 날들이었다.

'휴가지 해변에서 주워 모은 색색깔의 투명한 유리알들을 유리병에 고이 담아 코르크 마개로 봉해 놓은 다음, 삶이 힘들 때마다 그 유리알들을 한 알 한 알 꺼내 보며 거기서 발하는 따스한 빛에 용기와 위안을 얻는 것과 같은 그런... (pp. 454, 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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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면허 - 이동하는 인류의 자유와 통제의 역사
패트릭 빅스비 지음, 박중서 옮김 / 작가정신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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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을 생각하면 (이 책에서도 소개한) 2004년 개봉한 스필버그 감독, 톰 행크스 주연의 <터미널>이 떠오른다. 실존 인물인 이란 사람 메르한 카라미 나세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나세리는 난민 서류를 분실해 파리 샤를 드골 공항 1번 터미널에서 18년을 지냈다.

영화 <터미널>에서 나보스키(톰 행크스)는 동유럽의 작은 나라 크로코지아 국적이다. 그저 멋진 도시를 구경하고 싶어 뉴욕으로 향한다. JFK 공항에 도착했을 때 크로코지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나보스키의 비자가 취소된다. 이때부터 미국에 입국할 수도 조국으로 귀국할 수도 없어 JFK 공항에 머무르는 악몽이 시작된다.

여권에는 기묘한 힘이 있다.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는 안전한 통행을 약속하지만 오도 가도 못하게 가둬 놓기도 한다.


<여행 면허>는 '국경을 통과하는 사람들, 국경을 넘어 여행하는 사람들, 경계를 가로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횡단이 가능하게끔 만들기 위해 이들이 의존한 서류에 관한 내용이다. (P. 26)'

기원전에도 여권은 있었다. 여권은 우리 인류와 함께 어떻게 진화했을까? 또 여권은 어떻게 여행 꼭 필요한 것이 됐을까? 여권은 예술과 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 정체성, 국가 권력, 국제적 불평등 문제까지 모두 여권에 반영돼있다. 이러한 여권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있다.

'국경을 넘어 안전한 통행을 보장받기 위해서 여행자는 반드시 여권이 진본임을 입증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서류와 자신이 일치함까지도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p. 41)'

1976년 초가을 프랑스 영토에 도착한 파라오 람세스 2세는 최근 발급된 이집트 여권을 소지했다. 오래전 사망해 미라가 됐는데 왜 여권이 필요했을까. 신원이 확인돼야 유해 이송이 가능하다는 국제법, 생사와 관계없이 여권을 소지해야 한다는 프랑스 법률, 사망자조차 출국하려면 서류가 필요하다는 이집트 법률 등 그 이유가 다양하다.

츠바이크는 회고록에서 여권의 발달이 가져온 상실감을 서술하기도 했다. 당시 전쟁이 끝나고 외국인 혐오증이 유행처럼 번져 각국 정부는 외지인을 점점 더 수상하게 여길 때였다. 정면과 좌우 옆얼굴 사진, 열 손가락 지문, 각종 증명서 등 범죄자를 떠올릴 정도의 굴욕이 여행자에게 부과된다고 츠바이크는 증언했다.

헤밍웨이는 여권 신청서를 작성하면서 급하고 엉성하게 휘갈겨 쓴 탓에 유명한 'writer 작가'가 아니라 'waiter 웨이터'로 오인받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나중에 여권 발급처 앞으로 정정해달라는 편지를 보내야만 했다.

세계 난민 실상을 알리는 중국의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의 다큐멘터리 <유랑하는 사람들>에서 아이웨이웨이는 수용소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시리아인 마흐무드와 여권을 바꾼다.

'이 교환은 여권 통제 의례를 신랄하게 패러디한 장면으로, 여권 소지자가 체류할 국민국가에 위협이 되는지 판정하기 위해 서류를 검사하고 소지자를 심문하는 대신, 아이웨이웨이는 자신의 여권, 자신의 신원, 자신의 시민권이라는 형태로 급진적인 환대를 표현한다. (pp. 266, 267)'


출국 절차를 간소화하는 스마트 패스 서비스가 지난해 7월부터 인천국제공항에서 시작했다. 간소화와 편리함을 앞세워 여권은 점점 디지털로 변환될 것이 뻔하다. 디지털화는 신원 확인이나 국경 출입 과정 등에서 우리에게 멋진 신세계를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세밀한 내 정보의 저장 및 공유를 더 많이 허용해야 한다.

디지털화된 개인 정보를 통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에 반하는 움직임도 있다. 영토 국가의 개념을 거부하는 NSK 국가의 여권, 국경 없는 세계를 추구하는 세계업무기구의 세계 여권이 그 사례다. 이와 같은 '반反여권' 움직임은 더 이상 여권에 '좋은'이나 '나쁜'이란 딱지가 붙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어떤 신체는 지나가게 하는 반면 다른 신체는 붙들리는 일이 없는 세계를 상상하는 서류로서 말이다. (p. 368)'

어쩌면 보완과 효율성을 핑계로 진행되는 여권의 디지털화는 제2의, 제3의 나보스키를 만들어 공항에 가둬두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반反여권' 움직임이 있어 다행스럽다. 여권 디지털화에 제동을 걸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공항에서 나를 환영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환대를 받기도 전에 개인 정보를 토대로 누구는 환영하고 누구는 거르는, 그런 통제에 여권이 사용된다면 더 이상 이동성을 보장하는 여권으로서 기능은 상실됐음을 의미한다. 어느 누가 뉴욕 JFK 공항의 나보스키가 되기를 원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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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의 뇌과학 - 치매, 암, 우울증, 비만을 예방하고 지친 뇌를 회복하는 9가지 수면 솔루션 쓸모 많은 뇌과학 11
크리스 윈터 지음, 이한음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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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이었다. 조금 좁은 공간에 아내와 누워있는데 어떤 놈이 아내 쪽으로 슬금슬금 기어 왔다. '저리 가!'라고 몇 번을 소리쳤지만 들은 체 만 체 계속 기어 왔다. 안되겠다 싶어 있는 힘껏 그놈을 발로 걷어찼다. 옆에 자던 아내가 '아야~ 으이그 증말~'이라고 소리치며 날 밀쳐내고는 돌아누었다.

잠결에 미안하다고 널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까 하다가 아내가 돌아누었기도 하고 깰 자신이 없어 계속 잤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아니다. 의심스러우면 아내에게 물어보길 바란다.

<수면의 뇌과학>의 저자인 30년 경력의 수면의학자 크리스 윈터에 따르면 내가 겪은 일은 이상한 수면 장애 가운데 하나로 '렘행동장애 REM behavior disoder'이다.

'램행동장애는 뇌가 몸에 마비를 일으키는 신호를 보내지 않음으로써 나타난다. 그 결과 밤에 꿈을 꾸는 동안 몸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다. (p. 264)'


수면 문제에 시달리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 해법을 찾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고 저자는 밝힌다. 제대로 푹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봤다면 혹할만하다. 경험해 본 사람을 알겠지만 불면증은 고통도 심하지만 '이러다 내가 죽는 건 아닐까'하는 공포심이 더 대단하다.

'불면증은 잠을 잘 수 없는 상태가 아니며, "잠을 자고 싶을 때 잠이 오지 않는 상태", "잠을 못 이루는 사실을 아주 많이 걱정하는 상태"를 뜻한다. (p. 159)'

우선 수면 문제에 대한 잘못된 속설과 믿음을 짚어가며 잠에 대한 지식을 알려준다. 흔히 '한 잠도 못 잤어'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잠을 잤는데 단지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인간은 잠을 잔다'라는 명제를 인정하는 것부터 수면 문제 해결이 시작된다.

수면 문제는 잠을 충분히 못 자는 문제와 너무 졸리다고 느끼는 문제,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해결을 위해 수면환경, 불면증의 증상과 원인, 심한 불면증의 위험성, 수면제에 대하여, 수면 시간표 짜는 법까지 차례차례 다룬다.


항상 옆에서 자는 아내에 따르면 회사 퇴직 후, 억울한 게 많아서인지 욕을 하는 등 잠꼬대가 심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 나도 느꼈다. 몇 년 지나고 나니 회사 꿈을 그다지 많이 꾸지 않게 됐고 잠꼬대도 줄었다.

나처럼 억울해서, 밤 근무 때문에, 걱정거리가 많아서, 경기에서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한 것이 계속 떠올라서 등등 수면 장애를 겪는 사람이 3명 가운데 1명이다. 모두가 불면증을 앓고 있는 시대다.

앞에 소개한 나의 '렘행동장애'는 실제로 파킨슨병의 전조일 때가 많다고 한다. 이렇듯 수면장애는 그대로 방치할 경우 예기치 않은 질병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런데 얼마나 다행인가.
'희망적인 것은 수면은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바꿀 수 있는 몸의 가장 근본적인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p. 31)'

'수면은 배울 수 있는 기술'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리고 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스포츠 스타, 군인들의 수면 코치를 맡아온 저자는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과학적으로 쉽고 유쾌하게 풀어낸다.

이제 마음먹기에 달렸다. '렘행동장애'도 내 의지에 달렸다. 다만 시간은 걸릴 수 있다. 살찐 몸을 근육질 몸으로 만들 때도, 외국어를 익힐 때도 시간은 걸리지 않는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수면 문제를 해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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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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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나는 시, 소설, 그림, 조각, 음악, 그 무엇이건 간에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인간이 고안해낸 그 어떤 장벽도 초월한다는 믿음으로 이 책을 썼다. (p. 6, 지은이의 말)'

퇴직 무렵, 그동안 읽지 못한채 책꽂이에 꽂아놓은 책이나 읽어보자는 생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블로그 대문에도 써놓았듯이 내게 앞으로 남은 생을 책으로 채워보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책을 읽는 세계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내 친구가 되주었다. 두려움이라는 장벽이 퇴직 후 내 삶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들이 있어 그 장벽을 넘어 살아가는 중이다. 책이 맺어준 인연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해협 채널제도 건지섬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작가 줄리엣 에슈턴 앞으로 배달된다. 그 편지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의 멤버 도시 애덤스가 찰스 램의 <엘리아 수필 선집> 앞표지 안쪽에 적힌 줄리엣의 주소를 보고 보낸 것이다.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드립니다. 런던에 있는 서점 이름과 주소를 좀 보내주시겠습니까? 찰스 램의 작품을 우편으로 주문하려 합니다. (...) 그의 유쾌하고 기지 넘치는 글을 읽다 보니 찰스 램이 인생에서 엄청난 슬픔을 겪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pp. 18, 19)'

이를 계기로 줄리엣은 건지섬과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 호기심을 갖게된다. 북클럽 회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 그들이 어떻게 전쟁의 폐허 속에서 견뎌냈는지 알게되고 그 이야기를 <타임스> 컬럼에 소개하기로 결심한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모저리 부인의 초대로 돼지고기 파티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다 통행금지에 걸려 그 상황을 모면하려는 엘리자베스 메케너의 임기응변으로 탄생한 북클럽이다. 두 명의 회원들 제외하고 책을 가까이 했던 사람은 북클럽 가운데 아무도 없었다.

'통행금지령을 어겨서 정말 죄송합니다. 건지섬 문학회 모임이 있었어요, 오늘은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독일식 정원>에 대해 토론했는데 정말 유쾌한 시간을 보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책이죠, 혹시 읽어보셨나요? (p. 51)'

서간문 형식의 소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의 편지에는 건지섬 사람들이 독일군 점령하에 받은 상처가 담겨있다. 불안, 갈등, 질투, 굶주림 등 참혹한 현실, 그 가운데 사랑이 꽃피기도 하지만 이별의 아픔도 있다.

엘리자베스로부터 시작된 북클럽은 고아가 된 그녀의 아이 킷을 돌봐주는 등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보살핌과 우정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유머와 따뜻함이 있어 더한 감동을 준다.


책이 맺어준 인연들과 다양한 채널로 책모임을 갖고 있다. 우선 그들과 평어를 사용하면서 나이라는 장애물을 뛰어넘었다. 차려입고 외출도 한다 (가끔 아내와 함께). 그들 덕분에 웃기도 한다. 나이든 사람과 말상대를 해주니 수다도 떤다 (꼰대 소리 듣지 않으려고 조심하지만 잘 안된다).

이 책이 탄생한 배경에도 '문학회'가 있다. 메리 앤이 1980년 건지섬을 다녀온 다음 20년이 지난 후 글쓰기 모임 회원들의 글을 쓰라는 재촉이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의 씨앗이 됐다. 책과 책이야기를 나누는 북클럽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회원들이 절망적인 전쟁의 한가운데에서도 진정한 유대의 힘을 보여줬듯이.

'건지섬 주민들이 독서를 은신처 삼아 독일군 점령기를 견뎌냈듯이 (p. 433, 애니 배로스가 메리 앤 섀퍼를 기억하며)' 나도 책을 사랑하는 책 친구들,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 친구들, 책을 같이 읽는 책 친구들의 유대의 힘에 기대어 '60 이후의 공간을' 책읽는 기쁨으로 견뎌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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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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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는 1891년 미주리 주 중부 분빌 마을 근처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났다. (p. 9)'
나는 1960년 초반에 한강을 사이에 둔 북한 접경 지역의 경주 김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p. 8)'

나는 1980년 초반에 대학에 입학했다. 민주화운동 시위가 한창이어서 대학에는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한가득인 때였다. 졸업 후 기업에 취업해 나름 열심히 일했지만 내가 원하던 직위까지는 올라가지 못한 채 정년퇴직했다. 그래서 회사 동료들 가운데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스토너는 학자가 될 환경은 아니었지만 영문학 교수 아처 슬론의 인정을 받아 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모르겠나, 스토너 군?" 슬론이 물었다. "아직도 자신을 모르겠어?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세."
(...)
"그런 걸 어떻게 아시죠?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이건 사랑일세, 스토너 군." 슬론이 유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아주 간단한 이유지." (p. 31, 32)'

가장 연한 파란색 눈을 가진 이디스는 스토너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결혼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 딸아이를 돌보는 일은 무척 기뻤다. 모든 사랑을 딸에게 주었다. 딸과 행복도 잠시였다. 이디스가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학교에서는 장애를 가진 로맥스 교수가 스토너를 곤혹스럽게 했다.
'나이 마흔셋에 윌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p. 272)'
로맥스는 스토너와 캐서린의 사랑마저 깨뜨려 버렸다.

사랑하는 딸 그레이스의 결혼생활에도 불행이 찾아왔다. 아들이 태어났지만 그레이스 남편은 아이를 보지도 못하고 전장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아버지가 가없어요.” 그레이스의 목소리가 들려서 그는 다시 정신을 다잡았다. "아버지가 가없어요. 편안한 삶이 아니었잖아요."
그는 잠시 생각해 본 뒤 입을 열었다. "그랬지. 하지만 나도 편안한 삶을 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엄마와 제가… 우리 둘 다 아버지를 실망시켰죠?" (p. 381)'

스토너는 남들이 보기에 실패작처럼 보일 자신의 삶을 뒤돌아본다. 우정을 원했지만 친구 한 명은 전쟁에서 무의미한 죽음을 맞이했다. 결혼을 통해 다른 삶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지만 서툴러서 열정이 죽어버렸다.

캐서린을 사랑했다. 아쉽게도 마지막에 스토너는 그 사랑을 포기하고 캐서린이 혼돈 속으로 걸어가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학교 강단에 서고 싶었고 그 사명에서 온전한 순수성과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겨버렸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p. 388)'
스토너는 자신의 책을 펼쳐 손가락에서 힘이 빠질 때까지 책장을 넘기다 영원한 침묵 속으로 떨어졌다.


스토너의 인생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내가 살아온 삶도 한 장 한 장 넘겼다. 우리들 대부분은 여유롭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다. 우연한 기회에 인연이 되어 뜻하지 않았던 분야의 일을 한다. 사랑에 실패해 쓴맛을 보기도 하고 뒤늦게 남몰래 해야만 하는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결혼해 가정을 이룬다. 결혼을 후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이만하면 잘한 결혼이라는 생각도 한다. 아이와 사이가 좋은 시절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시절도 간혹 있다. 아이가 힘들어할 때 안쓰러운 마음으로 지켜본다.

직장에서는 내 앞 길을 막는 꼴통 같은 상사를 만나 괴로움을 겪기도 하지만 뒤돌아보며 애써 별일 아니었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진정한 친구라고 할만한 몇 명의 친구가 남아있는 건 참 좋은 일이다.

특별하지도 위대하지도 않은 평범한 나의 삶과 스토너의 삶이 무척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내 인생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들은 날 어떻게 볼까? 나름 내가 하는 일에 성실하게 임했고 애정을 갖고 열정을 쏟아부었다.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기도 했다. 살면서 만난 여러 불행과 슬픔을 제법 잘 견뎠다. 스토너처럼.

영웅적 서사에 익숙해 그런 삶을 성공으로 본다면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으니 나는 실패한 삶일 수도 있다. 스토너처럼.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p. 390)'
하지만 스토너가 죽음에 이르러 생각해낸 이 질문을 나도 떠올려보면, 무엇이 진정 옳은 삶이고 아름다운 삶일까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삶을 누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견뎌냈고, 물리쳐 승리한 삶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물러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까?' 죽음에 이르렀을 때 스토너의 삶이 내 삶에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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